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문제다
인디언의선물님의 [사이버 모욕죄에 악플달기 놀이로 맞설까.] 에 관련된 글.
며칠 전에 모 방송국과 인터넷 실명제와 관련한 전화인터뷰를 했다. 행인이 하는 말이야 원래 정해져 있는 거라 특별할 것도 없는데, 흥미가 동했던 부분은 이거다. 잠깐 전화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중에 먼저 전화연결이 된 어떤 사람이 인터뷰하는 내용이 들렸다. 물론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어떤 질문이 던져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사람이 하는 답변의 요지는 이런 거다. 전면실명제를 해야 한다. 지금 포털은 한 번 회원가입하면 아이디를 여러 개 쓸 수 있는데 이건 익명제다. 실명제를 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데 굳이 익명으로 할 필요가 없다. 운운.
그동안 게시판 실명제나 사이버모욕죄와 관련된 찬성론자들의 논리를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들의 주장에는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바로 어떤 때에, 즉 언제 그 제도가 필요할까이다.
사이버공간 상에서 본인여부를 확인하고 조사를 한 후 사법처벌이나 손해배상을 판단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반드시 뭔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평온 무사하게 사이버공간이 문제없이 돌아갈 때에는 본인확인이고 나발이고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이건 신자유주의자들, 다시 말해 시장지상주의자들이 그토록 "정의로운 법"이라고 나발을 불고 돌아다니는 민법(사법)의 기본 원칙이다. 사인 간에 공평무사하게 계약이 이루어지고 순탄하게 계약내용이 진행되면 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이 근대 이후 민법, 즉 저들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 "정의로운 법"이 가지고 있는 기본 원칙이다. 잠시 부연하자면, 이 원칙에 대해서는 좌파 역시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정의로운 법"에 의해 사법기관의 권능이 개입하는 것은 뭔가 법이 개입해야 할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 실명제나 사이버모욕죄의 경우를 보면, 누군가가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심각한 욕설을 했거나 명예훼손을 하는 행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문제가 되는 행위를 한 사람의 신원이 조사되는 것이고 처벌을 하던 손해배상을 하던 간에 사법적인 조치가 취해지는 거다.
문제는 그토록 시장자유를 주장하면서 국가의 개입을 죄악으로 여기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왜 사이버공간에서만큼은 "자유"라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려는가 이다. 얼핏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극렬한 "시장원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법치주의"를 고려해보면 이들의 행위는 일관성이 있다.
사실 시장원리주의자들은 사이버공간에서만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원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의 성격을 보자. 대자적 주체가 누군가를 살펴보면 이들이 말하는 "작은 정부"는 명쾌하게 설명된다. 즉, 시장원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정부가 '작아진다'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거나 혹은 아예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자신들의 이윤확보영역에 걸친 정부의 영향력까지 최소화하거나 아예 없애길 바란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복지분야이다.
기본적으로 돈이 돌아야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작금의 자본가 입장에서, 국가차원에서 보장되는 각종 사회보험들은 앉아서 돈 놓고 돈 먹기 할 수 있는 분야를 국가가 장악한 것일 뿐이다. 더 들어가면, 시장원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사회보장정책들은 스스로 자신의 밥그릇을 챙길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앗아가는 죄악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거저' 물질을 배분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다. 아니,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약한 정부'다.
그런데 주체를 시장원리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동안 정부로부터 '거저' 돈을 받아왔던 사람들로 옮겨보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시장원리주의자들에게 "작은 정부"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정부"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 거대함이라는 것이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공권력을 동원함으로써, 시장원리주의자들에게 있어 "작은 정부"를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복지를 통해 정부역할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복지를 줄임으로써 발생하는 그동안의 수익자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큰 정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폭력적인 정부를 요청하는 거다.
시장원리주의자들이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억누르기 위해 폭력적인 정부(시장원리주의자들에겐 전혀 그렇지 않은)를 요청하는 것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공간이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은 결코 그 공간을 거리의 노숙자나 철거촌의 아이들에게 내놓을 의향이 없다. 반대로 거리의 노숙자나 철거촌의 아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이 서 있는 그 공간을 동경하고 기회가 된다면 그 공간에 합류하고자 한다. 여기서 분쟁이 일어난다.
이 분쟁을 시장원리주의자들은 피하고자 한다. 분배를 통해 피한다는 것은 시장원리주의자들의 원칙에 합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지고 싶지도 않다. 결국 가능한 것은 정부가 시장원리주의자들을 대신해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을 억압함으로써 분쟁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이 요청에 부합하기 위해서 정부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분배정책을 통해서는 시장원리주의자들에게 반발하는 사람들을 달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작은 정부"가 되는 통에 돈은 돈대로 거둬들이지 못하게 되고(돈은 시장원리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곡식은 창고에서 사라진다. 결국 정부는 몽둥이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게 된다. "작은 정부"라는 말은 그래서 가장 상징적으로 시장원리주의자들의 사기성을 보여주는 단어가 된다.
시장원리주의자들이 사이버공간을 주목하고 이에 대해 "작은 정부"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몇 차례에 걸쳐 사이버공간의 파괴적인 위력을 실감한 이들은 더 이상 사이버공간을 관리불가능의 지역으로 방관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저들의 위기감 역시 오바질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지만, 저들은 어쨌거나 바늘만한 틈이라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위협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덜컥 일이 터졌다. 한 연예인의 죽음, 그동안 설왕설래 되어 왔던 악플의 위험성, 사이버공간의 자유방임적인 행태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 얼마나 좋은가?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집회시위, 노동쟁의만 없어도 국민총생산을 1% 이상 늘릴 수 있다고 쌩구라를 치고 있는 이명박 휘하의 시장원리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도처에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는 사이버공간의 키보드들이 80년대 중후반에 벌어졌던 노동쟁의의 쓰나미와 동급의 위험수준에서 파악된다. 이러던 차에 벌어진 한 연예인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터무니 없는 인터넷 망국론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회는 이 때다! 사이버공간에 재갈을!!
하지만 이 시장원리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대놓고 사이버공간의 기능정지를 요구할 수는 없다. 왜냐? 쪽팔리거든. 그러다보니 횡설수설 하면서 되지도 않을 근거를 늘어놓는다. 예컨대 앞서 전화인터뷰에 답변했던 어떤 사람의 말을 보자. 포털에서 회원에게 몇 개의 아이디를 줌으로 해서 실명제라고 볼 수 없다거나 혹은 실명으로 하더라도 동명이인이 많아서 익명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이 사람의 견해는, 정확히 말하면 실명제와 익명제의 차이가 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밖에는 의의가 없다.
주민번호를 비롯해 자신의 상당한 개인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포털 유저들이 제 아무리 아이디를 바꾼다고 해도 누가 누군지 확인하는 것은 식은 죽먹기다. "누가 누군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상이 다 드러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무슨 익명을 운운할 수 있나? 아니 이보다 더 확실한 실명제가 또 어딨나?
게다가 동명이인 어쩌구 하는 대목에서는 그저 이 분의 가출한 개념이 하루 속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다. 동명이인이 많아서 주민등록증에 한자이름을 병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어떤 노땅 정치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주민증에 한자이름 병기하지 않아서 동명이인의 난무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졌다는 뉴스 보신 적 있는가? 지가 무슨 기나라 사람도 아니고, 왜 대명천지에 하늘 무너질까를 두려워하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환기하자면, 결국 "그게 누구냐?"를 알아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는 뭔가 문제가 생긴 때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의 IT기술은 이미 발생한 문제에 대해선 얼마든지 처리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더불어 한국 경찰(검찰도 마찬가지)들의 사이버 수사능력은 자타공인 세계 최첨단이다. 그거 확인할 수 있는 기사가 여기 있다.
맘만 먹으면 지금도 얼마든지 단속할 수 있고, '검거' 씩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정도면 오히려 공권력이 가진 그 기술수준에 겁을 먹을 정도다. 그런데도 맥락없이 계속해서 인터넷 실명제 혹은 사이버모욕죄를 거론하는 것은 그 저의가 다른 곳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지들에겐 "작은 정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겐 "두려운 정부"를 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자들의 탐욕스러운 의도를 사이버공간에 완전하게 이식시키려는 것이다.
오바마가 인터넷 게임을 좋아한다더라.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어서라나? 그런데 오바마는 사이버모욕죄 도입할 생각이 없단다. 이명박이 오바마하고 닮은 꼴이라고 자찬하고 싶으면 뭔가 이런 부분에서부터 닮아있음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닮긴 개뿔을... ㅋㅋ
오홍..근래에 인터넷실명제에 대한 글이 많네요. 행인님이 단단히 뿔따구가 나셨나 보군요..^^
아.. 그런데 사이버모욕죄와 인터넷실명제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내세우는 목표는 같지만 방식이 다르니까요 (인터넷실명제는 간접적인 제약, 사이버모욕죄는 처벌에 의한 직접적인 제약). 또한 악용의 여지를 살펴봐도 다른 것이, 인터넷실명제는 (도둑놈들에 의한) 개인정보유출, 사이버모욕죄는 경찰측에 의한 과잉단속. 현재상태에선 인터넷실명제 한다고 해서 악플단 것만으로 처벌받는 건 아니죠. 사이버모욕죄가 만들어지면 실명제 안했다고 해서 악플러들을 수사못하는 것도 아니고..
평발/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잊을만 하면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일이 생기네요. ㅎㅎ 솔직히 많이 화가 나는데요,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네요. ㅠㅠ
monomask/ 그렇죠. 구성형태와 효과 등이 분명하게 구분이 되구요. 게다가 사이버모욕죄의 전단계로 인터넷 전면 & 완전실명제를 들고 나오곤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버모욕죄까지 일사천리로 뚫을 수 있을지는 쟤네들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죠. 해서 monomask님의 지적처럼 두 사안은 엄격하게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글은 어차피 두 사안을 싸잡아 이야기한 거라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