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행인[인간선언?] 과 그럭저럭 관련이 있다면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글.

1. 낙서

 

근처 공립도서관 건물 밖 등나무 그늘에 놓여 있는 벤치 등받이에 이런 낙서가 있다.

 

"나는 학교라는 감옥에서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라는 출감을 기다린다"

 

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낙서가 가지는 즉흥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 문장이 그런 곳에 쓱싹 씌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낙서를 한 친구의 의식상태가 항상 연금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2. 세대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386세대'라는 말은 항상 귀에 거슬린다. 한 때 유행했던 'X세대''Y세대', 혹은 그 이전에 떠돌았던 '신인류'나 뭐 이와 유사한 세대의 구분 역시 어지간히 어정쩡하긴 마찬가지다. 최근 유행하는 용어인 '88만원 세대' 역시 마찬가지. 세대간 특이점을 찾아봄으로써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 세대구분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해선 '386세대' 운운하는 것을 들을 때만큼이나 낯설다.

 

촛불집회에 왜 중고생(특히 여중고생)들이 나오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돈다. 이걸 또 새로운 세대구분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 같다. 뭐 그렇게 하든 말든 그거야 지들 마음이다.

 

10대는 이명박에게 빚진 것이 없어서 다 튀어나온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만, 그럼 난 이명박에게 빚진 거 허벌나게 많던가? 원 별 시덥잖은 소리들은... 88만원세대로 편입되는 불안감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럼 뭐 지금 88만원 세대는 앞으로 펴~~엉생 88만원 세댄가? 앞으로 10년 후에 586으로 업글되는 현재의 486, 10년 전 386은 2mB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 걸까?

 

 

3. 인간

 

놀고 먹는 백수가 되어서야 '노동'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개뻥을 언젠가는 깨주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다가도, 뭘 해서 입에 풀칠을 하나 생각하다보면 한숨이 폭폭 나오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왜 우리는 '노동'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 받고 노동력을 파는 행위를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40대부터 한 번 훑자.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에 만족하는 걸까? 물론 대답은 'No'다. 잔업수당이라도 챙기지 않으면 애들 학원비에 노인네 약값 조달은 물 건너 가는 거니까. 생고생 해서 마련한 아파트 융자금은 어떻게 갚을 것이며, 기껏 마련한 자동차 할부금은 어찌할 것인가?

 

30대, 지금 정신 없다. 기껏 취직해봐야 비정규직이 아니면 다행이고, 결혼자금 마련하느라 쎄가 빠지게 뛰어야 한다. 집에 가면 너 결혼 언제 하냐고 눈치나 주고, 친구들은 돈 버는 이야기로 사람 주눅들게 한다. 학자금 대출금도 갚고, 아파트 장만하려고 돌아다녀야 하고, 결혼을 위해 연애질도 해야 한다.

 

20대는 더 심각하다. 부모님 잘 만난 넘들이야 유학이다 뭐다 하겠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중한 등록금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 스스로 학비 버느라고 알바하는 학생도 있겠고,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서 직장잡고 돈 버는 것이 남는 거라고 생각한 채 촌각을 다투며 토익에 전공책에 수험서를 껴안고 사는 학생들도 있다. 캠퍼스의 낭만? 아버지 세대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10대야 뭐 말할 것도 없다. 대학 가야지. 딴 거 생각할 시간도 없다. 학원 가야하고 오밤중엔 새벽까지 수능방송 이비에수 들어야 하고 학교에 가선 선생님의 등쌀에 시달리고 뭐 기타 등등...

 

10대고 20대고 30대고 40대고, 이게 뭐 인간이 할 짓이냔 말이다. 비명소리 안 나오는 게 희한한 일이다. 비명은 왜 안나오냐고? "다 그렇게 사니까~!"

 

 

4. ?

 

우째야 할까? 우야되었던동 밥은 무으야 살끼 아이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일해야 하고, 일할 능력을 갖춰야 하고, 일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줘야 하고, 일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아니 기술이 아니라 간판을 딸 수 있는 곳으로 진학을 해야 한다. 이 순환구조는 무한반복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이 순환구조가 끊길 가능성이 없다. 왜? "다 그렇게 사니까~!"라고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청소년들 촛불집회를 감시하기 위해 교감이고 장학사고 다 동원하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이들이 뭔 죄가 있겠나, 시키는 대로 해야 먹고 사니 하는 일이지. 다 그렇게 살잖나?

 

청소년들이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라는 "출감"을 기다릴 때, 이 사회는 이 학생들을 "죄수" 취급하고 있던 거다. 이 와중에 학생들이 "왜 선생님은 명찰 착용 안 해요?" "왜 선생님은 교복 안 입어요?" 이런 질문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라나? 30대 또는 40대일 그 선생님들은(그 중에는 좀 빨리 선생님이 된 20대도 있겠지만) 어떻게 반응할까?

 

앞으로 창창하게 남은 백수의 시절동안 세대구분 같은 씨잘데기 없는 짓거리 말고,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걸지에 대해 고민을 좀 더 해봐야 겠다. 다들 인간선언을 할 수 있는 그 날이 올지 안 올지를 좀 따져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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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8 16:08 2008/05/1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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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야에 묻혀사는 백수 생활은 재밌나요? ㅎㅎ

  2. azrael/ 그닥 재미는 없네용. ㅎㅎ

  3. 30대의 평가가.. 가심을 후벼파는 구랴 ㅠ,ㅠ
    역시 세상에서 제일 힘든건 '남들처럼 사는거' 여 ㅠ,ㅠ
    - 엄친아(엄친딸) 포스에 바람잘날 없는 백수 삼순 보고파 영감니~임

  4. 2002년 '효순, 미선' 사건 때 촛불집회 주역이었던 여학생들이 지금의 20대가 되었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생각없는 20대'와 '좌파 10대'라는 식으로 구별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촛불집회에 나온 10대들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취업의 문제가 눈앞에 닥치면 정치적인 관심은 지금 20대 못지않게 뚝 떨어질 것이라 예측합니다. 솔직히 지금의 20대들도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고 있거든요.

    게다가 이번 촛불집회로 인해 가장 이익을 얻을 정치가는, 진보적 인물들이 아니라 '박근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통령을 제외하면 가장 언론의 부각을 많이 받는 정치가이며, 정치적 영향력도 워낙 큰 데다가 통합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워낙 낮기 때문에 박근혜가 이명박에 대한 가장 강력한 미래의 대안이 될 거라는 뜻이죠.

    그게 정치가 돌아가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5. 삼순/ ㅎㅎㅎ 보고프면 양주로 궈궈~~!!

    참군/ 20대에게 짱돌 던지면 안 되는 이유가 그거겠죠. 사실 짱돌 던질만큼 열받은 세대가 20대라면 몰라도 말이죠. 우석훈이 지금 10대를 '막장세대'라고 했다는데, 레토릭의 범주를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이건 좀 거시기 해요. '88만원 세대'로 돈 좀 벌더니 걍 세대구분으로 이름날릴 각오라도 하고 있는 건지...

    실제 그 윗세대들과 지금의 10대, 20대는 충분히 다른 면이 있어요. 적어도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느 세대보다도 민감하게 반응들을 하죠. 지금 40대에서 50대는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자신의 삶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대였는지 모르겠지만(물론 그 생각과 자신의 행위는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요) 지금 10대 20대는 "자신"과 밀접한 주제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모습이 보이죠. 그런데 저는 이게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적어도 개인주의라는 것이 제대로 발현한 역사를 가져보지 못했던, 오히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등치시키면서 죄악시해왔던 지금까지 우리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정치적 행위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박근혜가 지금 상황에서 최대 수혜자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근혜가 되었건 누가 되었건 "이 나라가 걱정입니다" 이따위 말로 뭉뚱그려서 정치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욱 관심이 가고 중요하게 바라보게 되는 거기도 하구요. ^^;;;

  6. 끼워맞추기에 가까운 생각이긴 한데..

    이명박의 중심 메시지가 "너에게 뭔가 떡고물이 떨어질 거야"라고 한다면, 그 메시지는 적어도 지금의 30대 이상에게는 확실한 효과를 주었고, 20대에게도 일부 "적어도 나 취직길은 넓어지겠지" 정도의 효과(대선 때 그 '청년백수 연설원'이 가능했던 건 이것 때문이겠죠)는 주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면 10대는.. 20/30대 이상에게 "너에게 뭔가 떡고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괴롭혀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던 거 아닌가 싶구요("영어몰입교육" 어쩌고 하는 일련의 '교육' 시리즈들 말이죠). 그게 지금 10대가 '효순,미선' 사건에 뒤이어 '촛불집회'에 나오게 된 이유가 아닐까나 싶습니다.


    건 그렇고.. 어케 지금은 좀 잘 쉬시는 중이십니까?^^ 세상은 날로날로 맹랑좌파당의 역할을 더 많이 요구하는 때인 것 같습니다만...

  7. 삐딱선/ 삐딱선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가 세대구분을 통해 사회적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고싶지 않습니다만 지금 10대를 두고 '막장세대'니 '2.0세대'니 하는 구분은 전혀 동의를 하지 않게 되더라구요. 우석훈이 이야기하던 '88만원 세대' 역시 그렇구요.

    그나저나 이러다가 맹랑좌파당 창당 전에 천지개벽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