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들을 정리하며

2019년이 다 가고 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올핸 뭘 해야지 하고 한 해가 끝나면 아쉬움이 어쩌구 저쩌구 하지는 않아왔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감회가 있다.

어제 한 행사가 끝났다.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실망과 회의를 안겨준 조직의 올해 마지막 행사였다. 행사에서는 나도 발제를 한 꼭지 했는데 주제는 조직의 향후 대안이었다. 이 발제를 맡은 후 굉장히 후회했는데, 과연 내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거니와, 더 심각한 문제는 막상 발제원고를 만드려고 하니 아무 진척도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거였다.

도대체 글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가 떠오르질 않았다. 전에는 머리 속에 생각이 나면 손가락이 저절로 키보드를 굴러다녔는데. 이번엔 아예 그런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이게 원고마감시한까지 계속되는데 거의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부담을 여러 곳에 하소연하자 발표를 ppt로 하고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서 진행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그래서 그에 맞춰 겨우 발제문을 완성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디서 발표를 할 때 정리된 글을 준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최대한 논문형식을 맞추려 노력했고, 그게 여의치 않아도 내 발표를 들은 사람이 나중에라도 들여다보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정리된 문건을 만들었더랬다. 그런데 이번 경우, 난 최초로 ppt 외에 정리된 논문을 제출하지 못했다. 매우 뒤끝이 안 좋다.

주제 자체의 무게도 무게거니와, 내 스스로의 전망에도 문제가 있었기에 아마도 두 가지가 중첩되면서 뇌기능을 정지시켰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후자인데, 난 도대체 내 전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세워야 할지를 아직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올 중순부터 이번 연말이 가기 전에 반드시 내 자신의 전망을 만들어보리라고 했지만, 여전히 암흑일 뿐이다.

그런데 어쨌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나를 괴롭히던 한 고비가 넘어갔다. 이제 자잘한 몇 가지가 남아 있다. 그 몇 가지도 빨리 정리해버리고, 완전 빈 상태에서 다른 시작을 하고싶다. 어제 발표 후에도 느낀 거지만, 이제 '연구'라는 행위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머리도 안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 연구가 과연 세상에 하등 도움이 되는 연구인지를 잘 모르겠다. 뭘 연구해야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저런 혼잡함을 일단 정리하게 되었으니, 이제 시간이 되는 대로 인생 2막을 어떻게 시작할지를 정리해보자. 버킷리스트도 좀 만들어보고, 내년에 계획 중인 각종 기술자격증 고민도 좀 하고, 리스트도 만들고, 관심가는 이야기들 찾아 목록도 짜보고, 글 쓰는 연습도 체계적으로 좀 해보자. 이것 저것 종합해서 빠른 시간 안에 정리를 해보아야겠다. 암튼 뭘 해도 하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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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4 12:54 2019/12/14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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