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축구는 이 맛이야~~!!

오늘 베트남과 월드컵 지역예선 2차전 축구가 있었다. 자다가도 축구라고 하면 벌떡 일어나는 행인이 장시간의 회의를 하다가 후반전이 다 끝나갈 때쯤 경기를 보게 되었다. 이런 줸장...

암튼 한 10여분간 경기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사람이 모자라 보였는데 한 명이 퇴장당해서 10명이 뛴거란다. 퇴장 당한 선수가 차두리란다. 흠... 왜 그랬을까나... 상대편 선수는 살았나?? 우리의 최전방 수비수(?) 차두리, 아깝다...

 

암튼 잠깐 본 축구지만 우선 느끼게 된 것은, 잔디가 놀라울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거다. 잔디의 길이가 일단 너무 길고, 그나마 잔디가 일직선으로 쭉쭉 뻗은 것이 아니라 석달 열흘 머리 안감아서 까치가 집을 지은 맹구 머리털처럼 서로 엉켜붙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울 선수들 차라리 맨땅에서 공차는 것이 훨씬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얼핏보기에는 촘촘하고 파란 것이 좋은 잔디처럼 보이는데, 상황은 영 말이 아니었던 거다.

경기한 곳이 호치민이라는데, 아마도 오전에 깎은 잔디가 경기시간쯤 되어 그만큼 자라올랐나보다. 그동네 풀 진짜 잘자란다. 쑤욱쑥...

 

푸른 잔디구장 위에서 공차는 선수들을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행인도 잔디구장에서 공을 차본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허구헌 날. 행인이 축구선수였느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다. 취직한 공장에 넓디 넓은 잔디구장이 있었던 것이었다. 공 차는 맛이 나던 그런 때였다. 이 잔디구장에서는 흔하게 축구경기가 열렸다. 각 부서들끼리 친선으로 공도 차고, 때론 공장장배쟁탈전도 열리고, 가끔은 전사체육대회 예선전도 열리는 등 각종 다양한 축구경기가 수시로 열렸던 거다. 물론 조기축구도 하고...



체육대회가 있었다. 역쉬 주 종목은 축구. 뭐 딴 거 할 게 없었기도 했다. 암튼.

생산과와 경기가 있었는데, 원래 이 팀이 그렇게 축구를 잘 하는 팀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행인이 소속된 기술실이 공을 매우 잘 차는 편이었다. 울 공장의 대표선수 중 1/3이 기술실 소속이었으니까. 물론 그 때는 행인도 한 축구 해서 그 속에 꼽사리를 낄 수 있었다. 사실은 후보였다. 흠흠...

 

어쨌든 그 체육대회의 백미, 생산과와 축구 시합. 뭐 공인된 체육대회도 아니었고 부서간 친목도모를 위한 토요일 오후의 한판 놀이였기 때문에 긴장감이 돈다거나 어쩌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 시합인데, 머리 당 만원빵의 내기를 걸고, 경기 중 음료수는 기술실이, 다른 먹거리는 생산과가 내기로 하고 한 참 재미나게 뛰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선배들이 전날 뭔짓을 했는지 제대로 뜀박질을 못했다. 동기들이 꽤 있어서 그럭저럭 버티기는 하는데, 주전멤버들이 다리에 힘들이 풀려 제대로 뛰질 못하는 통에 전반을 지고 말았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출전의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후반을 뛰지 않겠다고 뒤로 빠지고, 그렇잖아도 전반에 지고 있는 통에 패전의 기색이 점점 더 짙어가는 분위기였다.

 

동기들끼리 모여서 궁시렁 거리고 있다가 전반종료 휘슬과 함께 운동장을 빠져나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땀에 흠뻑 젖어서 뭔가 셔~언 한 것을 찾고 있는데, 기술실 동료들이 준비한 음료수는 맥주와 막걸리였다. 땡볕에 45분 공차고 들어가 기진맥진한 인간들에게 물은 안주고 맥주와 막걸리라뉘...

 

물을 찾아 먹고 나서 후반을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탈출하며 만원빵씩 걸린 판돈을 어떻게 하면 뺏기지 않을까와 만일 졌을 때는 그렇잖아도 비겁하게 뒤로 빠진 선배들에게 경기에 졌다고 한달은 욕을 먹을 생각을 하자 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에라, 이렇게 된 바에야 막걸리나 마시자.

 

그런데 기술실 사람들과 션하게 막걸리 한 사발 할라고 했는데, 벌써부터 선배들의 쿠사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가 니 나이때는 온 운동장을 혼자 다 마크했다는 둥, 죽만 먹고 살아도 니들보다는 잘 뛰겠다는 둥 벼라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이 이런 쓰벌... 같이 술마시고 싶은 생각 역시 싹 사라져버렷다. 에라, 저 쪽 가서 마실란다.

 

어차피 막간 음료수는 기술실이 내기로 했던 거라 인심쓰는 척하고 맥주와 막걸리를 딱 반분해서 생산과 쪽으로 가지고 갔다. 갔더니 이쪽에서는 대환영~! 어차피 자신들이 이기고 있던 터라 분위기가 한없이 업되어있던 상황이었고, 전력을 비교해봐도 후반전에서는 큰 힘 쓰지 않고 이길 것이 분명했던 판이기 때문에 패전주자들의 방문이 항복사절의 방문처럼 느껴졌나보다.

 

환영을 받자마자 행인도 기분이 업되어버렸다. 아싸, 오늘 봐 하니 기술실이 이기긴 애저녁에 틀린 일이고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술이나 퍼지를라고 왔다고 기염을 토한 후 막걸리와 맥주를 좌로 우로 돌리기 시작했다. 해저문 소양강에서부터 비내리는 호남선을 타고 낙동강 강바람을 맞은 후 부산갈매기랑 한바탕 놀아 제끼고 대전발 영시오십분에 몸을 실어 제3한강교까지 와버리자 생산과는 마치 잔치판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되어버렸고, 금새 막걸리와 맥주가 동이나버렸다. 흥에 겨운 생산과 직원들 술 떨어질 눈치를 채고 잽싸게 매점으로 달려가 또 맥주를 두어박스 사오고, 목마른 선수들과 후보들 응원단 할 거 없이 마시고 노래부르고 난리가 났다.

 

원래 15분을 쉬기로 했던 휴식시간이 후딱 30분을 넘어섰고, 축처진 기술실 쪽에서는 자기 근무처 내버려두고 생산과 가서 온갖 분위기 다잡고 있는 행인을 보면서 뭐 저런 썩을 놈이 다있나 하는 매서운 눈총을 보내고 있었건만, 이미 절정의 분위기를 타고 있었던 행인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두만강 푸른물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심판이 결국 얼른 경기 시작하자고 재촉을 하고서야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술기운에 운동장에 들어선 행인, 그리고 풀이 죽어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아군들.

동기들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이 씨바쉐이야, 지금 니가 선배들 가슴에 염장을 지르냐?"

"내비둬라, 어차피 놀러 나왔지, 우리가 뭐 국가 대항전 하고 있냐?"

이번에는 선배들의 쿠사리.

"이 정신나간 넘아, 니가 지금 혼자 기분낼 짬밥이냐?"

뒤통수도 한 대 맞고... 지은 죄가 있으니 선배들에게 게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시작 후 약 10분간은 역시 생산과의 압도적인 우세. 겨우 겨우 골을 막기에 바빴고 패색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10분이 지난 후부터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생산과 직원들이 20미터를 제대로 못 뛰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땡볕에 전반 45분을 죽자고 뛰었는데, 쉬는 시간에 노느라고 힘 다빼고 게다가 술까지 그렇게 퍼마셨으니 숨이 차고 눈이 풀려서 제대로 뛸 수가 있나? 그렇기는 행인도 마찬가지였다. 행인이라고 뭐 용가리 통뼈겠냐? 결국 행인은 후반 15분 후에 교체되고 말았다.

 

문제는 생산과에 교체선수가 없었다는 거다. 이 회사에는 사료생산1, 2과와 식용유 생산 1, 2과, 그리고 식용유 포장반이 있었는데, 그날 경기 상대는 식용유 포장반이었다. 식용유 포장반은 여사원들이 많고 남자 사원들이 거의 없었는데, 경기에 뛰는 선수들이 남자 사원들의 거의 다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교체선수들이 없으니 그 다리풀린 선수들이 후반 45분을 뛰어야 했는데, 술먹은 다리로 뛰다보니 후반 30분이 넘어가면서 제풀이 쓰러지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결국 후반전에만 5골을 넣은 기술실. 이건 뭐 축구가 아니라 거의 거저먹기였다. 골기퍼 혼자서 무슨 수로 축구를 하나???

 

기어코 대승을 거둔 기술실. 그리고 생산과에 가서 술을 퍼먹인 행인은 승리의 주역이 되고야 말았다. 행인의 깊은 심사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행인 덕에 승리를 거머쥔 기술실의 구성원들. 결초보은하는 심정으로 그날 밤이 새도록 행인에게 술대접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 축구는 바로 이 맛에 하는 거다. 그날 잔디구장에 밤이 새도록 거름을 듬뿍 듬뿍 주었던 행인이었다. 승리의 짜릿한 쾌감을 맛보면서...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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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9 00:18 2004/09/09 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