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범죄, 국가폭력, 그리고 청산과 화해

지난 10월 29일, 서울 고법에서는 중요한 판결 하나가 있었다. 간첩으로 조작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구명서씨가 24년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

 

재판부는 권위주의 시대 국가의 과오와, 그리고 이를 바로잡지 못했던 사법부의 과거에 대해 머리숙여 사죄한다고 밝혔다. 그 개인이 당한 고통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만은, 그리고 사법부의 이 24년만의 사과가 그 통한의 세월을 보상해줄 수 있겠는가만은, 사법부의 머리 숙인 사과는 만시지탄이나마 어떤 실마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같은 날 대법원은 죽산 조봉암사건의 재심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재심청구 2년여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대법원의 재심결정이 2년 이상을 질질 끈 원인은 다름아닌 검찰 때문이었다. 대검은 재심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서를 누차 대법원에 전달했다. 한국 검찰은 아직까지 과거청산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것이 이미 지난 세기의 일이다. 세기가 바뀌어 벌써 10년이 지났다. 물론 장강과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선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새로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그 20여년의 시간은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두보를 놓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폭력, 말 뜻 그대로의 폭력과, 그럼으로써 조직적으로 자행된 국가의 범죄행위는 하루 아침에 청산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죄판결과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한다고 한들, 멀쩡히 잘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하루 아침에 국가의 폭력에 의해 죄 아닌 죄를 뒤집어쓰고 죽느니만 못한 삶을 이어갔던 그 세월이 다시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다.

 

국가폭력과 국가범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기권력의 정당성을 도모하던 권력자들의 몰지각한 권력욕에 있다. 이들은 수시로 자기정권의 안녕을 국가의 안위로 포장하고, 그것을 공리로 천명하며 구성원들을 억압했다.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과거의 청산이라는 측면에서 국가범죄는 당위만을 가지고 따기지 어려운 부분들이 존재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어떤 법리는 법리 자체의 오용이기도 했지만, 성공한 쿠데타 세력이 여전히 자기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날것 그대로 적시하는 것이었다. 만수무강의 기원을 받으면서 29만원 현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삼고, 때때로 잊을만하면 300만원 정도를 던져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전직 독재자가 정정한 근력을 과시하고 있는 이 때에, 과거청산은 법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편재된 어떤 세력들 간의 싸움으로 곧잘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국가폭력과 국가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전두환이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것과 노무현이나 이명박이 컨테이너를 산성처럼 쌓아올렸던 맥락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 즉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국가의 범죄는 그 자체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인민들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한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는 최소한 과거의 불행했던 오점들에 대해 많은 폭로와 비판, 그리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나 하나 쌓여나가는 사회적인 성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 그럼으로써 신민이 아닌 시민으로서 국가를 견제하고 통제함으로써 다시는 국가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오판을 하지 않도록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국가범죄
국가범죄
이재승
앨피, 2010

 이재승 교수가 집필한 "국가범죄"는 그런 의미에서 국가범죄와 과거청산에 관한 일종의 시론이자 방향설정이다. 이 책에서는 매우 다양한 국가범죄의 사례와 청산의 사례가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과거의 청산과 관련하여 한국의 사례와 독일의 사례를 다양하게 분석하고 있다.

 

 법학교수라는 저자의 위치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입문서라고 할 수 없는 상당히 깊이 있는 법리적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글 자체가 논문형식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어렵게 느끼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풍부한 각주와 편집과정에서 삽입된 다양한 관련자료들만 읽어도 될만큼 풍성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런 편집때문에 논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산만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라드부르흐 공식에 관한 부분, 그리고 라드부르흐의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이 꼼꼼하게 번역되어 있는 것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저자가 라드부르흐 전공자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법학을 하는 입장에서 라드부르흐는 가깝고도 먼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용이 알찬만큼 분량도 상당히 많다. 물경 740쪽이 넘는다... 가격 역시 꽤 쎈데 물경 35,000원. 출판사에서 나름 의욕적으로 편집한 것임을 이해하더라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한다는 것이 또 바램이다. 저자와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출간 전에 각 논문들을 읽으면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면'은 '망각'에서 나오고, 망각은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됐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국가범죄의 재발을 막는 궁극적인 해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적 비참을 지상에서 제거할 것이다. 그것은 균질한 삶을 보장하는 경제와 분산적이고 공동체적으로 공유되는 권력에 기초한 정치사회일 것이다. 각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의 비참을 재수나 운명으로 방치하지 않고 공동체의 힘으로 제거함으로써 개인의 자주적 삶을 북돋는 공동체를 건설할 때 비로소 국가폭력은 소멸할 것이다." - 619쪽

 

결론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문장을 보면서, 이 문장의 기본적 골격이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결국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제도가 아닌 것이다. 저자의 의견과는 별개로 이 대목을 읽고서 더욱 굳히게 된 어떤 신조는, 바로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저런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질 때만 법과 제도에 각인된 문장들이 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
조현연
책세상, 2000

 

 참고로 한국 현대사에 있었던 기록적인 국가폭력에 관한 짧은 브리핑으로 조현연 교수가 쓴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을 보는 것도 '국가범죄'를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국가범죄'에 비해 분량도 짧은 데다가(불과! 170여 쪽. 게다가 문고판) 값도 저렴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만만하지는 않다. 더불어 '국가범죄'를 보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지식을 쌓는 데도 꽤 쓸만하다.

 

 그나저나 이러다가 내 논문은 언제 쓴다는 말이냐... 쩝...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1/02 23:20 2010/11/02 23:2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1337
  1. 이 책... 드디어 나왔군요. 페북에 담아가요. 선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