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를 읽다
'판관 포청천'이라는 TV 시리즈물이 있었다. 공명정대함의 대명사였던 송나라의 유명한 판관 포청천은 수호지에도 잠깐 잠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TV 드라마는 포청천의 영웅적 일대기를 다룬... 건 아니고 포청천을 주인공으로 하는 법정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
죄인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한 포청천이 표를 던지며 외친다.
"개작두를 대령하라~!"
그러자 죄인이 수치심과 분노에 떨며 자신의 신분, 계급적 지위를 거론하며 부탁한다.
"용작두로 해주시면 안 될까용...ㅜㅜ"
죽음에 있어서도 계급성이 인정되었던 봉건시대의 한 에피소드로 치부하기엔 허허롭게 웃으며 넘어가기가 껄끄럽다. 어차피 이 시대에서 역시 계급에 따라 죽음에도 등급이 있으니까.
단두대, 혹은 기요탱(Guillotione)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원래 유럽 각국에서 사용되었던 사형집행도구인데, 혁명기 프랑스에서 이 기요탱은 개작두와 용작두로 상징되는 죽음의 계급적 차별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되었다. 거기에 더해 참수된 자에게 고통을 최소한으로 주고자 하는 '인도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끼나 칼로 목을 쳐야했던 사형집행인에게 주는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도 있었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원래 기요탱은 칼날이 수평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끔 사진 같은 걸로 보는 기요탱의 칼날은 비스듬히 사선으로 되어 있다. 칼날을 수평에서 사선으로 '개선'하는 것은 참수를 보다 쉽고 깔끔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칼날의 효율개선에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루이 16세였다는 거.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이 전설이 사실이라고 친다면,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은 꽤나 참혹하게 그 본체를 드러낸다. 단두대의 칼날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한 루이 16세가 바로 그 단두대의 칼날 아래에서 목의 위 아래를 분리당해야 했으니... 참고로 단두대는 1977년까지 사용되었다. 1977년...
1794년, 자코뱅은 혁명재판소에서 증인 신문과 변호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프레리알 22일의 법'을 시행한다. 반혁명분자들과 그들의 음모를 최대한 신속하게 제거하기 위한 것을 명분으로 한 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심인물은 당연히 로베스피에르였다. 물론 그 후 로베스피에르는 프레리알 법의 무자비한 시행에 강력히 반대하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로베스피에르는 이 법을 제안한 쿠통의 동지였을 뿐만 아니라 법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법이 제정된 지 불 과 두 달이 되지 않아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하고 별다른 재판과정도 없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로베스피에르가 프레리알 법에 따라 처형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혁명의 적에 대한 즉각적이고 공포스러운 대응을 주장했던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그토록 즉각적이고 공포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것은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혁명의 혼란기에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프랑스혁명이라는 사건 자체가 특별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격동의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라는 사람이 보여준 행적은, 위기와 공포, 법의 역할 등에 천착하고 있는 요즘의 행인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문제들을 던져준다. 평판이 매우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기에, 주도면밀하게 그를 분석해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서투르게 어떻다는 판단을 하긴 힘들지만, 최소한 프랑스혁명이라는 일대 서사시가 오로지 부르주아만의 유혈 카니발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데 로베스피에르가 끼친 영향이라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요 사흘 동안 읽은 두 권의 책,
"로베스피에르 : 덕치와 공포정치", 로베스피에르, 배기현 역, 프레시안 북, 2009.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셍, 양희영 역, 교양인, 2007.
"~, 혁명의 탄생"은 본문만 640페이지에 가깝다. 그런데 마치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술술 읽혀졌다. 장 마셍의 역작을 무협지에 비유하는 것이 어쩌면 외람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일대기, 정확히는 1789년에서 1794년까지 불과 5년의 기록은 무협지는 물론이려니와 그 어떤 소설보다도 긴박하며 경이롭다.
물론 이렇게 많은 분량을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굵직한 폰트에 넓은 줄간격, 그리고 풍성한 여백으로 편집된 고급스러운 양장본 제판의 힘이 컸다. 당연히 이러한 배려는 29000원이라는 책값을 가능케 해주는 장치일 것이고. 상퀼로트를 위해 청춘을 불사른 역사속의 인물을 현대의 상퀼로트들이 만나기엔 조금은 버거운 가격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래 저래 봐야할 책들이 많은데, 분량 상 압박이 가장 심했던 책 한권을 읽은 소감으로는 매우 흡족한 편이다. 그 흡족함과 동시에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당장 어깨를 눌러 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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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서문이 인상깊긴 하더군요. 폭력에 대한 개념정의를 시도하면서 벤야민을 인용한 것은 데리다의 그것과는 또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출판사가 "문제적 인가"이라는 기획으로 다룬 것에 충분히 수긍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로베스피에르는 관심이 폭증하는 인물입니다.
요즘 책값은... ㅠㅠ OTL
야호...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아아 역사 속의 이런 야심차고 비극적으로 스러져간 인물들 너무너무 좋아요ㅜㅜ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세용. ㅎㅎ
저는 뭐 좋아할 계제까지는 아닌데, 암튼 들여다보는 내내 그동안 프랑스혁명과 관련해 가지고 있었던 여러가지 문제의식들이 많이 정리가 되더군요.
원래 혁명기는 대체로 무협지 필 남.
책값은 올리고, 도서관은 늘려야 된다는 게 평소 생각.
소비에트 혁명사를 읽을 때는 이렇게 무협지 삘을 느끼진 못했던 듯... 글 쓴 이의 내공 덕분이려나...
도서관은 늘리고 소장도서도 대폭 확충하고 도서관에서 사는 도서는 일반 가격의 두 배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동의. 하지만, 고급형 고가 양장본과 함께 저렴한 문고판도 함께 나오는 것이 필요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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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열심히 뛰고 계셨군요. ㅎㅎ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 사실 그동안 알고 있었던(봐왔던) 일면, 즉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과는 상반된 견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던 점에서 좋았구요. "~, 덕치와 공포정치"는 그의 연설문보다는 지젝의 서문때문에 요즘 여러 생각을 하고 있네요. ㅎㅎ
나름 널리널리 홍보토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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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지금 파고 있는 것이 바로 폭력과 법입니다. 더 정확히는 위기, 공포, 그리고 법치에 대한 것이죠.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책을 읽은 이유도 그것 때문인데요, 속을 들켜버린 것 같아 화들짝 했답니다. ㅡ.ㅡ+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덕치와 공포정치)을 읽다보면 혁명기 위기상황의 돌파를 모색하는 가운데 여전히 법은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더군요. 재밌는 것은 이런 현상이 프랑스혁명은 물론이려니와 소비에트혁명기와 중국공산당 집권과정(문혁때도 마찬가지로)에서도 동일하게 보인다는 거죠. 즉 폭력의 대체물, 혹은 폭력 그 자체로 법이 동원됩니다. 여기서 제 관심은 주체의 문제로 비화하죠. 절차적 또는 형식적 법치에 대한 틀은 좌우가 거의 동일합니다. 묘한 합의형태를 갖추죠. 그렇다면 결국 현존하는 법질서를 전제하고 논의되는 법치는 실제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문제는 거듭 주체로 전환되고 결론은 그 법이 누구의 법이냐로 귀착된다는 거죠. 당연히 권력의 주체, 사회구조, 생산양식 등 이 모든 것이 발현된 형태의 새로운 법질서를 새롭게 전제하지 않는 한, 기존 법체계를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법치논란은 상호간의 경계를 흐려놓고 서로 상대방의 알리바이만 완성시켜준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좌우 공히 마찬가지죠. 따라서 법치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지금까지 정리되지 않은 선에서 제 화두의 귀결은 이러한 방향으로 일단 선을 잡았지만, 아직 확연하게 뭔가가 뒤통수를 빵 때리고 지나가는 것이 없네요. 그러다보니 본 글을 쓰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적절히 언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으로 정리가 되는 대로 글도 올리고, 더불어 고견도 묻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