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값
언젠가 이 비스무리한 주제로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는 거 같은데, 귀찮아서 검색은 나중에.
설 연휴가 지나고 나온 뉴스 중에 안타까운 죽음의 사연이 있었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설 연휴 기간 중 근무를 하다가 사망한 한 의사의 이야기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이 응급의료체계에 끼친 공적이 크다 한다. 잘 모르는 분야이고 잘 모르는 분이기에 얼마나 큰 공헌이 있는지를 감히 셈하긴 어렵겠다. 아무튼 그 공적이 인정되니 그이의 영면은 즉각적으로 '순직'으로 규정되고 대통령부터 나서서 국가적 차원의 추모분위기가 형성된다. 아마도 이후 그 공적에 따른 보훈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다 문득,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고, 그 세월호에 타고 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음을 새삼 돌이켰고, 그 중에 학생들을 살리려다가 함께 죽은 어느 선생님이 생각났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기억하게 만든 건 '기간제교사'라는 딱지 때문이었다. 그 '기간제'라는 희안한 말이 앞에 붙어 있어서, 그이는 학생들을 위해 몸을 던졌음에도 '순직'이라는 규정조차 받지 못했다.
의사는 죽자마자 순직이고 교사는 죽자마자 기간제인지부터 따지냐는 서글픈 넋두리를 보았다. 가슴이 턱 막혀버렸다. 의사는 고귀하고 교사는 좀 떨어지는 지위라서? 아니, 오히려 의사는 기간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단기고용의사, 알바의사도 있더라만은, 그들이 단기간 근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기간제라고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알바의사나 단기고용의사로 있다가 죽어도 아마 '순직'처리가 되겠지. 왜 그럴까?
일하다 죽는 건 마찬가진데, 죽음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다른 건 무엇때문일까? 저승을 믿지 않는 나의 입장에서는, 이건 죽은 사람 당사자의 체면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산 자들의 자기 정체성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살아있으면서 어떤 책임으로 인하여 '기간제교사'의 죽음을 순직처리해야 하는 일을 담당한 사람의 입장이 중요하지 죽은 '기간제교사'의 입장은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마찬가지로 '의사'의 죽음을 순직처리함으로써 어떤 형태의 자기만족이 있는 자들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이런 일을 하지만, 죽은 의사는 자신의 죽음이 순직인지 뭔지 알 도리도 없고 알 방법도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결국, '기간제 교사'의 죽음을 '순직'처리한 후 벌어질 산 자들의 입장,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고, 이번 의사의 죽음에서는 그런 입장이 개입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장례가 있었다. 차마 장례식장에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새파랗게 젊은 청춘이 피어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 가슴에 아리고, 생떼같은 자식을 돌연히 보낸 그이의 어머니 아버지의 처연함을 들여다보기 두려웠다. 나는 이렇게 또 비겁한 하루를 잘 살아 보낸다.
어쩌면 평등세상이라는 건 죽음의 값어치가 평등하게 인정되는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오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평등하지 않고, 죽은 후의 처리 역시 평등하지 않다. 물론 나는 내 죽음의 값을 따지지는 않는다. 어차피 죽음에 관한 모든 처리는 산 자들의 몫이지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내가 감당할 몫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죽음을 처리하는 것이 힘들지 내 죽음이야 뭐 까이꺼 죽으면 그만인데.
죽어간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