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평화와인권연대 소식지에 실으려고 쓴 글..;;

 

 

 

영화에서 김복남은 섬에 고립된 여성이다. 섬사람 모두는 한편이 되어 잔인하리만치 김복남을 핍박한다. 그리고 이들은 김복남이 겪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다. 김복남은 섬 바깥에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했다.
얼핏보면 이 영화는 그렇게 당해온 김복남의 복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얽혀있는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 섬에 쉬러온 복남의 친구 해원은 모든 상황을 보고서도 끼어들지 않는다. 해원에게 복남은 철저히 타인일 뿐이다. 복남은 해원에게 넌 다 알고 있지 않느냐며 도와 달라 요청하지만, 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며 외면한다. 복수를 시작한 복남은 자신을 괴롭혔던 마을 사람 뿐만 아니라 해원에게도 낫을 겨눈다.
 
김복남은 곳곳에 있다
이 영화는 단어를 몇 개만 바꾸면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현대차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 전북버스노동자, 이외 외롭게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전북에서는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이 100일을 넘겼다. 행정당국, 버스회사, 경찰은 한 몸이 되어 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오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들의 무관심한 태도도 큰 이유로 작용한다. 시는 이런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무리하게 대체버스를 운행하며 시민들의 불편을 없애려 노력해왔다. 버스 운행률이 90%를 넘어섰고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은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에 관심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
이 영화는 이런 시민들에게 죄가 없는지, 이 시민들과 버스회사는 한 편이 아닌지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조자는 직접 가해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해에서 책임을 면할 것인가? 도로를 막고 시민들의 불편을 야기하는 노동자들의 복수는 과도하고 비난받을 일인가?
 
이 복수는 과도한가?
영화에서 해원은 거짓말을 했고, 가해에 동참한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명시적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흐릿하게 엉켜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곳곳에서 언제나 있지만 관심 가지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조차 않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외면했다고 탓할 수 있을까? 힘없는 이들의 싸움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사회는 이런 식으로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유로운(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만든 사회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사회와 구성원들은 서로 면죄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누군가는 실제로 고통 받으며 스러져가고 있다. 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제3세계 아동이 맨몸으로 농장에 농약을 뿌리고 있고,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을 얻는다. 해원처럼 ‘난 아무것도 몰랐다’며 발뺌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있다.
 
복수는 누구에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오랫동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해마다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선전물로 열사를 알릴 때 마다, 난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 박종태 열사가, 김주익 열사가, 배달호 열사가, 김진숙씨가.. 이런 사람들이 내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잔인한 복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복수의 방식보다는, 집요하게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캐묻는다. 김복남의 낫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우리 모두를 향해 겨눠지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오랫동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해마다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선전물로 열사를 알릴 때 마다, 난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 박종태 열사가, 김주익 열사가, 배달호 열사가, 김진숙씨가.. 이런 사람들이 내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잔인한 복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복수의 방식보다는, 집요하게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캐묻는다. 김복남의 낫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우리 모두를 향해 겨눠지지 않을까?김복남은 섬에 고립된 여성이다. 섬사람 모두는 한편이 되어 잔인하리만치 김복남을 핍박한다. 그리고 이들은 김복남이 겪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다. 김복남은 섬 바깥에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했다.
얼핏보면 이 영화는 그렇게 당해온 김복남의 복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얽혀있는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 섬에 쉬러온 복남의 친구 해원은 모든 상황을 보고서도 끼어들지 않는다. 해원에게 복남은 철저히 타인일 뿐이다. 복남은 해원에게 넌 다 알고 있지 않느냐며 도와 달라 요청하지만, 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며 외면한다. 복수를 시작한 복남은 자신을 괴롭혔던 마을 사람 뿐만 아니라 해원에게도 낫을 겨눈다.
 
김복남은 곳곳에 있다
이 영화는 단어를 몇 개만 바꾸면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현대차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 전북버스노동자, 이외 외롭게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전북에서는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이 100일을 넘겼다. 행정당국, 버스회사, 경찰은 한 몸이 되어 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오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들의 무관심한 태도도 큰 이유로 작용한다. 시는 이런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무리하게 대체버스를 운행하며 시민들의 불편을 없애려 노력해왔다. 버스 운행률이 90%를 넘어섰고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은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에 관심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
이 영화는 이런 시민들에게 죄가 없는지, 이 시민들과 버스회사는 한 편이 아닌지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조자는 직접 가해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해에서 책임을 면할 것인가? 도로를 막고 시민들의 불편을 야기하는 노동자들의 복수는 과도하고 비난받을 일인가?
 
이 복수는 과도한가?
영화에서 해원은 거짓말을 했고, 가해에 동참한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명시적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흐릿하게 엉켜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곳곳에서 언제나 있지만 관심 가지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조차 않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외면했다고 탓할 수 있을까? 힘없는 이들의 싸움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사회는 이런 식으로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유로운(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만든 사회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사회와 구성원들은 서로 면죄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누군가는 실제로 고통 받으며 스러져가고 있다. 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제3세계 아동이 맨몸으로 농장에 농약을 뿌리고 있고,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을 얻는다. 해원처럼 ‘난 아무것도 몰랐다’며 발뺌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있다.
 
복수는 누구에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오랫동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해마다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선전물로 열사를 알릴 때 마다, 난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 박종태 열사가, 김주익 열사가, 배달호 열사가, 김진숙씨가.. 이런 사람들이 내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잔인한 복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복수의 방식보다는, 집요하게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캐묻는다. 김복남의 낫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우리 모두를 향해 겨눠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