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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6
    전노협백서 그리고 전노협 _고계형(2)
    한내
  2. 2010/10/13
    문민정부 아래 눈치 없이 파업을 했다 _이정영
    한내

전노협백서 그리고 전노협 _고계형

전노협백서 그리고 전노협

 

고계형(백서발간동지회,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내가 ‘전노협’을 ‘발견’한 건 1996년 창신동 어느 5층 건물에서였다.

 

“네가 할 일이 많고, 진짜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만날 수 있다”는 학교선배의 말에, 아직 대학생이었던 나는 창신동 전노협백서 사무실에 가게 되었다. 사무실에는 제본된 문서들로 빽빽하게 찬 수십 개의 책꽂이가 있었고, 책상마다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서 백서발간팀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1년 전 해산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투쟁 기록들을 백서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난 자연스럽게 자원봉사자라는 이름으로 그 사무실 한켠에서 낡은 컴퓨터 하나를 차지하고 각종 성명서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을 시작했다. 전노협의 역사는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료는 엄청나게 많았다. 전노협 자체에서 발행한 문서들 말고도 각종 신문기사, 단체의 문서들, 각종 메모들 등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할 자료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였다. 메모 한 장이라도 소중한 기록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의 모든 자료를 입력해야 했다.

처음 한동안은 오타를 내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자료를 입력하는 데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면서 자료를 분류하고, 교정도 보고, 때로는 학교 후배들과 어두운 학교도서관에서 지난 신문의 축쇄판들을 뒤져가며 신문색인 작업도 했다. 나중에 누군가 백서에서 잠시라도 일했던 사람들이 연인원으로 수천 명이라고 했지만 언제나 일은 많고 사람은 모자랐다. 그렇게 난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꽤 긴 시간을 창신동에서 보내게 되었고, 할 일이 많고, 진짜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만날 수 있다던 선배의 말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거기서 난 전노협을 봤으니까.

 

그 때까지 사회과학 서적에서 보았던 노동자, 노동자계급, 노동운동은 머리 속에서만 존재했지, 실제로 노동자들을 만난 적도 별로 없었고, 노동운동을 실제로 느낀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다 백서발간팀에서 일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실제 현장의 기록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한에서 이렇게 치열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 놀라웠다. 한쪽에서 삼당합당이 자행되고 있던 시간에 노동자들은 탄압을 뚫고 전노협을 출범시켰고, 이후 해산할 때까지 수많은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노동조합의 협의체의 건설이 이렇게까지 힘들고 지난한 투쟁을 필요로 했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었다. 그야말로 전노협은 투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전노협과 직접적으로 함께 한 적은 없지만 전노협백서의 발간작업을 속에서 끊임없이 전노협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투쟁결의문, 각종 성명서, 신문기사, 회의록, 각종 통계, 판결문 속에서도 전노협은 있었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은 전노협이었고, 수많은 투쟁에 개입하고 선도했던 것도 전노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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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협백서 사무실에서 전노협 창립을 조촐하게 기념했다. _한내>

 

백서를 만들면서 종이 속에서 전노협을 보았지만 또 다른 경로로 전노협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통해서였다. 백서발간팀장을 맡고 있던 고 김종배팀장은 전노협의 역사를 온몸으로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아니 사실 난 전노협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고 김종배 팀장이다. 전노협에 관해서, 당시 노동운동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있어 물어보면 항상 생생하게 이야기 해주곤 했다. 그 자신이 전노협의 역사와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세세한 얘기들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전노협을 건설하고 지켜내려고 했었는지 전노협이 얼마나 노동자편에 서서 노동자계급을 지켜내고 싸워왔는지 그의 진지한 눈빛과 언어로 알 수 있었다.

백서발간 작업은 많은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했기에 만들면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했고, 야식거리를 사들고 응원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노조활동가, 각종 노동, 문화 단체 등 전노협과 직간접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올 때는 일을 잠시 쉬며 그들의 산 경험들을 통해 전노협의 생생한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모두들 전노협이 단지 해산한 과거 조직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고 다시 불러내어야 할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노협백서의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은 전노협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믿는다.

전노협 6년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일이었다. 단지 전노협만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노협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단순한 생각으로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밤새워가며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월급을 받는 그냥 직장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노협의 역사를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자부심으로 밤을 새가면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전노협에 눈을 돌렸을 때 전노협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지만, 전노협백서를 만들면서 전노협을 만났고, 그 역사 속에서 싸웠던 노동자들을 만났다. 아무리 자본과 언론이 그들의 투쟁을 지우려 해도 백서 속에서 만났던 노동자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투쟁하고 있음을 믿는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전노협 백서의 중요성은 높아지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기에 필요한 것은 전노협이 지키고자 했던 민주성과 자주성, 투쟁성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7년 백서 출판기념식에서 오래된 전노협 깃발을 다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투쟁의 현장을 함께 한 전노협 깃발. 해산과 더불어 접어서 보관돼왔던 것처럼 전노협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을까? 백서는 나에게 항상 노동자는 존재해왔으며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투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빛내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중심에 항상 전노협이 있었고, 지금도 전노협은 전노협백서 속에서 살아서 학생들이, 연구자들이,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펼쳐보고, 자신을 불러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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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아래 눈치 없이 파업을 했다 _이정영

문민정부 아래 눈치 없는 파업을 했다

 

이정영 (전 신일금속노조 위원장, 부양노련, 민주노총에서 일했고 지금은 임실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원래 정착했던 임실과 진안을 오가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잘 한 결정이다.

주변엔 한 때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이 있다. 같이 명상모임도 하고, 한 번씩 어울려 전주까지 조조상영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아이들의 생일 때면 집에서 직접 만든 피자에 초를 꼽아놓고 생일파티를 하기도 한다.

김장 채소도 같이 심고, 김장도 같이 담는다. 우리 집 고구마를 수확할 때면 어김없이 이 친구들이 와서 함께 캐준다. 경제적으로 조금 쪼들리긴 하지만 기쁘고 어려운 일을 함께하는 이웃이 있어 우리 가족은 지금 이 생활에 아주 만족한다.

 

전노협을 떠올려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모든 일들이 다 소중했다. 그 중 하나를 집어내자니 참 어려운 일이었다. 20년을 쭉 돌아보고서야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했던 게 무엇이었나 정리할 수 있었다.

 

사람 ‘人 ’자가 지푸라기 두 다발이 서로 기대고 서있는 모습이란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 한자가 학창시절 처음 배운 한자 중 하나인데 그 때는 그 뜻을 몰랐다. 아니 그때만 모른 게 아니라 그 이후로도 한 참을 모르고 살았는데 20대 후반 노동운동을 하면서 몸으로 알게 되었다.

 

93년 나는 부산에 있는 신일금속노조(지금 금속노조 비엠지회)위원장이었다.

그해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문민정부 이데올로기로 세상이 얼어있을 때 어용노조가 만들어준 일방중재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치 없이 투쟁을 했고 위원장인 나를 비롯해서 간부 6명이 연행되었다.

다음날 조합원들은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부양노련을 포함해 부산지역 노동자들은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동안 못 잔 잠이나 실컷 자자며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우리보고 나가라고 한다. ‘어? 이놈들이 왜 이러지?’ 했는데 현장에 와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동신금속, 한독병원, 대우정밀, 메리놀병원, 성요사, 그리고 ‘마찌꼬바’라고 불렸던 작은 하청공장에 다니는 활동가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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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감격이란...

생각해보니 금속 제조업종은 물론 병원, 언론, 화학(신발, 섬유) 등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가 오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생산직과 사무직, 학력과 생활수준 등 사회적 간극을 넘어서 함께 싸웠다.

 

내가 처음 징역을 산 것도 이런 연대 투쟁 관련해서다. 부양노련 조직국장으로 동래봉생병원노조를 지키는 투쟁에 함께 하다 제3자 개입으로 엮인 것이다.

그 당시 매일 수 백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 앞에서 집회를 했다. 매일 저녁 일을 마치면 저녁도 거른 채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병원 앞으로 모였다. 74일간의 파업기간동안 지역 내에서 함께 싸워주었던 동지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동래봉생병원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은 이기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내가 똑똑해서 혼자 헤쳐 나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동료, 친구, 친지들의 도움과 격려 속에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어우러져야 살아진다는 것을. 그래야 잘 사는 거고. 운동도 마찬가지고.

 

중학교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철없이 놀다가 포기한 학업으로 인해 내 안에 가득했던 열등감, 패배감이 노동운동을 통해서 극복되고 긍정적인 인간이 되었다면,

부양노련, 전노협 활동으로 함께 할 때 커지는 힘과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지애의 희열을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농사지으며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밑거름은 다름 아닌 바로 젊은 날의 노동운동과 그때 함께 했던 동지들임을 새삼 확인한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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