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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사, 구로역사연구소, 노동자대회_박준성

바보사.구로역사연구소.노동자대회

 

박준성(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90년대, ‘바보사’는 꼭 읽어야할 역사책으로 꼽혔다. 10여만 부 이상 나갔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이름은 ‘바로 보는 우리역사’인데 줄여서 바보사라고 불렀다. ‘바로 보는’이라는 제목을 놓고 말이 많았으나 줄여서 ‘바보사’라는 이름을 만들려고 일부러 ‘바로 보는 우리역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태일 열사가 ‘바보회’를 만들던 심정이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 기계와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과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바보’였다고 자각하였다. 바보처럼 억눌려 살아온 처지와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바보가 되자고 ‘바보회’를 만들었다.

 

전태일 열사가 ‘바보회’를 만들었듯이 노동자 민중도 바보처럼 믿어온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벗어나 자신들의 역사를 바로 보아야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들이 ‘책을 내면서’에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책을 <바보사>로 약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지금껏 지배자들이 항상 우매하고 무식하다고 깔보고 짓밟아 온 민중의 역사를 참되게 대변하고자 한다. 고통과 굴종의 역사를 거부했던 1980년대 민중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바보사>가 1990년대에도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힘찬 진군을 멈추지 않을 민중의 가슴에 살아 숨쉬는 ‘바로 보는 우리 역사’이기를 기대한다”

 

<바로 보는 우리역사>의 총론인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내가 썼다. 1984년부터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운동 단체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와 역사인식’ 같은 제목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한 글이었다. 글 끄트머리에서 전태일이 자각했던 ‘바보’를 떠올리며 노예 같은 존재와 삶을 이야기하였다.

 

“지배자들의 삶이나, 그들이 불어넣어 준 환상과 허위의식에 물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노예적 삶은 역사적 삶이 아니다. 자신의 노예적 상태를 깨닫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예는 이미 노예가 아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노예 상태를 감수하는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노예적 존재를 기쁘게 묘사하거나 자신의 주인을 친절하고 훌륭하다고 찬양하는 노예는 꼭두각시이거나 천박한 환각에 빠져 있는 멍청이일 뿐이다”

 

바보사는 구로역사연구소에서 공동작업으로 만든 노동자 민중의 역사였다. 좁은 공간에서 연구원들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쓰고, 돌려 읽고, 고치기를 수 없이 되풀이한 끝에 만들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1984년에 창립된 망원한국사연구실이 모태였다.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투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친 뒤 망원한국사연구실과 ‘한국근대사연구회’를 통합하자는 ‘역사연구자 대중조직론’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자 대중조직을 만드는데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민중운동과 결합하여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점이 쟁점이었다.

 

밤을 밝히고 피를 말리는 토론 끝에 총회에서 망원한국사연구실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총회의 결과는 무시되었다. 그럴듯하게 포장한 이념과 노선 밑바닥에는 미묘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결국 대중조직 건설을 주장하던 연구자들은 한국근대사연구회와 통합하여 1988년 9월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통합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공부했던 관계나 인연으로 따지면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연구자들 가운데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더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혁명적 지식인’으로서 역사를 무기로 대중과 만나 변혁운동에 함께 복무하는 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면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머리로는 호응하되 몸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는지, 통합 논의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 못했다.

 

논의 과정에서 나는 망원 독자유지론을 주장하였으나, 연구자들의 존재와 속성을 볼 때 어떠한 연구자 조직이 바람직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토론과 논쟁에 익숙한 체질이 아닌데다 인간관계까지 겹치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1988년 3월에 있을 혼인 준비를 핑계로 잠시 휴가를 얻기까지 했다.

 

새롭게 건설할 연구자 조직은 내 삶과 연구와 실천의 중요한 근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대중’으로 설정하여 ‘대중조직’의 연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망원한국사연구실은 더 이상 버틸만한 힘이 없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을 유지하자던 집행부와 일부 회원들이 새로운 연구소를 준비했다.

 

아끼고 믿었던 후배들은 대부분 따라오지 않았다. 술자리나 토론 자리에서 이루어졌던 약속과 현란한 말잔치는 거품이었다. 책을 복사했다가 뱉어 놓는 듯 한 번지르르하고 어려운 말이나 글이 모두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술값이 아깝지는 않았다. 말과 글의 주눅에서 벗어나 말과 글을 다시 돌아보게 한 값비싼 체험을 했으니까. 요즘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하는 논어 앞 대목을 그 때도 실감했다면 오히려 배운 것이 적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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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_ 사진 : 홍지욱/ 노동자역사 한내 소장 자료>

 

1988년 11월 13명의 연구원들이 구로역사연구소를 열었다. 1985년 구로노동자연대투쟁의 현장이며 노동운동의 중심지인 구로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고 연구소 이름에도 ‘구로’를 넣었다. 창립일도 전태일 열사의 분신 18주기인 1988년 11월 13일 전날인 11월 12일로 잡았다. 그해 11월 13일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매년 가을 열리는 노동자 대회의 역사가 시작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노동자대회였다.

 

11월 13일 오전에는 마침 1980년대 같이 공부한 후배가 가슴 아픈 혼인식을 치뤘다. 양쪽 부모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주례도 공부 모임의 이세영 선배가 섰다. 피로연은 안가고 바로 연세대로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대회는 이미 끝났다. 여의도로 행진하는 대열을 따라 잡았다.

 

행진에 나서기 직전 노동자 선봉대원들과 파업하던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연단 위로 뛰어 나가 손가락을 깨물어 하얀 광목 위에 ‘노동 해방’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행진 대열 맨 앞에서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 5만여 노동자 학생 시민들을 이끌었다. 여의도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 악법 개폐 촉구 대회’를 열고,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 대회’를 열었다.

 

진통 끝에 구로역사연구소를 열고,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노동자대회에서 느꼈던 감격으로 신나게 구로역사연구소 시절을 보냈다. 내가 선택한 구로역사연구소의 길이 옳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고 말과 글에 책임을 져야 했다. 혼인 초 아내와 함께 지낸 시간 보다 구로역사연구소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연구소에서 번번이 밤을 새웠다. (그렇다고 그게 다 연구와 활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테트리스 점 수 올리느라, 새로운 게임 끝까지 가보느라 막차를 놓쳐 할 수 없이 연구소에서 잔 적도 여러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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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노동자대회 후 한강다리를 건너 여의도로 행진하는 노동자_사진: 홍지욱/노동자역사 한내 소장자료 >

 

그 이후 조직을 만들거나 참가할 때면 구로역사연구소 초기처럼 활동하기 어려울 것 같아 주춤거렸다. 연구소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과 활동은 민중사학의 성과를 대중화하는 작업이었다. 창립 직후부터 민중사학에 입각한 대중교과서를 준비하여 1990년 2월에 <바로보는 우리 역사>(1.2)를 냈다. 또 한 축이 대중교육 사업이었다. 여기 저기 도맡다시피 교육을 다니다 보니 ‘박준성의 구로역사연구소’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다른 연구원들에게 미안하고 들을까봐 민망스러운 말이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1993년 8월 역사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로역사연구소로부터 따지면 22년이 지났다. 어떤 조직도 처음 만들 때 세웠던 거창한 취지를 제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 사이 연구소를 떠난 연구자들도 있고, 새로 들어온 연구자 들도 늘어나 13명으로 시작한 연구원 수가 지금은 40여명 가까이 된다. 연구원 수는 늘어 났어도 연구소는 회원들의 회비로 간단간닥 유지하고, 연구원들은 반 이상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어렵게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다.

 

돌아보면 언제나 아쉽고 부족한 것 투성이기 마련이지만, 나나 연구소나 혁명적 지식인으로서 변혁운동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을까. 그래도 연구소는 전태일의 ‘바보회’를 생각하며, ‘전태일 열사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맞춰 연구소를 창립한 뜻을 살려 연구와 출판, 교육을 계속해왔다. 2003년 11월에는 ‘투쟁의 역사, 희망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창립 15주년 기념심포지움을 열었고, 성과를 묶어 2005년 11월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를 펴냈다. 올 2010년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아서는 11월 7일 노동자대회에 맞춰 11월 6일 전태일재단과 함께 ‘청계피복 노동운동과 전태일의 재현’이라는 심포지움을 열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 한국근대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를 만들었던 20여년 전의 ‘진보적인 소장파 연구자’들이 이제는 학계의 중견 연구자들을 넘어 원로가 되어가고 있다.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늙어간다. 한편으로는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도 들린다. 스스로 다시 한 번 껍질을 벗고, 뒤에서 흘러오는 샘물과 섞이지 않으면 강물은 맑아지지 않는다. 아직은 장강의 뒷물에 밀려 퇴출될 때는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 바다로 향해 함께 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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