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기록"

왠만한 집회판마다 보이는 분이 있다. 로맨스 그레이, 별로 티나지 않는 캐주얼한 옷차림, 매우 편안한 얼굴의 아담한 체격, 어깨에 카메라 가방과 큰 카메라 두대, 그리고 손에 또 하나의 카메라...

 

항상 혼자 오는 것 같다. 누구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발견하면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댄다. 그리고는 또 조용한 얼굴로, 작은 눈에는 하나가득 연민을 담고 사방을 둘러본다.

 

집회판의 사진사로 기억되는 분은 다름 아니라 조세희님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 솔직히 이 책 단 한 번 읽고 다시는 꺼내보지 않았다. 한 번 읽으면서도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책 쓰신 분이었다. 언젠가 카메라 들고 다니는 반백의 노인네가 조세희님이라고 누군가가 알려주었을 때, 저렇게 조용하게 생긴 분이 어떻게 그렇게 아픈 글을 썼을지 궁금했다.

 

"난쏘공"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실 어렸을 때 바로 우리집, 옆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난쏘공"을 읽으면서 아팠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슬프고 아팠던 기억들을 온 것 그대로 꺼내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경 10년도 훨씬 전에 그 책을 읽었는데, 그 힘든 기분이 전혀 가시지를 않는다.

 

희안한 것은 그 책의 내용도 그닥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읽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기억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 어릴적의 기억을, 그것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도로 꺼내놓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난쏘공"이 200쇄를 돌파했다는 기사가 떴다. 이 소설이 아직도 읽힐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기록이라서일까, 조세희님은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이야기했다. 하긴, 뭐가 바뀌었는가?

 

전태일선배가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봉제공장의 열악한 환경은 아직도 현실이다. 철거로 쫓겨나는 사람, 밑바닥을 전전하다 결국은 목숨을 끊는 사람들처럼 "난쏘공"이 아프게 그렸던 그 사람들이 오늘도 무수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너무 슬프고 아프다. 다시 힘이 든다.

 

어쨌든, 그것이 "부끄러운 기록"으로 계속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350만 농민이 죽음의 행렬을 이어가고 850만 비정규직이 그 뒤를 잇는 이 현실. "난쏘공"이 과거의 추억으로 회상되지 못하고 그 200쇄가 "부끄러운 기록"으로 전락하는 이 암담한 현실은 뒤집어져야 한다.

 

조세희님을 계속해서 집회판에서 뵐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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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2 18:02 2005/12/0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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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5/12/03 01:40

    행인님의 ["부끄러운 기록"] 에 관련된 글. 이메일도, 휴대폰도 안쓰는 조세희 선생님이지만 카메라는 두대씩 메고 다니십니다. 볼 때마다 선생님 '이 사진 언제 다 발표하실라고 맨날 찍

    • Tracked from
    • At 2005/12/03 12:19

    행인님의 ["부끄러운 기록"] 에 관련된 글. ‘난쏘공’ 사상 첫 200쇄…조세희 “30년전 불행 아직도 안끝나”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143&article_id=0000004951&s

  1. 야아~~~!!! 조세희 님이 집회에서 사진을 찍고 계셨다니... 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감회가 새롭네요. 조만간 난쏘공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행인님 감기 조심하시구려*^^*...

  2. 이재유/ 앗, 저는 거의 매번 집회판에서 뵙는데요... 뭐 물론 조세희님이냐 제가 누군지 전혀~~ 모르시겠지만요 ㅋㅋ 말씀도 못붙여보고 그저 인사만 하고 있습니다. 감기조심하시구요~~ *^^*

  3. 언젠가 조세희 선생님이 사진찍는 모습을 내 디카에 담았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글을 읽고 나니 블로그에 올려 두고 싶은 생각이...ㅎㅎ

  4. 조세희님이 오늘 아침에 손석히의 시선집중에 전화 인터뷰 나오셨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어찌나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던지. 속이 다 시원하지 뭡니다. 라디오에서 농민의 노동자의아픔하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넘 반갑웠죠. 담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건강하셨으면 좋겠단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이상하게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났답니다. 그런 예술가가 있어서 고맙단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