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국에는 "국장, 국민장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률이 있다. 이 법률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자가 서거한 때에 그 장의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하는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제1조 목적)

 

이 법에 의해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지게 되는 사람은 주무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게 되어 있는데, 그 결정에 따라 국장이 될지 국민장이 될지 달라지게 된다.

 

이 법률에 적용을 받는 사람은 "1.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자, 2.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 이다. 제3조에 규정되어 있는 이 적격자 중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국장 또는 국민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법으로 규정된 국장과 국민장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다만 국장 및 국민장을 치루기 위해서는 장의위원회가 구성되는데 그 안에서 어떻게 장의를  치룰지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 진행이 달라질 수 있다. 법에 규정된 차이라는 것은 첫째, 국장의 경우에는 장의비용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고 그 기간이 최대 9일까지 가능하다. 둘째, 국민장의 경우에는 장의비용 일부를 국고에서 부담하고 그 기간이 최대 7일까지 가능하다.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는" 분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에게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 공로와 업적을 생각해서라도 국가가 장례를 지원하는 것은 일정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국장 또는 국민장의 대상이 되어 알토란 같은 국민의 세금을 장례비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좀 찝찝하다.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 보다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고, 그 결과 "국민의 추앙"을 받기 보다는 국민의 원성과 비난을 산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조차도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로 국장 또는 국민장의 대상이 된다면 아마 많은 시간을 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을 거다.

 

예컨대, 전두환이 죽었다. 27만원짜리 인생이니 장례치룰 비용도 없을 것이고, 이 때 덜컥 국가가 나서 장례를 치뤄주겠다는데 그 집안 식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을 거다. 그러나 1212쿠데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였고,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찬탈하고, 수많은 공안사건을 만들어내 무수한 사람들을 고통속에 절규하게 했고, 녹화사업이랍시고 애꿎은 청년들을 군대로 몰고가 고생시키고, 삼청교육대 만들어서 멀쩡한 사람들을 망가트리다가 결국 민중의 궐기로 인해 권좌에서 물러났던 그 사람이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여길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만일 전두환이 죽고 국가가 나서서 국장 또는 국민장을 치루겠다고 하면 민주노동당은 국장반대 국민투표 서명운동을 해야할 판이 되는 건 아닌가? 아니면 당원 총진군대회를 국장일에 맞춰 장례행렬이 진행되는 거리에서 열고 이렇게는 못보낸다, 학살원흉에게 국장이 왠 말이냐, 하고 집회 시위라도 해야되는 거 아닌가?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언론 보도용 용어 또는 공식의전용 용어가 서거란다. 사망이라고 쓰고 싶다만 오늘은 기냥 이렇게...). 청와대를 비롯 삼부요인과 각 당 당수 및 각계 인사들이 구름처럼 빈소에 모여들어 분향을 하고 있다. 1212의 전말과 신군부의 정권찬탈 과정을 가장 지근에서 바라보았을 최규하 전 대통령은 그렇게 20여년 간을 입 꽉 다물고 살다가 끝내 아주 입을 다물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회고록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말이 쏠쏠 흘러나오고 있다. 입을 다물고 있던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입 대신 손으로 무언가를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8개월 짜리 대통령으로서 그가 얼마나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다가 세상을 떴는지, 별로 감이 잡히질 않는다. 오히려 군부독재체제의 일원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신군부의 발호에 대해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며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혹은 밀려난, 이 땅 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했던 영욕의 일신사로 인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서럽게 했던 사람, 거기에 더해 장장 4반세기 동안 떳떳치 못하게 입을 다물고 살면서 아프고 서러웠던 사람들에게 갑갑증만 일어나게 만들었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최규하다.

 

어쨌든 그 평가는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고, 오늘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 도의일 듯 싶다. 영욕의 생을 다 누리셨으니 윤회의 고리를 떨치고 해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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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2 19:37 2006/10/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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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녠장... 아침 뉴스 보니 회고록 안 썼다네... 따로 쓴 거는 없고 "워낙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니 뭐 정리하다 보면 나오지 않겠냐는 이야기... 에뤠이... 결국 뭐야, 편집하기 나름이란 거야? 결국 입 꽉 다물고 그냥 가버린 거야??

  2. 음... 주둥아리 닥친 댓가로 말년까지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님, '무서운 진실은 숨기는 게 이롭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을까?

  3. 전두환이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치욕감에 빠졌겠지만, 자신의 하소연이 결국 독재에 부역한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드러내보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겠지. 다 그런 거 아니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