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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 _ 이승원

 제주 4‧3(?)평화공원

 

이승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제주 4‧3평화공원은 2000년 4‧3특별법 공포로 제주4‧3항쟁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아직 전체 공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며 3단계 중 2단계의 공사가 완료되어 2008년 3월 28일에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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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번지에 220,394㎡면적으로 자리 잡은 평화공원은 4‧3평화기념관, 위령제단, 위령탑, 상징조형물 등으로 꾸며져 있다. 평화기념관의 전시내용은 총10관 중 1에서 6까지는 4‧3에 대한 테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10관은 영상관, 7,8,9는 무장대와 토벌대에 의한 학살을 각각 나타내고, 제주의 공동체적 상징장소를 표현하고 있다.

 

1에서 6관까지의 테마는 제1관 프롤로그에서는 긴 터널을 통과하도록 하여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으며 원형의 천창 아래 누워 있는 ‘백비(비문없는 비석)’가 놓여 있다. 백비는 4‧3이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임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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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관 ‘해방과 좌절’은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발포사건-탄압’의 순으로 전개된다. 제3관 무장봉기와 분단거부는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무장봉기와 5‧10단선, 단정반대투쟁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제4관 초토화와 학살은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학살, 그 이후 한국전쟁 기간 형무소 재소자의 학살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5관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은 복구와 정착, 그리고 후유증, 진상규명운동으로 나뉘어 4‧3의 상처와 아픔, 그 회복과정을 보여 주려하고 있다. 제6관 에필로그는 4‧3의 아픈 기억을 통하여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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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흐름은 투쟁 - 탄압과 학살 - 후유증 - 진상규명 - 회복(사과와 용서) 순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해결되지 못한 숙제들은 여전히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주4‧3항쟁에 대한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백비’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제주4‧3항쟁은 그냥 제주4‧3일 뿐이지, 항쟁도 투쟁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나 반란도 아니다. 좌‧우의 타협점은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예민한 문제로 현재로는 휴전의 상태인 것이다.

한내에서 기획하고 있는 화보집과 관련해서 4‧3평화기념관에 사진협조를 받으러 방문하였고,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으나 4‧3뒤에 사건 또는 아무것도 붙이지 말 것을 요구받아 결국 사진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것은 제주4‧3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또한 제주4‧3에 대한 시나리오가 회복(사과와 용서)으로 끝을 맺고 있는 점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인가. 역사의 진실이 다 밝혀지고, 그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명해졌는가. 가해자는 응분의 처벌은 받았는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졌는지 따져 봐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무슨 용서와 화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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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방문 후기들이다. 평화, 화해와 용서, 안타깝다는 이야기....>

 

때마침 전시되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시화전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분노와 놀라움 -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 - 대통령이 사과했으니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역사의 왜곡이다. 교육의 효과일 것이다.

 

제주4‧3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부족하고 내용상의 문제가 있는 기념관이다. 그리고 4‧3항쟁의 주제가 왜 평화인지? 3시간에 가까운 관람에서 끊임없는 반문이 일었다. 왜 ‘평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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