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술

고향 역전에는 구멍가게가 둘 있었다. 하나는 역전 바로 밑 술도가 앞집이었고, 또 하나는 거기서 조금 더 내려와 교회가 있는 언덕배기 밑에 있는 집이었다. 요 가겟집 둘째아들이 행인의 친구였다. 한 때, 지역은 물론 멀리서까지 조폭들이 스카웃을 해가려고 했던 전력이 있을만큼 주먹질이 좋은 넘이었는데, 술을 좋아하기는 해도 그닥 주량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무튼 놀기 좋아하는 넘들이다보니 이래 저래 쏘다니면서 사고도 많이 치고, 사고치는 것보다 더 많이 술을 퍼마셨다. 그래도 어른들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처지라 항상 뒷방 골방에 앉아 술을 퍼마시곤 했다.

 

시골에서는 봄 가을로 1년에 두 차례 혹은 한 차례씩 온 동네 어른들이 모여 관광차 대절해서 놀러가는 일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경운기 타고 근처 간현이나 동화 같은 곳에 물놀이를 가거나 용문산으로 천엽을 가는 정도였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모내기 후나 가을걷이 후에 아예 관광차 대절해서 멀리까지 다녀오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로 기억되는데, 부산가서 양아치짓 하던 이넘하고 우연하게 시골에서 조우를 하게 되었다. 마침 어른들이 모두 관광차 타고 떠난 바로 그날. 이건 철딱서니 없이 술 좋아하는 고삐리들에겐 집구석에서 대놓고 술을 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안 그래도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이넘 집이니만큼 쌓인 게 소주요, 널린 게 맥주였다. 가게 규모는 영세하다못해 말 그대로 '구멍가게'라는 이름이 실감이 날 정도지만, 어쨌든 그 안에 있는 술은 두 넘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것이었다. 자식들 술 마신 것에 대해서만큼은 넉넉하게 인심을 쓸 줄 알았던 어른들의 경향 상 그 정도 술 마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안방에 들어 앉아 술을 퍼마시는데, 처음에 같이 껴서 술을 마시던 그넘의 형님도 나중에 어디 간다고 가버리고, 둘이 앉아 시원시원하게 술을 마시게 되었다. 뭘 어떻게 마셨는지는 잘 모르겠고, 안주로 뭘 먹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암튼 그렇게 퍼마시다가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삐딱하니 방바닥에 드러 누운 채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던 중 행인의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이 친구 아버지께서는 술 담그는 것이 취미였다. 해서 온갖 과일주며 더덕주며 인삼주며 기타 등등의 담근 술병이 벽면에 그득하니 진열되어 있었다. 아... 저 술을 다 마실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부러움을 한껏 담아 진열된 술병들을 훑어보다가 눈이 딱 고정된 것은 바로 승룡의 기세로 몸을 한껏 꼰 뱀이 담겨져 있던 술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뱀술이었다...

 

살모산지 뭔지 이름을 듣긴 들었는데 뭐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고, 암튼 큼직한 술병에 노랗게 국물(?)이 우러난 그 술병이 계속해서 행인의 시선을 잡아 끌고 있었다. 다른 술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희안하게 행인의 관심은 그 뱀술에 꽂혀버렸고, 결국 참다 못한 행인, 그 술병의 개봉에 대해 진지하게 친구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다.

 

친구넘, 단호히 거부. 딴 거는 딸 수 있어도 저것만큼은 딸 수 없다는 것이 이녀석의 답변이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딸 수 없는 술이 두 종류 있다는데 하나는 오래 묵은 더덕으로 담근 더덕주와 바로 이 뱀술이라는 거다. 제안이 거부되고 머쓱해진 행인, 다시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한 순배 걸쭉하게 돈 다음인데, 그만 또다시 그 뱀술이 눈에 들어와버렸다.

 

저걸 꼭 한 잔만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온 몸을 후려치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참아내기가 어려운 거다. 해서 다시 친구넘에게 은근슬쩍 뚜껑을 따자고 제안했다.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번에는 좀 귀찮게 치근덕 거렸다. 몇 차례 그렇게 하자 이넘, 갑자기 성질을 내면서 "아 이 씨팍쉑퀴야~! 안 된다니까!"하고 소리를 친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고통도 감내할 준비를 이미 마친 행인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의 성질부림은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더욱 처연하게, 그리고 더욱 비굴(?)하게 친구넘에게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딱 한 잔"만 해보자는 거다. 저 큰 술병에서 겨우 소주잔 "딱 한 잔"만 퍼내는데 표시가 나겠는가? 내 이거 한 잔 마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평생 여길 것이며 니가 서울 올라오면 술 한 판 쎄게 쏘겠다는 등의 알맹이 없는 공약까지 남발해가며 친구넘에게 엉겨붙는 행인이었다.

 

건달패로 성장하면서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를 것 같던 이넘이 아버지를 그렇게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좀 새로운 것이었지만, 행인의 뱀술에 대한 집요함은 결국 이넘의 두려움을 점점 더 무력하게 만들어 갔다.

 

결국 친구넘과 합의를 본 것은 행인만 딱 한 잔을 마신다는 것. 감격한 행인, 후다닥 부엌으로 나가 국자를 들고 들어왔고, 한 방울이라도 샐 새라 조심조심 뚜껑을 개봉하여 될 수 있는 한 소주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술 한 잔을 덜어 내자 친구넘은 후다닥 병을 밀봉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에 올려놓았다.

 

이 술 한 잔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감격과 흥분에 휩싸인 행인, 얼른 홀짝 마셔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면 결국 한 잔의 기억으로만 남을 것임에 분명한 것이고, 어쨌든 이 한잔을 종잣돈으로 해서 저 술을 맘껏 마셔보기 위해서는 뭔가 작전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소주잔에 담긴 뱀술의 빛깔은 말 그대로 황금빛이었다. 그 묘하고 투명한 노란색, 마치 빛이 나는 듯한 그 느낌...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친구넘이 왜 안마시고 그러고 있느냔다. 너무 아까워서 마실 수가 없다고 이야기해줬다. 이 빛깔을 봐라. 이 냄새를 맡아봐라(솔직히 냄새에 대해서는 별 기억이 없다). 너는 이 술을 그렇게 쉽게 마실 수가 있겠냐. 뭐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소주잔에 담긴 뱀술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았다.

 

눈치보는대는 일가견이 있던(?) 행인, 친구넘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잔을 들어 찔끔찔끔 술맛을 보았다. 그러면서 연신 술맛에 대한 찬양을 계속했다. 그 맛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다만 어디서 줏어 들은 이야기는 있어가지고 뱀술이 몸에 좋다(!)는데 맛만 봐도 그럴 것 같다는 둥 하면서 뻥을 까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데, 이넘이 갑자기 은근한 목소리로 "야, 나도 맛 좀 보자"라고 한다. 드디어 걸렸구나...

 

행인 : 그건 안 되쥐. 이거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니가 하도 난리를 쳐서 나만 먹는 걸로 한 건데, 니가 같이 마셔버리면 그건 약속을 어기는 거 아니겄어?

그넘 : 아니 그 쉑... 이건 마 우리 아부지거아녀. 그럼 그 아부지의 자식인 내 거고. 그럼 이건 내 건데, 임마 내걸 내가 좀 마시겠다는데 쫘샤.

행인 : 아, 그러니까 니건 니가 마시고, 이건 니가 나 줬으니까 내거 아닌가? 그럼 내가 마시고.

그넘 : 안돼, 저건. 더 퍼내면 집구석 또 난리나니까 절대루 안 된단 말이다. 그러니 니 거 좀 마시자.

행인 : 쒸... 난 이걸로도 모자란데, 니 얼굴 봐서 여기까지로 참아줄라고 하는 거잖아. 근데 그걸 또 도로 가져가냐? 얌마, 줬다 뺏으면 똥구멍에 털난다더라.

그넘 : 기왕 난 거 좀 더나도 상관은 없는데, 아... 그 쉑히 그거, 정 그러면 떠들지 말고 조용히 처먹던가.

행인 : 그러지 말고 너도 한 잔 해라. 소주잔 한 잔이나 두 잔이나 뭐 차이도 없고, 잔도 부딪쳐야 맛인데 나만 홀짝거리기도 그렇고 하니까, 너도 딱 한 잔만 해라.

그넘 : ...

 

결국 이넘이 큰 결심을 하고 말았다.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뱀술병의 뚜껑을 연 것이다. 그리곤 지 잔에 한 잔 퍼 내고 말았다. 물론 잽싸게 다시 뚜껑을 닫은 술병은 원위치.

 

희희낙락 하면서 둘이 뱀술을 한 잔씩 했다. 오오... 이 기분이여... 술맛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일단은 소원성취의 일보를 내디뎠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친구넘은 맛이 어떤지 별로 말이 없다. 야, 이게 말이야 한 잔 가지고는 도저히 맛을 알 수가 없구나. 그러니 한 잔만 더 하자. 다시 망설이던 친구넘, 무슨 생각이었는지 다시 한 잔씩만 더 하잔다. 그러면서 뱀술병을 선반에서 내려왔다.

 

한 잔만 더 하자는 말처럼 공염불이 없다.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하자고 해놓고 딱 한 잔만 하고 나오는 인간은 무척 드물다. 이건 거의 공식적인 건데, 뱀술을 앞에 놓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하~! 이게 이 맛이구나, 하면서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결국 방바닥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깨나보니 벌써 저녁나절인데, 어른들이 올 시간은 되어 가고 슬슬 집에 가야겠다 하고는 친구넘을 깨웠다. 비몽사몽간인 친구넘에게 나 간다고 이야기하고 나올려는데, 가게문을 열고 문턱을 넘는 순간 갑자기 이넘이 행인을 불렀다.

 

그넘 : 야 이 쉑아... 지금 이 뱀술 니가 다 먹은 거냐?

행인 : 얼씨구, 임마 나만 먹었냐? 너랑 같이 먹었잖아!

그넘 : 어... 이런 *&%*, X됐다...

행인 : ...

 

분위기가 이렇게 급랭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뱀술의 분량에 있었다. 한 잔만 하자고 했던 뱀술은 물경 3분의 2가량이 줄어들어 있었던 거다. 술이 취해 정신이 없던 행인과 그넘, 마음은 급하지 개념은 상실되었지 이를 어찌해야하나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차린다고 물을 먹으러 나갔던 그넘이 갑자기 유레카를 외쳤다.

 

원래 울 시골은 물을 다 길어먹는다. 지하수가 워낙 좋아서 집집마다 펌프를 쓰고 있었고, 해서 서울사람들처럼 보리차나 다른 엽차종류 같은 것을 끓여서 마시는 일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하필 이날 무슨 일이 되려는지 그 집 주전자에 시원하고 진하게 끓여진 보리차가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유리컵에 받아본 보리차의 빛깔은 뱀술의 빛깔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천우신조가 있는가 하면서 그넘과 행인은 뱀술병에 보리차를 따라 붓기 시작했다. 적절하게 높이를 맞춘 술병을 원위치에 놓고 나니 뱀술과 비교해도 전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을 적절하게 처리했다는 만족감을 가지고 그넘은 다시 뒤비 자기 시작했고, 행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얼마 후...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놈 집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뱀술은 사라지고 뱀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알콜에 푹 불은 뱀을 맹물에 담궈놓았으니 이 뱀의 살이 풀어져버리고 흐물흐물해지면서 결국은 살점이 술병 안을 둥둥 떠다니게 된 것이다. 언제나 선반에 진열된 담근 술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친구넘의 아버지, 문득 뱀이 완전히 분해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의 효과를 내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 때 이미 행인은 서울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친구 아버지로부터의 응징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속히 떠나야 했던 친구넘은 직장을 짤리는 한을 남김은 물론, "100배로 갚아라"고 명한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그 때부터 팔자에 없는 땅꾼 노릇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뱀술 먹고 뭐 좋아진 것같지는 않다만, 아마 그넘, 뱀잡으러 다니면서 몸은 좀 튼튼해졌을 것이다. 지금 그넘은 넘치는 힘을 주체못하면서 아직도 양평 언저리에서 트레일러를 몰고 다닌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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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6:17 2007/01/1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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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ㅎ 넘 재미있어요.

  2. 님의 파란만장한 과거사는 정말... 최고ㅋㅋ~~

  3. 황금빛!!!그거 마시면 72시간 동안 효력이 지속 된다는...장인어른이 두 잔만 마시랬다가 2/3병을 함께 비웠는데..약효를 익히 알고 있었던 장인어른 왈 "할멈, 우린 뒷방으로 가자고" 여기서 울 마누라 "엄마~ 가지마~"결국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날밤 새벽 4시까지...

  4. 마음의 평화/ 감솨함돠~~ ^^

    토토/ 파란만장만 하지 최고까지는...(쑥스...) --;;;

    민주애비/ 헉... 그런 효능이 있단 말입니까... 조심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