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386이 586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진보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을까? "민주화"로 상징되던 어떤 세대가 기왕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이상의 가장 저급한 수준에 자족하면서 살고 있는 이 시기에, 20년을 격해 자기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상은 또 언제 어느만큼이나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 줄 수 있을까?

 

말걸기 덕분에 보게 된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는 그 제목과는 달리 결론적으로 "20대여, 니들이 구해라, 대한민국" 뭐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다. 극중에 드러나는 각종 사건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인은, 그러나 개별 사건들에 대한 나레이션 속에서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왜 다 아는, 어찌보면 식상하기까지 한 소재들 안에서 왜 이토록 낯선 이물감이 느껴지는 걸까? 그건 극의 주제에 동의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각 장에서 드러난 상황들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캠퍼스, 물론 행인이 70년대의 캠퍼스를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노동현장의 현실들, 청소년들의 고민들, 어른들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이중성, 뭐 이런 것들을 그나마 지금 20대보다는 더 실감나게 겪으면서 그 시간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뻔하디 뻔하면서도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는 결말부분을 볼 때까지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은 어쩌면 이미 기성세대화되어 20대의 아픔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현실 때문일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중 내내 개인으로 고립되어 홀로 자신의 고통에 분노하던 화자들이 결론에 가서 급작스레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정도의 수준으로 모이게 되는 흐름에 충실히 감정을 실어 따라가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행인이 주변에서 보게 되는 20대의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니라 분노의 거세이다. 아니,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꼭 그렇진 않다. 그들은 과거 우리 삼촌뻘 세대, 혹은 우리 세대, 조금 더 쓰자면 한 10년 터울의 동생뻘 세대와 비교하더라도 각각의 개인적 분노가 더하면 더 하지 덜하진 않다. 하지만 못내 아쉽고 안타깝게 느끼는 부분은 그 분노가 공유되지 못하고, 분노를 매개로 연대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주변에 보이는 20대의 한계는 바로 그들 세대가 분노의 자각을 넘어서 분노를 세력화하는 데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뻥구라닷컴에서도 몇 차례 세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행인은 그때도 그렇지만, 세대구분을 통해 전선을 형성하고 싸움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선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연극의 참고가 된 88원 세대가 가지고 있는 함정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러한 세대구분은 결국 지배제력의 담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아닌 말로, 한 10년 후에 이 연극의 제목이 계속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로 남을지, 아니면 "누가 대한민국 30대를 구원할 것인가?"로 업글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은가?

 

어찌되었건 간에 중요한 것은 20대로 상징되는 현실상의 피착취계급(혹은 계층?)은 단순히 20대라는 세대구분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령 알바원들이 속속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혹은 아직도 전태일 시절의 평화시장 봉제공장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영세 소규모 사업장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이 상황에서, 오직 20대만이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 녹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 연극은 20대하고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행인에게 이처럼 다른 각도에서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다시 20대로 포인트를 돌려보면, 적어도 "20대여, 니들이 구해라, 대한민국"이라는 귀결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이미 잃을 것이 조금이라도 생겨버린 기성세대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거, 혹은 대한민국을 구원한다는 거, 이건 그닥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언젠가 한 번 언급한 적도 있지만, 역사는 장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돌려말해 장년의 비애일 수도 있겠으나, 장년들은 슬퍼말 일이다. 청년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은 때론 용기가 필요하다. 장년은 청년들에게 언제나 짱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금, 변혁의 주체는 분노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걸어야 할 대상을 찾아내고 그들과 함께 분노를 공유하고 분노로 연대해야 한다. 다만 그 연대가 단지 연배가 비슷한 집단 안으로 수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연극 말미에 "우리가 한 달에 만원만 내면 20대를 위한 시민단체를 만들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단체는 영원히 재생산되는 20대만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몇 년 후에는 30대, 또 몇 십년 후에는 60대를 위한 시민단체가 될 것인가?

 

탄탄한 구성과 훌륭한 연기 덕분에 간만에 몰입할 수 있었던 연극이니만큼 속이 쓰리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는지 모르겠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연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20대라는 세대구분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연극을 좀 봤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연장 바깥의 음습함이 꼭 연극을 보고난 후의 심정 같아 갑갑해지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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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16:45 2009/07/1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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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받아랏, 짱돌!!! 쿄쿄쿄...

  2. 볼 만하였나 보네... 사실 이 연극의 연출자가 이런 주제로 극본도 쓰고 연출도 한다는 게 좀 어색하긴 해. 왠지 말걸기가 가서 보면 '녀석, 그럼 그렇지~'라고 할까봐 보기 싫은 것도 있지.

    행인, 유어 웰 컴~!

    • 연출과 구성도 탄탄했고, 연기자들이 자기 이야기로 소화해내는 능력도 매우 탁월한 연극이었어. 사실 주제 자체가 조금 무거워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물건 하나 건졌다고나 할까... 다시 한 번 쌩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