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씨잘데기 없는 일로 한나절을 보내다가 문득...
하... 이거 뭐 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꼭 쓰잘데기가 있는 일도 아닌 일로 오전 한나절을 그냥 다 보냈더니 기분도 꿀꿀하고 날도 꿀꿀하고... 어디 가서 혼자 삼겹살이라도 구워야 하나... 꿀꿀 거리면서.
암튼 기분도 울적해서 뭔가 가벼운 글이라도 한 편 읽어볼라고 집에 있는 소설책들을 뒤비적 거렸는데, 아뿔사, 이게 왠 일이란 말이냐, 소설책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나름 한 때 문학소년이었던 내가 소설이 이렇게 읽히지 않는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란 말인가.
하긴 뭐 요새 나타난 증상이 소설은 물론이려니와 어떤 책이든 예전처럼 눈에 들고 머리에 들고 마음에 들고 하는 일이 거의 없긴 하다. 읽는 속도는 전성기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나오는 듯 하고, 집중도 잘 안되고 이해도 잘 안 된다. 기억도 잘 안나고, 그러니 어디다가 써먹지도 못하겠고. 이거 참 미칠 노릇인데, 이젠 책 보는 걸 접어야 하는가.
상실감이 너무 커서 고르던 책들을 다 다시 집어넣었다. 끼니를 어찌 때우고 나니 그나마 제정신이 돌아오는데 흠... 아, 삼국지나 다시 읽어야겠다고 보니 삼국지는 안산 집에 있구나...
삼국지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이지만, 나관중이 연의를 지을 때 촉한을 정통론으로 삼고 유비를 띄워준 건 소설을 쓰는 작가의 주관이 작동한 것이겠지만, 이게 어쩌면 보통 사람들의 심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위오촉 삼국을 들여다보고 비교검토를 해보면 유비의 촉이 가진 자원이라든가 뭐 그런게 쥐뿔이나 위나 오와 비교할 때 그닥 나은 바가 없었고, 이게 통상의 경우 없는 놈 떡 하나 더 준다거나 뭐 그런 거 아니었을라는가?
예를 들면, 딱히 뭐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는 없는 상태에서 어떤 두 팀 또는 두 선수가 경기를 가지는 것을 봤을 때, 은근히 약한 쪽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 같은 거 말이다. 레알마드리드랑 레알소시에다드랑 레알더비가 레알로 펼쳐질 때, 레알마드리드 골수팬이 아닌 한국의 어떤 듣보의 입장에서는 저런 돈으로 처발른 팀 말고 그랑 대적하는 팀이 이겨라 하는 것하고 비슷한 그거. 알고보면 소시에다드라고 해서 조기축구회 수준인 건 아닌데도 말이지.
나관중이 삼국을 가지고 구라를 풀 때, 뭐 애초부터 촉한에 대한 어떤 연민, 어쩌면 한족의 정통성에 대한 향수 같은 게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마구 구라를 풀어 제낄 때, 가장 극적인 것은 어디서 쥐뿔이나 고개 한 번 쳐들지 못할 것들이 북적북적 거리다가 조조나 손권하고 맞장을 뜨면서 영웅으로 부상하는 드라마에 대한 환타지가 있었지 않았게나. 그게 또 재미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다보니 원래 유비가 그리 어설픈 집구석에 비리비리한 주변머리를 가진 자가 아니라 나름 뭔가 배경이 있는 자였음에도, 당장 굶어 죽기 직전의 가난한 살림에 마음만 좋아가지고설랑 비루하게 살고 효심은 많은데 지지리 궁상인 집안에서 겨우 연명하던 처지에서, 난데없이 산적 두목같은 것들하고 의형제가 되더니 사람들의 마음을 쓸어담고서는 조조하고 맞다이를 뜨게 되고 한황실의 적통으로서 가오를 차리고 뭐 이렇게 되어야 이야기가 쏠쏠하니 재미지고 다음 장을 넘길 맛이 나게 되었더라 이런 거 아닐런지.
아놔, 그러고보면, 유비한테도 쨍하고 볕들날이 돌아가던데 나라고 뭐 이러고 살 쏘냐, 이러면서 희망을 가져본들 그거 다 나관중 개뻥에 당한 것이 되고 마는 거다. 천하의 ㅈㅂ 유비가 천하의 33.3333333333...%를 먹어 조진 영우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그럴만 했으니 그런 거라면, 역시나 소설은 구라일 뿐이고, 쥐뿔 암 것도 없으면서 그걸 보면서 청운의 뜻을 품는 넘은 망상계가 작동한 것일 뿐인 거옄ㅋㅋ
에고... 이게 다 내 말이다. 한나절 씨잘데기 없이 보낸 후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 같냐, 나도 조만간 볕 들 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위로하다가 문득 생각난 삼국지(연의)가 날다시 자포자기의 수렁으로 되돌려 놓았다. 에라, 다 때려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