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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학 노동자들, 1988년 능곡 평화의 집에서_정경원

대한광학 노동자들, 1988년 능곡 평화의 집에서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1988년 6월 6일 새벽 쇠파이프, 각목을 든 구사대 200여 명이 농성장을 습격했다. 노동자를 무차별 구타한 뒤 64명을 끌어내 경찰에 넘겼다. 구로공단의 대한광학. 노동자 700여 명은 4월 19일부터 회사인수업체인 아남정밀 측의 감원계획 반대, 임금인상, 노조임원교체시신고증 교부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질기게 싸웠다. 이후 6월 19일 감원 계획을 전면 철폐시키며 62일간의 투쟁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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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2월 능곡 평화의 집에서 수련회를 하는 대한광학 노동자들 (사진=노동자역사 한내)>

 

그 해 겨울. 능곡 평화의 집으로 수련회를 갔던 것......

구로공단, 대한광학, 능곡 평화의 집. 지금은 디지털단지, 행신 아파트 단지 등으로 바뀐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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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분계선 _ 양규헌

세월의 분계선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묻혀가는 공간 속에서 흘러가는 계절, 세월은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은 또 그렇게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늘 가고 오는 시간의 행진은, 보이지 않는 세월의 분계선인 한해가 가고, 내일이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상이한 하루가 다가온다. 

인생이 그렇게 가고 오고, 오고 가는 세월의 순환 과정에서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허무와 절망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갖는 삶의 무게의 중량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진 나이가 되고서는 젊었을 때 없었던 조바심과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난다. 한동안 생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패기와 기세’는 삶의 흔적에 비례하여 차츰 소멸되어 간다는 나약함도 어쩔 수 없다.

특정한 종교의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은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우주먼지에서 와서 우주먼지로 돌아가는, 물질에서 물질로의 회귀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허무가 더 강하게 엄습해 오는 모양이다.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면 한숨 속에 아쉬움이 담겨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안고 있는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끈을 부여잡기에 너무나 많은 모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롭게 만들어진 장벽도 아닌, 이미 오래 전에 확인했던 모순임이 확실하지만 연륜의 분계선을 접하는 지금은 그렇게 무겁다. 계절이 순환되어도, 시간이 뒤죽박죽이 되어도, 참과 거짓의 논리가 어처구니없는 현상으로 노출되어도 억압적 모순은 결집된 힘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속은 썩어 문드러진 야만의 자본주의는 거죽만 돈으로 처발라 번지름한 채, 미처 날뛰고 있다. 자본주의의 육중한 틀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노동자, 민중은 자본의 세균이 득실거리는 공간에 노출되어 한숨으로 보내는 시간의 길이가 얼마일까

광분하고 있는 비정상적 모순은 정신병원에 감금시켜야 하지만 마땅한 정신병원 하나도 없으니 미친 자본은 노동자, 민중을 향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법제도조차도 무용론을 앞세우며 미친 짓거리와 폭력으로 노동자계급의 희망을 앗아가며 이윤배가의 도구인 노동자로 위치 지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전태일 열사를 수 십 년 팔아 오는 동안, 투쟁은 이벤트로 전락하고 계급적 연대투쟁이 방기됨으로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파편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틈새를 비집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노동계급 내부에 균열을 가하며 기본권조차 앗아가는 절망의 분계점에 와 있다.

보편과 특수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사유의 보편성과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특수성이 어우러져 사회가 되고, 인류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적이고 특수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마땅히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고난의 한해를 보내는 마음이다.

 

가버린 해와 새해의 의미는 형식적일 수 있다. 순환되는 역사의 흐름에서 변화발전의 합법칙성의 조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모순을 하나씩 파괴시켜야하는 임무가 방기되기도 하고, 힘의 역관계 속에서 주춤거림을 과도하게 해석할 이유도 없다.

'만족해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된다.'는 동화의 메시지처럼,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임무를 방관하며 넘어갈 수가 없다.

지나가는 해와 새해의 분기점은 공간의 개념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해도 이 시기에 새해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하며 희망의 출발은 ‘견고한 자본의 거대한 성’에 작은 파열구를 내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작은 위안을 담아본다.

 

시간과 계절이 흘러, 또 다시 한해를 맞이할 때,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전태일열사의 해방정신을 세워내고 간접고용, 파견노동자투쟁을 비정규투쟁이 아닌 계급투쟁으로 조직하여 미쳐 날뛰는 자본에 작은 파열구를 만들어 내는 연말과 새해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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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2월 테제> :노동자 농민이여, 이 땅 위에 생동하는 ‘노농 소비에트’ 깃발을 세우자! _안태정

1928년 <12월 테제> :

노동자 농민이여, 이 땅 위에 생동하는 ‘노농 소비에트’ 깃발을 세우자!

 

 안태정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아, <12월 테제> … …!!!

다시 말해서,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는 1928년 12월 10일 국제공산당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1919.3.2~1943.5.15) 집행위원회가 채택한 것이었다. 그것은 1928년 11월 코민테른에 의하여 기존의 조선공산당 승인이 취소된 직후였다. 그리하여 1929년 이후 <12월 테제>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시대 조선의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세력의 조선혁명에 대한 ‘통일적인’ 기본 입장이나 방침 또는 비전(vision), 규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 <12월 테제>는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의 역할을 했던 박헌영이 기초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 또 <12월 테제>는 1945년 12월 17일자 《해방일보》광고에 나왔듯이 해방 직후에도 널리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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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죽(朱世竹, 1901~1953)과 박헌영(朴憲永, 1900~1955)

 

<12월 테제>는 1928년 7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회 대회를 방청한 서울파의 이동휘(李東輝), 엠엘파의 양명(梁明), 화요파의 김단야(金丹冶) 등으로부터 ‘조선문제’에 대한 보고를 듣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서기국 조선문제위원회(이탈리아의 윌터넨Wiltanen, 러시아의 미프Mif, 중국의 구추백瞿秋白, 일본의 좌야학佐野學으로 구성)가 토의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12월 테제>는 조선의 공산주의 그룹들이 표명한 ‘조선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조선문제위원회가 ‘종합’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12월 테제> 이전에는 공산주의 그룹들이 제각기 다른 ‘조선혁명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동안 조선 공산주의운동 내부의 ‘분파투쟁’을 심화시켜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작용을 어느 정도 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12월 테제>는 조선 공산주의 그룹 대표와 코민테른을 대표한 조선문제위원회가 ‘합작’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통일적인 조선혁명론이었다. 즉 분파투쟁의 한 요인이었던 다양한 ‘조선혁명론’이 <12월 테제>로 ‘종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1929년 이후부터 <12월 테제>를 중심으로 삼아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세력이 단결해서 조선혁명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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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휘(李東輝, 1873~1935)                         김단야(金丹冶, 1899~1938)

 

그러면 <12월 테제>는 어떻게 하여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참여하게 해서 조선혁명운동을 발전시키려고 했는가?

 

우선,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조선혁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즉 <12월 테제>는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착취, 정치적, 민족적 압박이 야기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취약성, 봉건제 및 전(前)자본주의적 관계 온존 등이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발전을 저지하여 조선인민의 경제적 빈곤, 정치적 무권리,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부자유 등 삶의 모든 측면에서 ‘궁핍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룩하려면 조선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당시에 어떠한 조선혁명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12월 테제>는 “제국주의 타도와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은, 그 발전의 첫 번째 단계로서 조선혁명이 지니는 주요한 객관적․역사적 실질이다. 이 의미에서 조선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셋째,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어떻게 해야 그런 조선혁명을 성공할 수 있게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토지혁명을 하지 않고는 민족해방투쟁도 승리할 수 없다. 민족해방투쟁과 토지에 대한 투쟁을 거의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1919, 1926)의 혁명운동은 나약했고, 결국 실패했다. 제국주의 굴레에 대한 승리는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민주독재의 수립(소비에트 형태로)을 전제로 하며 그를 통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한다.”

 

이렇게 <12월 테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민족해방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 소비에트(평의회) 건설’이었다. 더 줄인다면 ‘노농 소비에트 건설’이었다. 왜냐하면 토지혁명을 하려면 그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봉기기관이면서도 권력기관이기도 한 ‘노농 소비에트’였다. 그것이 노동자와 농민을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이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도래(到來)를 위한 조선혁명의 추진력으로 제출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 소비에트를 건설하기를 원한다면,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노동자와 농민의 전위대로서 강철 같은 조직, 공산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즉 “공산당의 복구․강화 없이는 일본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그리고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싸움은 불가능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1928년 <12월 테제>는 분파투쟁 속에 있는 다양한 공산주의 그룹을 ‘통일적인’ 정치조직으로 단결시키기 위한 강령의 역할을 했다. 또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 소비에트를 건설’해야 한다는 ‘프레임’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12월 테제>가 제시한 강령과 비전의 진정성을 믿고 일본제국주의 및 이와 연결된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1929년부터 끈질기게 벌인 결과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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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李載裕, 1905~1944)

 

해방 직후 <12월 테제>의 영향을 받은 <8월 테제>에 의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노동자와 농민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고 공장과 토지를 자주 관리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와 농민의 노력들이 또 다른 제국주의국가인 미국 군대의 군화발에 짓밟힘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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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혁명적 노동운동, 혁명적 농민운동의 한 사례>

 

오늘날에 나는 다음과 같이 원한다.

오늘날에 나는, 힘없고 다양한 이른바 ‘진보’ 세력을 힘 있고 통일적인 정치조직으로 단결시킬 만한 <12월 테제> 같은 성격의 강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 조속히 작성되기를 바란다.

오늘날에 나는,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 전쟁상태, 환경파괴 등으로 민중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주의(자본과 자본주의국가)를 지양(止揚)해서 민중을 웰빙(well-being, 심신의 안녕과 행복)하게 할 만한 ‘프레임’을 구성하여 비전을 제시하는 <12월 테제> 같은 성격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하루빨리 작성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언뜻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나는, 경제적 불평등, 전쟁상태, 환경파괴 등 결코 진(眞) 선(善) 미(美)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런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나는, 모든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는 그런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이제, 앞으로 더 비참(悲慘)해지고 더 참담(慘憺)해 지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다함께 그런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과거 속에서 현재 속에서 찾아내어 되살리고 보편화시키기 위하여 실천해야 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다 같이 그런 ‘조건’을 창조해 내기 위하여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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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을 믿습니다" 조현식 열사 _ 이승원

 

“동지들을 믿습니다.”

동지의 팔뚝에 새기고 떠난 조현식열사

 

 이승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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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를 당해 화기에 손상된 폐와 기관지가 부어올라 호흡이 곤란하고 무서운 고통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열사가 동지의 팔뚝에 새긴 글씨가 “ .... 동지들을 믿습니다!” 였다.

끝까지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던 조현식열사는 가족보다도 동지들을 챙기고 생각하였다.

 

조현식열사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격동의 시기였던 1984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독일어과에 입학하여 90년에 용인캠퍼스 학회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93년 경광주 노동법률 상담소 기획부장, ‘97년 ’광주지역 일하는 사람들‘ 2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운동에 헌신하다가 1998년 5월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열사가 노동조합을 설립하던 시기는 사상초유의 국가부도사태가 나서 IMF구제금융과 이로 인한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쫓기던 상황이었다. 특히 건설 노동자는 건설 경기의 침체로 극심한 실업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며, 그야말로 죽지 않기 위해 산다는 처절한 나날을 보냈다.

 

열사는 실업의 고통과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고 있던 건설노동자와 함께 경기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초대위원장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겨울철만 되면 일이 없는 건설현장의 특성상 IMF와 동절기는 건설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조합원들의 먹고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조현식 열사는 산림청과의 협상을 통해 숲 가꾸기 사업을 따내 800여 노동자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기뻐하던 열사는 새벽 4시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숲가꾸기 잘해서 우리 노동자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우리 한번 멋지게 해보자며 진정으로 조합원들과 함께하며, 무엇이든지 나누고자 하였다.

숲 가꾸기 사업설명회를 위한 조합원의 날(1998년 12월 25일)에 우리 조합원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자고, 봉급 봉투 내밀며 그리도 좋아했던 열사는 조합원을 맞이하기 위해 사무실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회의를 하며 너무 들뜨고 좋아 웃음이 떠날 줄 몰랐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한순간에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했던 열사는 다른 동지들의 안부를 챙기며, 숲 가꾸기 공공근로 사업 참여 희망자들인 조합원들의 명부와 관련서류들을 챙기기 위해 다시 화마 속으로 들어갔다가 쓰러져 4일 만에 끝내 운명하였다. 1998년 12월 28일 04시 40분경이었다. 겨우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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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식 동지 추모제>

 

짧은 인생이었지만 많은 것을 남긴 인생이었다. 장례를 치룬 후, 그의 자취방에서 나온 유품은 헤어진 옷가지 몇 벌과 잔돈 몇 푼이었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던 열사!, 이 땅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건설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게 되는 날을 위해 헌신했던 열사!, '동지를 남기는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열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실천 속에 몸은 떠났지만, 동지들의 가슴 속에 분명하게 새겨져 제2, 제3의 조현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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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일간의 승리, 단 하루의 패배 _오준교

76일간의 승리, 단 하루의 패배

[해고는 살인이다]를 읽고 

 

오준교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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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노무현 정권 주도하의 쌍용자동차 해외 매각은 완전히 실패로 끝난다.

공적자금 1조와 금융지원 2천억이 투입된 쌍용자동차를 상하이차에 불과 5,900억원에 매각한 것이다. 그나마 상하이차의 자체 조달액은 1,200억에 불과하고 4,200억은 쌍용자동차의 자금, 나머지는 부채였던 것이다.

 

노무현 정권하에서의 특혜 인수에도 불구하고 상하이차는 투자 당시의 약속을 철저히 어기기 시작한다.

1억 달러 이상의 투자 계획에 대한 특별합의서까지 체결하였으나 결코 이행하지 않았고 고용승계 보장은 전환배치, 비정규직 347명 강제휴직과 희망퇴직으로 결론지었다. 장기 발전에 대한 투자 약속 역시 투자 및 생산설비 증설이 전무함에 이르고 경영 자율성은 상하이차의 임원 낙하산으로 허울뿐인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다.

 

쌍용자동차의 기술 유출에만 관심있던 상하이차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조합밖에 없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투쟁 이전의 노동조합 집행부는 어용의 전형을 보여줬을 뿐이다. 2006년 임단협 교섭위원의 룸싸롱같은 전형적인 부패뿐만 아니라 사측의 전면적 복지 중단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상하이차는 쌍용자동차의 기술 유출이 완성단계에 이르자 부채비율이 불과 150%로 양호한 편임에도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더욱이 채권단이 신청하는것이 통상적임에도 최대주주가 신청하여 그들의 애초 목적이 달성되자 먹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해졌고 상하이차의 하수인이자 기술유출 방조자가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되자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최후의 투쟁에 걸게 된다.

“상하이차의 숨톰을 끊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상하이차 투자약속 이행, 고용 쟁취에서 더 나아가 투자불이행시 상하이차의 전면 철수를 요구한 범민주세력의 한상균 집행부가 들어선다. 한상균 집행부의 당선은 만연했던 노사협조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단호한 배격을 증명하였다.

 

이후 처절하게 전개했던 76일간의 영웅적인 투쟁.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손쉬운 굴욕과 항복을 선택하는 대신 명예로운 패배를 당당히 선택했다. 다른 자동차 노동조합의 철저한 무관심, 민주노총의 수수방관속에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공장을 멈추고 점거했다. 그 순간만큼은 공장의 주인을 넘어 이 사회의 주인이 된것이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은 76일간이나 이 땅에 그들만의 해방공간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역사는 언제나 다시 나선형으로 반복된다. 내일이면 제2, 제3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장과 그들의 사무실을 점거할 것이다. 언제나 전진하는 역사의 진리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멋지게 증명해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쌍용자동차의 투쟁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요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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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 _ 이승원

 제주 4‧3(?)평화공원

 

이승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제주 4‧3평화공원은 2000년 4‧3특별법 공포로 제주4‧3항쟁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아직 전체 공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며 3단계 중 2단계의 공사가 완료되어 2008년 3월 28일에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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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번지에 220,394㎡면적으로 자리 잡은 평화공원은 4‧3평화기념관, 위령제단, 위령탑, 상징조형물 등으로 꾸며져 있다. 평화기념관의 전시내용은 총10관 중 1에서 6까지는 4‧3에 대한 테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10관은 영상관, 7,8,9는 무장대와 토벌대에 의한 학살을 각각 나타내고, 제주의 공동체적 상징장소를 표현하고 있다.

 

1에서 6관까지의 테마는 제1관 프롤로그에서는 긴 터널을 통과하도록 하여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으며 원형의 천창 아래 누워 있는 ‘백비(비문없는 비석)’가 놓여 있다. 백비는 4‧3이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임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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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관 ‘해방과 좌절’은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발포사건-탄압’의 순으로 전개된다. 제3관 무장봉기와 분단거부는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무장봉기와 5‧10단선, 단정반대투쟁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제4관 초토화와 학살은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학살, 그 이후 한국전쟁 기간 형무소 재소자의 학살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5관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은 복구와 정착, 그리고 후유증, 진상규명운동으로 나뉘어 4‧3의 상처와 아픔, 그 회복과정을 보여 주려하고 있다. 제6관 에필로그는 4‧3의 아픈 기억을 통하여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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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흐름은 투쟁 - 탄압과 학살 - 후유증 - 진상규명 - 회복(사과와 용서) 순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해결되지 못한 숙제들은 여전히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주4‧3항쟁에 대한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백비’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제주4‧3항쟁은 그냥 제주4‧3일 뿐이지, 항쟁도 투쟁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나 반란도 아니다. 좌‧우의 타협점은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예민한 문제로 현재로는 휴전의 상태인 것이다.

한내에서 기획하고 있는 화보집과 관련해서 4‧3평화기념관에 사진협조를 받으러 방문하였고,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으나 4‧3뒤에 사건 또는 아무것도 붙이지 말 것을 요구받아 결국 사진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것은 제주4‧3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또한 제주4‧3에 대한 시나리오가 회복(사과와 용서)으로 끝을 맺고 있는 점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인가. 역사의 진실이 다 밝혀지고, 그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명해졌는가. 가해자는 응분의 처벌은 받았는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졌는지 따져 봐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무슨 용서와 화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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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방문 후기들이다. 평화, 화해와 용서, 안타깝다는 이야기....>

 

때마침 전시되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시화전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분노와 놀라움 -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 - 대통령이 사과했으니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역사의 왜곡이다. 교육의 효과일 것이다.

 

제주4‧3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부족하고 내용상의 문제가 있는 기념관이다. 그리고 4‧3항쟁의 주제가 왜 평화인지? 3시간에 가까운 관람에서 끊임없는 반문이 일었다. 왜 ‘평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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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황시>_이성철

<황시>

 The Children of Huang Shi, 2008

 

이성철(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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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 양자경, 조나단 리스마이어, 그리고 린다 미첼 등 호화 배역이 등장하네요. 1930년대 말(1937년 12월~) 일제 침공과 어수선한 국공합작 등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 영국 기자(George Hogg)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에드워드 노턴과 나오미 와츠 주연의 <페인티드 베일>에 비하면 탱탱한 맛이 덜 하네요. 좋은 소재, 좋은 배우들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영국 기자인 호그는 일제의 난징대학살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적십자 요원으로 위장해 난징에 잠입하나, 자신이 찍은 학살 장면의 사진이 일제에 발각되는 바람에 참수를 당할 지경에 이릅니다. 이때 주윤발('천', 외국명 '잭')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하게 됩니다. 이후 곡절 끝에 호그는 중국 후베이성(호북성)의 황시마을에서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아이들을 위해 살게 됩니다(사족입니다만 황시까지 가려면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서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무한)까지 비행기로 1시간 30분, 다시 여기서 택시로 2시간 30분이 걸리는 먼 곳이랍니다. 1930년대 주인공이 상하이에서 여기까지 갔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겠지요). 호그는 취재를 위해 전선으로 다시 가려 하였으나, '리'(린다 미첼)가 남긴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고 눌러 앉게 됩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는... (<묵공>? ^^;;)

 

이후 호그의 열정으로 고아원에는 훈기가 피어나고, 아이들도 파란 눈의 이방인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장개석 휘하 국민당 장교의 협박, 일제의 마을 침공 임박 등으로 약 60여명의 아이들을 간쑤성(감숙성) 샨다로 이주시킬 결심을 합니다. 북부 지방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참고로 간쑤성은 지난 5월 대지진의 여파로 약 280여명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고, 팬더곰 서식지며, 둔황 등으로 유명한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죠(영화에서 황시마을의 재력가인 왕사장으로 나오는 양자경이 호그에게 [실크로드]라는 영문판 책자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영화의 복선인 셈이죠).

 

황시에서 샨다까지의 거리는 1천 킬로가 넘고, 눈보라가 치는 겨울 산을 수없이 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끌고, 밀고, 지고, 메고....간난신고 끝에 샨다에 이르게 됩니다. 나중 이 일을 회상하는 생존자들은 이를 두고 "작은 대장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호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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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두고 중국판 <쉰들러 리스트>라고 하는 분도 있군요. 저는 오히려 캐나다 출신 의사 노먼 베쑨을 떠올렸습니다. 모택동 군대와 함께 대장정을 함께하고 그 도중에서 가없는 인술을 펼친 사람입니다. 참고로 언론쪽에서는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 역시 중국인들로부터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예컨대 에드가 스노우의 묘비는 지금 북경대학 구내 미명호(未名湖) 옆 야트막한 동산에 마련되어 있고, 베쑨의 경우 길림성 장춘시에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약학대학이 있을 정도입니다. 베쑨의 중국 이름은 백구은(白求恩)입니다. 베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도 비디오로 나와 있습니다만, 구해 보기는 여의치 않을 것 같네요. 중고 비디오점에 혹 있을 지도 모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들 보시길...그의 전기는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한편 호그 역시 생전에는 '피그'(Pig)라는 별명으로 아이들의 우스개거리가 되지만, 사후 '허커'(何克)라는 중국 이름을 갖게 됩니다. 영화 말미에 한 생존가가 회상하는 한 마디 말이 이 영화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을 돕고 투쟁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령 티벳을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는?

 민족주의는 자칫하면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또는 <인크레드블 헐크>가 됩니다. 굳이 배링턴 무어를 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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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문 무크지 <레프트 대구>

레프트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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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전문 무크지다. 2010년 5월 창간호를 낸 후 반년 만에 2호가 나왔다.

'레프트'도 반갑지만 '대구'는 더욱 반갑다.

"낡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노동운동의 전망을" 함께 고민하자고 대구에서부터 바람이 일고 있다.

    

이번호에는 좌파란 무엇인가, 여성노동자 노동권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대구 지역 노동자 생활과 투쟁 이야기가 실렸다. 

 

“‘오늘 우리에게 좌파란 무엇인가?’는 도대체 좌파가 뭐냐는 질문을 가볍게 던지면서 왜 좌파냐에 대한 반성에 이르기까지 우울증이 스며드는 시대에 대한 전망을 고민해보기 위해 마련했다. …… 국가와 자본이 노동권마저 백지화시키려고 하는 엄혹한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과연 좌파란 무엇일까? …… 좌파는 현실을 갑갑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연대를 새롭게 발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면서 부드러운 좌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구의 ‘민중행동’ 주최로 열린 토론회 ‘여성노동자의 노동권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발표글과 토론 내용을 묶어서 특집2로 만들었다. 남성중심의 생활임금 모델에서 남성과 여성의 연대에 의한 생활임금 모델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 …… 한국사회 여성노동자의 저임금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 …… 이명박 정부의 국가고용전략회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차례>

 

책을 펴내며_ 편집위원장 이득재

 

특집Ⅰ_오늘 우리에게 좌파란 무엇인가?

 이일재(공산주의 운동가), 함철호(인권운동연대 대표), 이득재(대구가톨릭대 교수), 천용길(레프트 대구 편집위원)

 

특집Ⅱ_여성노동자 노동권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여성노동자 노동권_안숙영(창원대 비정규 교수)

여성노동자 저임금 구조화에 대한 비판_박찬희(성서공단노동조합 위원장)

총자본의 퍼플잡(유연근무제) 비판_손소희(공공노조 대경지부 사무국장)

토론문_질의응답

 

정세와 전망

복수노조 지형의 노동조합운동_정병기(영남대 교수)

G20 정상회의 누구를 위한 회의인가?_이창근(민주노총 정책부장)

 

이슈와 논쟁

복지국가론, 은유 혹은 수사(修辭)_노태맹(레프트 대구 편집위원)

 

현장의 목소리

시간강사는 프롤레타리아인가?_임순광(비정규교수노조 사무처장)

 

마르크스21

앤디 스턴의 종말과 당대 자본주의에 있어서 노동조합 문제_골드너(<폭동노트> 편집인)

대구에서 마르크스주의학교를 열다_서장수(민중행동 상임교육활동가)

 

사람을 만나다

권영숙 언니를 생각하며_배현주(여성노조 대경지부장)

 

대구21

<화보> 동산병원 영양실 분회 외주철회 투쟁_레프트 대구 편집위원회

대구지역 이주노동자 노동권 실태조사 결과_임복남(이주연대회의 집행위원장)

반자본운동으로서의 진보적 장애인운동, 그 의미와 과제_전근배(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대학생'의 권리를 넘어, 민중의 노동권, 생존권을 쟁취하는 싸움에 함께 하자_조호제(역지사지 대표)

<사회지표를 말하다1> 재난자본주의와 안전_임순광(레프트 대구 편집위원)

대구지역 빈곤층과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의 현황과 요구_서창호(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

만평_임복남(화가)

<노동과 문화>  집단적인 몸의 노래, 우리들의 꼬뮨_김은희

우창수 동지 결혼식에 부쳐_조성웅(해방글터 동인)

불에 탄 맨 몸뚱이, 울지 말고 투쟁하라!!-구미 KEC 농성투쟁 중 분신하신 김준일 지부장을 생각하며_신경현(성서공단노조 선전부장)

따뜻한 밥2

동산병원 환자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 하며

예술 노동 '조가다'를 아십니까?_이상헌(조각가)

<노동자 책읽기> '자본론'_이태광(노동운동가)

<서평> '마르크스의 임금이론'_류주형(노동자운동 연구소 교육실장)

<영화를 보자!> 레프트대구 편집위원회

<지리산 통신> 지리산 이야기2. 마적도사를 아시나요?_깊은강(지리산꾼)

<제안> 가칭 '자유 대학'을 제안한다_레프트 대구 편집위원회

<독자후기> 레프트 대구 창간호를 읽고_태영(성균관대 노동문제연구회), 김형균(부산, 철도노조)

 

출판사: 메이데이

가격 : 12,000원(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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