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계산기와 머리속 계산기의 차이
하승수 변호사는 역시 부지런하다. 그리고 일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타고난 실천가다. 그럼에도 하승수 변호사가 하는 일들이 그닥 성과가 없는 건 그가 일을 잘못하거나 내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워낙 그가 잡은 주제들이 어려운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자면, 그래서 하승수 변호사 같은 사람은 너무나 소중하고, 더불어 너무나 안타깝다.
암튼 뭐 사설은 여기서 그치기로 하고, 하승수 변호사가 정성껏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칼럼 한 편을 올렸다.
하승수 변호사의 계산에 따르면, 선거법 개정은 현재 민주당 의석인 128석에 21석만 더 보태면 가능하다. 이러한 계산은 당연히 그 21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래서 하승수 변호사는 정의당 6석, 민중당 1석, 민평당 14석만 합해도 가능하다고 계산한다. 계산상으로는 승산이 있으므로,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결국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주체가 필요한데, 하 변호사는 이 주체로 민주당을 호명한다. 그러면서 민주당의 결단을 요구한다.
"공은 민주당에게 넘어갔다. ... 민주당 지도부는 역사적 책임감을 갖고 반드시 개혁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를 갖춰야 할 것이다."
당연하다. 민주당이 결단해야 한다. 나도 이 블로그나 페북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수도 없이 열쇠를 쥔 자는 민주당임을 거듭거듭 이야기한 바가 있다. 이건 하 변호사와 나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에 대해 꼬딱지만큼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상식이지만, 문제는 이 민주당이 그런 결단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변호사의 칼럼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거지만, 일단 당 내 지역구 의원들의 반발이 거세다. 현재 의석을 유지하는 전제에서 비례의석 확대는 결국 지역구 의석의 축소로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지역 유지로서 지역에서 군주노릇을 하고 있는 지역구 의원으로서는 자기 지역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인구가 적은 농어촌을 지역구로 둔 경우엔 이러한 위기감이 더 심해진다. 그러다보니 이 위기에 직면한 현직 의원들은 그럴싸한 명분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지역대표성의 약화' 문제다. 사실 이 문제는 오늘날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이런 명분이 동원되면서 지역구 의원들이 난색을 표하자 민주당 지도부도 곤혹스러워한다. 물론 그 곤혹스러움은 연기일 뿐이지 내심은 그렇지도 않다. 아무튼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 변호사는 의석수 증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정치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의원증원 대신 기득권 해소 등의 부가적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하 변호사가 두들긴 계산기와 저들이 두드리는 계산기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의석을 늘리든 그대로 두든 간에 민주당으로서는 현 시점에서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통한 비례확대의 결과와 지금 제도에 따른 선거를 통해 얻는 결과가 그닥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지역분할구도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밑천을 염두에 둘 때 장기적으로는 굳이 제도를 바꿀 유인이 없다. 이건 자유한국당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합집산이 아무리 종횡으로 벌어지더라도, 어차피 때 되면-즉 총선시기가 되면- 둘 중 하나로 재편되게 되어 있다. 민주당으로 오든지 한국당으로 가든지.
그렇다면 다른 정당들은 어떨까? 정의당이야 뭐 어차피 독자노선이니 선거법 개정이 사활을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만, 다른 정당들은 그렇지도 않다.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바른당의 경우 패스트트랙 동의해준 건 이게 어차피 안 될 일이기에 해준 것일 뿐이다. 기왕 안 될 거, 괜히 반대한다고 욕 먹을 이유도 없고, 그거 반대한다고 힘 뺄 이유도 없으니 그렇게 했을 뿐이다.
평화당은 좀 내막이 다른데, 정동영 같은 부류는 독자생존을 위해선 제도개선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박지원 같은 부류의 입장에선 그때그때 마음이 달라진다. 지난 총선처럼, 호남 민심이 민주당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제도개선을 통해 지역의 맹주로 거듭날 꿈을 꾸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도 바뀌어봐야 오히려 남을 게 없다. 차라리 다시 민주당으로 가는 게 낫지.
최근 평화당 분란이 심상치 않다.
뷰스앤뉴스: 평화당, 분당수순 돌입. 반당권파 10명 '대안정치연대' 결성
박지원이 정동영 등에 칼을 꽂고 있다. 일단 평화당에서 10명 뽑아나가면서 당내 내홍이 역시 만만찮은 바른당에서 최소 10명 뽑아 나오면 이걸로 원내교섭단체 가능. 그러면 이 기세로 민주당하고 쇼부, 당대당 통합. 빠르면 내년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머리속에서 이런 계산이 돌아가고 있는 자들이 선거법 개정에 도움을 줄리가 없다.
그리하여 "민주당 의석 128석 + 21석"이라는 하 변호사의 계산결과는 그냥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공상에서 멈춘다. 일단 민주당은 하 변호사의 요청과는 무관하게 그런 결단 따위 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한국당에 떠넘기면서 패스트트랙은 슬로우트랙으로 바뀔 것이다. 평화당 14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당 안에서도 128석이 전부 찬성할 가능성은 제로다. 그리하여 일단 숫자상으로 149석은 요원하다.
하반기에 박지원이 주도하는 '대안정치연대'가 결성된다면 어떨까? 예상대로 20석 이상을 확보하고 이들이 전격적으로 선거법 개정에 나서준다면 패스트트랙 통과가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게 거의 망상수준이라는 거다. 이들은 비례의석을 확보하여 현 수준의 의석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호남민심이 2016년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한 길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20석이라는 의석을 가지고 민주당과 쇼부치는 거다. 이 과정에서 선거법 개혁은 오히려 자기 발목을 잡는다.
이 대목에서, 현재 한국당이 분열하여 일부가 공화당으로 가게 되면, 한국당이나 공화당이 자기 세력 유지를 위하여 선거법 개혁에 나설 수도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그거 역시 공상일 뿐이다. 이들은 분열하면 망한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이들은 분열과 결합의 판단과 실천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결단력과 신속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비례의석확대가 이런 특성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는 자들이고.
해서, 하 변호사의 계산기가 보여준 아름다운 결과와는 달리, 이들 정치세력들이 돌리는 계산기가 내놓는 결과는 완전 딴판이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민주당은 '결단' 따위 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은 그냥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내년 3월 말까지, 패스트트랙의 처리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시간이 후딱후딱 지나갈 것이고, 이걸 바라지 않는 입장에서는 시간 참 더럽게 안 간다고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는게 그닥 어려운 게 아니다. 다시금 하 변호사가 너무 안타까울 뿐이고...
아,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하승수 변호사의 계산결과가 현실이 되길 바란다는 거다. 내 계산이 틀리길 바란다는 거고. 현재의 패스트트랙 법안에 대해서는 난 여전히 이런 수준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지만, 하 변호사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그가 원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