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감수성이라는 건 정말 민감한 것이어서

나름 법학을 전공했고, 그걸로 몇 년 간은 밥을 벌어 먹었던 입장이다. 법학분야 중에서도 인권법은 내 전공의 한 분야였고 밥벌이의 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인권에 '법'이라는 학문적 분류가 따라붙었을 때 정말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마치 인문에 '학'이라는 말이 붙었을 때 우리가 진정으로 인문의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듯이. 서설이 길다. 여기까지 하고.

최근 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이 여기 저기서 논란이 되고 있던데, 인권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주제와 아주 빈번하게 결부되는 관념이기도 하다.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난 적어도 인권에 있어서 일정한 가치의 지향은 원칙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에 일부나마 느슨하게 기준을 늦춰줄 경우 그것은 쉽게 가치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꽉 찬 군기 빼기는 쉬워도 빠진 군기 채우는 건 불가능"이라는 철칙이 여기도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인권 감수성이라는 건 아주 연약한 것이어서, 이성적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더라도 감정적으로 약간의 흔들림만 있으면 반감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인권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인권에 대한 발화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에 실상은 인간의 존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균열이 있음을 자각하도록 하는 강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발화하는 주체는 더 없는 용기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그 발화를 듣는 주체에게는 스스로가 익숙한 어떤 것을 벗어던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 또한 머리로는 이러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조립해낼 수 있다만, 감정을 가진 동물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어떤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머리로 이해했던 인권을 감정적으로 부정하고픈 충동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방편이 바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인권에 대한 강의를 듣는 거다. 특히 당사자들로부터.

내가 인권법을 강의하는데 누구에게 강의를 듣는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 스스로가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인권강의를 찾아 듣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당에서 일할 때, 학교에서 강의할 때, 기타 등등의 시기에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성평등강의, 장애인권 강의, 소수자인권 강의 등을 부득이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수강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야 이 감수성이라는 걸 날카롭게 벼려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둔감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둔감해지기 시작하면, 익숙했던 과거로 돌아가기 쉽다. 그 익숙했던 과거는 결코 인권친화적이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건 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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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7 18:08 2019/12/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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