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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0
    영화이야기 <황시>_이성철
    한내
  2. 2010/11/15
    영화이야기 <위스키> _이성철
    한내
  3. 2010/10/13
    진송 _ 이성철
    한내

영화이야기 <황시>_이성철

<황시>

 The Children of Huang Shi, 2008

 

이성철(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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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 양자경, 조나단 리스마이어, 그리고 린다 미첼 등 호화 배역이 등장하네요. 1930년대 말(1937년 12월~) 일제 침공과 어수선한 국공합작 등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 영국 기자(George Hogg)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에드워드 노턴과 나오미 와츠 주연의 <페인티드 베일>에 비하면 탱탱한 맛이 덜 하네요. 좋은 소재, 좋은 배우들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영국 기자인 호그는 일제의 난징대학살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적십자 요원으로 위장해 난징에 잠입하나, 자신이 찍은 학살 장면의 사진이 일제에 발각되는 바람에 참수를 당할 지경에 이릅니다. 이때 주윤발('천', 외국명 '잭')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하게 됩니다. 이후 곡절 끝에 호그는 중국 후베이성(호북성)의 황시마을에서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아이들을 위해 살게 됩니다(사족입니다만 황시까지 가려면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서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무한)까지 비행기로 1시간 30분, 다시 여기서 택시로 2시간 30분이 걸리는 먼 곳이랍니다. 1930년대 주인공이 상하이에서 여기까지 갔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겠지요). 호그는 취재를 위해 전선으로 다시 가려 하였으나, '리'(린다 미첼)가 남긴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고 눌러 앉게 됩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는... (<묵공>? ^^;;)

 

이후 호그의 열정으로 고아원에는 훈기가 피어나고, 아이들도 파란 눈의 이방인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장개석 휘하 국민당 장교의 협박, 일제의 마을 침공 임박 등으로 약 60여명의 아이들을 간쑤성(감숙성) 샨다로 이주시킬 결심을 합니다. 북부 지방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참고로 간쑤성은 지난 5월 대지진의 여파로 약 280여명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고, 팬더곰 서식지며, 둔황 등으로 유명한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죠(영화에서 황시마을의 재력가인 왕사장으로 나오는 양자경이 호그에게 [실크로드]라는 영문판 책자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영화의 복선인 셈이죠).

 

황시에서 샨다까지의 거리는 1천 킬로가 넘고, 눈보라가 치는 겨울 산을 수없이 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끌고, 밀고, 지고, 메고....간난신고 끝에 샨다에 이르게 됩니다. 나중 이 일을 회상하는 생존자들은 이를 두고 "작은 대장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호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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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두고 중국판 <쉰들러 리스트>라고 하는 분도 있군요. 저는 오히려 캐나다 출신 의사 노먼 베쑨을 떠올렸습니다. 모택동 군대와 함께 대장정을 함께하고 그 도중에서 가없는 인술을 펼친 사람입니다. 참고로 언론쪽에서는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 역시 중국인들로부터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예컨대 에드가 스노우의 묘비는 지금 북경대학 구내 미명호(未名湖) 옆 야트막한 동산에 마련되어 있고, 베쑨의 경우 길림성 장춘시에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약학대학이 있을 정도입니다. 베쑨의 중국 이름은 백구은(白求恩)입니다. 베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도 비디오로 나와 있습니다만, 구해 보기는 여의치 않을 것 같네요. 중고 비디오점에 혹 있을 지도 모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들 보시길...그의 전기는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한편 호그 역시 생전에는 '피그'(Pig)라는 별명으로 아이들의 우스개거리가 되지만, 사후 '허커'(何克)라는 중국 이름을 갖게 됩니다. 영화 말미에 한 생존가가 회상하는 한 마디 말이 이 영화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을 돕고 투쟁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령 티벳을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는?

 민족주의는 자칫하면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또는 <인크레드블 헐크>가 됩니다. 굳이 배링턴 무어를 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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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위스키> _이성철

위스키

이성철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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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sky, 2003, 우루과이)

 

국내에는 거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루과이산 영화입니다. 2004년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탄 작품이네요. 정말 시간이 나실 때, 시끄럽고 요란스럽고 활극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들에 지쳐 있을 때, 함 들여다 보시길 바랍니다.

 

형인 야코보는 우루과이에서 조그만 양말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노동자 2명, 현장관리인 1명). 브라질에 사는 동생 에르만 역시 양말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업인 모양입니다. 단지 동생은 형과 달리 신기술도 도입하고, 여러 나라에 수출도 하는 등 사업을 넓히고 있습니다. 한편 과묵한 형과 달리 동생은 쾌활한 듯 보입니다만, 형제간에는 무거운 어색함이 감돕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어머님을 형 혼자 모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며칠 후면 장례식이 있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동생이 여러 해 만에 형의 집으로 오게 됩니다. 이야기의 사단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나이 많은(이제 노인이 된) 형은 결혼을 안한 듯 합니다만, 동생에게는 결혼을 한 것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은 공장의 현장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마르타에게 동생이 머무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지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즉 부인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지요. 마르타 역시 곱게 늙은 홀로 된 여인인 것 같습니다.

 

사진관에서 동생에게 보여줄 전시용 부부 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는 ‘위스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진 찍을 때 ‘김치~’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형의 집에서 며칠 지내게 된 에르만은 형수(?)에게 많은 정을 느낍니다. 이제 장례식도 끝나고, 내일이면 동생은 다시 브라질로 떠나야 합니다. 형도 동생이 빨리 떠나길 바라지요. 그런데 동생은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을 합니다. 두 분을 위해 자신이 좋은 해변 관광도시(피리아폴리스)로 초청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형은 거절하지만, 마르타가 이에 응하는 바람에 셋은 다시 며칠간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호텔에서의 야코보의 생활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조롭기 그지 없습니다. 혼자 호텔 수영장으로 내려간 마르타는 그녀를 찾아나선 에르만과 수영도 하게 되고, 호텔 노래방에서 에르만의 노래를 듣고 감동하기도 합니다. 마르타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야코보지만 이런 몇몇 장면에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동요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동생에게 살짝(?) 질투를 느끼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에르만은 형에게 “그동안 어머니를 보살펴줘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조그만 보상이다”라면서, 꽤 많은 돈을 형에게 건네게 됩니다. 형은 거절하지만, “새 기계를 사는 데 보태라”는 말을 듣고 어쩐 셈 인지 이 돈을 챙기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 카지노에 들러 돈 전부를 칩으로 바꿔 배팅을 하게 됩니다.

 

근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배팅을 했건만, 예상치 않게 오히려 큰 돈을 따게 됩니다. 동생 줄 선물과 이 돈 중 대부분을 곱게 포장해서 나중 마르타에게 주게 됩니다. 동생은 다시 브라질로 떠나고, 마르타와 야코보는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일단 야코보의 집으로 돌아온 마르타는 자신의 짐을 챙겨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택시를 불러주는 야코보는 앞서 말한 선물을 챙겨 줍니다. “내일 공장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마르타 역시, “내일 봐요, 신이 허락한다면...”이라면서 택시에 오릅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마르타의 눈 가는 촉촉이 젖어듭니다. 마르타 역시 황혼의 사랑을 가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평소처럼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공장 문을 열게 되는 야코보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다 함께 작업준비를 했던 마르타가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늘 마르타가 타주던 차도 자신이 타 마시면서 마르타를 기다리지만.... 조금 뒤 출근하는 두 여성 노동자들 중 한명이 “라디오를 틀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야코보는 “안 트는 게 좋겠다”고 말하지만, 이내 “마르타가 오면 물어봐”라고 합니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끝나게 됩니다.

 

줄거리는 그저 단순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두 노 배우들의 가슴 속 연기가 바깥으로 아름답게 배어나옵니다. 황혼의 사랑 역시 “신이 원한다면”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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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_ 이성철

진송

이성철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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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효문 감독의 1996년 작품입니다(국내에는 김용 원작을 드라마화한 <천룡팔부 2003>등으로 더 잘 알려짐). 강문, 갈우 등 중국의 대표적인 배우들이 등장하는군요. 강문은 <붉은 수수밭>, <부용진>, <햇빛 쏟아지던 날들>, 첸 카이거의 <시황제 암살>, 그리고 <송가황조>, <귀신이 온다>, <사라진 총>, <모리화>, <천리주단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등으로 잘 알려져 있고, 갈우는 <야연>, <시황제 암살>, 그리고 <패왕별희> 등으로 잘 알려진 배우죠.

 

진시황(BC 210년 등극)과 한 음악가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나중에(13세 때) 진시황이 되는 양정은 연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습니다. 그는 연나라의 고점리(나중 진나라의 대악사가 되는 인물)의 어머니에게 함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랍니다. 세월이 흘러 양정은 진나라의 왕이 되나, 그의 끊임없는 정복야욕 때문에 이웃 나라들(고점리의 조국인 연나라, 그리고 초나라 등)은 전전긍긍합니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암살자를 보내 진왕을 암살코자합니다(일설에 의하면 진왕은 재위 동안 19차례의 암살위협에 놓였다고 합니다). 예컨대 연나라에서는 ‘형가’(원래는 위나라 사람임)를 보내 척살하려하나 실패하게 됩니다(장예모 감독의 <영웅>의 실제 모델이기도 함). 이 결과 연나라는 초토화되고, 진왕은 고점리를 데려오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점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와 그 왕에 대해 저항합니다.

 

한편 진왕의 슬하에는 30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총애를 받았던 공주는 월양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인 진왕과 함께 말을 타다 떨어져 앉은뱅이가 되어버려 딸에 대한 애틋함이 무엇보다 컸던 탓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진왕이 또 암살위협에 놓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고점리와 월양이 함께 타고 있던 마차에 바위 같은 큰 돌이 떨어지면서 월양은 중상을 입게 됩니다. 고점리는 월양을 닷새 동안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그녀를 회생시키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랑이 싹터 ‘월양곡’을 짓게 되죠. 심지어 월양이 걷게 됩니다.

 

“물이 하늘에 이르러 구름이 되니

한가로운 세상에 사랑이 충만하다“

 

어릴 적 젖 동무였던 진왕은 고점리의 뛰어난 음악 실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진나라를 위한 노래(즉 진송, 일종의 애국가)를 만들라고 합니다만, “대왕, 내가 능한 것은 평민들의 음이라서 궁중 음악인 송(頌)과는 별개의 음이라네”면서 거절합니다. 그러나 진왕은 끈질기게 회유합니다. 진송을 만들어주면 종묘사직의 제사를 관장하는 대악사에 봉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점리는 계속 거절하고, 궁중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월양과의 애정행각만 이어갑니다. 그러나 월양은 왕과 대장군(왕건)간에 약조한 정혼자(왕분)가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 진왕이 ‘진송’을 만들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음악은 가장 쉽게 민심을 사로잡는 것이다”는 거죠. 천하는 통일했으나(제나라 정복 후 통일, 제나라는 지금의 산둥지역 일원입니다) 민심은 잡지 못한 진시황의 제 1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간의 대학살을 가리려는 것이기도 했죠. 70-80년대 한국의 수많은 금지곡과 건전가요들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와중에 만리장성 공사장의 돌에 모반을 부추기는 글귀가 발견됩니다. “진시황이 죽으면 나라는 분열된다”는 내용입니다. 진시황은 공사장 민중들 3만 명을 백 명씩 묶어 참수하게 됩니다. 가히 공포가 극에 달하게 된 셈이지요. 이에 고점리는 결심하게 됩니다. “내가 월양도 잊고, 작곡도 할 테니 처형을 멈춰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2만 5천명의 생명을 구하게 되죠(아! 처형된 5천명은? 좀 더 일찍 결심하지.....^^;;). 그러나 고점리의 반항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왕분에게 시집갈 월양과 성(聖)스러운 종묘에서 성(性)스러운 예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 일 등으로 고점리는 눈이 멀게 되는 형벌을 받습니다. 슬퍼하는 월양이지만 월양은 그에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의 월양은 늙지 않을 거예요”라는 애틋한 마음을 남깁니다.

 

마침내 진송이 완성되고 진왕은 시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점리는 진시황의 등극 연설 중에도, 자신이 들고 있던 악기로 그를 때리게 됩니다. 이에 진시황은 “역사는 내가 쓴다. 그리고 너도 죽이지 않는다”면서 고점리에게 아량을 베푸는 듯하지만, 이미 고점리의 몸 속에는 독이 번져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제국의 건설과정이었지만 그 제국은 결국 BC207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음악은 영원하다는 것이겠지요? 배우들의 연기가 빼어납니다. 중국역사 공부를 겸해서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연전에 EBS에서 강연된 김영수 선생의 ‘사기열전’을 들춰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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