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적자와 같이 놀지 마라
항간에는 87년 6월항쟁과 7/8/9 대투쟁 이후 87년 헌법체제가 들어서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이 되었고, 이젠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가 남아있다고 썰을 푸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사실 이러한 발상은 망상에 가까운데, 우선 나는 아직까지도 '형식적'과 '실질적'을 구분하지 못하겠다. 민주주의는 어떤 완성된 체계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추구할 체계이고 따라서 언제나 미완성의 체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취지에서 형식적이고 실질적이고 간에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상 '형식적'이라는 것 역시나 완성하곤 거리가 멀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최악의 독재정권이 만들어놨던 제도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국가보안법. 이건 뭐 생명력이 장난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물관에 넣자고 설레발을 쳤다가 한 발 뺐던 일도 있었지만, 이놈의 국가보안법은 진저리가 나도록 살아남는다. 그런데 이것만 그럴까?
정치관계법 중에는 정당법이 국가보안법 수준의 구태다. 오늘날의 정당법 체계가 형성된 것은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의회고 정당이고 나발이고 사람 모일만한 게 있으면 싸그리 다 해체시킨 후 1962년도에 만든 정당법에서부터 기인한다. 이때부터 정당을 만들려면 실질적으로 국가(정권)의 관리와 통제 속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요건에 맞춰야만 했다. 이렇게 시작된 국가의 정당관리체계는 세월이 지나고 60년이 된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민주화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정당법은 갈수록 정당을 만들기 어렵게 변화해왔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87년 이래, 소위 '민주화세력'이라 자칭하는 부류들이 실질적으로 이 정당법 체계의 단물을 빨아왔다는 점이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이게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임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재의 정당법 체계는 정당의 입장에서는 빈익빈부익부, 즉 큰 정당이 더 많은 자원을 독식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똑같은 성격을 가진 정치관계법인 공직선거법 및 정치자금법과 결합하면서 발생하는 시너지가 결과적으로 양당체계를 공고히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보통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바로 이러한 정당법 체계 덕분에 독재정권의 적자들과 그 반대편에 있었다고 하는 더불어민주당 세력 간의 공생이 가능하게 되며, 다당제 자체가 발 붙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도적으로 형성함에 따라 양당 간 권력의 교환구조가 항구화될 수 있게 된다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권력의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이 결국 바로 그 억압적 권력이 만들어놓은 구조를 향유하는 일주체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더불어민주당계열에서도 불만이 나올 수 있는데, 이쪽 정치인들 중에 일부는 그전부터 이러한 정당법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견은 극소수 몇몇 정치인의 개인적 견해였을 뿐이고 본격적으로 더불어민주당계열의 정당 자체 혹은 다수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지난 개헌정국에서조차 이 문제를 전면에 내걸지도 않았다.
최근 부상하고 있는 지역정당 건설운동은 현행 정당법체계의 연원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단순히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군소정당을 허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의 사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역정당 건설운동은 한갑자를 거치면서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정치탄압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1962년부터 2022년까지 유지되고 있는 말 그대로 '적폐'를 발본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의 결과가 결코 현재 거대양당에게 유리하지만은 않다.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양당구조가 적절하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는 거대양당의 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이 정당법 체계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독재정권의 적자들은 뻔뻔한 것이고 그들과 싸웠다는 훈장을 가슴에 단 채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 덕분에 꿀을 빨고 있는 소위 '민주화 세력'은 구차한 모양새다.
한편, 지역정당의 건설이 가능하게 되면 풀뿌리민주주의를 활성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역유지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아무래도 돈과 사람을 동원하는데 유리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지역의 유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정당을 건설하고 사적인 목적으로 정치를 오염시킬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동시에 지역유지와 마찬가지로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는데 유리한 기성 거대 정당들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위성정당을 만듦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지역을 예속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보았듯이, 파렴치하게도 아무 거리낌 없이 위성정당을 만들고 지들끼리 자리를 나눠먹었던 거대 양당을 경험하였기에 이러한 걱정은 더 실감나는 상황이다.
지역정당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부문정당도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각종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정당으로 재편하면서 이해관계를 위해 지역적 정치구조를 악용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지역유지나 거대정당이 지역정당의 가면으로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이를 부문정당에서 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러한 항변 역시 나름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거대 양당이 모든 자원을 독식하도록 보장하고 있는 현행 정당법 체계를 용인해야 하는가? 실제 군사정권이 현행 정당법 체계의 골간을 잡은 이유는 정치불안의 종식이었다. 즉 정당이 난립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를 하겠다는 게 군사정권의 표면적 의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국가후견주의다. 그것도 가장 저열한 기본권 탄압의 방식을 동원한 국가규제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 정치결사의 자유, 집단적 정치활동의 자유 등 정치와 관련된 모든 자유를 최대한 억누름으로써 국민을 정치적 혼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숭고한 발상.
이러한 반민주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진 현행 정당법 체계를 그냥 놓아 둔다면 지역정당을 허용하는 정당법을 만들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저 문제들은 정녕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그 답은 지금의 정치구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현행 정당법 체계에서 오히려 저런 일들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유지들은 지금도 거대정당과 유착해서 지들의 이권을 남김없이 빨아대고 있다. 오히려 거대정당이 이러한 자들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제재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거대양당은 지금 체제에서도 얼마든지 지들 멋대로 위성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한다. 군소정당의 피를 말리기도 하고 또는 군소정당을 2중대화하기도 한다. 이익집단들 역시 지역유지나 별반 다름 없이 거대양당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고 거대양당은 지역유지들에게 하는 것처럼 이익집단과도 동행한다. 이재용을 아무리 집어넣어봤자 거대정당이 필요하면 얼만든지 날개를 달아줘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정당법 체계가 바뀌고 그에 결부하여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이 바뀌게 되면 다당제가 현실적으로 실현되며, 그 결과 거대양당이 할 수 없었던 사회적 변화가 가능해진다. 그 와중에 바뀐 법제도를 이용해 지역유지나 이익단체들이 활개를 칠 수도 있고, 곳곳에서 위성정당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풀뿌리의 강점 중 하나는 좋든 싫든 자신들이 원하는 구조를 찾아간다는 거다. 풀뿌리를 어떻게 어떤 규모로 꾸릴 것인가는 장차 더 깊이 논의해야 할 일이지만,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자신들이 뭘 해야 할 지를 찾게 되어 있고, 작은 단위에서부터 그러한 노력을 하면서 세상은 변해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또 다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독재정권이 만들어놓은 정치체제부터 철저하게 뒤집어 엎어야만 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니 뭐니 하는 망상은 접어버리고. 독재정권이 만든 체계 속에서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민주주의 운운하는 허위의식에 쩐 가식적인 말들은 좀 그만 들었으면 싶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지역정당 깔대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