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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전, 민중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10월투쟁 _ 김영수

1987년 이전, 민중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10월투쟁

 

김영수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19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에 대해 민주시민의 승리로 간주한다. 이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대학생 및 제도권 야당의 정치세력, 중간층의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리고 민족민주진영의 운동세력 등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승리한 대항쟁이었다는 평가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항쟁의 주요한 요구사항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대통령 직선제 쟁취’ 등 탈계급적인 수준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의 주체와 요구사항을 이렇게 평가할 경우, 6월항쟁의 이면을 보지 못한 채 항쟁의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다.

 

6월항쟁은 1987년 6월에 발생하였지만, 1970년대의 반유신투쟁 혹은 1980년 광주항쟁의 연속이었으며, 노동자·민중이 생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전개하였던 투쟁의 연속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지배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양면적인 전략, 즉 제도권 야당의 정치세력과 대학생들을 포용하는 통제전략을 구사한 반면,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탄압하는 통제전략을 구사하였다.

신군부세력 및 전두환 정권은 1970년대에 민주노조활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을 사회정화조치의 일환으로 삼청교육대에 보내기도 했으며, 노동운동의 투쟁에 대응할 수 있는 정부의 ‘노동대책회의’를 상설화하였다. 또한 노동관계법, 즉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노동위원회법·노동쟁의조정법 등 4개의 법을 반민주적으로 개정하여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였다. 특히 노동조합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민주노조운동의 활동가들을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외에도 정당하게 파업투쟁을 전개하는 노동자들에게 가차없이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1년 이후의 청계피복 노동조합 복원투쟁, 1984년 택시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 1984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의 파업투쟁, 그리고 1985년 구로지역 중소기업 노동조합의 동맹파업투쟁 등에 대해 폭력적인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구로동맹파업투쟁에 참여했던 5개 노조의 노동자 중에서 약 1,300여 명이 “불구속, 구류, 구속, 부상, 해고, 강제사직” 등의 탄압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불법행위도 자연스럽게 자행하였다. 그것은 1984년 초반부터 노동운동과 관련된 활동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노동현장으로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이전한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을 불순분자로 간주한 상태에서, 그들을 취업하지 못하게 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단위 사업장에 배포하였으며, 그들을 구속하기까지 하였다. 1987년 들어 정부는 소위 위장취업자라는 이유로 6.29이전까지 43명, 6.29 이후 9월 2일까지 37명 등 모두 80명의 현장활동가를 구속하였고, 노사분규와 관련하여 6.29이후 9월 8일까지 모두 2,618명을 연행하여 이중 388명을 구속하였다. 이 외에도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개별주체들에 대한 직업적 깡패와 경찰의 납치・감금・협박・집단폭행 등이 자행되었다.

 

이처럼 전두환 군부독재의 반민주적 폭력은 노동자·민중들을 대상으로 일상화되었다. 단순히 대통령이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이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노동자·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자행하였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1987년 이전에 제5공화국의 헌법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대표적인 경우가 85년 10월에 결성된 ‘전국 노동자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와 1986년 10월 26일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이다.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는 1986년 10월 26일 서울 신대방동 돈보스꼬 청년회관에서 노동자,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여해 결성식을 치렀다. 1986년 5.3인천사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은 개헌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 쟁취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 노동3권 쟁취 등을 위한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난 이후, 대림동 로터리에서 30여 분간 가두시위를 전개하면서 개헌투쟁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처럼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은 이러한 투쟁기구를 중심으로 ‘민중민주주의 개헌투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노동자 정치운동의 개헌투쟁은 노동자 정치운동과 민중민주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한 노력으로 가속화되었다. 1986년 11월 29일에는 수도권 차원에서 민중민주주의 개헌투쟁을 전개하였고, 1987년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을 계기로 발생된 2.7투쟁과 3.3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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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 결성선언문>

 

6월항쟁의 과정에서는 노동자 대중들의 조직적 동원을 추진할 전국적 지도체계가 부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참여 노동자들의 비율이 점차 늘었고 항쟁이 노동자 계급으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지배블록의 6.29민주화조치가 이루어졌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매일 출근해야만 했었던 상황이었지만, 퇴근 이후에 도심을 누볐던 넥타이 부대가 노동자가 아니고 누구였단 말인가? 가두투쟁을 전개할 때, 차의 경적 소리로 투쟁을 북돋아주고 최루탄과 경찰에 쫒길 때 몸을 숨겨 주었던 사람들이 노동자․민중이 아니고 누구였단 말인가? 그들을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비록 6월항쟁의 과정에서 비조직적이었고 개별적・분산적 수준이었지만, 개헌투쟁의 주요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6월항쟁이 노동자 계급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들을 6월항쟁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는 점이다. 특히 노동운동을 ‘양날개론’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그렇다.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고, 정당운동만이 국가권력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경향성은 6월항쟁의 주도세력이나 요구사항들을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속성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6월항쟁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요인을 ‘넥타이 부대’의 동참에서 찾는다. 그런데 1987년 당시의 ‘넥타이 부대’는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핵심적 주체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1987년 이전에 민중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과 요구들을 자신의 이해로 간주하였다. 노동자․민중들은 정치권력의 형식적 민주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추구하려 하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 내용들이 노동자․민중들의 이해와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노동자․민중들은 자신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국가권력을 수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1987년 이전에 민중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민중들은 진정한 평화주의자들이다. 노동자․민중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인간에 대한 ‘착취의 폭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평화, 인간에 대한 ‘폭력적 지배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평화, 그리고 노동자․민중들에게 순종과 복종만을 추구하는 ‘강제의 폭력’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평화 등이다. 노동자․민중들의 ‘새로운 6월 민주항쟁’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구조를 진정한 평화구조로 변화시키려는 과정이다. 정치적 민주화만으로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기는 힘들다. 사회의 하부구조(social infra-structure)가 실질적으로 민주화되는 과정, 즉 노동자․민중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구성되거나 운영되는 사회만이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 노동자․민중들은 ‘새로운 6월항쟁’으로 다음과 같은 평화사회, 즉 사회구성원 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민중들의 이해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사회, 그들의 이해가 사회적․국가적 이해로 전화되는 사회, 그리고 노동현장의 공동체적 관계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관계로 전화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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