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았던 시절
목전에 닥친 몇 가지 일들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정신이 사나우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격한 게으름이 솟구쳐 올라와 이리 저리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현장실습 나갔다가 산재 당한 학생들의 유가족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관련 사이트 : 현장실습 고등학생 사망에 따른 제주지역 공동대책위원회
마음이 먹먹하다.
그러고보면, 나도 저들 현장실습 고등학생들과 거의 다를바 없는 경로를 밟았었다. 공고 다니다가 3학년 1학기에 취업을 했다. 그랬다. 나는 취업이었다. 비록 3개월의 수습기간이 있었지만, '현장실습'이 아니라 엄연한 취업이었다. 3개월이 지나면 본인이 때려치우지 않는 한 거의 예외없이 정사원이 되었던 때다.
구로공단에 있는 필기구 회사에 3달을 다녔는데, 완전 개난장판같은 상황에서 그만 뒀다. 3개월 일했는데 한 달치밖에 임금을 받지 못했고, 그나마도 30% 떼고 주는 돈이었다. 하루 12시간, 주야 맞교대에 연장, 조출, 철야, 연근까지 했는데 임금은 과자값 정도였다.
임금도 임금이고, 노동시간도 노동시간이지만, 노동환경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인쇄가 끝난 펜대를 세척해서 탈수를 해야 하는데, 항아리만한 탈수장치가 번번히 튕겨나가 작업장 안을 지랄탄 튀듯이 튕기며 돌아다녀 죄다 들고 튀어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 작업 중 졸다가 인쇄 롤러에 손가락이 끼는 건 예사였고, 빠우치다가 손까지 갉아버리는 사태도 벌어졌다.
아무튼 이 공장을 나와 인천의 다른 공장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식품공장이었고 배치받은 부서가 분석실인지라 고된 노동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야 맞교대는 기본이었고, 유기용매와 유독약품들을 많이 다루는 곳이었음에도 안전장치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컨베이어 벨트나 컨베이어 버스킷 등 공장설비와 지게차와 벌크차 등 작업장비 운송장비로 인한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망사고도 있었고, 손이 날라가는 사고도 있었고, 주변에서는 심심찮게 재해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산재처리 없이 넘어갔다. 공장 문 앞에는 '무재해 000시간'이라는 판넬이 언제나 새로운 시간 경신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장 안에서는 누군가 다치고 있었고, 누군가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결국 빼도 박도 못할 산재사고가 나는 바람에 공장 문 앞의 무재해 판이 '무재해 0시간'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람이 크게 다친 건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무재해 기록이 깨진 건 공장이 폭파된 듯한 난리로 이어졌다. 연일 담당부서의 관계자들이 깨지고 안전교육이니 뭐니 하는 교육이 이어졌다. 어차피 그래봐야 안전시설 확충이나 안전장구 개선 등은 없었지만.
문득 벌써 30년 전 일들이 생각나는 건, 저들 현장실습 고등학생들의 연이은 사망사고에 비추어볼 때, 내가 지금껏 살아서 이렇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건 정말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운에 대하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저 가슴아픈 사연들이 너무 아려서, 내 운이 좋았음에 안도하는 게 너무 미안하다.
어쨌든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는 걸, 그리고 그 운을 이렇게 게으르게 흘려보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아 남은 게 죄가 되지 않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