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에 대하여
언제나 끓어오르는 부분이지만, '기회의 평등'이라는 말이 가지는 허위의식은 어떻게 이해를 해보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회 자체를 쥘 기회가 원천적으로 불평등한데 기회의 평등이 가능한가. 어디 가서 가끔 드는 얘이지만, 기회의 평등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아주 기계적으로 이야기된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렇다. 이것들은 FC바로셀로나와 FC서울 유소년 축구단을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 올려놓고 전후반 90분을 뛰게 만들어도 '기회의 평등' 운운할 것들이다. 똑같이 골 넣을 기회를 줬으니 기회의 평등 아니냐고 할 자들이다.
문희상이 제 아들에게 지역구 세습하면서 이미 검증이 되었다고 하는 거나, 조국 또는 나경원이 부모찬스를 사용해놓고도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거 그런거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거짓말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거창한 말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좌파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이야기 해야만 한다. 빨갱이 소리 들을까봐 주저하는 면이 있는데, 어쩔 수 없다. 그거 주장하는 게 빨갱이면 빨갱이를 해야지. 어찌된 놈의 빨갱이들이 맨날 기회의 평등만 이야길 하나.
"살찐 고양이법"이라는 게 있다. 보통 임금격차를 줄이기위 한 제도적 제한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도 이 살찐 고양이법 논의가 계속되어왔다. 민주노동당 때에도 그랬고, 특히 진보신당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주제를 의제화했다. 지금 서울시 의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모양이다.
노컷뉴스: 서울연구원장 연봉이 2억 낮출 순 없나... 살찐 고양이 조례 또 보류
가만 보면 한국은 여전히 士農工商 류의 계급적 위계가 작동하는 봉건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분화를 적용하자면 이미 한국은 초자본주의사회일지도 모르겠다. 商士工農으로 계급이 재편되었음을 염두에 두면 봉건성 운운은 낡은 생각이 되겠다. 문제는 계급사회의 구조가 더 강고해진다는 거다.
직종의 희귀성이라든가 그 직책에 다다를 때까지 투여된 자본(시간, 재정, 노력, 네트워크 등)을 따졌을 때 청소노동자보다 연구원이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대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공정'이 화두가 되었는데, 내가 봤을 때 그 '공정'은 공공연하게 확인될 수 있는 절차에 대한 신뢰이지 내용적 '공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꼬우면 니들도 시험 봐서 들어오지"라는 류의 저 '공정'론을 비웃을 수밖에 없다. 그정도 사고 수준은 기껏해봐야 주민등록번호 변경한다니까 간첩들 활개치게 만들어주려고 한다고 주접을 싸는 자한당 정미경의 사고수준과 유살 뿐이다. 소위 '기회비용'이라는 건 관념에서나 작동할 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이에크처럼 '운'을 이야기하는 게 훨씬 낫다.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라고 하면서 돈 없는 부모를 원망하라고 할 때, 차라리 정유라는 '공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부모 잘 만난 '운'을 더 쳐줬다. 수준에 맞는 표현이었으며, 이 수준밖에 되지 않으면서 '공정'을 운운하는 건 수준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아무튼.
서울연구원장이 2억 받는데 청소노동자가 기껏 2천만원 받는다는 건 부당하다. 아닌 말로 청소노동자가 서울시의 행정에 기여하는 바가 더 많은지 서울연구원장이 더 많은지를 객과적으로 따져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서울연구원장이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청소노동자는 없으면 난장판이 벌어진다. '공정'을 이야기하려면 이정도는 감안해야 하지 않는가?
기사를 보니 이 문제는 단지 살찐 고양이법에 국한된 게 아닌 듯하다. 서울연구원장이 박원순 측근이라는 거고, 그러다보니 박원순이 자기 사람 감싸느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인 듯 하다. 시장 정책특보를 거쳐 시장 비서실장까지 한 경력이다보니 측근 중의 최측근이긴 하다. 권력보위의 측면도 이 사건의 내막에 있는 듯한데, 결국 뭐 '공정' 따윈 개뿔이고 누구 빽이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나?
유대인 예수가 포도밭의 비유를 들었던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능력주의-일찍 와서 더 많은 일을 했다-로 분배를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서 분배-늦게 와서 적게 일했더라도 같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가 공의롭다는 것이다. 평등한 결과는 결과를 만들어내기까지 기여가 적은 사람에게 분발의 의욕을 줄 수 있고, 기여가 많은 사람에게 겸양의 미덕을 줄 수 있다.
아, 물론 예수의 저 비유에 어떤 뜻이 있느냐는 건 각인각색이니 뭐 나야 내 뇌피셜을 할 수밖에 없다. 하긴 저 비유가 결국 절대권력자-신의 아들인 예수-가 "따지긴 뭘 따져? 내 맘이지!" 이렇게 한 것일 수도 있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