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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과 책임감.

  • 등록일
    2007/04/24 04:23
  • 수정일
    2007/04/24 04:23

뭐, 나라는 놈이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사람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글이 길어질 것 같아 트랙백으로 연결합니다.

그렇다고 상담이나 조언따위는, 더군다나 그토록 싫어하는 오만한 해석은 아닌, 전혀 다른 이야기니 상관없겠지...

 

관계는 바다와 같아서.

해변가 모래사장에 앉아 물끄러미 처다보면 한없이 그리운 비린 내음이지만.

막상 조금만 깊은 곳에 들어가도, 그 육중한 진동과 차가운 냉기에 한없이 허우적거린다.

평생 허우적 거리다 힘떨어지면 끝도없는 심연속으로 가라않거나,

운이 좋아 다시 해변으로 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그리워진다.

 

또 관계는 우주와 같아서

어차피 타자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기껏해야 인정투쟁 또는 생존투쟁같은 건데.

왜냐하면 관계란 놈의 서로 끌어당기는 유혹과 멀어지려는 탈주의 욕구의 중력장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근거리에 있는 관계라 할지라도 적나라한 현실은 불균등한 권력모순에 다름 아니다. 마치 지구와 달처럼.

 

따라서, 주변 근거리에 있는 관계속에서 서로 상처주고 상처입는 것은 너무 당연한 물리학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허우적대는데 사람들은 또 나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언제라도 불러내 밤을 찢을수는 있지만, 맹목적으로 찡얼댈수 있는 또 다른 대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다. 

 

"다 쓸데없는 일이야"라며 말과 마음을 닫아봐야, 그것 역시 저항과 탈출이라는 행위가 품어내는 극렬한 연쇄반응에 직면한다.

결국 죽음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꿈이다.

 

이 얼마나 불우한 생인가..

 

생각해보니 대학에 들어간 이후, 내게는 준거집단이 딱 두개밖에 없었다.

학교다닐땐 동아리, 졸업하고는 지금 앉아 있는 이곳.

많지는 않지만, 그 곳들에서 어떤 관계는 보는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인 것도 많았고, 또 어떤것은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런 극렬한 욕망투쟁을 겪고 지나고 나니.

한때는 그립고 서러운게 많았지만, 언제가부터는 그런 모든것이 아름답지 않게 느껴진다.

 

또 며칠있으면 그 아이가 이세상으로부터 아주 폭력적으로 사라진지 두해가 된다.

그 죽음은 내게 일종의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 사실 단절은 보다 구체적인 맥락들이었지만 -

더 이상 동아리 아이들이 그립지도 않고, 사무실 사람들과 아웅다웅 하는 가운데 있고 싶지도 않다.

 

정은 없어보이지만 그런 쪽에서 스트레스를 예전보다 덜 받는건 사실이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전처럼 관계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대신, 이미 구조화된 관계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집착과 책임감 사이에는 20대와 30대라는 숫자의 차이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다. 똑같은 이유로.

 

이 얼마나 불우한 생인가..

 

결론이랄 것 까지는 없지만. 결국 살고 살아남고, 버티고 또 버텨지고 이 모든것은 삶의 맹목적인 신화중에 하나이다.

정말 웃기게도, 지금 내가 잠이들어 내일 아침 잠에서 깨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너무 당연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이불이 그리운 것처럼 맹목적인 믿음이다.

하지만 어제 아침과와 오늘 아침이 서로 다른 세계이듯. 버티고 투쟁하는 삶의 숨결은 매번 다르다.

매트릭스의 Revolutions 처럼..

 

우리가 매일 기능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이야기와 영상에는, 대단치 않지만 솔직한 느낌과 변화가 담겨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그게 우리의 혁명이다.



근데, 뚱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면, 매일밤을 같이하는 무시무시한 주당 동지들이 서운해하지 않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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