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한 평가

2005년 1월 12일. 용산구민회관에서는 민주노동당 제5차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진행을 맡아서 참석한 중앙위원들의 등록접수를 하는 등 소소한 일을 하는 것이 오늘의 업무였다. 시간이 흘러 개회가 선언되었는데, 얼굴 익은 기자들이 속속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봤더니 비공개란다.

 

이유는 의제가 많아서라는데 이건 진짜 웃기는 변명이다. 의제가 많으면 기사거리가 풍부하다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오히려 기자 대환영이라고 플랙카드라도 써 붙여 놔야 정상인 거 아닌가? 당 선전하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딨다고 그래 이 기회를 내질러버리나? 말로는 대중정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중하고 멀어지는 짓거리만 하고 있다.

 

그래 도통 궁금한 거다. 뭐가 문젤까? 한 옆에서는 비공개 자료를 배포하고 있었다. 중앙위원들에게 사인을 받고 배포하면서 회의 종료 후 반납하라고 주문을 했다. 뭔 내용이 있었길래 그렇게 조심조심 다루는 것일까? 대충 눈치는 잡히는데 아직까지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므로 떠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그 비밀스러운 자료도 비공개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번 중앙위원회 안건 중 매우 격렬한 논쟁이 오고갈 부분이 있었다. 더 나가서는 정파대립구도로 판이 돌아갈 수도 있는 그런 의제들도 있었다. 구체적인 것은 이후 생각날 때마다 하나 둘씩 이야기하겠지만, 그러한 민감한 문제들을 기자들에게 공개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당 지도부에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되려 사건을 키우는 결과로 나타날 거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회의 처음부터 끝까지 비공개라는 것은 좀 납득이 가질 않는다. 해서 뭐가 문제일까 하는 마음에 회의자료를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좀 낯뜨거운 부분을 보게 되었다. 다른 내용들은 차치하고라도 당원인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내용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개가 꺼려질 수밖에 없겠지.

 



이번 중앙위 회의문건에서 정말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2004년 하반기 투쟁평가였다. 이 평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오직 이거 하나다. 지금 뭐가 뭔지 모르고 있군... 주객관적 정세의 판단은 물론 자아비판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오류 투성이다.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갑갑할 정도다.

 

다음은 하반기 투쟁 평가 중 "성과" 부분에서 발췌한 것이다.

 

일관되고 원칙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자 서민의 정당, 진보정당으로서의 당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였다.

○ 이러한 투쟁을 통해 비정규 노동법 개악안은 실질적으로 저지시켰으며, 국가보안법은 완전폐지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국가보안법을 전국적 쟁점으로 만들고, 민주노동당이 유일진보세력임을 과시하였다. 이와 함께 농민대중의 쌀수입개방 반대투쟁에서 당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여론의 역풍이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공무원 노동자들의 기본권 쟁취를 위해 투쟁함으로써 농민, 공무원 등 기층대중의 당에 대한 지지도를 높이고, 향후 당의 조직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파병연장 동의안 저지투쟁, 사회적 소수자 권익보호투쟁 등 다양한 투쟁을 앞장서서 전개함으로써 당의 위상과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성과를 가져왔다.

 

히야~! 민주노동당, 2004년 하반기 동안에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해냈단다. 갑자기 가슴 뿌듯해질라고 그런다. 그러나 뿌듯해지던 가슴이 갑작스레 뻐근해지면서 심장박동이상과 호흡곤란증세가 일어날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평가, 이거 낯뜨거운 대로변 자위행위다. 숨막히기 전에 분석은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다음으로 투쟁 평가 중 "한계"부분부터 발췌해서 보기로 하자.

 

○ 객관적인 조건과 역량상의 한계는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국가보안법폐지와 공무원노조에 대한 여론, 원내 10석의 한계 등, 주객관적인 요인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정치협상에 정국이 좌우되는 조건을 뚫고 정세를 주도하지 못하는 근본 한계로 작용하였다.

○ 비정규투쟁, 국보법 투쟁 등 당의 중심적 투쟁과제를 중심으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파병한저지, 쌀수입 개방저지 투쟁 등을 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해 정치적 성과를 남기는 방향으로 역량이 제때, 효율적으로 배치되지 못하였다.

핵심투쟁에 힘을 집중하면서도 사회적 현안과 민생개혁과제 등에 대해 기민하게 대처하는 기동성,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성과와 한계의 내용을 동시에 들여다보자. 이게 정말 제대로 된 인식에서 주객관적 정세를 파악하고, 자기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내린 평가인지. 정말 그런가? 이거 일일이 다 설명하려면 시간 걸리고 스크롤 압박 장난 아닐 것 같아서 하나만 이야기 한다. 일단 다음 두 대목을 비교하자.

 

"국가보안법을 전국적 쟁점으로 만들고, 민주노동당이 유일진보세력임을 과시"

"국가보안법폐지와 공무원노조에 대한 여론, 원내 10석의 한계 등, 주객관적인 요인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정치협상에 정국이 좌우되는 조건을 뚫고 정세를 주도하지 못하는 근본 한계"

 

유일진보"정당"이었겠지. 오타일까? 급하게 자료집 만드느라고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라고 봐야하나? 유일진보"세력"이라니? 게다가 가관인 것은 국가보안법을 전국적 쟁점으로 만들었다는 부분이다. 이건 자화자찬을 넘어 아전인수다. 국가보안법을 전국적 쟁점으로 만든 것은 열우당과 한나라당, 이 두 보수정당이었고, 그 과정에 불을 지른 것은 노무현이었다.

 

지난 투쟁에서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전국적" 투쟁에 일부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은 '국보폐지국민연대의 원내 파견대'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기획은 완전히 거세당한채, 국민연대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 전술을 구사하는데 바빴고, 그것이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 올인" 이라는 투쟁 방향을 낳게 되어 결국 "사회적 현안과 민생개혁과제 등에 대해 기민하게 대처하는 기동성,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로 귀착되는 것이다.

 

이런 평가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도도 감지덕지한 평가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2004년 국보철폐투쟁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도대체 어떤 기획을 내놓고 달려나갔나? 이들이 내놓은 기획은 "국가보안법 연내철폐"였으며 "열우당 2중대"였다. 이 와중에 "국가보안법 완전철폐"라는 애초의 당론은 유야무야되었으며, 유일진보"정당"으로서의 모습은 실종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국가보안법 완전폐지는 이루지 못"하게 되는 거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민주노동당, 주체적인 측면에서 국가보안법 "완전철폐"를 전국적 쟁점으로 만드는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유일진보"정당"의 모습도 보이지 못했다. 이걸 제대로 평가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없다. 그러면서 여론과 소수의석, 거대정당들의 야합을 탓하고 있다. 가관이다. 원칙을 상실한 사람들이 누구 탓을 하나?

 

무척 할 말이 많다만 더 했다가는 손꾸락이 뽀샤질까봐 못하겠다. 이런 간지러운 평가서 내놓고 쪽팔리니까 기자 내보내는 짓 하는 거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낼 아침 기자회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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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3 01:42 2005/01/13 0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