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이해

다른 이를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걔중 가장 진절머리 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핑계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어떠한 영향을 받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어리다고 비겁한건 아니니 말이 맞지 않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인간이면 바뀔 여지라도 있을텐데, 그런 반성이 없는 사람은 바뀔 여지도 없으니 더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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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이상을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며 모임을 정리했던 아이가 스키장 간다는 걸 보고 드는 생각이다. 내 기준에서 보면, 그 아이가 말했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허술하게 살면 안된다.
물론 나름대로 그 이상을 추구하겠지. 하지만 그게 자기 삶의 목적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지금의 생활이 낯부끄럽지 않을까?
이건 어떤 삶을 추구하든지, 그 방향과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던져야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꼭 지고지순한 삶의 목표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삶의 목표라고 이야기할 정도라면 그것을 위해 현재의 삶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반성 해야하지 않느냐는 거다. 활동가에게도, 다른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말한 큰 이상이란 것도 정말 그 이상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담겨있기 보다는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합리화시키는 겉치레로 보인다. 자신의 안녕에 대한 욕망을 그렇게 큰 이상으로 포장할 이유가 없다. 그런 욕망이 부끄러울 것도 아니고, 없어져야할 것도 아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다를까를 궁리하지 말고, 수많은 삶들의 숭고함을 경외하며 묵묵히 살아가면 될일이다. 성인입네 하면서 할거 다하는 인간들이 가장 저질이지 않던가.
뭐, 다른 사람을 마음을 속속들이 알수는 없지만, 그 아이가 자신을 너무 쉽게 합리화하는 건 틀림없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게 합리화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그래도 누구는 자기가 부끄럽다는 걸 안다고 말해서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2009/12/15 23:00 2009/12/15 23:00

지나간다컨닝

 

내 점수를 올리기 위해 처음 했던 컨닝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다.

국어시험에 맞춤법을 물어보는 문제가 있었다. 헷갈려서 답을 못정하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답을 써야한다는 강박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빈틈을 안남기려는 강박증은 뿌리 가 깊은 것 같다. 그 무렵에도 컨닝이란 건 학교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는 반사회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어있는 답을 메우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컨닝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걸렸을 때 겪게될 일들이 두려웠을 따름이었다. 내가 한문제를 더 맞는다 해서 누군가에게 별다른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고, 설사 죄책감이 들었다 해도 비어있는 답안란을 놓아두는 것보다는 그 죄책감을 마음에 이는 것이 차라리 더 홀가분했다.

 

그 땐 책상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시험을 치뤘었는데, 컨닝을 못하게 막기위한 의식이지만 사실 이건 컨닝에 매우 알맞은 환경을 제공해준다. 다른 사람 것을 보고적기야 힘들겠지만, 자기 책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가려지니 말이다.

시험과 관련된 책들은 다 치웠기 때문에 책상에 참고할 만한게 없었는데, 서랍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왔던게 얇은 한영사전이었다. 빈약해보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쟤도 사전이니 표준어대로 실려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고 가방을 병풍삼아 재빨리 단어를 찾았다. 그렇게 답을 찾아 적어냈을 때의 성취감이란!!

 

그 뒤로도 컨닝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미 충분히 높은 점수를 받고 있었음에도, 100점이 아닌 시험지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했고, 100점에 대한 강박이 컸다. 점수는 등수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집착했던 것은, 아닌 척 해도 스스로를 서열화된 경쟁질서에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서술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무렵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등수를 얻고 있었고, 그 이상의 등수가 필요하다는 욕심을 낸 적은 없다. 시험이 절대평가이길 항상 바랬으며 대학입시에는 절대평가로 계산된 내신성적이 반영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1등을 하든 20등을 하든 90점만 넘기면 별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컨닝은 등수를 올리는 것 보다는 비어있는 답안지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벽증에 더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설명하는 편이 옳다.

 

대학에 와서도 컨닝은 때때로 이어졌고, 이 때의 컨닝은 생존을 위한 컨닝이었다. 유급을 면하기 위한 - ......

 

나중에 더 써야지.;;

 

 

 

 

그런 결벽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Pass 시험이고 충분히 통과할 만큼 답안을 작성했더라도, 남은 여백을 채우기 위해 끙끙대며 컨닝이라도 할 방법을 강구한다. 시험에서 뿐만 아니라, 레포트를 쓸 때도, 다른 글을 쓸 때도, 어떤 사업을 할 때도 - 여백이 보이면 그것이 머리에 끊임없이 떠올라 손댈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는 여백을 못견디는 건 그렇다쳐도, 그 여백을 메우기 위해 그만큼 절실하게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컨닝과 비슷한 방법을 시도해서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그냥 놓아둔다. 어차피 내가 노력하지 않았던 부분이니, 성공하면 덤이고, 안되도 손해볼 건 없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완벽에 대한 결벽증과 내 삶을 소진시키고 싶지 않은 얄팍한 마음은 샛길을 찾아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잡을 수 없는 공을 잡으려 해야하느냐는 질문은 정당하다. 거기에는 공을 잡아내야 하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후자의 질문을 빼놓고서, 떨어진 공을 주워 글러브에 담아놓고는,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지만 공은 잡는다고 얘기하는 꼴이다.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는 내가 본래는 어느 편에 가까운 인간인지 알수없게한다.

 

100 점짜리 시험지에도, 성공한 삶에도, 멋진 인간관계에도, 어느것에도 얽매이기 싫다는 마음은 언제나 있다. 하지만 얽매이지는 않되, 그것을 놓아버리지는 못한다. 놓지는 안되, 잡지도 않기 때문에 되면 그만, 안되도 그만이다. 결국 내 진심을 다하는 것이지 않다. 내 모든 걸 던지는 삶을 동경하지만, 일상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에게는 정작 그러지 못한다. 내 삶을 던지지 못하면 잡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이다. 이런 내 모습이 안타깝다.

2009/12/13 11:08 2009/12/13 11:08

지나간다아픔

나만 아픈 게 아니다.
아픈 사람은 참 많다. 아픔의 종류도 다양하다.
비슷한 종류의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위로가 된다.
공감받지 못할까봐, 동정받을까봐 두려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서로 꺼낼 수 있다.

비슷한 류의 사람들이 비슷한 아픔을 겪는 것 같다.
나 의 상처는 나의 온존재를 걸었던 무언가가 무너졌을 때 생긴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 있어야 했다. 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내가 죽을 수 있었다. 그 칼날이 나를 베었다. 내 주변의 아픈 사람들도, 보통 그래서 아프다. 자신의 모든 걸 던졌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데 대한 상실감. 비슷한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하게 아프다.

나만 아픈 게  아니다. 자신이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픔을 나누고 싶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다. 내가 겪은 아픔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연민이 든다. 쓰다듬어 준다. 그 사람도 나를 쓰다듬어 준다. 동정하는 게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느낌이 좋다.

2009/12/12 00:48 2009/12/12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