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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을 믿습니다" 조현식 열사 _ 이승원

 

“동지들을 믿습니다.”

동지의 팔뚝에 새기고 떠난 조현식열사

 

 이승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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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를 당해 화기에 손상된 폐와 기관지가 부어올라 호흡이 곤란하고 무서운 고통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열사가 동지의 팔뚝에 새긴 글씨가 “ .... 동지들을 믿습니다!” 였다.

끝까지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던 조현식열사는 가족보다도 동지들을 챙기고 생각하였다.

 

조현식열사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격동의 시기였던 1984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독일어과에 입학하여 90년에 용인캠퍼스 학회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93년 경광주 노동법률 상담소 기획부장, ‘97년 ’광주지역 일하는 사람들‘ 2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운동에 헌신하다가 1998년 5월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열사가 노동조합을 설립하던 시기는 사상초유의 국가부도사태가 나서 IMF구제금융과 이로 인한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쫓기던 상황이었다. 특히 건설 노동자는 건설 경기의 침체로 극심한 실업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며, 그야말로 죽지 않기 위해 산다는 처절한 나날을 보냈다.

 

열사는 실업의 고통과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던 건설노동자와 함께 경기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초대위원장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겨울철만 되면 일이 없는 건설현장의 특성상 IMF와 동절기는 건설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조합원들의 먹고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조현식 열사는 산림청과의 협상을 통해 숲 가꾸기 사업을 따내 800여 노동자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기뻐하던 열사는 새벽 4시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숲가꾸기 잘해서 우리 노동자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우리 한번 멋지게 해보자며 진정으로 조합원들과 함께하며, 무엇이든지 나누고자 하였다.

숲 가꾸기 사업설명회를 위한 조합원의 날(1998년 12월 25일)에 우리 조합원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자고, 봉급 봉투 내밀며 그리도 좋아했던 열사는 조합원을 맞이하기 위해 사무실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회의를 하며 너무 들뜨고 좋아 웃음이 떠날 줄 몰랐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한순간에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했던 열사는 다른 동지들의 안부를 챙기며, 숲 가꾸기 공공근로 사업 참여 희망자들인 조합원들의 명부와 관련서류들을 챙기기 위해 다시 화마 속으로 들어갔다가 쓰러져 4일 만에 끝내 운명하였다. 1998년 12월 28일 04시 40분경이었다. 겨우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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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식 동지 추모제>

 

짧은 인생이었지만 많은 것을 남긴 인생이었다. 장례를 치룬 후, 그의 자취방에서 나온 유품은 헤어진 옷가지 몇 벌과 잔돈 몇 푼이었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던 열사!, 이 땅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건설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게 되는 날을 위해 헌신했던 열사!, '동지를 남기는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열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실천 속에 몸은 떠났지만, 동지들의 가슴 속에 분명하게 새겨져 제2, 제3의 조현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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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은 떠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전태일_이숭원

 

우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전태일 

이승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전태일열사의 40주기를 맞이하였다. 살아계셨다면 환갑이 넘어 노년에 접어든 나이다. 금년에도 예외 없이 전태일열사 정신계승을 이야기하고, 많은 행사들이 열리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자본과 권력의 분리정책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급적 단결도 못 이루고 있다. 이 가을 또 한 동지의 분신은 지난 40년간 굴곡은 있었으나 줄기차게 노동자를 탄압하고 착취하는 일관된 자본과 정권의 실체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얼마나 많은 열사와 희생자를 내어야 하는 것인가?

전태일열사는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스스로를 죽이고 우리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체 노동자의 각성된 투쟁을 호소하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서 인용, 전태일지음/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를 간절히 호소하고 목숨을 바친 것이다. 열사가 전사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열사는 48년 8월 26일(음력) 출생하여 스물 두 살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힘든 생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꽁초줍기, 하드장사, 우산장사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만큼 닥치는 대로 일했다. 어려운 환경에 초등학교를 중퇴했지만, 배우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열사는 15살 때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닌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16세가 된 열사는 1964년 봄 노동자가 된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 하루 열네시간의 노동에 일당 50원, 먼지 구덩이 다락방이 노동현장이었다. 열사는 그곳에서 노동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깨닫게 되었고,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고민하였다. 첫 번째 행동은 재단사가 되는 것이었다. 재단사가 되어 열악한 어린 여공들을 도와주려 했으나, 노동자인 재단사로서 열사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1969년 ‘바보회’를 만들고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노동청에 진정했지만, 그들은 비웃음과 무시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열사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기 위해 70년 4월 삼각산에 들어가 낮에는 수도원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근로기준법을 연구하며 이후를 도모하였다. 결단을 내린 열사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투쟁조직화 하여 회장을 맡았다. 청계천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분석하여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노동청에 진정하고 경향신문에 보도까지 되었다. 그러나 근로조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삼동회원에 대한 회유와 협박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으나, 당국과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계획된 투쟁은 실패하였고, 결국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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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열사는 조직 활동가였고, 정책가 이며, 사상가, 실천하는 운동가였다. 열사는 다섯 권의 일기를 남겼다. 자신의 활동과 사상, 느낌들을 적어 놓은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의 회상수기와 소설초안1,2,3, 모범업체 설립계획서 등을 남겼다.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과 행동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전태일열사의 40주기를 맞아 살아있는 열사의 정신은 바로 현재를 고민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나부터 변화하고 세상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보다 생활환경이나 소득이 나아졌고, 입고 먹는 것이 좋아졌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와 노동에 대한 착취는 더 심해져 계급적 모순은 심화되었다. 현실의 모순을 바꾸려고 했던 열사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외장의 화려함과 행사의 다양함 보다 전태일이 꿈꾸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천이 절실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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