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저하

가끔 글이 전혀 씌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블로그에 한 줄이라도 올려볼까 하는 의무감(!)때문에 마빡을 쥐어 짤 때도 있음을 고백하지만, 그래도 뭐 하나 제대로 글빨이 솟구쳐 오르지 않아 포기할 때도 있다. 뭔가 쓸만한 거리가 있어서 줄줄이 써나가다도, 도대체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장문의 글을 미련없이 날려버린 적도 많다. 아마 글 올린 횟수만큼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쉬는 거다. 어차피 허구헌 날 하는 짓이 글 쓰는 짓. 물론 블로그에 올리는 것처럼 쉽고 편안하게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매일 매일 이런 저런 페이퍼 몇 장씩은 써야하고, 그걸 쓰기 위해선 작성하는 분량의 최소 몇 십배는 뭔가를 읽어 제껴야 한다. 머리 속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릴만 한 거다. 그럴 때는 그저 블로그고 뭐고 글 올릴 생각을 말고 며칠이고 쉬는 것이 장땡이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이것 저것 하고자픈 말이 잘 생각난다.

 

행인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거다. 소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을 저지르게 되면 곳곳에서 많은 비판이 쏟아지게 된다. 니나 쉬면 되지, 남들은 그렇지 않다더라 하면 행인의 경험은 그저 한 개인의 습관에 불과한 일이 된다. 검은 고니가 발견되면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가 꽝이 되니까. 그런데 어차피 백(白)조는 흰 거 아닌가?

 

행인의 경험칙을 일반원칙으로 승화시키려는 이 음모는 행인 스스로 생각해봐도 별로 영양가가 없다. 그러나 행인과 같은 구라계의 인사들에게는 대충 이게 먹힌다. 과거 개구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갑제라는 분, 이분 요새 필력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동안 애국하시느라 머리 속에 모든 것을 애국의 길 한 길로 일렬종대 세워놓다보니 이제 써먹을 거 다 써먹고 했던 말 또하고 했던 말 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2일 총궐기 투쟁을 본 이 조갑제 옹의 소회는 이렇다.

 

"독재국가의 백성노릇보다 자유민주국가의 국민노릇 하기가 훨씬 어렵다"

 

사실 이분 사이트 조회수 올려주는 짓 하기 싫어서 그동안 어쩌다 이분 이야기가 나와도 링크를 걸지 않았는데, 이맘때쯤에는 한 번 걸어줘도 될 듯 싶다. 예전의 그 날카로운 문장력이 보이지 않는다. 노쇠한 논객의 힘든 모습을 보는 것은 같은 구라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인으로서 심히 보기 애처롭다.

 

이분, 이제 노무현 정권의 국민들을 자유민주국가의 국민으로 확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독재국가였던 박정희 정권 하의 국민들이 기껏해야 '백성노릇'이나 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요 부분만 보면 조갑제옹, 드디어 치매증상을 극복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충분히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좌익 좌파정권"이 배후조종하는 "좌익폭동"으로 22일 총궐기를 규정하시는 이분이, 노무현정부의 현 체제를 "자유민주국가"라고 규정하고 그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백성이 아닌 "국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표현 역시 이분의 정신세계가 아직까지도 근대 민족국가형성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지만, 어쨌든 이것이 진일보한 것인지 아니면 영구퇴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만 하다.

 

항상 이분의 논리구조 속에서 "좌익"은 결코 "자유민주국가"를 만들 수 없었으며, "좌익정권" 즉 빨갱이 정권은 독재국가의 독재정권일 뿐이었다. 그랬던 분이 왜 이렇게 갑작스레 중언부언하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신념체계와는 다른 표현양식을 사용하는 걸까? 역설의 미학이라도 깨쳤단 말인가?

 

구라계라는 동종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행인의 판단으로 볼 때, 이러한 현상은 이념의 혼선이나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필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글빨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 옛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박정희 각하의 말씀을 경구처럼 인용하면서 김일성 궁전에 땡크를 몰고들어가는 시원짜릿한 통일구상을 서슴없이 내놓던 그 갑제옹의 글빨은 이제 자기가 쓰는 표현이 자신의 신념체계를 배반하는 용어인 것조차 분간을 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분이 계속 구라를 깐다면 대한민국 우익, 앞날이 점점 요원해진다. 대~한민국 우익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한국 보수의 바이블 제조기 갑제옹의 필력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하여 좌파의 뻥구라와 우파의 개구라가 함께 진검승부를 펼칠 때, 한국 구라계의 앞날이 전도창창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탁하건데, 갑제옹, 이제 좀 쉬시는 것이 어떨지. 뭐 몇 년 쉴 필요도 없고, 기냥 한 한달 정도 푹 쉬시면서 박정희 각하 무덤에 침이라도 좀 뱉어주면서 그분의 소원성취에 도움도 주시고, 프라모델 땡크 하나 조립해서 미니어처 주석궁 때려부수는 오락도 좀 하시고, 뭐 이러시다보면 그 필력 왕성했던 예전의 모습을 좀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기냥 쉬는 것이 뭣하면 요즘 한창 개구라계의 전설로 등극하고 있는 지만원 옹에게 정신감정이라도 좀 받으시던가... 물론 그 길은 전혀 정 반대편에 서있긴 하지만 구라계의 발전을 진정으로 바라는 행인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갑제옹, 잠시 쉬시는 편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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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4 02:11 2006/11/24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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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그리고...

    좌우 뻥구라계와 개구라계를 합쳐서 '구라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용어를 조심할 일이다. 구라라고 해서 다 같은 구라가 아니다. ㅎㅎ

  2. 표현이 적날해서 그런가요~읽고 "구라,구라"~한참을 피식 웃었어요~구라계..^^;;

  3. 솔직히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게 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 매일 매일 이슈에 대해서 무엇인지를 쓰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 게다가, 그 부분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그렇다고 글을 쓰기 전에 조사도 하지 않고 ... 끍쩍이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진보니 좌파니 어떤 당의 당원이니 지지자니 뭐니 하는 말을 방패로 삼아서 ... 근거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 관계도 없고, 게다가 고심한 흔적도 없는 패악질에는 치라시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만이 ... 결국 조중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의 거울 속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런 비판, 혹은 비난으로부터 저 자신도 자유롭지는 않지만 ... ^^*

  4. 필력이 나빠지시기는요... ㅋㅋㅋㅋㅋㅋㅋㅋ

  5. 심슨/ 다 같은 구라는 아닙니다. ㅎㅎ

    손윤/ 뜨끔뜨끔 하군요. "자신을 진보니 좌파니 어떤 당의 당원인"하는 행인이 혹시나 "패악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

    pilory/ 제가 이 블로그의 청정지역화를 위해 욕설신공을 하지 못하니 아무래도 필력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인 거 같습니다. ㅎㅎ

  6. 손윤님 말씀 듣고 보니 저도 뜨끔;; 그나저나 진짜 다카키씨 무덤 가서 침 뱉으면 뭐라고 안 하려나요;; 해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