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구라2.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1편에서, 헌법 전문의 시작을 보았는데, 거기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이게 도대체 뭘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 빛나기까지.
3`1운동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주제는 종을 쳤고 민주공화제가 국체로 등장했다. 사실 3`1운동 때문에 군주제가 망했다기보다는 그 이전에 1910년 경숙국치 과정에서 순종이 나라를 일본에 넘긴 때 한민족에게서 군주제는 사실상 종쳤다고 봐야할 것이다.
다만, 순종이 그만 주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겨버렸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주권이양을 부인하고, 주권의 주체 자체를 민주주의의 주체로, 즉 인민에게로 돌려버렸던 것이 '민주공화제' 선언이었다. 이후 살피겠지만,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는 선언은 이런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법통이 제대로 된 법통이냐는 또 별개의 논의가 필요하지만.
자, 아무튼, 임시정부를 기점으로 하더라도 "우리 대한 국민"이 간직한 민주공화제 안에서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라는 건 불과 한 세기를 갓 지난 것이고, 현행 헌법이 만들어질 때는 기껏 70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정도의 기간을 상정한 것이라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은 좀 낯간지러운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고작 1919년 이후부터 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니라면, 역사와 전통은 국가체계 혹은 정치체제와는 별개로 사회문화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 사실 그렇지 않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이런 가계가 있었으니 지금 내가 있는 거고, 그것이야말로 역사와 전통일 터이니.
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구절은 제헌 이래 유지되어왔다. 제헌 임시헌법 제5차 개헌에서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라는 전문의 구절이 있었다. 헌법을 기초했던 유진오는 이 구절을 작성하면서 "반만년의 광휘 있는 문화적 전통에 빛나는" ---> "장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수정하였다.
재밌는 건,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후 만든 속칭 '제5공화국 헌법'의 전문은 약간 다르다는 점이다. 전두환의 신군부 헌법은 이 구절을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평화애호의 전통을 자랑하는"으로 바꿨다. 평화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개차반 정신을 가졌던 전두환 일당이 감히 평화애호의 전통을 운운한 것은 가소로울 지경이다. 뭐 이런 뻔뻔한 것들이 다 있는지.
전두환이가 은근슬쩍 바꿔놨던 이 구절은 현행헌법에서 다시 복구된다. 물론 말로만 보자면야 평화애호도 들어가고 그러면 좀 좋겠나만은, 광주를 무력점거하면서 인민들을 학살한 자들이 평화애호를 자기 헌법에 집어 넣은 것은 그저 단순히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헌법이 얼마나 무용지물이 될 수 있으며 우스개거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구절을 잘못 새기면 엉뚱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민주공화국 건국 이래의 헌정질서의 연원을 군주정 시대로까지 추급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거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되어 헌법재판소가 이를 위헌으로 판단하면서 내세운 '관습헌법'이라는 거. 이게 무슨 역사와 전통도 아니고... 전통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전통인데 이것들이 아직도 전두환 때 하던 버릇을 못 고쳤...
이 구절은 헌법 본문 제9조와 연결된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엄격히 따지자면, 헌법전문의 구절과 이 제9조 규정은 난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도대체 계승해야 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어디까지로 소급할 것인지, 어떤 역사와 전통을 이을 것인지 헌법 규정만으로는 알 도리가 없다. 민족문화의 창달(暢達)은 어떤 민족문화를 창달하라는 건가?
어찌되었건 간에, 일단 내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존재라고 헌법이 밝혀주는 건 참으로 의미가 있다. 이렇게 훌륭한 존재를 졸로보는 국가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다. 각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훌륭한 존재는 국가(정부)가 보호하고 그 권리를 보장해줘야만 한다.
다시금 내 자신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존재라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면 잠이나 쳐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