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호치민 7 - 한 끼니를 위한 고민
그렇다. 아무리 계획 없이, 오로지 두 발로 이곳 저곳 그냥 다녀본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떠난 여행길이었다고는 해도, 내 이번엔 더 많이 먹고 오리라는 굳은 결심이 있었던 것이다. 앞서 커피-까페농-도 그랬지만, 더 많은 베트남 음식을 먹고 오겠다는 의지가 있었더랬다. '요리'가 아닌 '음식' 말이다.
'음'이야 뭐 까페농으로 해결이 되겠다만, '식'은 또 그렇질 않다. 나름 세운 어떤 기준에 따르면, 요리는 맛을 위한 것이고 음식은 몸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리라는 건 어쩌면 도락의 한 부문이겠고, 음식이라는 건 생존의 몸부림일 수도 있다. 굳이 '요리'를 찾지 않고 '음식'을 찾는 건, 어쩌면 말장난일지도 모르겠으나 딴에는 호치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좀 더 들여다보고싶다는 염이 앞섰기 때문이다. - 정작 중요한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이 생기지만 그냥 넘어간다.
암튼 뭐 여기까지 하고. 그런데 기껏 베트남 음식이라고 알고 있는 건 쌀국수에 반미에 모닝글로리같은 채소류에 월남쌈 정도... 하긴 뭐 내가 음식이나 요리에 대해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그게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다만, 그래도 이번엔 뭔가 살펴보기라도 하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게으름과 대충살자주의는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도다...
쌀국수만 해도 국물의 유무며 맵기의 정도며 쌀국수의 생김생김이며 토핑의 종류며 조리의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 무궁무진인데다가 그 이름을 외우기도 어렵고 하니 애초에 잠깐 뭐 좀 들여다본다고 머리 속에 들어올 게재도 아니었다만, 암튼 그런 저런 핑계거리를 찾아낸 후 내린 결론은 가서 메뉴판을 보고 결정한다였다. 이게 문제가 되었으니...
웬만한 점포들이야 메뉴판에 사진도 넣어놓고 조금 큰 곳에 가면 영어로도 뭔가 설명을 해놓았는데, 길거리에서는 이런 친절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다니고 오래된 차량에서 시커먼 매연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대로변 도보에 차려진 노점상은 아무리 비위가 좋다고 자부하는 나라고 해도 선뜻 앉기가 꺼려지는 거다. 그런 곳 중에 보면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는 노점이 있는데 거기서는 뭔가 먹고 싶어도 이게 도대체 뭐라고 씌여 있는지도 모를 말로 한 두 가지 품목이 씌어 있거나 그것조차 없는 집이 많아서 자리에 앉아 뭘 먹고 있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그릇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을 하다가 "How much?" 수준의 생존영어 날리면서 가격을 물을라치면 그조차 말이 통하지 않아 겸연쩍어하며 수줍게 웃는 노점상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저 난처할 뿐...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노점상가들. 그러고보니 그냥 도보에 좌판 깔고 옛날 동네 목욕탕 의자 앉아 먹는 노점들은 사진을 못 찍었다. 난 꼭 뭔가 지나간 다음에 아차 그걸 찍을 걸 하고 후회한다. 거참... 암튼 그냥 도보에 대충 앉아먹는 노점보다는 이렇게 정비된 노점상가들은 아주 그럴싸하다. 메뉴도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게 잘 해놓기도 했고. 먹부림을 하고 오겠다고 작심을 했건만 정작 먹을 거리 사진은 그닥 찍지도 못했다. 암튼 그 와중에 몇 가지.
각종 향채들과 번을 잘라놓은 것 같은 것에다가 매운 고추, 라임과 함께 나온 국수. 도저히 이름을 모르겠다. 헐... 계란 노른자 같은 것이 세 개 들어 있는데, 이게 계란 노른자인지 뭐 다른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먹어봐도 계란 노른자같지도 않고 뭔가 거시기 한 식감인데 맛은 별로. 암튼 그렇지만 자작한 국물에 견과류 깨서 넣어주고, 여기에다가 저 번 같은 쪼가리를 먹을만한 크기로 부숴 넣어 국물에 불리면 이게 어쩌면 누룽지같기도 하고 수제비같기도 한 잘 알지 못하는 그런 느낌의 것으로 변하게 된다. 쌀국수 특유의 식감이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가지각색의 향채를 같이 넣어 먹는다는 거. 어떤 사람들은 저 향채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난 저거 넣어 먹으면 아주 좋다.
밴탕시장 앞의 푸드코트에서 먹은 고기국수. 진한 소고기육수에 각종 부위의 고기가 넣어져 있고 특유의 어묵인지 소시지인지 모를 뭔가도 들어 있다. 건더기는 맥주 안주로 그만. 면은 한국의 소면같은 수준이다. 국물에 기름이 엄청 많다. 그름이 워낙 많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오히려 기름이 꽉 끼어 있다보니 빨리 식지 않아 뜨거운 거 좋아하는 사람에겐 딱 맞을 수도 있겠고. 뜨신 국물 좋아하는 나야 땡큐. 더운 곳에서 뜨거운 거 먹느라 고생일 수도 있겠지만, 마침 이 국수 먹는 동안 스콜이 장대하게 쏟아져내리는 통에 더위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는 거.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다 먹고 났는데도 이놈의 스콜이 스콜답지 않게 꽤 오래 내리는 통에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 쌀국수는 '포 비엣남'이라고 하는 꽤 큰 쌀국수 가게에서 자신작으로 내놓고 있는 '포 다'라고 하는 쌀국수. 이 국수는 국물이 완전 갈비탕 국물이다. 향신채로 인해 냄새가 한국 갈비탕과는 약간 다르지만 국물이고 건더기고 하다못해 그걸 내놓은 그릇마저 한국 유명 갈비탕 집의 쇠테 둘러진 돌그릇이다. 여기에다가 각종 향신채며, 저 꽈배기처럼 생긴 중국식 튀김빵을 부숴 넣고, 옆에 따라 나온 샤브샤브용 고기와 국수를 넣어 먹는다. 돌그릇이다보니 국물이 빨리 식질 않아 취향에 따라 샤브샤브 먹든 고기를 하나 하나 익혀 먹은 후 면을 말기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뜨거울 때 죄다 집어 넣어 끓이듯이 익히는 것이 좋아 죄다 다 집어 넣고 촵촵. 국물맛이며 그릇이며가 하도 한국식이라 한국인이 하는 집이냐고 했더니 그건 아니고, 오히려 이 집은 한국인에게 잘 안 알려져 있는 맛집이라고 한다. 이 '포 다'는 95000동, 한화로는 4500원쯤 하는데, 노점에서 먹는 쌀국수의 두 배 가격이다.
손님대접 하겠다는 친구에 끌려간 한식당. 한식당이라니... 이런 줴길... 한국에서도 안 먹던 생태탕을 벳남 와서 먹게 되었다. 그런데 재료들이 좋아서 그런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먹는 엔간한 생태찌게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다른 친구도 하나 합류하여 세 명이 앉아 소주 댓병을 먹었는데 그것도 괜찮았다. 그러나 물 건너 가면 그 동네 먹거리만 먹겠다고 했던 나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이렇게 또 한식당을 거쳐가야 하는 여행이 되어버렸다. 맛난 거 먹었으니 그걸로 됐고.
정말 나는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뭘 찍는 건지 모르겠네. 먹었던 것들이 반도 없어. 어허라. 뭐 그거야 어쩔 수 없고. 아무튼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애초 맘 먹은 바, 배가 터지도록 이것 저것 다 먹고 오리라 했던 다짐은 그닥 지켜지지 않은 축에 들 듯하다. 지난 번에 짝꿍과 함께 호이안과 안방을 돌아다닐 때는, 짝꿍이 의외로 많이 먹지 않아 별반 많은 맛을 못 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짝꿍과 같이 돌아다니는 통에 오히려 이것 저것 더 많이 먹어봤던 거. 이번에는 혼자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에 혹해 여기저기 들락거리다보니 되려 음식점에는 못들어가봤고, 노점에서도 그다지 먹어보질 못했다. 동행이 있어야 한 군데에서도 이것 저것 먹어보는데 혼자 가니 음식 시키는 것도 제한되어 내 먹을 거 외에 다른 음식을 먹기는 좀 힘들었고.
쌀국수든 반미든 먹다보니 어째 한국에서 먹는 것하고 그닥 차이가 없고, 베트남 특유의 무엇이 이것이다라고 뙇! 와닿는 게 없어 이게 바로 세계화의 힘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게 무신 새삼스럽게 오늘날 갑자기 세계화의 물결을 타서 이런 맛이 나오는 게 아니라,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아시아 어느 곳에서 온 사람이라도 부담이 없이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탄생시키게 된 배경이었고, 이러한 맛의 세계화가 베트남에서는 일찍부터 진행되었기에 그렇다고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한족과 교류하면서 맛이 섞이게 되고, 남북으로 긴 지형의 영토에서 북쪽과 남쪽의 맛이 교류하면서 한족의 맛이 남쪽으로 퍼지고, 반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쪽과 교류가 많았던 남쪽은 남방의 맛을 끌어왔고 이게 또 북쪽으로 전파되면서 독특한 베트남의 맛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사람이 오든 일본사람이 오든, 아니면 인도네시아 사람이 오든 인도사람이 오든 간에, 낯설지만 익숙한 어떤 맛을 느끼게 된다는 거다. 게다가 프랑스가 낑겨들어와 유럽식 음식도 많이 전파되었고, 이게 베트남 고유의 음식들과 교잡되다보니 예컨대 반미같은 음식이 나왔고, 이게 또 서양인들이나 동양인들이나 서로 간에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고. 듣고 보니 그럴싸 한 해석이었다.
아무튼 생각만큼 많이 먹지 못한 여행이 되어버렸다. 아쉽다. 다음 번에는 먹고 죽자고 각오한 인간들로 탐사대를 꾸려 사전에 먹자코스를 선정한 다음 돌아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다. 오사카에 갈 때 먹고 죽자는 각오를 하고 가지만, 여긴 먹고 죽자고 맘만 먹으면 오사카도 범접치 못할 종류의 먹거리가 있다. 게다가 먹거리의 값은 오사카의 10분의 1 수준에서 가능하다. 허... 이리 좋을 수가...
하지만 이건 그냥 나중에 함 해봤으면 싶은 버킷리스트 정도로 묶어 두기로 하자. 내 배부름의 미래는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현재 스코어로 봤을 때. 갑자기 기분이 칙칙해지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