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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외우고 있는 시가 달랑 하나인데...

 

 

인생

 

백기완

 

보일락 할때가

눈이 어두워 질때라

 

온 몸으로 보거라

눈을 감어도

보일때까지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들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이러고 보니 내 잡기장이 온통 시로 채워지는군.

누가보면 시랑 무지하게 친한 줄 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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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좋은 친구 푸른살이가 생각나서...

나는 댐일까? 파도일까?

댐을 보며

 

신경림

 

강물이 힘차게 달려와서는
댐에 와 부딪쳐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다시 파도를 이루어 헐떡이며 달려오지만
또 댐에 부딪쳐 맥없이 깨어진다.
깨어진 물살들은 댐 아래를 맴돌며 운다.
흐르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댐을 뛰어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소리내어 운다.

 

댐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강물 뿐이랴,
강물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댐을 뛰어넘자고 깨어부수자고 달려온
그들 자신이 어느새 댐이 되어 서 있다는 것을.
파도를 이루어 뒤쫓아오는 강물을
댐이 되어 온몸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이제 저 자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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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쟁, 전쟁의 삶

삶의 전쟁, 전쟁의 삶

문강형준
서울문화이론소 연구원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이라크에서는 무장단체에 의한 한국인의 피랍사건이 일어났다. 한국군이 파병을 철회하지 않으면 참수하겠다는 무장단체의 선언 앞에서 이라크 미군에 납품을 하던 한국인 노동자는 카메라에 대고 공포에 질려 파병을 철회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총과 칼을 든 무장단체 앞에서 애원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인질의 안타까운 모습과 결국 시간이 지나 살해되는 인질들의 모습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시작된 이후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자동소총과 탱크를 앞세운 합법적 무장단체 미군은 물론 이보다 훨씬 더한 살상을 저질러 오고 있고, 이라크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수많은 이라크 민중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다. 전쟁을 결정한 당사자는 저 멀리 안전한 워싱턴과 텍사스 크로포드 목장에서 때로는 여유 있게 때로는 자못 비장하게 잘 살고 있고,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외치며 국민들을 설득하고 있는 당사자는 역시 저 멀리 안전한 서울에서, 촛불에 의해 부활까지 하면서 잘 살고 있는데, 아무 죄없는 미국과 한국의 노동자와 이라크의 민중들은 총과 칼과 폭탄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전쟁은 이런 것이다. 언제나 가장 먼저 죽는 것은 맨 앞에 선 보병이고, 힘없는 민중들이고, 가장 나중까지 살아남아 과실을 챙기는 자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이다. 칼과 총을 쥔 자들이 자신들의 극단적인 신념을 앞세우면서 빈 손의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일이 일상화되는 것, 전쟁은 이런 것이다.

‘자본’이라는 무기

서울에서도 이미 전쟁은 일상이 되었다. 아침 8시 반, 신도림역은 전쟁터다. 청량리행 열차가 신도림에 서면 열차문이 열리자마자 출근길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쏟아져 나와서는 2호선으로 갈아타는 지하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먼저 가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를 밀쳐내고, 그 와중에 멈칫멈칫하다가는 자칫하다 밟힐지도 모른다. 2호선 열차가 들어서면 우르르 내려선 사람들을 다시 비집고 들어가야만 한다. 각자의 노동현장으로 제발 늦지 않게 가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를 밀쳐낸다. 빠르지 않고, 힘이 세지 않으면 그 출근 전쟁터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다. 이 출근길 전쟁에서 ‘병사’들은 진격하고, 싸우고, 밀려난다. 역시나 싸우는 ‘병사’들은 다 힘없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을 이토록 뛰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들은 이 곳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어딘가에서 유유히 또다른 전쟁을 구상하며 사령부로 가고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전쟁에서 몇대째 패배한 어떤 사람들은 ‘비닐하우스’ 달동네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1970년대부터 서울시 소유 체비지에 살아왔던 비닐하우스 주민들은 그들이 이 땅을 시효취득하는 것을 막으려고 서울시가 90년부터 물린 변상금 폭탄을 맞고 있다. 이미 그 중 한 명은 군대 간 두 아들에게 5천만원 가까운 빚만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이 전쟁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무기는 자본이다. 일단 자본이라는 무기가 없으면, 교육을 제대로 못받아서 지식이라는 무기도 못갖추게 되고, 그렇다고 얼굴이나 몸매라는 무기마저도 없다면 거의 백전백파라고 보면 된다. 이 무기들은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는데, 그래서 ‘합리성’이라는 신념이 진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전쟁터에서는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이상한 비합리성이 판을 치기도 한다. 자본이나 지식 등의 최강무기를 제대로 갖춰서 약삭빠르게 살아남은 20% 정도의 사람들을 ‘상류층’이라고 하고, 최강무기는 하나도 없고 오직 몸뚱이 하나로 육탄전을 벌이는 20%의 사람들을 ‘하류층’ 혹은 ‘빈곤층’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이 둘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고만 있다.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의 5.7배에 달하는 등 무기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삶의 격차는 벌어지고, 한번 빈곤층에 속하게 되면 그 수렁에서 탈출할 확률은 6%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KDI 보고서도 나왔다.

패잔병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신봉하는 전쟁광들이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는 오늘날 상류층과 하류층의 격차가 벌어지고 빈곤층이 수렁에서 탈출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없는 사실이다. 이미 막강한 무기를 점유한 상류층은 영양상태에서도 월등하여, 이제 육탄전에서마저도 이들을 이길 수 없다. <한겨레>의 식생활에 관한 기획기사에 따르면, 빈곤층의 먹거리는 곡류와 채소를 중심으로 3-6종에 그치고, 열량의 8-90%를 탄수화물로만 때우고 있지만, 중산층과 상류층에서는 매일 먹는 것이 바람직한 다섯 가지 기초식품군을 고루 섭취하고 음식 가짓수도 12-17종류에 이른다고 한다. 한달 총수입이 600만원인 상류층이 한번 외식에 10-15만원을 쓸 때, 한달 수입 23만원인 빈곤층 노인부부는 한 달 내내 식품비로 15만원을 쓰는 것이다. 문명이 정점에 달한 이 ‘위대한’ 시대에, 자본이 없으면 이제 영양실조로 죽을 일만 남았다.



전쟁에서 져서 싸울 무기마저도 없는 패잔병들은 소위 ‘노숙자’라고 불린다. 전쟁에서 진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듯, 노숙자들 역시 인간대접을 못 받는다. 지금까지는 노숙자가 병에 걸려서 (그 중 대부분은 병에 걸린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지만, 다행히 병원에 들어가게 되면) 입원비와 치료비에 대한 시의 지원이 있었지만, 이제 서울시가 ‘노숙인 의료구호비로 통원 치료비만 지원하고 입원, 수술비는 제외한다’는 공문을 공공병원에 내려 보내면서 지원이 끊겼다. 또, 얼마 전에는 노숙자들이 길거리 벤취에서 자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벤취 가운데 팔걸이를 놓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던 서울시다. ‘하이 서울’을 위해 시청 앞 광장에는 수억을 들여 잔디를 깔아놓고 집회라도 할라치면 ‘잔디를 살려야 한다’며 거부하고 있는 서울시는 상류층 전사의 1년 연봉도 안되는 노숙자 의료구호비 1년 예산 8억원도 아까워 인간은 죽이고 있다. 잔디만도 못한 것이 이 시대 패잔병 노숙자의 생명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자본과 지식을 갖고 ‘중산층’에서 튕겨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대다수의 삶도 언제나 폭격직전이다. 이 전쟁터에서 각개전투를 하지 않고 대규모 부대에 들어가서 전투를 치르는 많은 병사들은 정규군과 비정규군으로 나뉜다. 비정규군으로 편성이 되면 그 병사에게는 보험혜택도 없고, 월급도 정규군의 70%대이며, 언제 어느 때건 무기가 압수되고 부대에서 쫓겨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대규모 부대를 창설하고 운영하는 소위 ‘자본가’라 불리는 전쟁광들은 부대유지에 드는 비용을 줄여서 자기가 챙길 자본을 극대화시키기 원하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챙겨줘야 하는 정규군 대신에 비정규군의 규모를 점점 늘려가고 있다. 이미 한국 전체 노동전사들 중에 비정규군의 규모는 70%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인터넷 부대에서 비정규군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 하나는 자신이 지금껏 일해 온 1년 동안 자신에게 지급된 월급이 ‘인건비’가 아니라 ‘컨텐츠 비용’에서 나오고 있으며, 처음에 비정규군으로 들어올 때는 계약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재계약을 맺은 이번 달부터 퇴직금이 산정된다고 토로했다. 이미 인간이 아닌 ‘컨텐츠’ 취급을 받고 있는 이 친구는 아예 이번 달부터는 정규군과 같이 쓰던 화려한 고층막사에서 밀려나 비정규군만 모아놓은 음침한 막사로 쫓겨났다. 그래도 부대를 벗어나 각개전투를 하기엔 이 도시의 삶이 너무 힘에 부치기 때문에 친구는 모든 걸 참으면서 오늘도 야간전투에 임하고 있다. 물론, 친구가 야간전투를 해서 벌어들이는 자본은 ‘비정규 자본’ 대우를 받지 않고, 부대로 고스란히 들어가 쌓인다.

전쟁과 전쟁하기

이쯤 되면 가히 전쟁은 전쟁이다. 이라크에서 미군 비행기는 마을을 폭격해서 쑥대밭을 만들고, 남자들을 붙잡아 교도소에서 고문하고, 이 광경을 지켜 본 이라크인들은 항전을 다짐하고, 무장세력은 인질을 납치해서 참수하고, 이 광경을 지켜 본 미군들은 다시 마을을 폭격하는 이 전쟁. 서울에서 사람들은 입시와 졸업을 통과하여 비정규직 취업을 하고, 사장은 노동자의 실적이 안좋으면 바로 해고시키고, 해고된 사람은 노숙자가 되고, 노숙자는 병에 걸려 죽고, 남은 가족은 빈곤층이 되고 영양결핍에 시달리다 자살하고, 사장은 고층 아파트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손자는 미국에서 낳고 유산은 탈세하고, 언론은 사장을 ‘리더’로 만들고,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그런 ‘리더’로 만들려고 입시지옥에 몰아넣으며 과외를 시키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신도림역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을 밀치고 뛰어가는 이 전쟁.

한쪽에서는 전쟁이 삶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삶이 전쟁이다. 사는 게 본질인 ‘삶’과 죽이는 게 본질인 ‘전쟁’이 이렇게 같이 가는 모순을 끊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살면서 죽고 죽이면서 사는 이 전쟁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반대’를 외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부정이 없이는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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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일요일

노동조합문화 - 집회를 중심으로

 * 2003년 민주노총 조직담당자 수련회 교육자료 

노동조합 문화 - 집회를 중심으로

손동혁I인천노동문화연대


작년 한 해 민주노총에서 주최한 집회 횟수가 200회를 넘겼고, 쓴 돈도 9,000만원이 넘은 걸로 집계가 되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크고 작은 집회를 한 셈이니 '민주노총'을 가히 집회를 위한 조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 이렇게 집회를 많이 하는가? 집회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집회마다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 성과를 거둔 것인가? 혹시 별 효과도 없는데 타성에 젖어서, 별로 할 게 없으니까, '니들은 집회도 안 하냐'는 외부의 질책과 눈초리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집회를 때려 박지는 않았는가? - 박선봉



□ 집회 / 시위


집회(集會)[지푀/지퓊][명사][하다형 자동사] (공동 목적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일정한 때에 일정한 자리에 모임, 또는 그 모임. 회합(會合).


데먼스트레이션[demonstration]

개요 - 특정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다수인이 벌이는 집단행동.

본문 - 약칭하여 데모라고도 하며, 시위 ·시위운동 ·시위행동이라고 번역한다. 개인이나 조직의 위력을 보이는 모든 시위행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시위를 위한 행진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구사항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슬로건을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위력을 지배자에게 과시하는 한편,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 요컨대, 데모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및 그것의 전달과 실현 등의 기능을 지닌다.

【종류】 ① 좁은 뜻으로는 데모행진 ·데모집회를 가리키나, 넓은 뜻으로는 지배자 ·피지배자 ·사회집단이 자기의 힘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인원과 물량 등을 동원하여 상대에게 심리적 압력을 가하는 사회적 ·정치적 기술을 가리킨다. 예컨대, 무장한 경관 ·기동대 ·군대의 행진과 연습, 전차의 행진이나 항공기의 편대, 해군의 관함식(觀艦式) 등은 지배자측의 데모이다. ② 쇼(show)의 색채가 짙은 것은 간접적 데모이고, 국경 주변의 군사연습 등은 직접적 데모이다. ③ 자연발생적 데모와 정기적 데모의 구별도 있다. 정기적 데모로는 1889년 파리에서의 제2인터내셔널대회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세계노동자들에 의한 메이데이(May Day:5월 1일)의 데모가 유명하다. ④ 이 밖에도 형태와 방법에 따라서 여러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항의(抗議)데모 ·진정데모 ·통근데모 ·공장데모 ·해상데모 등이 있다. 또 가두데모에도 지그재그데모, 도로 가득히 퍼져 행진하는 프랑스식 데모, 기동대원에게 둘러싸여 규제되는 데모 등도 있다. 노동자 ·학생 ·시민단체 등의 데모는 주로 데모행진 ·데모집회의 형식을 띠는데, 깃발 ·플래카드 ·머리띠 등을 두르고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 ·연좌 ·옥외집회를 행하는 평화적인 데모이나, 경관과 유혈충돌하는 혼란 속에 군중이 끼여들어 폭동을 일으키는 데모도 있다.

【규제】 데모는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자기의 의사를 자주적으로 표시하는 귀중한 기본적 권리이다. 헌법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21조 1항),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3조 1항에서도 누구든지 평화적인 집회나 시위를 방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도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헌법 37조 2항).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옥외집회와 시위는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여야 하고(6조 1항), 일출 전과 일몰 후의 옥외집회나 시위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어 있다(10조). 또한, 관할 경찰서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집회나 시위의 금지를 사전에 통고할 수 있고(8조), 그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18조).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집회 풍경


우리는 집회를 보통 짧게는 한 시간 반에서 길게는 세 시간 정도 한다.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대오정비, 문화공연, 개회 선언(*지도부 입장), 민중의례, 지도부 및 참가조직 소개, 대회사, 연대사, 초청 공연, 투쟁사 2-3개, 결의 연설 또는 결의문 낭독, 마무리 노래, 그리고 행진. - 박선봉


날씨가 춥든 말든, 주변 조건이 좋든 말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무미건조한 연설은 참가자들 관심을 떨어뜨리고, 오히려 인내력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자리를 뜨고, 졸기도 하며, 심지어는 집회를 하다가 대열 속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종종 있다. 물론 큰 집회 때 얘기다. 그 전에는 그래도 무대 쪽을 보고 조심스럽게 술을 마시더니, 이제는 아예 무대를 등지고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잡담을 해 가면서 마신다. 각 조직의 조직담당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술 마시는 것은 좋은데, 제발 무대 쪽으로 앉아서 드십시오 동지들." - 박선봉


그렇게 집회가 끝나면 위력적인 시위를 위해 행진을 한다. 먼저 경찰 쪽과 협상을 해서 어디까지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 폴리스라인을 따라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한다. 현수막을 든 지도부가 앞장을 서고, 삑삑거리는 방송차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관심을 가져 보지만 우리가 시위하는 까닭을 제대로 설명하려는 뜻이 처음부터 없는 듯하다. 설령 그 뜻에 동의하여 동참을 하려해도 행진대열에 끼기가 쉽지 않다. 행진 분위기가 너무 근엄하고 복장부터가 다르다. 그래서 길가의 시민들이야 듣든 말든, 동참하든 말든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어찌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랴.' - 박선봉



□ 문제의 장면들


대열이 길고 참가자가 많을수록 무대는 점점 높아만 간다. 앞에 있는 사람은 한참을 우러러 봐야 그나마 무대 위 연설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물론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런 무대에는 아무나 올라 갈 수가 없다. 몇몇 은혜 받은 사람들만 올라갈 수 있다. 그야말로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초대받지 않은 일반 조합원들이 올라가기에는 무대 문턱이 너무 높다. 현장의 소리, 조합원들의 쓴소리는 언제나 원천봉쇄 된다. 일방적인 지침만 무대 밑으로 내려올 뿐 집회는 더 이상 소통과 교류, 토론과 상호확인 및 공동결의의 장이 아니다. - 박선봉


왜 우리는 그렇게 획일적인 것을 좋아하는지 아마도 군대식 문화에 찌들어서 그럴 것이다  줄을 맞추어야 하고, 표정관리도 해야한다. - 박선봉


격식 따지기를 좋아하는 높으신 어른들은 당장에 써먹을 만한 화려한 문선에만 신경 쓰지 별로 표시도 나지 않고 얼른 성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일반 조합원들 문화에는 도대체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문선을 잘한다고 문화가 바뀌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박선봉


노동조합 사무실을 가보라. 어디를 막론하고 조합원들하고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위원장실이 가장 안쪽에, 사방이 막힌 채, 삐까번쩍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조합원들이 들어가려면 뭔가 찝찝하고 위압감이 들게 돼 있는 그 위원장실의 문턱 높이 만큼 노조의 문화도 경직되고 위계화 되어 있다. 아직도 노조 행사 때 위원장이 입장하면 기립박수를 치는 노조가 있고, 조합원 게시판에 지도부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지우는 일이 다반사며, 지도부를 어버이처럼 떠 받들어야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팽배한 것이 노조문화의 현실이 아닌가? - 박선봉


중요한 집회의 사회자는 대체로 남성이 맡는다. 발언자도 남성이 많고, 단상 위에 올라 와서 이야기 하는 방식도 목소리 크고 욕 잘하면 일단은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 김은주


이외에도 술문화, 뒷풀이문화, 노래, 율동 등 각종의 문화영역에서 남성성이 강조되고 남성중심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 김은주


그런데 노동조합의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의 참여는 극히 저조하다. … 이와 같은 현상은 민주노총과 산별연맹 뿐만 아니라 단위노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여성들은 논의 대상에서 소외되고 자연히 정보의 공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 김은주


투쟁방식에서도 여성들의 참여를 가로막거나 소극적 자세를 취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 철야농성을 해야 할 때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 기혼여성들의 경우 참여가 쉽지 않다. 단식이나 삭발을 해야할 때에도 남편눈치, 시댁눈치 때문에 마음껏 투쟁도 못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김은주


당시 광화문 집회에서 '소파 개정, 부시 사과'부터 시작해서 '미군 철수'까지 그동안 범대위가 주장해온 구호들을 네티즌들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들의 구호로 삼고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모인 그 대오를 보고 오히려 범대위는 어찌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는 단지 범대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시까지 모든 운동진영이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전 운동진영이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몰려가는 이 사태'를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 - 최세진


그 날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여 비폭력 추모제를 하자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인 네티즌들은 나중에 깃발을 들고 몰려온 운동단체들이 집회를 주도하려고 하면서 폭력적으로 진행하려 하자 거부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깃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네티즌들 스스로에 의한 자발적 추모제가 깃발을 든 단체들이 소집한 집회처럼 되거나, 깃발을 든 단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운동단체의 참여자격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집회운영을 요구한 것인데, 운동단체 구성원들은 '우리도 참가 자격이 있다. 당신들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을 때 우리가 바로 맞아가면서 싸워왔는데, 왜 참가 자격이 없는가'하는 반론을 했다. 그리고 평소 하던 방식으로 운동단체들은 집회를 이끌고 나가려 했고, 집회 대오 내에서 무대와 대중이 따로 분리되고, 운동단체와 개별 참여자간에 반목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 최세진



□ 가능성 찾기


일방적인 지침만 무대 밑으로 내려올 뿐 집회는 더 이상 소통과 교류, 토론과 상호확인 및 공동결의의 장이 아니다. - 박선봉


왜 모인 사람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무시되는가? 자신들 주장을 각양각색의 표현양식으로 다양하고 자유스럽게 하면 안 되는가? 그러면 우리 의식이 쁘띠비지화 되는가? 행진은 재미있으면 안 되는가? - 박선봉


다른 나라는 비록 문선은 보잘 것 없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집회와 행진을 봐라.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하며 열려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의 문화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 박선봉


그러면 집회와 행진의 형식적인 몇 가지를 바꾼다고 우리의 집회, 행진 문화가 진정으로 바뀔 것인가? - 박선봉


이러한 문화 자체가 바뀌지 않고 집회 형식 몇 개를 바꾼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화가 바뀌어야 진정으로 세상이 바뀐다는 진리를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 박선봉


할당제 논의 과정에서 보여준 남성 동지들의 반민주성과 보수성은 여성활동가들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 주었고 조직내 양성평등의식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 김은주


따라서 외형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용적으로 진정한 참여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 김은주


여성들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역할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배려를 귀찮게 생각하거나 여성들은 제대로 투쟁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지 말자는 얘기다. - 김은주


이런 문제들의 해결방안은 사실 문제점을 거꾸로 놓고 보면 이미 나와 있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남성동지들의 마음가짐이다. 양성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진보적임을 자처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 김은주


지난 토요일(2002년 11월30일, 12월7일, 14일, 21일) 우리는 유래 없었던 놀라운 집회를 보았다. 한 네티즌이 게시판에 '토요일 6시에 촛불을 가지고 모이자'라고 올린 제안 글을 시작으로 첫 주에는 1만여 명이 광화문에 집결했고, 두 번째 주에는 전국 36개 도시에서 같은 집회가 진행되었으며, 광화문에는 5만여 명이 집결했다. 조직된 대중이 아닌 무차별 개인들이 한 개인의 제안으로 이렇게 한날 한시에 모여서 같은 요구사항을 걸고 집회를 연 것은 세계 초유의 사건이었다. - 최세진


이 글을 보고 찬성한 네티즌들이 해당 글을 퍼다가 다른 동아리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제안이 나온 지 단 3일만에 광화문에 1만여 명이 집결했다. 거기는 책임 주체도, 조직도, 집회 내용에 대한 사전 합의도, 계획도 없었다. 다만, 제안과 동의만 있었을 뿐이다. 그 집회에 대해서는 범대위도 당일까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언론도 입을 닫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그 선전, 조직은 순전한 네티즌들의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 최세진


이렇게 조직된 집회이기에 집회 신고는 당연히 할 생각도 없었으며, 집회현장에서도 주도하는 조직이나 단체가 없었다. 덕분에 집회가 금지된 광화문과 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그것 때문에 처벌받았다거나 구속된 사람과 단체는 없었으며 오히려 전 사회적으로 급격히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 최세진


처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주최하는 단체나 정해진 연설자 없이' 마이크를 주고받았다. 참가한 중학생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자유롭게 무대에 올라와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해산도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번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집회는 당일 한 연사가 이 추모제를 계속 하자고 제안하고 집회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자 거수로 매주, 매달, 매일 중 매주 모일 것이 '그 자리에서'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그 날 집회에서 대중은 동원의 대상도, 선전 선동의 대상도 아니었으며, 스스로 조직하고, 선전하고, 연설하고, 의결하고, 집행하는 주체였다. - 최세진


이에 대해 초기 제안자인 '앙마'는 <광화문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이라는 글에서 네티즌들에게는 '이기기 위해서는 "넓어져야"합니다. ... 언론이 미선이 효순이의 진실을 가리려 할 때 깃발 든 분들이 결국 진실을 지켜내셨습니다. ... 깃발은 그분들의 자존심입니다. ... 너그러워집시다. 깃발이 보이면 아, 저분들도 왔구나. 서로 칭찬합시다.'라며 달랬고, 운동단체들에게는 '광화문을 진짜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만듭시다. 여기 처음 오시는 시민들은 기존의 집회형식을 낯설어합니다. ... 거리감을 주는 표식을 떼어주십시오.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떨치십시오. ... 당신들은 10년 넘게 거리에서 대중들을 호출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 광화문에 모인 모두에게 집회의 주도권을 주십시오.' 라고 호소했다. - 최세진



참고자료

* 99년 노동미디어 워크샵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평조합원 전략” 중에서 ‘노동조합과 communication - 전달인가 소통인가?’(임인애 / 세기말현장보고서팀, LAN)



● 프롤로그


1. 노동조합 의사소통 딜레마


2. 그들은 너무 달랐다.


3. 집회와 커뮤니케이션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집회와 유인물을 통하여 결집되고 표현되었다. 이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배적인 매체로서 가동될 것이다. 집회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의사소통해왔던 대단히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집회와 가투로 몰아부친 87 대투쟁의 그림을 상상한다면 집회는 집결이고 폭발이고 서로를 느끼고 확인하는 소통과 연대, 투쟁의 성격과 정보가 순식간에 교감되는 독특하고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었다.


그것은 어떤 매체보다 직접적이고 동시적이었다. 발신과 수신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표현의 현장성,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체감지수를 절대적으로 상승시키면서 명쾌한 전략과 기발한 전술들은 즉석에서 창출된다. 이렇게 투쟁은 재빨리 속살을 채우며 심화되고 확산된다.


이때 체험하고 소통하는 정보는 발언되어지는 것 이상이었다.

누가 발언하는가 누가 응답하는가에 대한 경계는 무너지고, 발언 내용과 응답 사이 말의 의미가 꼬리를 물고 증폭한다. 그 순간 소통된 정보의 질감은 단순한 말의 의미를 뛰어 넘는다. 언어라는 코드에 에너지가 팽창하면, 폭발 직전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이것을 사람들은 "가슴 벅찬..." 혹은 "온몸으로 느꼈다..." "집회 분위기 좋았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래서 구체적 내용을 물으면, "내용이 중요해? 분위기지!" "그냥, 감동 그 자체였어...." 그리고... 보름이고 한달이고 다리 아픈 줄 모르고 도시를 가로질러 뛰면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가투를 치룬다. 우리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런 에너지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런데 말의 의미 문자적 코드 이상이 소통되던 공간, 내용 보다는 느낌이었던 집회에서 언제부터인가 느낌이 거세된다. 느낌이 거세되자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으로 경직된다. 화려한 연설적 수사가 용량 높은 앰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지만 이제 모두 "집회가 전만 같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집회가 내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민주노조 운동 10년의 시간만큼 연단위의 수사적 테크닉은 분명 세련되어졌고 고물 앰프로 투박하게 선동할 때 보다 내용도 훨씬 명료하게 전달되는데 사람들은 '내용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집회를 "내용이 없다.."는 말로서 평가한다. 그것은 곧 소통된 내용이 없었다는 표현이었다.


연단에 선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발언권을 독점할 수 밖에 없는 집회 형식 자체가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란 형식적 쌍방향성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방성이냐 쌍방성이냐는 이분법적 개념에 몰두하다 보면 때로는 형식을 깨뜨리고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또다른 현실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대신해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느낌이 소통되는 공간이 있다. 그것이 집회이고 연단이 높고 마이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발언이 이루어지는 내내 열광적 환호나 지지의 함성 없이 침묵만이 흘렀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경험을 종종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누군가 꼭 찝어서 표현 할 때, 모두가 발언하지 않았지만, 굳이 일방적이라 평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통이란 표현의 형식이나 질량 관계, 누가 많이 발언하느냐... 그리고 매체의 속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조합원을 대신하여 '판단'한 지도부가 그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고 지침을 전달하는 자리에는 비장한 침묵도 시선 맞추기도 울림도 사라진다. 함께 판단할 의사가 없는 공간, 질문을 받지도 응답도 묻지 않은 채, 한편에서는 말하고 한편에서는 들어야 한다. 연단위와 아래는 철저히 분리되고, 발언권을 독점하고 있는 지도부들의 원고는 천편일률적으로 흐른다. "그 소리가 그소리..."가 된다. 이쯤되면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된다. 민감한 내용도 새로운 소식도 없이 "열심히 투쟁합시다!" "끝까지 투쟁합시다!"란 상투적 구호가 공허하게 반복될 뿐,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그곳은 이미 폐허였다. 누가 거기 가고 싶어지겠는가? 평조합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왠만한 지역 집회는 활동가들의 의무조항으로 당착된다.


더욱 이런 상황은 집회의 중앙집중을 강화시키고, 그렇게 잡힌 집회를 참석하기 위해 그들이 종종 전세 낸 관광버스 안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만만챦아 진다. 그들의 활동내역중 1/3은 집회참여로 채워진다. 또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 집회에서는 동원에 대한 고민이 추가된다. "조합원들을 어떻게 집회에 데려갈 수 있을까...?" 이것이 중요 안건이 된다. 동원해야만 하는 집회... 이미 자발적인 의사소통이 증발해버린 공간이다. 90년대 중후반을 들어서면서 누구나 이런 체험을 했다.


4. "예"라고만 응답하시오!


그러나 96, 97 노개투 집회부터 상황이 반전되었다.

평소 천단위로 모이던 울산의 태화강 고수부지 집회에 1996년 12월 26일, 만단위 인파가 운집했다. 그날은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된 날이었다. 조합원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깃발이 도열하고 단위사업장의 위원장들이 연단위로 오르고 사회자는 정해진 식순대로 집회를 진행했다. 연단위의 인사들은 차례차례 나와서 비슷 비슷한 정세분석과 국면에 대한 설명을 반복했다. 여전히 연단위의 연설은 조합원의 상상력과 소통하기에는 너무 고정된 틀에 갇혀 있었다. 흐름이나 리듬, 집중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높은 톤으로만 일관하는 선동과 연설, 구호는 왜 싸워야 하는지는 알기 때문에 나온 조합원들의 판단과 상상력을 오히려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연단아래 앉아 있는 조합원들 또한 열심히 듣기를 포기하고, 의례적인 박수나 구호를 시간 맞추어 반복한다. 그래서인지 연사들은 발언 중간 중간에 "여러분 맞습니까?" 라는 문장을 반드시 구사하면서 청중들의 "예"라는 답을 확인한다. 맞습니까.../ 예..../ 그럴 수 있습니까.... /예 는 그날 집회기간 내내 반복되던 대화형식이었다. 예라고만 대답을 강요하는 연설 형식...그 공간에서 투쟁의 에너지는 규격화된다. 끝까지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 예... 지도부의 고민은 오로지 이 대오를 언제 까지 유지시킬 수 있느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어떻게 싸울 것이냐를 웅변했던 내용을 다소 지루하더라도 옮겨 적어 본다.

사회자 : .... 예, 우리.... 우리의 승리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다같이 결의 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사회자 : 예, 믿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현총련 의장이면서 민주노총 부의장이신 .... 의장님 을 모시고 민주노총 투쟁 방침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 시기 바랍니다.

의장 : 반갑습니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급기야 오늘 새벽 천인이 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 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한 것입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를 정면으 로 부정하고 ..... 동지 여러분.... 강력한 총파업 투쟁으로 박살내야 합니다......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님의 투쟁 방침을 철저히 따릅시다. 좋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휴가 또는 직장폐쇄가 단행되더라도, 이를 거부하고 주야 공히 정시 출근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낮 시간은 단위노조별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오후 4시 부 터는 거리로 나와서 국민과 함께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모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려면 폭력투쟁 가두투 쟁을 자제해야 합니다. 동지여러분 국민과 함께 비폭력 평화투쟁을 힘차게 벌려 나 갈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투쟁 지도부의 지침을 철저히 따릅시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부를 우리의 손으로 지 켜냅시다. 그럴수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신정 휴가를 반납하고 힘차게 투쟁합시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오늘밤부터 간부들은 철야 농성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그리하여 김 영삼 정권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힘차게 투쟁합시다. 동지 여러분 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도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칩시다. 승리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강력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갑시다. 투쟁합시다. 승리합시다.

군중 : 예...

의장 : 동지여러분 감사합니다.


"예..."라고만 대답하라 이미 투쟁 방침은 결정되었다. 지도부를 따르라....

이것이 발표하는 지침의 기본구도 였다.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노개투,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울산 집회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비폭력 평화투쟁의 기조를 위하여 질서유지대가 조직되었고 한달을 넘기는 시가행진중, 가끔 나타나는 돌출적인 가투는 금방 통제되었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결정된 이상, 싸움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창조적인 움직임과 판단은 금지된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넘나들던 지금까지 노동자 투쟁의 노하우는 폐기처분된 것이다. 평조합원들의 에너지는 거대한 행진 속에 고정되고, 의례적인 스펙타클의 한부분을 이룰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발한 전술도 격렬한 표현도 아이디어도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판은 이미 다 짜여져 있었고, 집회는 앉아서 구경하고 국면이 진행됨에 따라 나타나는 지역 인사들의 연설만 열심히 경청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집회는 일정이었고 이만큼 투쟁하고 있다는 물리적 증거였고, 지도부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전달했고 끝까지 투쟁하자고 당부하고 당부하면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오래된 연애 같이 .투쟁은 그렇게 거듭거듭 확인 절차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지도부들이 평조합원들에게 잠재하고 있던 미지의 열기는 지나쳐버리는 순간, 평조합원들의 수동적인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굳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없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끝없이 인도를 타고 줄지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파업이 철회되었고 1년후 98년 1월 그들의 대표는 노사정위라는 틀속에서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 도장을 찍었다. 96년 12월 26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권영길 위원장, 민주노총 , 지도부라는 단어를 거명하며 그들의 지침에 철저히 따르라는 발언을 했던 사람도 도장을 찍어주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평조합원들은 집회연단에서 나오는 발언은 이미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치적 협상과 압박을 행사하기 위해 치루는 집회와 진짜 싸움을 위해 결집하는 집회를 구별할 줄 아는 통찰력 정도는 당연히 생긴다. 또다시 집회 동원력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소통은 없고 전달만 있는 집회.... 평조합원들의 정세 판단이 서기 전까지 당분간 소강국면으로 들어선다.


하나만 더 그날(1996년 12월 26일) 집회의 발언을 인용해보면....

16시 43분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위원장의 연설이다.

"예, 반갑습니다. ... 현대중공업에서는요... 4000명이 오토바이 타고 나왔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에 2명씩 그러면 오토바이 몇대왓습니까? 예, 오토바이가 한 2000대 나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한 만명 왔죠? 예, 한 만명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 4000명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는 가깝고 자동차는 3만 5천이고 현대중공업은 2만 2천 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현대자동차는 당연히 많이 와야 됩니다. 맞습니까? 그 못지 않게 작은 사업장에 있는 세종공업 효문 단지에서 동양나일론에서 모든 동지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울산 노동형제 일어섰다 하면 전국이 흔들립니다. 맞습니까? 전국의 노동형제들은 울산을 예의주시 하고 뭔가를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87에서 또다른 역사를 만들어나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낼 수 있습니까?"

"예"

"정말입니까?"

"예..."

"예,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연설은 쇠소리 톤이 아닌 아주 소박한 말투로 구사되었고, 그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솔직하게 집어내어 얘기를 풀어 나갔던 이유로 듣는 사람들 얼굴에 잔잔한 웃음까지 번지게 했고 줄곧 경직되던 분위기를 다소 이완시켜주었다. 당시 그 위원장의 느낌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이 연설은 선동과 정치적 언어로 일관하는 수사력과는 다른 질감, 무엇인가 자기 생각을 말로 건네는 듯한 느낌을 그 공간에 불어넣은 것은 분명했다. 획일적인 말투와 내용에서 조금만 탈피해도 잠시 틈새는 생긴다. 경직된 분위기는 풀리고 사람들의 표정은 금새 생생해진다. 그들은 귀기울이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중간중간 "예"라는 답을 전제한 "....맞습니까?"에 대한 응수도 좀은 달랐다. 그러나 모처럼 자신을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한 연사의 발언 내용에는 집회 동원력에 대한 강박관념과 큰 사업장과 작은 사업장에 대한 구별짓기라는 무의식이 적나라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87의 기억, 울산의 이미지로 자신감과 결의를 고취시키는 수사학 속엔 투쟁경력과 울산 이라는 지역구도에 따른 기득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수직적인 연대개념이 숨어 있었다. 집회는 경험유무에 상관없이 함께 투쟁하러 나온 자리이고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이 수평적으로 소통되는 곳이다. 그런데 큰 사업장 작은 사업장 동원능력을 출석체크 하는 곳도, 각 사업장의 상이한 조건들이 확인되는 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 이 덩치큰 집회를 예의주시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력이나 등수를 상기해서라도 한 번 잘해보자는 식의 이야기는 우선 당사자들에게는 뿌듯함과 자신감을 줄지 모르나 노동자 내부 분할구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투쟁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직접 싸우는 것이다. 집회는 그 싸움에 대한 풍부한 의사소통의 집단적 매체이고, 발언은 소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표현은 최대한 진실해야하고 구체적이어야하고 솔직해야한다. 이견들은 최대한 첨예하게 부딪히고 토론되어야 하고 정보는 열려져야 하고 모두가 스스로 판단할 수있어야 한다. 표현이 형식적이면 소통도 형식적이다. 표현이 획일적이면 꼭 그만큼만의 소통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러나 집회의 규모로 투쟁에 대한 양적 수치를 확인하려는 순간 집회는 소통보다는 동원 그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되고, 집회 참석과 불참이라는 분할선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도부들은 무수히 초조해진다. 모든 동력과 조직력은 그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집회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는 조합원을 느낄 수 있는 지표가 무엇인지, 자발성과 잠재력을 무력화 시키는 동원전술에 대한 맹점은 어떻게 드러날지.... 제3의 전술도 무엇인지... 평조합원들의 생각이나 은밀한 표현은 어떻게 흐르는지.... 소통에 실패한 지도부들은 감각은 이 모든 물음을 비껴간다.


"그날 96년 12월 26일 새벽에 국회가 그렇게 된 그날... 활동가들이... 현장을 돌았지요. 그날 당일은 조합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나오는 순간 정문 앞에서 바로 집회를 하고 싸웠어야 했어요. 줄도 맞출 필요 없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서서 비좁으면 담벼락에도 올라서고 현장에 있는 엠프 가져다 쌓아놓고 바로 그기서 집회하고 싸웠어야 했어요.

열기가 막 느껴졌어요, 그 순간은.... 조합원들도 그걸 바랐던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형식이 없어지는 순간, 차있는 열기를 뽑아내야 계속 충전될 것 같은 것... 끊임없는 완전 연소를 해야하는 순간..샘물도 고인 것은 퍼내야 새물이 솟아 나는거 아니까? 그런데 고수부지까지 인솔해 가고 형식적인 가두행진을 하고 그러면서 이상해졌어요. 달리는 순간 힘이 다 빠져버린 건지.. 판을 읽었는지... 취향에 안맞는 건지... 우리도 그때 이게 아니다라고는 느꼈지만, 그 다음 부터 조합원들이 도통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위기감을 못느낀다...관리자들의 통제가 너무 심하다.... 뭐, 말들은 많았지만, 싸울 만큼 싸워본 조합원들인데 동원하고 규격 맞추는 집회에는 더 이상 목매달지 않는 것 같아요. 막상 작정을 하고 덤볐는데 아무것도 안느껴진다 생각되면 안나와요. 관리자들 탄압 받아가며 나올 이유도 열정도 싹 식어버렸던 거지요. 뭔지 모르겠 지만 판을 읽는 것 같아요. 우리 조합원들 너무 안움직인다 이상하다... 밖에서 말은 많 지만, 거칠고 투박해도 조합원들은 민감하고 정확한거 같아요. 말은 안하고 있지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눈감아 버려요... 노개투 싸움에 대한 우리 몇몇 생각은 이래요. 이걸 우리가 못느끼는 것 같아요. 뭐...느낀다한들 별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이후로 울산에서 하는 지역 집회에서 현중위원장들은 종종... 우리 사업장 조합원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현장의 탄압이 워낙 강고해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덧붙이고 연설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대체로 노개투는 대중참여가 활발했던 적극적인 집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사소통이란 잣대로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문제점은 심각했다. 구체적인 날짜와 지역에 한정하여 예를 들어 묘사한 탓에, 당시 전국의 집회 전부를 규정하기에 다소 무리는 따른다고 본다. 그러나 집회와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서 접근한다면 일반적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느끼고 이야기한다.

"집회는 집회야. 딱딱하고 설렁하더라도... 집회는 집회로서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집회에서 더 이상 무얼... 집회는 집회야!"

이미 집회는 평조합원들의 의사소통 매체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적절한 시기 모인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집회의 기능이 있는데..."

국면이 조성되면 집회를 잡아야 하고, 앞으로 당분간 집회라는 형식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모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 노동자 투쟁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부분까지 동의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집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복원시켜야 할 것이다.


5.폐쇄회로-전달인가, 소통인가?


집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노동자의 미디어에서 의사소통- 우리는 이것을 전통적 의사소통 형식이라 생각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본단위로 구성된다. 한쪽에 발신자가 있고 한쪽에 수신자가 있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뼈대만 그린다면...


메세지(정보)

발신자----------------> 수신자


이런 경로 속에는 한편에서는 말하고 한편에서는 듣는다.

또한 발신자와 수신자는 인위적으로 고립되고 인위적으로 결합된다.

수신자 발신자 사이의 영향력과 상호적 관계는 메시지나 정보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런데 정보나 메시지에 대한 발신자의 선택의 영역은 참으로 다양하고, 선택과정에는 주로 패권적 담론과 코드가 작용되면서 정보가 결정된다. 그러나 수신자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할 자유,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모델 속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에서 수신자는 수동적인 액션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더욱 분쟁과 문제 일으키기는 자칫 노노분열로 해석될거라는 불문율 속에서, 그들은 종속과 침묵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신할 때는 물론, 회피할 때조차 발신자의 코드에 종속되어야 한다. 코드를 깨트리거나 위반할 수도 범주를 벗어날 수도 없다. 예를들면 집회 참석과 불참은 메시지의 수신과 거부로만 해독될 뿐이다. 그것이 발신자가 선택한 코드이다. 그러나 코드를 달리하면 그들의 침묵이나 집회 불참등은 단순히 수동적인 거부가 아니라 제 3의 행위나 또 다른 직관이나 표현일 것이다.

발신자의 해독능력 바깥 코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통용되는 지배적인 코드 밖에서 일어나는 평조합원들의 다양한 코드나 의미들을 발신자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 소통불눙 어긋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평조합원과 지도부가 위 모델 속에서만 커뮤니케이션 할 때, 상황이 조금만 민감해지면 모든 것은 어긋나버린다.


아직까지 노동자 내부 의사소통에서 발신자의 위치는 주로 지도부들이다.

집회, 노조신문, 유인물, 영상 등은 주로 발신자들이 더 많은 정보를 수신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고 가동된다. 정보가 일방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발신자들은 노동조합의 대소위원 조직체계를 통하여 가끔 수신자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매개과정이 추가될수록 최초의 표현들이 굴절될 가능성이 큰데다, 그 수렴하는 형식이 대의원 대회나 간담회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공식적인 언어의 형태를 강제 받는다. 더욱 대의원들의 전달력이나 취사선택이 가미된다면 이때 발신된 메시지의 생생함이나 코드의 민감함을 떨어뜨릴 위험조차 존재한다. 아주 건조한 메시지가 수신된다. 애초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기도 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6.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1998년 8월 21일 갑자기 만들어진 노조앞 집회에서 조합원들은 위원장에게

"우리 조합원들 발언을 제발 들어 주십시오, 위원장님..."

"위원장님, 바쁩니까? 회사하고 마라톤 협상도 하는데.... 아무리 바빠도 밤을 새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제가 여러분 얘기 안듣겠다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대소위원 통해서 듣겠습니다.."

"대소위원 통해서 올라가야 말이지... 우리 얘기가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제발 직접 들어 주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대소위원들을 통해 올라간다 만다의 사실 여부보다 평조합원들은 자신들이 발신한 메시지가 대소위원들을 통하여 원활하게 지도부로 수신되지 못한다고 체감하는 현실 이다. 잘 소통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왠만해서는 발신을 멈추고 침묵하고 지켜본다. "뒤에서 따라주면 된다...."는 인터뷰 내용은 이런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얼토당토 않는....." 순간이라고 판단되는 순간까지는 그들은 왠만하면 잠자코 있는 쪽을 택한다. 그런데 그날 굉장히 파격적인 소통을 제안한 것이다. 대소위원을 통한 의사소통 관행과 경로를 무력화 시키고 직접 발언에 나선 것이다. 연단위의 연사가 바뀐 것이다. 위원장과 집행부는 정말 오랜만에 집회 형식 속에서 수신자의 위치에서 들어야 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3시간이 넘는 자유발언대가 불빛도 없이 진행되었고, 평조합원들의 단호한 어조 일상의 언어들은 거침없이 쏟아졌다. . 집회에서는 전혀 쓰여지지 않는 언어와 말투였다. 생소한 어감과 금기의 발언들이 주저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참 이상한 집회였다. 앰프도 약했으며 문선대의 투쟁가도 연단도 조명도 없었지만 3시간 내내 긴장감은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열심히 발언했고 열심히 집중했고 동의와 지지를 표현할 때는 밀도가 다른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어와 비언어의 리듬이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매개없는 직접 발신, 그렇지만 단지 수신만을 요구하는 발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날 이 새로운 발신자들은 끊임없는 의문형 문장으로 발언을 채웠는데, 그것은 단순히 "예"를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복잡하고 상세한 서술을 요구하는 주관식 의문형을 끊임없이 펼쳐가며 어둠 속에서 길지 않은 분량으로 골고루 즉석에서 마이크를 돌려가며 팽팽하게 3시간 짜리 집회를 사회자 없이 진행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들 행위는 수신자에서 발신자로의 단순한 위치이동 이상이었다. 전통적인 의사소통의 양극 구별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전통적인 소통 모델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표현이 일어났던 것이다.

권력을 가지는 말투, 규범화된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발언, 전혀 새로운 어감, 형형색색의 다른 의견과 내용들을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했고, 또한 귀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어도 되는 연설, 말의 구색과 테크닉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연설, 눈치도 검열도 없는 자리, 권력화된 언어가 사라지고 발언의 독점권이 무너진 자리에서 자유로운 표현과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색다른 경험, 초기 노동운동 시절의 기억, 집회 커뮤니케이션의 느낌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한다.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옛날 집회할 때 그때 그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싸움은 그날 우리 요구대로 안됐쟎아요? 그냥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게 곧바로 모든 해결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날 그들의 절실한 발언들은 진심이었지만 요구하는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발신자 또한 메시지에 대한 피드백 정도로 감지했을 것이다. 정보내용 실행에 대한 결정권 또한 순전히 발신자의 권리였다. 그것은 엄청난 권력이다. 발신과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는 지도부와 그 반대편에 있는 평조합원들, 그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아직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다. 지도부에게 항의하고 요구하거나 수긍해주는 관계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평조합원들의 정체성 또한 혼란스럽다. 다만 우리는 실패한 경험을 통하여 의사소통이란 단순히 정보의 발신과 수신이 아니며, 발신된 정보의 피드백 수치로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미묘한 버전이라는 것을 확인할 따름이다. 정보 소통 경로를 바꾸는 문제, 회로의 일방성과 폐쇄성을 허무는 문제 정도로 밑그림이 잡힐 뿐이다.


그래서 98년 8월 21일은... 수정을 요구하는 수신자들의 항의에 불과했는지, 노조의 권력과 질서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 행위였는지... 정말 모호하다.

하지만 강도 높은 파열이었슴은 분명하다. 당시 집행권자들에겐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우리 모두는 그날을 공개해야 한다. 그때 발언되어진 말들을 꼼꼼하게 뜯어보면서 평조합원들의 전략과 전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연구자들이 수십편의 논문을 통해서 구축한 이론들 종류가 그날 그 자리에서 다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그들은 경영참여에 대하여..../ 노동조합이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원칙에 대하여... / 만약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면 선정기준에 대하여... / 노자의 협상 본질에 대하여... / 협상의 전술에 대하여... / 선동의 상징성이 안고있는 거짓과 진실의 양면성에 대하여.... / 이미지전술에 대하여... / 협상팀의 구체적 행동지침에 대하여.... / 집회진행에 대하여... / 공권력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하여.... / 그리고 그들 노동과 투쟁에 대하여... 그들은 전략 전술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예"라는 응답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대신 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들에게 사소한 결정까지 맡겨버려야 한다. 최대한 서로 다른 견해와 다양한 정보를 걸러지 말고 공개시키고 유통시키는 것, 소통하고 의논하고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수평적 관계를 실제적으로 복원시키는 것, 그들이 "가르치거나 이끌어 내거나 조직화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는 것... 명령과 지침이란 말이 주저없이 통용되는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것...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토대는 여기서 시작한다.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정보를 던지고 그 정보를 받아 안는 것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완성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정보의 송신도 수신도 아니고, 정보의 피드백 과는 다른 특별한 교감이고 상호적인 심리작용이며,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 다양한 표현,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합의제와 다르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끊임없는 긴장관계속에서 일어난다. 그런 의사소통 과정은 정보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행위의 선택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열어놓을 것이며, 어떻게 투쟁할 것이냐를 놓고 무궁무진한 전술과 전략을 창출 될 것이다. 평조합원들, 그들의 생생한 화법때문에 정보확산이나 전달력 또한 배가될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새로운 매체와 만날 것이다.

의사소통은 정보를 운반하는 미디어 조건이 중요하지만 결코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아무리 새로운 매체가 노동자의 손에 주어진다하더라도 그것이 곧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폐쇄회로는 전복될 것인가...

인터넷이나 사이버, 그곳이 그들의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표현력들로 넘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될지, 통제된 정보, 획일화된 전달사항, 언제나 승리할 것이며 승리했다는 현실감을 상실한 투쟁소식으로 채워지는 또 다른 폐허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국가의 노동통제는 노조의 체제내 포섭으로 유연화 되고 있다. 끊임없이 제도화되는 노조의 사회적 권력이 자본의 파트너가 될것인가 평조합원들의 진정한 대표가 될 것인가 평조합원들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은 그것을 감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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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미술제의 방향과 전망

노동미술제의 방향과 전망1)

 

손동혁

 

 

1. 노동 / 문화

 

“… 비자금을 쌓아놓기 위해 빌라 한 채가 통째로 금고가 되는 시대에, 한푼 두푼 모았던 돼지저금통이 아직도 감개무량하십니까? 자본가에게서 나온 검은 돈으로 정권을 사는 대통령이 노동자 편이기를 바라셨습니까? 조중동의 입이 곧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체제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셨습니까? 효리에게 알몸을 보여 달라는 스포츠신문들을 돈 내고 사보면서 세상이 바뀌길 바라셨습니까? 삼성해복투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도 라이온스를 응원하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울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줄줄이 개죽음을 당해도 현대 호랑이 축구단이 이기는 날 축배를 드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우리는 저들의 손바닥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 - 김진숙,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

 

“문화”를 인간 삶의 총체적인 것이라 했을 때 한 사회의 “문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철학적 기반이 어디에 있는가를 바라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철학적으로 이분하는 한 방법이 노동과 자본이라면 문화 역시 노동문화와 자본문화로 이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과 “문화”의 결합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IMF 이후 한국사회의 “노동”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우선 노동자2)의 범위가 바뀌었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는 더 이상 노동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노동의 방식과 공간은 과학기술과 유통방식의 발전을 통해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거치고 있으며, 노동의 상태는 이전과 비교해 상대적인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불안정하게3) 변화했다.
이러한 노동의 변화는 이전과 다르게 은폐된 방식으로 수많은 생명을 빼앗고 있다. 년초부터 년말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민과 노동자들의 자살은 국가적 수준에서 제도화되고 있는4) 불안정한 노동과 소비를 선동하고 있는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결합해 만들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이러한 상황의 도래에 대한 책임에서 노동문화운동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적극적인 비판과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5)

 

2. 노동 / 미술

 

“나는 개념적 미술이나 세계를 추상화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으며 미술이 현실에 근거하고 삶의 현장성에 근접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감동과 진실을 담보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 이종구, ‘주인을 찾습니다’

 

요즘 “민중미술”(또는 민족미술인협회)의 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다.6) 그리고 변화를 위한 과정으로서 ‘광범위하고 실제적인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주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먼저 진단해야 하는 것은 “늙고 지친” 이유가 아닐까? 스스로 “늙고 지친”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가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집요하게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현장성과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끊임없는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이 예술과 만났을 때 노동은 비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게 되고 감동을 극대화하게 된다.
80년대 민중(노동)미술운동을 통해 우리들은 이러한 감동을 경험했다.7) 하지만 80년대 민중(노동)미술운동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폄하되었다. 그것은 “더 높은 예술적 성취를 위해” 개인 작업실과 미술관으로 스스로의 몸과 작품을 가두게 만들었으며, 현장과 생명력으로부터 민중(노동)미술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80년대 민중(노동)미술운동에 대해 적극적이고 새로운 관점에서의 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8)


3. 노동미술제

 

“노동미술제는 전문예술작가와 노동자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또한 실내 전시장과 야외 마당전시, 그리고 사이버상에서의 전시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미술전, 만화전, 사진전, 노동자 참여 기획전, 그리고 어떠한 매체든 구분없이 창작 가능한 노동자의 작품을 받는 공모전으로 구성되며, 찰흙으로 빚어보는 노동자의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노동미술축제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보려고 합니다.” - 제16회 인천노동문화제 중 ‘노동미술제 소금꽃’

 

90년대 후반에 들어 최소한 사회적으로는 ‘노동미술’ 또는 ‘노동미술제’라는 것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 미술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노동예술위원회가 사실상 조직적인 활동을 멈추는 것과 함께 현장 노동자 미술소모임의 활동도 사라지고, 집회와 시위의 현장에서 걸게그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학생운동의 침체와 함께 대학 내 진보적 미술동아리의 활동마저 뜸해지면서 새로운 미술활동가의 재생산마저 단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노동미술제를 시작하는 데에는 인천노동문화제의 변화9)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인천노동문화제를 통해 미술과 현장을 연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5년째 계속되고 있다.10) 회화/조각/만화/사진, 실내/야외, 전문가/아마추어 등 모든 부분이 한자리에서 어루러지도록, 준비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하고 함께 즐거울 수 있도록, 미술을 매개로 하는 한바탕 굿판이 될 수 있도록….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상처받는 현실을 목격하고 그것을 형상화하여 역사에 기록하고 세상에 고발하는 것에 있고, 예술가는 상처받는 현실을 목격하기 위해 자신의 촉수를 민감하게 세우고 그것을 형상화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예술가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 황해미술 2003년 겨울호



1) 미술이라고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몇 년간 미술반 활동을 한 것이 전부인 필자에게 “노동미술제의 방향과 전망”을 주제로 글을 쓰라고 하니 정말 암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이 글은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가 아닌 지난 몇 년간 인천노동문화제를 기획하면서 고민에 부딪쳤던 것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미술에 대한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거칠게나마 정리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2) 전통적으로는 ‘제조업 생산직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을 노동자라 칭함

3) ‘불안정’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유연화’로 표현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노동의 상태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4) IMF 이후의 강제적 구조조정과 “근로자 파견법”의 제정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60%를 넘어서고 있다.(민주노총 추정 비율은 80% 이상)

5) 개별 노동자의 삶과 그 삶의 내부로 접근은 이미 시작부터 노동조합이라는 뾰족한 한끝이 아니라 다른 경로의 접근이다. 일상활동은 노동자 삶의 총체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은 문화적 접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노동문화운동은 노동조합 구조 속에서의 접근으로 진행되어 왔던 한계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일상활동의 접근은 그 출발부터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문화운동은 노동자의 삶이라는 총체적 구조로의 관점으로 그 활동방식, 내용, 조직 등이 변화되어야 한다.” -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정책토론회 자료집

6) “… 기왕지사 언젠가는 찾아 올 새벽을 기다리며 민중미술의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든지 아니면 불사조 같이 스스로 부활해야 한다. 늙고 지친 민중미술을 이대로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은 미술계는 물론이거니와 사회변혁 운동에도 별 도움이 안되는 것이 자명하다.” - 이인철 ‘민중미술의 높은 단계를 위하여’

7) “… 80년대 미술운동이 진행되던 당시 많은 이들이 대중적으로도 강력한 시각적 호소력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현실 비판적인 주제와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에게 매력을 느꼈고, 단순히 전시장 내에 머무는 미술이 아니라 정치투쟁의 현장이나 노동현장에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미술로 그 사회적 기능과 영향력을 확대한 성과들이 있다고 …” - 심광현, ‘80년대 민중미술의 공과와 탈근대적 공공미술의 전망’

8) “… 80년대의 미술운동은 어떤 예외적 상황에서 나타났다가 소멸한 일시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운동이 아니라, 부분적인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동반한 일련의 실험들로서, 사회정치적인 위기와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확산에 따른 미술의 사회적 영향력 약화라는 미술외적 위기들로 촉발된 낡은 미술문화의 패러다임 위기에 대한 능동적 반응이었으나, 그것은 10년-15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위상을 획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위기와 대응들의 보다 장기적인 흐름속에서 장차 출현하게 될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을 주장하는 최초의 문제제기로서, 보다 커다란 문화적 이해의 첫 도입부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 심광현, ‘80년대 민중미술의 공과와 탈근대적 공공미술의 전망’

9) 87년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온 문화제가 90년대 중반이후 양적으로 늘어났으며.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문화축제로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합법화 이후 발견하게 되는 제반의 문제들과2) 다양화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확장된 운동영역3)에 대한 혼란은 노동문화운동의 자성과 함께 새로운 문화운동을 위한 적극적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는 일상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투쟁으로 모아졌으며 “일상을 모든 것과 싸워라!”로 정식화되었다. 인천 노동문화제는 이러한 노동문화운동의 시작과 과정을 함께하면서 맨 앞에서 길을 열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10) 문화를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세상을 바꾸는 힘! 제12회 인천노동문화제

1999년 10월 23일(토)-30일(토)

․ 부대행사

“지역의 필요한 문화적 역량을 확대하고 문화제에 참여하는 각 단위의 조직적 실천이 가능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치한다. 다양한 볼거리와 참여행사를 배치해 문화제를 보다 풍성하게 한다. 1. 만화, 사진, 시화 그림전시”

제13회 인천노동문화제 “당당하게” -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2000년 9월 13일(수) - 17일(일)

․ 전시[니기미시반노미전 泥起美示叛勞美展]

“니기미시반노미전은 기존의 미술행사가 가지는 자기 폐쇄성과 경직된 틀을 거부하고 야외공간을 선택하였다. 이는 열린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을 점령하여 적극적으로 미술과 대중을 만나게 하는 장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미술문화의 진정한 대중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니기미시반노미전은 회화, 대자보, 시화(걸개), 포스터의 평면미술에서부터 도서, 도자기 굽기, 페이스페인팅 등 비평면 미술장르가 한데 어우러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야외마당에서 한데 어우러지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전시회를 펼치고자 하는 것이다.”

“회화전, 시화전, 포스터전, 대자보전, 설치, 도서전 등”

세상을 바꾸는 힘! 2001, 인천노동문화제 “노란선 넘어…”

2001년 9월 18일(화) - 23일(일)

․ 화전(畵展)놀이

“전복(顚覆)이란 곳곳의 현장에서, 우리 이웃들 속에서 작지만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 모래알 같은 힘들이 모이고 섞여 하나의 단일한 힘의 형태로 드러날 때 이루어집니다. 나의 모습, 이웃의 모습이 올바른 미(美)의 전형임을 깨닫고 함께 어깨걸고 나아가 노란선 넘어 세상을 진정한 삶터로 만들어 봅시다.”

“사진전, 노동미술전, 노동만화전, 도서전, 시화전, 참여전”

세상을 바꾸는 힘! 2002, 인천노동문화제 “밥과 일 그리고…”

2002년 10월 2일(수) - 6일(일)

․ 화전(畵展)놀이

“…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예감했던 무언가를 연신 주장하는 그림들, 그 경직된 전시대 사이를 빠져 나오고 나니 숙면에서 깬 듯 육체가 개운하다. 이상하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나는 그곳에 무엇을 버리고 온 것일까. 무겁고 질긴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

“노동미술전 ‘곤지곤지(坤地坤地)’, 노동사진전, 노동만화전, 시화전, 판화전”

세상을 바꾸는 힘! 제16회 인천노동문화제 “소금꽃”

2003년 10월 8일(수) - 12일(일)

․ 노동미술제 소금꽃

“노동미술제는 전문예술작가와 노동자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또한 실내 전시장과 야외 마당전시, 그리고 사이버상에서의 전시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미술전, 만화전, 사진전, 노동자 참여 기획전, 그리고 어떠한 매체든 구분없이 창작 가능한 노동자의 작품을 받는 공모전으로 구성되며, 찰흙으로 빚어보는 노동자의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노동미술축제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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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화운동의 현황과 과제

 

노동문화운동의 현황과 과제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 손동혁

(92년 노래선언으로 활동시작, 현재는 인천민예총 사무국장)


* 이 글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가 아닌 현재 시점에서의 현황과 과제를 경험에 의거해 거칠게 정리한 것임.

* 당연히 주관적 판단과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음.



0. 들어가기


- 87년 노동자대투쟁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다양한 문화예술활동들이 생겨남.

- 80년대후반 노동문화운동을 하는 전국적 조직들이 생겨남.(민문연이후 서노문협, 전노문연, 노문연 등으로 분화)

- 장르를 중심으로 현장 노동자들의 문화패 조직.

- 90년대 중반, 전체운동이 이념적 혼란을 겪는 것과 함께 대부분의 연합조직 해산.(민예총 건설과 사단법인화)

- 모색,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개별활동

- 민주노총의 건설을 통해 전국적 네트워크 확보(노동문화운동의 독자적 네트워크 필요성 제기)

- 2000년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창립



1. 현황


□ 조직


1) 문화패

- 전국적으로 1,000명 이상이 문화패원으로 활동중

- 노래패, 풍물패, 영상패, 율동패가 일반적임

- 연극, 미술, 문학은 소수가 활동중

- 문학은 문화패와 문화단체로 나누기 어려움

- 노동조합 홍보단위를 중심으로 글쓰기 모임이 유지되는 곳 있음

- 전국적 연대단위 구성을 위한 사업 진행 → 전국노동자문화패장 연석회의


2) 문화국

- 연맹 중심으로 사업진행됨

- 지역차원의 문화사업은 현실적으로 진행이 어려운 상태 → 문화사업 담당자가 극소수


3) 문화단체, 개인

- 연극, 노래, 풍물, 문학을 중심으로 단체활동 지속

- 풍물은 지역성을 강화하면서 굿판을 만들어 내며 활동중

- 노래를 중심으로 개인활동 경향 강화

- 민중가요 15년, 꽃다지 10년의 시사점은?

- 미술단위 와해

- 문학은 출판사업체계를 통한 사업진행 → 삶이 보이는 창, 작은 책

- 영상단체의 왕성한 활동

- 기획집단의 가능성 모색

- 단체는 전국노동자문화운동단체 대표자회의를 통해 연대사업 진행

-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의 설립과 기대 또는 실망

- 노동의 소리의 성과와 한계

- 민예총과 이중 멤버쉽을 유지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독자적인 조직틀을 유지


* 문화개혁 시민연대와의 관계설정은?

* 미디어 단위와의 관계설정은?

- 참세상 방송국

- 서울 영상미디어센터

* 정당 또는 정치조직의 문화사업은?


□ 사업


- 년간 많은 수의 문화행사와 투쟁의 현장에 문화일꾼들이 참여하고 있음

- 격년으로 열리는 전국노동문화일꾼대회로 총화

- 인터넷을 통한 사업진행 일반화 → 사이버 문화예술운동으로의 발전은 취약

- 인터넷을 통한 활동 → 꽁알꽁알, 해방글터 등


□ 문제점


- 전체적으로는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

- 문화패 활동은 여전히 전통적인 노조활동방식으로 정체되어 있으며, 일상화된 탄압을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하고 있음.

- 문화국은 거의 1인이 연맹 전체의 문화사업과 집회 실무를 담당함으로서 중장기적 기획사업보다는 당장 처리해야 하는 사업에 매몰될 수 밖에 없는 실정. 관성화!

- 단체 및 개인은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활동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음. 하지만 여전한 생활의 어려움과 새로운 창작활동에 대한 고통스러움이 역력함.



2. 과제


- 새로운(현재의 활동방식에 맞는) 연대방식에 대한 실험과 모색

- 사이버 공간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사이버 문화예술운동 양식 개발

-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로 표현되고 있는 슬로건의 현실화 → 인식의 확장

- 창작활성화를 위한 방안 모색

- 새로운 반자본적인 문화활동에 대한 관심과 연대

- 이론영역에 대한 탐구와 정식화

- 지역과 공간에 대한 실험

 

* 2002년 전국노동자문학회 대동제에서 발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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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보다 문득

시인 신동엽의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외침이 생각났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時代는 있었다.

 

백제의 달밤이 지나갔다,
고구려의 치맛자락이 지나갔다,

 

王은,
百姓들의 가슴에 단
꽃.

 

군대는,
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 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
아침 저녁 나누었다.

 

가을이면 迎鼓, 舞天,
겨울이면 씨름, 윷놀이,
오, 지금도 살아 있는 그 흥겨운
農樂이여.

 

시집가고 싶을 때
들국화 꽂고 꽃가마,
장가가고 싶을 때
정히 쓴 이슬마당에서
맨발로 아가씨를 맞았다.

 

아들을 낳으면
온 마을의 경사
딸을 낳으면
이웃마을까지의 기쁨,

 

서로, 자리를 지켜 피어나는
꽃밭처럼,
햇빛과 바람 양껏 마시고
고실고실한 쌀밥처럼
마을들은 자라났다.

 

地主도 없었고
官吏도, 銀行主도,
특권층도 없었었다.

 

半島는,
평등한 勞動과 평등한 分配,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分配,
그 위에 百姓들의
祝祭가 자라났다.

 

늙으면 마을사람들에 싸여
웃으며 눈감고
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半島는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分配의
무정부 마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分配,
그 위에 靑春들의
祝祭가 자라났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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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주시오. 그리고
열 사람만 나와 주시오
역적이 되고 싶은,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
열사람만 나와주시오,

 

문을 흔듭시다,
주먹으로 두드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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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너무나 더운 어제 오후 사무실에서 친구가 구워 준 CD를 열씸히 봤다.

제목은 "화씨 911"이라고 했다.

2시간 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고 났더니

젠장할 제목이 9/11이었다.

 

9/11 사건 당시 미국의 소방관들이 정말 헌신적을 구조작업을 펼쳤고

미국인들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선은 화가 났다.

영화를 잘못 받아 준 친구에게...

발빠르게 이런 영화를 만들어 올린 미국정부(?)에게...(물론 영화에서는 소방관 다큐를 찍다가 우연히 사건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감독이 말한다.)

그리고 끝까지 본 나에게...

 

하지만 어떠한 의도도 참혹한 현장의 기록 그 자체에서 오는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건 사실이니,

"화씨 911"을 보고자 하시는 분들은 유사품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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