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북미 연락사무소 무산 사건 - 이것은 음모론인가 팩트인가?

전 통일부장관인 정세현이 김어준이 진행하는 라디오프로그램에 나와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논의하던 중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정세현 : 95년에 그 합의(북미연락사무소설치에 대한 합의를 말함)에 따라서 서로 부지 물색까지 하고 다녔었어요. 북한이 워싱턴에 들어가서 어디에다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 좋겠는가. 왜냐하면 그 연락사무소는 장차 대사관이 들어갈 자리도 되기 때문에. 미국도 평양에 들어가서 연락사무소를 어디에다 두는 게 좋겠는가 서로 현지 조사까지 하고 있는 와중에 그해 95년 한 10월인가? 갑자기 미군 헬기가 북한 상공에서 추락이 됩니다. 격추가 돼요. 그러니까 그건 어떤 점에서는 미국이 헬기를 북쪽 상공으로 보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 아니에요? 우리 쪽에 떠 있는데, 비무장지대 남쪽에 떠 있는데 북쪽이 미리 예방 차원에서 쏘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그쪽에서 떨어졌으니까.

김어준 : 왜 그쪽으로 북한….

정세현 : 정찰용으로 간 거지. 그런데 헬기라는 건 진짜 저공으로밖에 못 가는 거 아니에요? 

김어준 : 그리고 눈에 띄는데 그걸 어떻게 북한으로 띄웠죠? 

정세현 : 그러니까 일을 그르치려고 하는 세력이 그 당시에 미국 내에 있었다는 이야기죠, 군부 쪽에.

김어준 : 그렇겠죠.

정세현 : 연락사무소? 무슨 그런 짓까지 하는가. 이거 좀 막을 방법 없나. 그러니까 사고를 칩시다. 그러나 이제 북한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벌이면 끝나는 거 아니겠느냐. 

김어준 : 아무 통보 없이 헬기가 북쪽으로 넘어간 겁니까?

정세현 : 그렇죠.

김어준 : 그러면서 그걸 또 격추시키고. 

정세현 : 격추시킬 수밖에 없죠, 북쪽은. 자기네 지역으로 오고, 군용 헬기가 들어오니까. 무슨 목적으로 들어오는지, 그게 정찰만 하고 갈지, 무슨 폭탄을 떨어뜨리고 갈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 격추를 해야지. 그래서 연락사무소 설치는 95년 연말 경에 사실 끝나고. 

김어준 : 그 사건 하나 때문에 결국 악화돼서. 

정세현 : 그렇죠.

김어준 : 그때도 그럼 그런 이야기가 많이 있었겠네요? 이건 누가 일부러 한 것 같다.

정세현 : 그건 뻔하지.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세계 최강국이고 국제정보질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그걸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만 하지 우리가 비행기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안 하지. 

김어준 : 그게 북한 상공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정세현 : 그렇죠.

 

출처: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문재인 대통령, 남북경협 떠맡을 각오? …“남북미간 교감 있었을 것”

그런데 이런 발언에 대해 정 전 장관이 책임질 수 있나? 

우선 사실관계부터 정 전 장관은 잘못 기억하고 있다. 해당 사건은 1994년 12월 17일에 있었다. 당시 사고헬기는 휴전선에서 헬기조종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는 부사수를 사수가 교육시키기 위해 헬기 운항을 하던 중 악천후 속에서 조종오류로 분계선을 넘어갔고, 이를 북한이 격추시킨 사건이었다.

관련기사: 서울신문 - 미군헬기 DMZ 북방 불시착

북한으로서는 미군 헬기가 갑자기 날아들어오자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쏴서 격추시켰고, 그 과정에서 사수는 사망했고 부사수는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이후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링크를 한 기사에서는 불시착으로 제목이 뽑혔지만, 이때 이미 북한에서는 격추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부사수가 송환된 후 미국에서는 사건 관련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방향을 잃고 조종을 잘못하여 북한으로 헬기가 넘어갔으며, 격추당하기 직전까지 이 두 미군은 자신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참 북쪽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한편, 당시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미간 관계개선을 위한 실무협상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군부가 대미협상과정에서 군을 창구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했고 이후 이러한 정황이 결국 북미연락사무소 개설을 좌초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건의 전말이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 25년전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협상 내막 ... "북한군 반대로 좌초"

정 전 장관이 나이도 있고 하니 날짜의 오류야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 사건이 미국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정 전 장관이 발언한 것이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헬기를 북쪽 상공으로 보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의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을 그르치려고 하는 세력이 그 당시에 미국 내에 있었다"고 하면서 "미국이 헬기를 북쪽으로 보냈기 때문에"라고 하면, 이건 북미관계개선을 원하지 않는 미국 내의 일부 세력이, 그것도 군부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잘 되어가고 있는 북미연락사무소개설을 방해하고자 군을 움직여 북한을 자극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 전 장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국은 이 사건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헬기가 추락했다는 사실도 은폐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비록 그 말은 정 전 장관이 한 것이 아니라 김어준이 이야기하는 형식이었지만("그게 북한 상공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이를 긍정하였으니("그렇죠") 정 전 장관은 미국이 헬기추락사건 자체를 은폐했다고 하는 거다.

하지만, 미국은 이 사건을 조사했고 앞서 확인했듯이 사건의 경과를 밝혔다. 그런데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 이렇게 단정적으로 미국(내의 특정 세력)이 고의로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을 방해했다고 하는 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된다. 물론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분이니 아무래도 나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맥락상 정 전 장관은 이미 25년 전에도 연락사무소 개설 이야기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다가 나온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말이, 그것도 전직 통일부 장관이 하는 이런 말이 과연 이번 북미관계개선에 도움이 될 것인가? 북미와 남북이 잘 되길 바라는 충정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나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래선 안 된다.

난 이 상황이 워낙 음모론적으로 사건들을 풀어가는 김어준의 프로그램에 나왔다가 김어준에게 말려서 오버페이스 했다고 보진 않는다. 이야기 앞뒤를 봐도 그런 정황은 나오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더욱 심각한데, 이 냥반이 어디가서 뭔 소리를 더 하고 다닐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가 많이 돌지는 않은 듯 하다.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를 대상으로 저지른 짓을 보면 뭐 일부러 헬기를 북쪽으로 들이밀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적어도 확인된 사실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렇게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다. 이게 진짜 내막이 있고, 이제는 25년이나 지났으니 이야기할 수도 있다면 실질적인 사실관계를 좀 내보이면서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런 식으로 막 지르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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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 18:15 2019/02/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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