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11/15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1/15
    국민연금 개혁 논란 -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하이에나새끼
  2. 2006/11/15
    21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 경제
    하이에나새끼

국민연금 개혁 논란 -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권영길 의원의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세도 인상" 이나  "고소득 노동자들의 국민연금을 줄여 저소득층 국민연금 보험료 절반을 지원" 하자는 제안은 매우 우려스러운 발언이다.

 

기사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저와 같은 제안은 노동계급 전체의 하향평준화를 제시하는 것이며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을 통한 문제해결을 회피하고 오히려 노동계급의 사기만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에서 나올 제안이 아니라 열린우리당 쪽에서나 나올법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장석준 연구원의 말처럼 "대기업 노동자들의 양보를 통해 전체 노동계급 내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평등주의'" 이고 그렇지 않고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려 하는것이 분파주의 라면, 평등주의를 최대한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비정규직 으로 전환신청 하여 차이를 최소화 해야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합법적 진보정당은 '현실적' 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며, 근본적인 주장만 반복하는 것은 아마츄어리즘 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현실론이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라면, 합법 불법을 떠나 진보정당의 입장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부끄러운 일이다.

 

--------------------------------------------------------- 

 

맞불 20 호
http://www.counterfire.or.kr

 

국민연금 개혁 논란 -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지난 10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국회 본회의 정당대표 연설에서 "사회적 연대 방안"을 발표했다. 이 연설의 핵심 내용은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상해 양극화 해소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국민연금 기금 마련이나 양극화 해소를 위해 부자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주장은 다른 주류 정당들의 대안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더 내고 덜 받는' 개악안을 3년 전부터 고수하고 있다. '말쑥해진 치와와' 유시민은 조삼모사 식으로 일부 노인들에게 8만 원씩 쥐어주는 대신 연금 급여를 열린우리당 안보다 더 낮추자고 한다.

 

한나라당은 한술 더 떠, 기초연금을 신설하는 대신 국민연금 급여를 현재의 3분의 1로 대폭 인하하자고 한다. 보험료를 7퍼센트로 낮추자고 하지만, 민주노동당과는 정반대로 기업주들과 부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런 것이다.

두 주류 정당은 개악의 폭과 속도 차이가 있을 뿐 노동자들의 노후 생계를 내팽개치려 한다는 점에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주류 정당들이 민주노동당의 방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권 의원은 "고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세도 인상"하고 "고소득 노동자들의 국민연금을 줄여 저소득층 국민연금 보험료 절반을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양보도 필요하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이 기존의 개혁안에서 후퇴해 노동자들의 양보를 제안하는 것은 주류 정당들과의 분명한 차이를 다소 좁히는 아쉬운 일이다.

이번에 권 의원이 제시한 '고임금 노동자 양보' 제안은 진보정치연구소가 지난 10월에 발표한 '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전략의 모색'에서 내린 결론과 궤를 같이한다.

 

진보정치연구소 장석준 연구원은 이미 지난 6월 27일 <레디앙>에 기고한 칼럼에서 민주노동당의 중요 과제로 노동자 당원들이 앞장서서 "단기적으로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는 요구안을 외치도록 만드는 것"을 꼽았다. "숙련도와 성과에 따른 보상을 획득해 특정 노동자 집단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경향"은 '분파주의'이고 "대기업 노동자들의 양보를 통해" 전체 노동계급 내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평등주의'라는 것이다('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전략의 모색').

 

그러나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저해하는 '분파주의'가 아니다. 물론 민주노조라는 무기와 방패가 있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조건이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나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이로부터 내려야 하는 실천적 결론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 함께 싸우며 '상향평준화'를 추구하도록 고무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작 기업주들과 정부는 양보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는데 먼저 나서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쌈짓돈을 털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건네라는 '하향평준화' 정책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 개악안, 노사관계로드맵 등으로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때 이런 '양보'를 제안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다.

 

국민연금

 

지난 9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현애자 의원이 발표한 국민연금 개혁안도 이전의 민주노동당 선거 공약에 비해 명백히 후퇴한 것이다. 현재 보험료와 수급액으로는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기금 고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과 열우당의 국민연금 개악 시도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논리는 '기금 고갈론'이다. 40년 뒤에! 기금이 고갈될 것에 대비해 보험료를 올리고 수급액을 낮추자는 것이다.

 

하지만 3년 만에 와해되고 있는 열우당을 '100년 가는 정당'이라고 말한 정치인들이나 IMF 경제 통치를 코앞에 두고도 안심하라던 경제학자들의 '기금 고갈론'에 휘둘려, '더 내고 덜 받는' 조처를 불가피하다고 여겨선 안 된다.

 

원래, 적립된 '기금'은 경제 상황의 변동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 전체가 계획되기는커녕 무계획적 경쟁에 의존하는 시장 경제 체제에서 수십 년 뒤의 경제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경제 이론이 아니라 역사철학일 뿐이다.

 

40년 사이에 공황이 닥칠 수도 있고, 그리 되면 아무리 보험료를 올려도 연금 기금은 파탄나기 십상이다. 거꾸로 앞으로 20년 동안은 적립 기금이 국가 예산의 몇 배로 불어날 가능성도 크다. 무엇보다 개정안도 결국 2070년 재정 고갈을 전제로 한 개정안일 뿐이다.

 

요점은 현재의 연금 제도는 정부의 과장·허위 광고와는 달리 근본적인 재정 불안 요소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자기가 받을 연금은 자기가 적립하는 '수익자 부담 원칙'이라는 시장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적립식'과 '부과식'으로 나뉘는 연금 제도의 근본적 차이다.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유럽의 개량주의 정당들이 기존의 부과식 연금 체계를 적립식 연금 체계로 바꾸려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단지 개악에 반대할 뿐 아니라 현재의 국민연금 제도를 '용돈'을 뛰어넘는 진정한 복지 제도로 개혁하려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연금 제도를 부과식으로 바꾸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공약처럼 부유세 등 부자들에 대한 직접세 증세와 정부 투자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지배계급이 지난 10여 년 동안 이런 대안들을 모두 부정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해 왔고 노무현은 그 최근 주자로서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는 점이다.

 

당내 일부는 대기업 노동자 양보라는 '미끼'를 던져서 노무현 정부와 주류 정당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저들은 '조직 노동자들의 양보'에 감동하기는커녕 '물에 빠진 사람이 보따리도 내놓으라고' 할 공산이 크다. 악마에게 한 손가락을 내밀면 곧 몸 전체를 요구하는 법이다.

 

민주노동당은 더 '현실적인' 입법안이나 '양보'를 내놓으려 할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를 저지할 강력한 대중 투쟁을 고무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1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 경제

정성진 교수의 에세이가 연재될 예정으로 있는것 같은데, 매우 반가운 일이다. 경제학 분야에 문외한이라 이분의 책을 사고 싶어도 내용이 이해가 안 갈거 같아 망설이는 중. 공부좀 해야할텐데, 쩝.

 

---------------------------------------------------

 

맞불 20 호
http://www.counterfire.or.kr

 

21 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경제

 

정성진의 맑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21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 경제

 

△억압적·무계획적인 자본주의 - 디에고 리베라의 1933년 작품 '현대 산업'

 

오늘날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이 확산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노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대중적 반감으로 점차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21세기 조건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없애고 민주적 계획경제 방식으로 더 나은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이들 분노한 대중은 사회주의보다는 좌파 케인스주의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이나 시장사회주의와 같은 개량주의를 대안으로 여긴다.

따라서 오늘날 21세기 조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필요성뿐 아니라 가능성, 나아가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급진좌파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로서, 생산·분배·소비 등 인간의 경제생활이 시장이나 국가와 같은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제되는 참여계획경제다.

 

그렇다면, 흔히 계획경제의 모델로 여겨지는 소련 동유럽 블록 경제는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가 아니라, 일종의 관료적 명령경제였을 뿐이라는 사실이 먼저 지적돼야 한다.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두고 오늘날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시장을 폐지하고 민주적 계획경제 방식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1세기 조건에서 시장 폐지의 불합리성 또는 계획경제의 불가능성 명제는 우리 나라 진보 학계에서는 거의 '공준'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나라 진보 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좌파 케인스주의자들이나 시장사회주의론자들은 21세기 세계화·정보화와 같은 변화된 조건에서 시장 폐지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효율성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물론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스탈린이 강변했던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하기가 점점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국사회주의'는 고전 맑스주의가 지향하는 국제적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계화는 각국 자본주의의 상호연관을 증대시켜 국제적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더 성숙시키고 있다.

 

한편, 정보와 복잡성이 천문학적으로 증대한 조건에서 시장이 아닌 계획에 의거해 자원을 배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을 수반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고도로 발전한 IT 기술 덕분에 지난 20세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가능해졌다. 예컨대, 오늘날 모든 상품에 부착된 "바코드"를 활용한다면, 전국적·전세계적 수준에서 대부분의 재화의 생산과 재고, 물류의 통합 관리와 소비자 수요 조사가 가능하다. 실제로, 개별 기업 수준에서 이와 같은 계획은 이미 첨단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와 같은 계획이 개별 기업 수준에 국한되고 사회 전체에서는 극심한 경쟁과 생산의 무계획성이 득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령 모든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이 의무화된다면,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이를 수집·분석해 전국적·전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제안한 구상, 즉 화폐와 가격을 폐지하고,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소득을 분배하는 구상은 오늘날 실제로 실행 가능하다. 즉, 맑스적 의미의 경제 계획 입안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로 구현된 노동시간의 계산 작업도 오늘날 발전된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다면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이를 통해 각자는 자신이 수행한 노동시간만큼 "노동증서"를 받고(물론 교육·의료와 같은 "사회적 소비"와 투자·기술혁신에 필요한 "사회적 축적" 기금 부분은 공제돼야 한다), 이 "노동증서"를 가지고 이와 똑같은 노동시간이 구현된 소비재를 구입한다는, 맑스가 말한 "공산주의 초기 단계"의 평등주의적 분배 원리를 실제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정보화의 핵심인 인터넷에 기반한 네트워크의 발전은 맑스적 의미의 계획, 즉 진정한 의미의 참여계획, 아래로부터의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온라인 토론과 인터넷 투표를 결합할 경우, 고대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경제와 정치 영역에 광범하게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계획경제에서는 개성과 자유가 억압되고, 민주주의의 후퇴와 계획 기구의 비대화·관료화가 필연적이라는 하이예크의 비판이나, 이와 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시장 기구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알렉 노브나 존 로머 같은 시장사회주의론자들의 주장은 인터넷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참여계획경제의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최근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주목하는 앨버트의 ≪파레콘≫이나 드바인의 '협상조정' 모델은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의 정신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가 제안한 노동시간 단위 계산을 배격하고, 신고전파적 "지시가격"(앨버트)이나 리카도적 "생산가격"(드바인)에 의거한다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시장사회주의론으로 퇴행할 가능성이 있다.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에서는 분업의 폐지를 통해 노동 소외가 극복돼 노동 의욕이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산자들이 아래로부터 참여하므로 오늘날 기술 혁신에 결정적인, 생산현장의 '암묵적 지식'과 정보 동원이 극대화된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에서보다 훨씬 역동적인 기술혁신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생산성 향상과 기술 혁신의 과실이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풍요로운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계획경제에서는 혁신과 생산성 둔화가 불가피하다는 하이예크 등의 비판은 맑스적 의미의 참여계획경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급진좌파의 대안적 경제 모델은 케인스주의적 사회적 시장경제나, 그 자체가 형용모순인 시장사회주의가 돼서는 안 된다. 시장경제 자체를 지양하는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 즉 참여계획경제여야 한다. 이에 바탕을 둠으로써만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