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전엔 일본과, 이젠 미국과...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1876년 조선과 일본 간에 이루어진 강화도 조약의 조문 중 일부(각 5조, 7조, 10조)이다. 공식명칭이 "조일수호조약(또는 병자수호조약)"으로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 메이지 정부가 조선과 체결한 이 조약은 대표적인 불평등조약(unequal treaty)이었다. 식민지 확장 및 그 지배를 위해 구미열강이 사용했던 이 조약체결의 방식은 상대국가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게 하는 대신 자국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 절차적 과정이었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이 편무적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일본에 병탄당하면서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 그 사이에 강화도 조약 제5조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 3개 항구를 개방한 조선은 제10조에 따라 개항장은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 이외의 장소에서도 일본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여야 했다. 제7조에 의해 실행되었던 일본의 조선 연근해 해안측량사업은 이후 만주전쟁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에서 일본군의 작전수행에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하였다.

 

일본이 조선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은 원래 구미열강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던 시절에 이미 일본이 겪었던 것들이었다. 1853년, 흑선을 몰고 와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 동인도함대 페리제독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던 막부는 결국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2개항 개항과 영사의 주재, 치외법권 등 일방적 최혜국 대우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받고 있던 막부들은 미국 이후에 연달아 개항을 요구하는 영국, 네델란드 등에도 미일화친조약과 거의 같은 수준의 화친조약을 맺는다. 페리가 개항을 요구했을 당시, 당황한 막부는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는 등 기존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실상 개항이라는 사건은 일부 항만의 개방과 통상의 허여라는 표면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막부시대 그 자체를 종식시키는 일련의 계기가 되었다.

 

개항 여부를 둘러싼 정치세력 간의 다툼은 결국 중앙정부의 권력강화를 요구하는 소위 '유신지사'들의 활동을 정당화 했으며, 그 결과 대정봉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본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근대로 접어들게 된다.

 

근대화라는 시대적 조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일본정부는 폐번치현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진행한 후 기존 막부들에 의하여 체결되었던 각종 조약들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근대공업국가로 진행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전력하기 시작했던 일본으로서 구미제국들의 압력과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관세자주권 회복을 위해 진행했던 미국과의 교섭은 조인단계까지 갔음에도 영국, 독일 등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로부터 또 수년이 지난 후인 1892년에 가서야 일부 불평등한 내용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영국과 일영통상항해조약을 조인하게 되었고, 1899년에는 미국, 독일 등 다른 나라들과 이에 준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일본의 관세자주권 회복 등 기존 불평등조약 내용의 완전한 개선은 1911년에 가서야 완료된다.

 

1854년 페리와 맺었던 불평등조약으로부터 시작해 구미제국들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내용을 해소하는데 일본이 소요한 시간은 물경 반세기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특유의 치밀함과 인내심으로 반세기라는 시간의 장벽을 뛰어 넘어 구미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와 국가 간에 이루어졌던 불평등 조약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만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각 국가간 자유무역협정, 그것도 미국의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FTA는 국가와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조약이 아니라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자본과 국가가 조약을 맺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 지구적으로 진행된 상황에서 자본은 이제 군과 경찰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일국 정부와 동등한 권력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FTA 체결을 위해 회담장에 나선 미국정부 대표들은 그들의 직함만 정부대표일 뿐 손에는 자본이 쥐어준 계약서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자본은 한 국가의 주권과 민주주의를 완전히 희생시켜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다. 독점재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알량한 "민족자본" 운운하면서 지키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살 수만 있게 해달라는 절박한 요구를 들고 거리로 나왔던 농민과 노동자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정권과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는 본질적으로 인간성의 파괴를 담보로, 인민의 피를 재물로 삼아 자본의 살을 키우기 위해 진행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안에는 그나마 국가라는 경계 안에서 자국국민들의 보호막 역할을 해왔던 정부의 권한마저 얼마든지 박탈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칼이 들어 있다. 단순히 국가와 국가 간의 일반적인 통상조약이 아니라 자본 앞에 정부의 권한을 내려 놓아야 하는 불평등한 조약이 FTA다.

 

일본이 반세기에 걸쳐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이 불평등조약을 해체시키기 위해선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 암담해진다. 아니, 현실은 이보다 더 암담하다. 일본은 불평등조약 아래서라 할지라도 정부의 권한행사를 할 수 있었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자고 요구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런데, 한미 FTA가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맞춰 진행될 경우 일본처럼 일정한 발전단계를 거치면서 재개정을 요구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열악해지지는 않을까? 멕시코는 어떨까? 캐나다는? 호주는? 한국은? 또는 한국의 인민은?

 

FTA를 밀어부치면서 시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옹색하다.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보다 먼저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주장 역시 그렇다. 문제가 있었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그 문제가 중차대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된다. 그렇게 못하겠다고 우긴다면 끝내 반대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강화도조약보다도 더 불평등한 협정이 맺어진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정치외교적 능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의 모든 제반 물적조건이 19세기 이전만도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덧글 :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국민투표"는 자칫 덫이 될 수 있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한미 FTA가 외교 또는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일 수는 있으나 요건 상 대통령이 이를 국민투표에 부의하지 않으면 국민투표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국방 및 통일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칠 미군의 전략적유연성인정이나 평택미군기지 확장 문제조차 국민투표는 생각지도 하지 않은 노무현 정권이 이를 할리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일 국민투표가 이루어져 한미 FTA를 한다고 결정되면 그것을 그대로 따를 것이냐다. 더 나가 국민투표로 가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발 물러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잘못된 것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끝내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노무현이 먼저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주장하더라도 이건 국민투표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9/15 05:13 2006/09/15 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