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호치민 1 - 우연한 시작
사건이라는 건 상당한 경우 계획적으로보다는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게 더 많은 듯 하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일회적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잦은 반복은 일종의 경험칙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내겐 순간의 어떤 계기가 하나의 일을 만드는 일이 꽤나 많기에, 우발적 사건의 발생과 전개는 계획적인 그것보다 비율적으로 훨씬 많다는 경험칙이 성립하게 된다.
이번 건도 그렇다. 짝꿍과 나는 한 이자카야에서 이른 소주를 한 잔 하고 있었다. 이 이자카야는 얼마전 동네에서 발견한 곳인데 꽤나 안주가 맛이 있는데다가 큰 부담이 없어 앞으로 단골로 삼아야겠다고 정한 곳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이자카야를 처음 발견하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원래는 한 블록 지나 있는 인근에 제법 유명한 중화요리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밥을 먹기로 했더랬다. 그런데 그 중화요리집은 상당히 붐비는 곳이어서 일찍 재료를 소진하기 일쑤였고, 짝꿍의 퇴근시간 이후에 밥을 먹으러 가면 번번이 영업을 종료하는 중이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도착한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손님들을 바라보면서, 주문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심정을 여러번 당하면 약간은 약이 오르게 마련이다.
그날도 그렇게 돌아가다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공사중이던 건물 상가에 이자카야가 생긴 걸 발견했다. 중화요리집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옮기던 중이었다. 마침 일본상품 불매운동이니 일본 여행이니 어쩌구 하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발견한 터라 어쩔까 하다가 일단 들어갔더랬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맛있고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발견한 술집에서 두 번째 저녁 술을 하던 중에 말이 나왔다. 그 날의 주제는 나의 문제였다. 난 짝꿍에게 내 삶의 방식을 완전 reset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정리되는 대로 난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과 단절하고 처음부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실은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건 좀 오래된 일이었다. 재작년 하반기부터 뭔가 계속 막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앞이 막막해졌었고, 그러다가 작년 1월 2일 심장 스탠트 시술까지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멘붕이 왔고, 넋이 빠진다는 게 뭔 말인지를 알게 되었더랬다. 작년 연말을 지나면서 겨우 정신을 추스리게 되었을 무렵부터 내 머리 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맴돌고 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어떤 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건가?
나는 돈을 벌고 싶은 걸까? 명예를 얻고 싶은 건가? 지위에 오르고 싶은 건가? 난 어떻게 살고자 하는 건가?
그런 의문들을 정리하면서 내 다음 생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이야기했다. 조금은 답답할 수도 있겠고, 힘도 들겠지만 좀 도와줬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화통한 짝꿍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까이꺼 지금 당장이라도 쉬라고 말해줬다. 어영부영하는 내 성격과는 완전 다른 짝꿍이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하던 와중에 문제의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일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인생 reset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나온 친구는 어쩌면 그런 희망의 한 사례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친구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들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바꾸고, 생활의 근거를 옮기고, 이를 위해 약 1년 반을 세계를 주유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쉬는 이야기가 나왔고 정리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짝꿍이 치고 들어왔다.
호치민에 친구 있을 때 놀러가,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 와. 그렇게 좀 머리를 비우고 오면 또 뭔가 궁리가 나오지 않겠어? 짝꿍은 집요하게 호치민에 다녀오라고 부추겼다. 역시 우유부단한 나는 좀 더 생각해보고, 그 친구하고 이야기도 해야 하고 뭐 이러쿵 저러쿵 따지고 있었는데 짝꿍은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스마트폰으로 항공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정을 맞춰야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그 친구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일정이 조정되었다. 짝꿍도 밀어주고 친구도 오라하니 그럼 갔다 와야겠다는 마음이 섰다.
이후 호치민으로 향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사실 돈도 문제고 해서 여러 고민이 있었는데, 항공비는 짝꿍이 대주고 잠은 친구의 숙소에서 해결하는 걸로 정리했다. 항공비는 ktx 타고 부산 왕복하는 것과 비슷한 초저가 항공이 포착되어 그걸로 냉큼 질렀다. 친구가 동남아 각국으로 출장을 가는 시기가 있어서 그 시기를 피하다보니 5일 정도로 잡혔다. 따로 코스는 잡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머리를 비우러 가는 것이니 코스따위 따로 계획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뚜버기로 호치민 일대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여행의 주제는 "두 발로 호치민"
이렇게 정리를 마치고난 다음날. 나는 술 김에 또 저지르고 말았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쥐뿔 벌이도 없으면서 무슨 여행이라니. 머리 식힌다는 핑계가 좋다. 아아 난 또 짝꿍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고 말았구나... 뭐 이런 생각들이 마구 스치면서 그렇잖아도 복잡한 머리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뭔 두 발로 호치민은 두 발로 호치민이여... 두 마리 치킨도 아니고...
그러나 어쩌랴, 이미 비행기표는 끊었고 친구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게 되었다. 기왕 내친 김에 뭐 갔다 오는 거지 뭘. 그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인생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거 봤냐, 사고치고 수습하고 그런 게 인생이지. 그리하여 여행 준비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 출국일이 다가왔다. 호치민 일대를 두 발로 돌아다녀보리라.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암튼 그렇게 해보자.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보고.
그렇게 해서 나는 인천공항에서 호치민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