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덫
공부방 짐을 싸는 중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책을 정리하다보면 책을 꾸러미로 만드는 시간보다 되려 책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오늘 안으로 이 책을 다 묶어놓으리라고 다짐을 하지만, 번번이 아주 번번이 그 다짐은 내일 하지로 바뀌게 되고, 정작 하는 짓은 아니, 이런 책이 있었나? 이 책은 왜 여기까지밖에 못 읽었지? 어라, 내가 이런 책도 봤네? 와, 이게 그런 뜻이었군, 전에는 이걸 미처 생각을 못했어... 이따위 짓들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유물같은 물건들이 툭 튀어나오게 되면, 그 책의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그 책에 얽힌 과거의 일들이 병풍을 펼치듯이 사락 사락 일어나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이 손바닥보다 좀 큰, 2mm가 될까말까한 두께의 이 책자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표지에 찍힌 날짜를 보라. 20년이 훌쩍 지났구나. 저 안에 놓인, 그리고 앞으로 정리하게 될 그 문장들과 단어들을 놓고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갔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며, 얼마나 많은 술잔이 오고갔던가. 그 와중에 얼굴을 붉힌 건 몇 차례며 인연을 놔버린 일이 몇 건이었는지. 이 손바닥만한 얇디 얇은 문건을 사이에 놓고 얼마나 뜨거웠던가. 나는, 우리는, 언제 한 번 또 다시 그렇게 뜨거울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빛나던 청춘은 옛일이 되었고 반짝이던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갔다. 다시는 함께 뜨거운 시간을 만끽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위해 소주 한 잔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의 삶을 떠나간 사람들은 또 그렇다만,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지만 이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어떻게 해야할지는 여전히 숙제다.
이렇게 또 짐 쌀 시간을 떠보낸 채, 과거가 남긴 유물을 들여다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오래된 어떤 시간과 어떤 장소와 어떤 사람들이 머리 속을 배회할 즈음, 이 방을 정리하여 돌아온 보증금으로 빚잔치를 해야 한다는 현실의 고단함은 잠시 잊었다.
오늘에 멈춰서서 미래를 저당잡힌 채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을 나는 매우 격앙되어 저주했었다. 그런데 이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과연 내가 저주했던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지금 이 문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야말로 내가 뱉어냈던 저주를 돌려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싸던 짐을 계속 싼다. 이 문건은 아마도 평생 나의 짐 속에 남게 될 것이다. 버리지 못할 과거가 되었고, 내 인생을 reset 한다고 해도 끝내 덫처럼 나를 옭아맬 것이다. 속세의 굴레가 이리도 모질다. 그 굴레를 감내하면서 나는 싸던 짐을 계속 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