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성폭력으로 정의할 것인지, 성폭력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런 논의는 그 논의의 주체가 소위 '운동'을 몇년 했느냐, 혹 얼마나 빡세게 하고 있느냐와는 상관 없이 거의 대부분 저열한 논쟁으로 치닫는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자신을 '운동'한다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운동하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그것도 그저 직업인가? 여기가 무슨 디씨커뮤니티도 아니고, 어쩌면 이렇게 반성과 성찰이 없나?
이 사회 어느 누구도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게 아니며, 자유로운 개인(완성된 주체)이라는 껍데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형태이다.' 성별권력관계 속에서 평등한 만남이란 환상에 불과할 뿐이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실의 질곡을 은폐하는 효과를 가질 뿐이다. 성을 둘러싼 모든 문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데, 그것을 두고 일어난 일이 개인적인 호오의 문제로 혹은 과도함의 정도에 대한 문제로 정리될 수 있나? 그저 생각하고 표현했을 뿐이지만, 그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사회적 관계를 뛰어넘어 상상을 할 만큼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자신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이데올로기 안대에 그려진 평원에 심취해 자신은 자유롭게 날고 있다고 꿈꾸는 것일 뿐.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건 기본 아닌가? 누군가 이거 아닌거 같다고 얘기했을 때, 그곳에 왜 부딪힘이 존재하는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효과를 가지는 지 생각해 보는거. 난 운동을 하고 있으니, 이미 사회적 관계에서 자유로워졌는가? 그래서 반성보다는 자기 방어가 더 급했나? 그 로빈슨 크루소 타령은 마르크스가 살아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데, 소위 자신을 운동한다고 혹은 진보적이라고 여긴다면 역사를 좀 바라보자. 진보라는 이념은 역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역사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에 동의한다면, 그래서 역사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저 겸손하게 반성하고 성찰하자.(애플, 구글을 쓰는 게 진보입네 여기는 치들도 많은 것 같다만.) 그리고 페미니즘은 다른 게 아니라 그런 공동체적인 반성의 윤리다.
대체 이런 저급한 논쟁이 언제부터 토씨하나 안바뀌고 재연되고 있는건가? 자기검열이 걱정돼? 당연히 자기 검열 해야지. 자기검열도 뭣도 싫고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은 인간들이 밥은 먹고 먹고 TV는 보고 스포츠도 즐기고 사회적 관습은 다 따라하며 살고 있을 거 아냐.(이런 것들 다 벗어나 있다면 얘기해 주시길.) 저 틀 안에서 사는 건 상관없고, 자기 생각 반성해보는 건 틀 안에 갇히는 거 같애? 대체 얼마나 자유롭고 싶은데?
다만 걱정되는 건, 성폭력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바라봤을 때, 가해자/피해자로 이분한 뒤 가해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흘러가서는, 대부분 경우 그래왔던 것처럼, 변화 대신 서로에게 상흔만 남긴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성별 권력 관계에 대한 공동체적 성찰을 제안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바로 이 순간, 성별권력구조가 없는, 그래서 성폭력이 없어지는 공동체란 미망에 불과하니. 그리고 이러이러한 '성폭력적' 행위를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기존의 섹슈얼리티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관계의 구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동체가 어느 순간에나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게 전제돼야 하는 것이지, '나 이런 구도는 식상해' 같은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로 되는 거 아니라는 거. 그런 표출 또한 로빈슨크루소 놀이.
헌데 내가 남겨논 이런 글도 참 식상하겠지?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의 글을 떠올리며 적었고, 그 사람들이 이걸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읽는다면 대충 누구 가르키는지 알겠거니 믿는다.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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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넘어서는 관계의 구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동체가 어느 순간에나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게 전제돼야 하는 것" 요 부분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싶기도 하고요.
명쾌한 좋은 글 고맙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는 아래 지나가다님이 쓰신 것들이 좋은 방법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음, 현실의 관계에서 보자면, 가끔 성적인 농담이 불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떠올려봐요. 그런 농담들이 가능하려면 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서로가 상대를 대상화하거나, 특정 성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 신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어느 순간에나 '대단히' 솔직해야 하고(이를테면 '그 농담의 대상이 너였어, 미안해' 같은 자기고백과 반성까지도), 매순간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할 거에요. 참 멀고 무식해 보이지만, 솔직하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지만, 관계가 보다 우애로워질 수는 있는 듯 해요..
대부분 공감하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거 같애. 어떤 분이 쓰신 글에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 똑같은 논쟁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다 나자빠졌거나 떠났다는. 왜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결국 이 공동체를 떠나야만 했을까. 결국 또다시 저열한 논쟁이 발생했고,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전에 있었던 논쟁의 결과물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난 이시점에서 논쟁이 저열한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논쟁의 저열함에 질려있다면 "이제 이런 논쟁은 질려, 너희들은 어찌 이렇게 똑같냐"라고 외치는 것보단, 당신같은 사람들이 이전의 과오나 오류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개입하고 논쟁을 이끌어가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
가령 이 기회에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만든다든가, '반여성적' 표현에 대한 채널을 만들어 공감대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지. 이전에 이런 노력들이 존재했나? 아니면 존재는 하는데, 다들 알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보넷이라는 공간이 비록 서로가 다 아름아름 알꺼라고 생각은 되지만, 접근의 제한이 없는 공간이라는 특성상 새로운 사람들도 많을거야. 이런 논쟁이 이미 존재했다면, 그 결과를 어떤 형태로든 공유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
아무튼 좋은 글 잘 읽었어.
나도 댓글에 공감해.
문제제기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표현이 문제가 됐다면, 그 표현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 근데 그에 앞서 걸리는 건 진보넷불로그를 사용하는 집단이 그런 토론을 감내할만큼의 윤리를 갖추고 있느냐야. 말한 것 처럼 이곳은 접근의 제한이 없는 공간이고, 그래서 별 사람들(무슨 단월드니 뭐니)이 다 들리는 곳이기도 하고, 또 별 사람이 아닌 이들이라 해도 성폭력에 대한 제기에는 경기를 일으키잖아. 그래서 공동체의 윤리를 얘기했지만, 내가 얘기한 건 별 내용없이 공허하다는 것도 알아.. 반복되지 않도록, 공동의 기억으로 남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한 거 같아. 고민 많이 할게. 얘기해 준 내용 다 고마워.
덧. 채널을 만들어 소통해보는 방법 좋은 거 같애.
덧2. 나도 굳이 말 높이진 않았어.
모두 떠난 건 아닙니다. ^^그리고 논쟁의 결과물은 포스팅으로 남아있지요. 물론 사라진 글이 더 많겠지만. 지나가다님의 댓글에 대체로 동의하고, 논쟁의 방식이나 논리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이라는 걸 하고 싶은데, 다른 분은 몰라도 저는 솔직히 많이 지쳤어요.
자기검열이란, 감시의 시선을 전제하고서야 비로소 작동하는 그야말로 근대적 기제가 아니었나? 철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성찰'이나 '자기 반성'과는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사용되어온 단어를, 저렇게 뭉뚱그려 후려치는 건 적절치 않은듯. 자기 검열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는 건, 또 다른 맥락에서 분명 의미있는 행위라고 여겨짐.
어떤 분이 '자기검열'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곳의 용법을 보니, '반성'이라는 단어가 적합할 자리였다는 생각이었는데, 그걸 표현하려던 것이 제 표현이 잘못됐던 것 같음.
글쎄님의 의견에 동의함.
(존댓말로 댓글 달다, 다시 읽어보니 말이 짧아서 나도 줄였음. 이거 붙이느라 말이 더 는 것 같긴 하지만.)
잘 읽었습니다. 식상하지 않습니다.
식상하지 않습니다. 초기에 보고 오늘 다시 들어와봤는데, 기분은 나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글을 읽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 저에게는 매우 감사한 글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