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교사와 공정성
집에 TV가 없다. 드라마를 볼 일이 없다. 한류 드라마가 전 세계를 휘젓고 있다지만, 애초 드라마에 별로 흥미가 없다. 드라마 뿐만 아니다. 예능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내가 놀지도 못하는데 내 대신 놀아주지도 않는 걸 자기들끼리 놀며 즐기는 모습을 시청하고 있는다는게 영 어이가 없다. 아, 이런 이야기가 아니고.
드라마를 안 보니 기사에 나온 드라마를 모르고, 그러다보니 전반적으로 몰입이 잘 되지 않는 경향은 있지만, 좌담의 내용은 아주 잘 이해된다. 이래서 올해도 어김없이 예의 그 '공정성'이라는 것은 이 사회의 한 화두로 지속될 듯하다. 이 좌담 기사는 기간제 교사들의 현실을 아주 담백하게 그대로 드러내준다.
경향신문: 드라마 '블랙독'과 현실의 학교 ... "현실대로라면 고하늘 선생니믄 정규 교사 되기 어려울 것"
그렇지. 언제나 현실은 픽션보다 더 픽션같은 거니까.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환타지가 아닐까 화들짝 놀랄 정도다.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의 연속에 내가 끼어들어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하고. 내가 비정규직이 아니라 백수인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현실이 내겐 일상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극단적으로 폭로된 사건은 한 생산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입는 작업복의 형광띠가 달랐다는 것이었다. 작업복만 보면 누구라도 어느 쪽이 비정규직인지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좌담 기사에도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 자료집을 만들면서 과목별 교사 명단에 어느 선생님은 기간제라고 명시해놓은 거다."
ㅆㅂ, 신문을 들추고 있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이 핑 돈다. 이게 뭐하는 짓들인가. 연전에 비정규직 교사를 정규직화한다고 하자 난리가 났다. 임용시험 준비하는 학생들이 특히 반발했는데, 그게 자신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거다.
난 이에 대해 임용시험의 공정성을 문제삼으면서 수험생들의 논리에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왜 너희들이 공부할 시간에 현장에서 흘린 땀은 공정의 저울 바깥으로 밀려나야 하는지를 설명해보라고 묻고싶다. 수험생들의 논리는 그저 본전생각일 뿐이다. '쫄따구' 때 허벌나게 구르던 자가 고참 되면 역시 본전생각에 쫄따구를 굴리는 것과 같은.
이 본전생각은 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와 아주 잘 들어 맞는다. 투입이 있으면 산출이 있어야 한다. 나는 교사가 되려고 돈과 시간을 투자했다. 기간제는 그런 과정 없이 현장에서 돈 받아가며 살지 않았나. 이 논리다. 그런데 웃기는 건, 비정규직 교사들이 현장에서 돈 받은 건 그들의 노동의 대가일 뿐이고, 그 노동의 대가가 무색할 정도로 자기를 갈아 넣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현장에 채용된 이유는 다분히 교육정책적 및 제도적 차원의 실패를 감추고 더불어 교육 현장의 고용유연화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은 양산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차별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왜 이들이 거저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로 매도되어야 하는가?
좌담에 참여한 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얘기가 정규 교사 대 기간제 교사의 대립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기간제 교사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지 서로 이해했으면 한다."
나처럼 울끈불끈하고 모난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도량이다. 그래, "서로 이해"가 중요하지. 관계란 그런 거니까. 그 이해가 충분해진다면, 그 땐 공정성 운운하면서 어딜 비정규직이 정규직 자리를 넘보냐는 식의 차별이 아니라, 이따위 시스템을 만든 책임을 분명히 져야할 누군가를 명확하게 정립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진정한 공정성은 그때 비로소 제 가치를 찾게 될 거고.
차별 없는 세상은 요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별 없는 세상을 찾아가는 노력을 멈출 일은 아니다. 어떤 가치든 그것은 완성된 상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치로 남는 것이니. 가치는 그것을 목적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제 빛을 발휘한다. 빛을 잃지 않기 위하여 늘 깨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