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냄새가 좋은 날
방구석에 있어봤자 뭐 나올 것도 뾰족히 없으니 가끔 앞산에 오르기도 한다. 우리집 앞산이 무려 북한산이다. ㅎ 등산도 하고 둘레길도 돌고 그렇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하는 날도 보내고...는 개뿔,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허구한 날 이러면 별로 감흥도 없고... 에휴... 하지만 앞산, 즉 북한산은 이 참 명산이다보니 매일 가도 다 못들여다보는 판이라 그나마 의욕이 생기긴 한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운운하기엔 내 생활의 급이 하도 떨어지므로, 뭐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지만, 설날이 되고 해서 시골에 갔더니 따로 자연의 삶을 떠들 일이 아니더라. 여긴 걍 사는 거 자체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게 도시것들이 생각하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투쟁이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노인네의 90도로 꺾인 저 허리는 그 오랜 세월 신산한 삶의 흔적이리라. 그것도 '자연과 함께 한' 삶 바로 그거. 새벽에 눈 뜨면 밭일 나가, 논일 나가, 봄이면 씨뿌리고 가을이면 걷고 여름에 가꾸고 겨울엔 만들고. 도시빈민과 공장노동자로 평생 살아오신 내 부모님과는 다르게, 짝꿍의 어르신들은 평생을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혼자 되신 어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밭일을 하며 사신다. 일을 줄이라고 성화를 해도 쉽지가 않은 것이, 내나 하던 일이라 그런지 그걸 어찌 줄이는지를 잊으신 듯.
텃밭에 있는 감나무며 자두나무며 배나무며 사철나무 등속을 전지하고, 잘려진 그루터기와 가지들을 묶어 장작더미를 만들었다. 이게 일이 많은 건 아닌데, 도시에서 의자 등받이와 바닥 장판에 등을 기대고만 살았던 것이 간만에 일이랍시고 하다보니 수월치가 않다. 그거 끝내고 나설랑은 밭에 아직 뿌리를 박고 있는 참깨며 들깨의 밑둥을 뽑아내고 흙을 털었다. 밭이랑에 줄지어 서있는 것이 그냥 서서 볼 때는 얼마 없는 듯 하더니 허리 숙여 일삼아 하려니 뭐가 이리 많단 말이냐... ㅠㅠ
뒷산 가득 매화도 피었다. 바람 한 번 살랑 하니 향기가 코 끝에 엉겨 붙는다. 쌀쌀한 겨울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가 어찌 이리 자극적인지. 머리속이 맑아진다. 깻단 뿌리의 흙을 털 땐 구수한 냄새가 난다. 노는 셈 치고 오르는 산에서 맡던 냄새와는 또 격이 다르다. 한참을 잊었던 노스탤지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생각까지 들게 만들면서.
다 좋은데, 촌에서는 집집마다 비닐을 그냥 태워버린다. 이게 아주 고역인데, 시골의 맑은 공기를 가슴 깊이 담아 가고 싶어 심호흡을 크게 할 때 하필 이 고함량 다이옥신 개스를 흡입하게 되면 맑은 공기 개뿔이고 아주 걍 시골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버린다. 내가 이 독가스를 마시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자괴감도 들고... 아이고, 엄니, 그건 좀 분리수거해서 버리세용, 폐기물 처리비용 드릴테니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