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결과들이 찝찝하다. 예상외로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다. MB심판 같은 허구적인 구호에 같혀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의 집권을 정당화시켜 준것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도 필요하겠고, 그래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필요하겠지.

김상봉씨가,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수 민주당 득표율이 아니라 진보신당 10% 득표라고 얘기했는데, 명쾌한 인식이다. 가끔 우리의 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들곤 하는데, 콘서트 보러 모인 10만명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지만, 다칠 각오를 하고 파이프를 든채 모인 1천명은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현실 정치는 실재적인 힘을 쉽게 은폐시키고, 숫자놀음에만 시선을 맞추게 한다. 심상정씨는 결국 그 시선에 갇혀 놀음에 빠져들었다.

심상정씨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라는, 운동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반mb전선을 외치며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다. 역사를 바꿔온 것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현실정치의 프레임에 갇히면 그런 역사인식은 실종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이점을 익힌다는 것일텐데, 광주의 영령들이 혁명적이었던 건 죽을 줄 알면서도 싸웠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하고서 총을 버릴 수 있던 기회가 있었지만, 내 다음 사람에게 비겁의 기억을 남기지 않기 위해 패배하는 것을 선택했다. 광주의 정신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그 죽는 법을 잊어버린 데 있다. 자신의 위치를 겸손하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찾지 않고, 오만하게 결정적 국면의 역사를 바꾸는 자로 남고자 하는 것 말이다.

mb를 심판하겠다는 것은 결국 내가 죽지 않고서 싸울 방법을 찾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될법한 것과 그럴싸한 것의 절충이잖은가? 그리고 mb를 심판하는 것이 중요하고 커다란 국면이라는 '대의'명분은, 내 손으로 큰 흐름을 바꿔내서 역사에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이 전제된 것이다. 이건 혁명을 희화화 시키는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다. 언제나 임박한 파국을 외치며 양치기 소년이 되어, 자신을 장렬한 투사로 포장하는 것.

심상정은 살고자 했고, 그래서 모두가 죽게 되었다. 4대강을 심판할 유시민은 결단코 박지연씨를 추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지연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은 4대강을 심판한 뒤로 미뤄도 되는 일인가? 그렇게 죽음에는 경중이 있는가?  대의가 아닌 것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어졌고, 자신을 역사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 덕분에 역설적으로 역사는 대의를 주관하는 소수의 손에 맡겨진다. 기억되지 않는 죽음들에 대해 심상정씨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 이전에 심상정씨를 그렇게 압박했던, 반mb전선을 꾸리자던 그 치들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특히, 민노당, 당신들은 역사 앞에 어떻게 무릎꿇을 것인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박정희 이래 수구 꼴통들에게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될법한 것에 파리 몰리듯 달겨드는 게 아니라, 나를 그저 묵묵히 벼려내고 버티어내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