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 |
블로그 제목부터 '구라'가 들어있을 정도로, 나는 '구라'라는 장르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매우 오래 전에, 구라의 종류를 3종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의의와 내용 및 장단점에 대해 설명한 바도 있다. 통상 구라는 뻥구라, 생구라, 개구라로 크게 나뉘는 바, 나는 특히 상식적 가치를 가진 구라로서 뻥구라를 으뜸으로 치고, 소설적 가치를 가진 구라로서 생구라의 의미를 인정한다. 반면 요즘 유행하는 소위 '가짜뉴스'와 같은 비중으로서 '개구라'를 취급하며, 개구라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난을 쏟아 붓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나름 구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 내지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구라를 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은근한 존경의 염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비록 나의 지향이 뻥구라라고는 하나 구라계의 일원으로 말석에도 자리하기가 어려운 천학비재한 자로서 저들 구라의 천재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기라성 같은 구라의 대가들을 일일이 언급하기는 어렵고, 다만 최근 들어 이 자의 구라는 매우 진지한 구라이면서도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 구라쟁이는 지젝이었다. 한 십 년 이상을 지젝의 지젝거림을 들여다보고 있다보니, 이젠 지젝이 뭘 말할지 대충 안 봐도 감이 잡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막장 드라마류가 으레 그렇듯, 보다 보면 다음 대사까지 정확하게 예측이 되는 그런 수준이라고나 할까. 좀 더 부연하자면, 지젝의 문제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언술에 녹아 있는 일종의 선동이 날이 갈수록 그저 장삿속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가장 위험한 구라를 가장 안전한 위치에서 지젝거리는 것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다만.
언젠가 접했던 구라 중에 뻥구라와 생구라의 경계를 묘하게 왔다갔다 하던 자는 '총 균 쇠'를 썼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였다. '총 균 쇠'는 대담하게 거시적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저서였다. 미시사가 유행처럼 번져갔고, 그 미시사를 연결하는 것에 아주 빡이 치던 시절에 만난 게 바로 '총 균 쇠'였다. 수많은 "00의 역사"를 꿰어맞춰서 통합적인 전체 역사로 "명징하게 직조"하는 건 어차피 내 수준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기도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한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보았더랬다. 하지만 그의 구라는 끝내 이것이 뻥구라인지 생구라인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도처에 구멍이 있었고, 과거에 헤겔이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주제에 위도에 따른 인종적 특성까지 꿰뚫었다는 개구라를 들었던 느낌의 재현이랄까.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역사를 거시적/통시적으로 보게 해주는 즐거움을 준 책이었다.
그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추천사를 썼다는 책을 이제야 들여다 보았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연말에 딴짓 하지 말고 책을 한 번 제대로 읽어보자고 마음 먹었던 때에 눈에 먼저 들어온 게 이 사피엔스였고, 그래서 샀다. 아, 사실 이 책을 처음 들여다보게 된 건 지난번에 호치민에 갔을 때였다. 친구 집에 이 책이 있었고, 그걸 몇 페이지 정도 들여다보았는데 그만 일정때문에 변변히 읽지도 못하고 귀국했다. 아무튼 그런 전차로 구매를 했는데 연말연초에 딴 짓 하느라고 책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가파도에서 이틀을 보내게 되었고, 조건이 맞아 이 책을 완독하게 되었다.
책 읽는 속도가 과거와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거의 세 배는 더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그런데도 이 책은 2박 3일만에 완독을 했다. 사실 한 번 읽고 그 책을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렵기에, 더구나 본문만 56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한 번 완독했다고 하여 소화한다는 건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글이 중학교 졸업 수준의 지식수준과 이해도를 가지고 있으면 충분할 정도로 쉽고 평이하게 씌여진데다가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곳곳에서 적절하게 튀어나와주는 특유의 유머가 읽기를 수월하게 해주었기에 제법 속도감 있게 글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을 보면 유인원 중 하나였던 사피엔스가 어느날 갑자기 한 소리를 듣고 개안을 하게 되어(인지혁명) 다른 영장류와 달리 지구의 적자로 거듭나더니, 또 어느 순간 제 입 속에 들어갈 먹거리들을 될 때까지 기다리고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제 손에서 자라게 만들게 되었고(농업혁명), 그러더니 느닷없이 먹거리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제 꼴리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더니(과학혁명), 이제는 아예 신과 맞다이를 뜨면서 영생불사의 우주적 사변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길가메슈 프로젝트)는 논지로 이어진다.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 지식에 따를 때 여기저기 구멍이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고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소거하거나 왜소화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문제점이 현재까지 내 기준으로 볼 때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처럼 뻥구라와 생구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사피엔스는 뻥구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된다.
나는 최소한 그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피엔스의 마지막 즈음에 결론처럼 제시되는 질문이 그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궁극의 질문,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유발 하라리가 사회주의자이거나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데올로기를 내쳐버리지 못한 채 자본주의 전복을 욕망하는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한시도 놓을 수 없는 질문이 바로 저것 아니었던가? 그것을 평등이라고 하든 생산수단의 사회화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간에,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원하는 존재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은가? 물론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그 답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가 마치 배추도사 무도사가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놓은 장구한 역사, 아니 우주사(빅뱅부터 시작하여 태양계의 구성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니)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저 질문에 다시금 천착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게 되는 거다.
그러다보니, 사피엔스는 그저 역사의 전개과정을 나열하고 있는 듯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결국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에 대한 회의와 지금의 역동적 활동들이 이후에는 행복을 가져오게 될 것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인류가 공통의 환상을 어떤 실체와 같은 수준에서 공유함으로써 사회가 형성되고, 그 사회가 장구한 세월동안 온갖 투쟁과 환난을 경험하면서 과거와 단절하거나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면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 존재하는 인류가 결국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섬찟하게 해부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인류가 아직까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가치 하나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 국가는 공통의 국가적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사법체계는 공통의 법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53쪽.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60쪽.
"인지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 66쪽.
"석기시대는 목기시대로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쓰던 도구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74쪽.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135쪽.
함무라비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이런 원리들에 객관적 타당성은 없다." 163쪽.
"상상의 질서란 사악한 음모도 무의미한 환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66쪽.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167쪽.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237쪽.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266쪽.
"모든 것이 변환 가능할 때 ... 인간의 가치를 부식시키고 이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 267쪽.
"신뢰는 인간이나 공동체, 혹은 신성한 가치가 아니라 돈 그 자체 그리고 돈을 뒷받침하는 비인간적 시스템에 투자된다." 268쪽.
"문화의 다양성과 영토의 탕력성은 제국의 독특한 특징일 뿐 아니라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만드는 요소" 273쪽.
"영국인들은 인도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경제적 통합에 극히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했다." 292쪽.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 298쪽.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데 뛰어난 문화다." 344쪽.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357쪽.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404쪽.
"누가 이 물건들을 구매할 것인가? ...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 누군가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490쪽.
"고층 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수위에게 주어야 할 급여액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마당에 어떻게 이들이 국가에 저항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509쪽.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516쪽.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 바람 없는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겼던 닐 암스트롱은 3만 년 전 쇼베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모를 수렵채집인보다 더 행복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농업과 도시, 글쓰기와 화폐제도, 제국과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530쪽.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535쪽.
"과학의 첫 단계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536쪽.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 ...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560쪽.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580쪽.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585쪽.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589쪽.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섭렵하면서 "명징하게 직조해"낸, 유발 하라리는 그래도 인간의 진보와 발전에 대하여 낙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장에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고 바뀌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의 간극을 넓혀보면 그래도 과거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는가?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전쟁의 위협에서 인류는 드디어 해방될 가능성을 타진하는 단계까지 왔지 않는가? 물론 이런 구조를 들이대면서 유발 하라리가 그러니 지금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먼 미래에는 지금의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임을 믿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듯이, 당장 내게 닥친 고통과 분노는 역사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역사를 다루다보니 유발 하라리가 전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546쪽 중간에 살짝 두 나라의 이름을 함께 올린 정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뻑하면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에 뚝배기가 깨져가는 친구를 봐야하는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이 과연 스스로를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여길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사피엔스는 일단은 역사적 상식의 집대성 정도로 여기는 것이 맞겠고.
이러다보니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무엇일지가 궁금해지는 거다. 결국 유발 하라리의 다음 책들을 들여다보게 되고. 다른 시리즈물들도 분량이 상당하던데, 이걸 언제 다 읽어보게 될지 기약이 없다. 다시 가파도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아, 여담이지만, 내가 구매한 책은 파본이다. 417쪽부터 432쪽까지가 없다. 대신 433쪽부터 448쪽까지가 두 번 연속된다. 알라딘에서 구매한 것인데 이거 제대로 제본된 걸 받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일 전화라도 해봐야 하나 모르겠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