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왜 하라고 그러지?

#1. 익명성의 폐해??

자주 들어가는 정치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 한 때는 잘나간다는 필진도 여럿 포진해 있었고, 선거철에는 정치판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피튀기는 전투도 벌어지곤 했다. 그 덕분에 한동안 꽤 유명한 사이트 축에 들었는데, 지금은 영 황이다. 내로라하는 필진들이 빠져나간 이후 그야말로 논객의 춘추전국시대가 벌어지는데 아직 패권을 장악할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거의 고만고만한 수준들이고. 그냥 심심풀이 땅콩으로 생각하고 들어가는 사이트라 행인은 글을 남기지는 않는다. 유령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사이트, 잘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욕설과 모욕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유령아이디를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고정 아이디를 쓰는 사람들 역시도 욕설이 난무하는 글들을 올린다. 그 욕설이라는 수준이 웬만한 저잣거리 몸싸움 과정에서 보이는 수준의 욕설이 아니다. 차마 말로 옮기기가 민망한 욕설이 무궁무진하다. 욕지거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행인도 두손 두발 다 들 정도니까.

 

그러다보니 이 사이트에서 유행하는 말이 사이버 수사대에 고소하겠다, 명예훼손이다, 폭력이다, 또는 성폭력이다 하는 주장이다. 또는 협박이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낯뜨거운 욕설싸움을 벌이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 서로 치고 박는다. 정치사이트라기 보다는 욕설의 경연장 같다.

 

#2. 자정능력

이 사이트의 운영자들. 좋게 보면 사이버공간의 익명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고 나쁘게 보자면 게시판 정화를 위한 조치를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못잡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비슷한 정치웹진을 표방하고 있는 서프라이즈의 경우 게시판이나 댓글에 욕설이나 비방, 심지어 자신들의 정치지향에 대한 극단적 반박이 올라오는 경우에 가차없이 이를 삭제한다. 하지만 게시판이 완전 개판이 된 이 사이트의 경우 전혀 삭제가 없다. 다만, 음란물이나 택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에 해우소로 이동할 뿐이고 그나마도 썩 잘 하고 있지는 않은 편이다.

 

그런데 이 사이트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욕설공방의 대표적 인사였던 인물들이 거의 갈데까지 간 싸움질을 얼마전까지 벌였다. 이 공방의 와중에 편이 갈라지고 서로 치고박는 일이 벌어지는 것까지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중립적위치라고 할까, 어쨌든 관망의 자세를 보이고 있던 사람들이 계속 개입하면서 게시판 정화를 위한 자체적인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싸움박질하는 양 당사자를 중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싸우던 서로 칼부림을 하던 간에 게시판에서 지켜야할 일정한 룰을 지키라는 지속적인 압박이었던 거다.

 

결과는 상당히 양호하다. 아직 딱부러지게 좋아졌다고 이야기할 근거가 없으나 불과 몇 주 전에 비해 지금의 상황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지금보다 더 좋아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자판파이터들의 전투력이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폐인지경에 있는가에 따라 달려있는 것인데 분란을 일으켰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폐인수준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조만간 다시 개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게시판이라는 이 독특한 한국적 인터넷 문화가 단지 익명성에 의해 개판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문젠가?

 

#3. 언제 말 할 자유를 줬던가??

어릴 적에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 시골 사랑방에 노인네들이 모여 앉아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정치인 이야기나 지역 유지의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 정치인이나 지역 유지가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어디 사는 뉘집 자식인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렇게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봐가며 이야기할 일도 아닌데, 이 어르신들은 마치 누군가가 들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신다. 왜 그랬을까?

 

어른들에게 제일 많이 듣던 말. "나서지 마라." 간혹가다가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할라치면,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행인이 이럴진데 행인 이전의 세대는 오죽하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어디 가서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던 거다. 그렇게 억눌려 살다가 술 한 잔 들어가면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 꺼내놓게 되고, 그거 누군가가 들으면 투철한 신고정신 발휘해서 경찰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며칠 후 간첩단 사건이 되어 신문을 도배한다. 막걸리 반공법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렇게 입을 꼭꼭 다물게 만들어놓고 살았던 것이 지난 반세기. 어디 반세기 뿐이랴. 일제강점기까지 치면 무려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입 뻥긋하는 것이 목숨을 걸고 할 일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문이 막혀 살기를 강요당해왔던 이 땅의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마음껏 터뜨리게된 시기가 온라인이 활성화된 시기와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새삼스럽다. 통신환경이 발달하면서 바야흐로 논객들의 전성시대가 되었고, 게시판은 글로 넘쳐나고 이제는 답글과 댓글로 온갖 논의들이 범람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제 겨우 말할 자유를 획득했다고나 할까? 더구나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익명성이 극대화된 곳. 서로 얼굴 볼 일 없고 살면서 부닥칠 일 없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그게 어제 게시판에서 나한테 욕지거리를 했던 넘이라는 사실을 알 도리는 없다. 이 안도감에서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오고 그 끝에는 욕지거리와 언어폭력이 난무한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한꺼번에 누리면서 그 한계에 대해서는 이제 겨우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4. 논의들...

지난달 말에 국회에서 게시판 실명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위헌적 발상이라는 법적 비판도 있었고, 온라인 거래활성화에 장애를 줄 수도 있다는 상업적측면의 비판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비판들 이전에 게시판 실명제 추진하는 정부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은 과연 너희들이 언제 우리에게 말할 자유를 보장해준 적이 있었는가 이다. 그동안 꽁꽁 묶어놓고 있다가 이제 겨우 입 좀 열려고 하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앞으로 한 반세기 동안 실컷 떠들게 내버려둬보자. 입을 틀어막고 있었던 시기가 한 세기쯤 되지만 크게 인심써서 그러면 반세기 정도만 입이 아프고 손가락이 뒤틀리도록 하고픈 이야기 맘껏 하게 함 둬보자. 장담하건데, 그 와중에 나름의 질서라는 것이 잡혀갈 것이고 익명이라는 '가면'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이라는 온라인상의 또다른 '인격'이 발현할 것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개판 오분전의 게시판이 나름대로 질서를 찾아가듯.

 

혼란이니 무질서니 하는 말, 그렇게 쉽게 사용하지 말고 그냥 한 번 둬보라는 거다. 그게 두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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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6 13:02 2005/11/0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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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사에서도 이걸 왜 하는지 모르고 하는 멍청한 일들이 상당히 많은데 공무원들 세계에선 더 심각하더군요.

  2. 자연(인간)의 자정 능력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수업시간에 졸거나 딴짓했을 겁니다. 그러니 엄한 짓거리나 하겠지요. 이런 자들은 체벌 교육이 나름대로 필요한 건데...ㅋㅋㅋ...

  3. 골룸/ 사실 그 분들이 '멍청'하다기 보다는 '멍청'하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게 했던 어떤 넘들이 나쁜 넘들이죠. ^^;;;
    이재유/ 헛... 꽃으로 '아이'들을 때리지 마세요~~~ ^^ 그 '아이'들, 이제 교육으로 해결될 수준들이 아니거든요. 치료가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 합니다. ㅎㅎㅎ

  4. 저는 익명게시판에도 글을 잘 못쓰겠더라구요...추적이 두려워서..ㅋㅋ

  5. 정말 많이 동의해요! 진짜 멋진 글.
    '초등학생의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자'라는 포스트를 어디선가 봐서 이와 비슷한 요지로 포스팅을 해볼까 생각했었는데 이 글이 너무나 감동적이라서 차마 할 수가 없군뇨 ㅡㅜ

    한마디 덧붙이면 실명제 후 과연 그 '혼란(?)'이 정립될 것인가? 라는 의문도 요즘 들어서 자꾸 들더라구요.
    예전 VT모드의 PC통신 대부분이 실명제였는데 완전 개판이었던 하이텔 플라자란을 생각하면...

  6. 네이버도 실명확인 회원제라니까요.
    덧글 파이팅을 보면 예술이죠 ㅋㅋㅋ

  7. 야옹이/ 어차피 쓸 사람은 뭔 일이 있어도 쓰고 별로 내키지 않는 사람은 아예 신경을 꺼버리게 되죠. 야옹이 글에 앙심품고 추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좋아서 스토킹을 하게될지도... ㅎㅎ
    자폐/ 장담컨데 실명제 된다고 '혼란'이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주민등록번호 '그까이거 대충' 남의 거 갖다 쓰면 되는데요 뭐... 이건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지 제도가 해결해주는 문제는 아닌 거죠.
    조커/ 덧글 파이팅이 사실은 게시판의 꽃이 아닌가 하거든요. 그걸 왜 막을라고 하는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