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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코뮤니스트의 발자취를 따라 1

코뮤니스트의 발자취를 따라

기억과 망각의 도시를 찾아 -

 

 

지난 가을 우리는 아주 특별한 여행을 했다오랜 시간 함께 투쟁하고 연대했던 동지들과 코뮤니스트 활동가들이 처음으로 공동의 목적과 각자의 의미를 찾아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그중 하나는 코뮤니스트의 발자취를 따라 유럽의 몇 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혁명가들의 삶과 시대를 느껴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모두의 안전과 함께 계획한 일정(1~2주)을 무사히 마치는 것에 우선을 두었다하지만개인적으로는 방문하는 도시의 일부분이 되어보고 싶었고찾고자 하는 시대의 어느 순간과 마주치고도 싶었다내가 도시와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는지흔한 관광객이 되었는지는다음 여행을 기약했으니 그때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9월의 어느 날

 

우리는 1차 일정으로 파리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돌며 코뮤니스트(맑스와 레닌 그리고...)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기로 했다방문할 도시의 이동 거리가 멀어 차량을 빌려서 움직였고중간에 파리 코뮨 등의 역사적 장소도 방문했다.

 

첫째 날, 파리에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우리를 초대하고 안내해주신 정선생님과 함께 렌터카를 인수했다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인원이 늘어 14명이 7인승 두 대로 움직이기에는 자리가 좁을까 걱정했는데다행히 내가 인수한 차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고급사양의 9인승이었다.

 

다음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에마침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우리가 방문할 박물관이 있다고 하여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그런데 공항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렌터카 회사의 차량 관리 소홀로 사소한 문제가 생겨 박물관 방문을 취소하고 근처의 대형쇼핑몰로 향했다쇼핑몰에서 차량 문제를 해결하고 공항으로 돌아가 일행을 픽업해 초대해주신 정선생님 댁에 도착했더니 늦은 저녁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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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겉과 속이 달랐던 차량

 

9월의 어느 날 파리에서의 첫 운행은복잡한 공항 주변을 두 시간 넘게 돌며 낯선 차량 운전에 익숙해지고파리의 신호체계를 익히기도 전에 파리 시내를 관통하는 야간운전을 하면서 시작되었다파리에서 (대중교통 여행을 하기 전) 렌터카로 장거리를 이동한 첫 일주일간의 여행기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운행 일기와 여행 일기가 섞여 있기에 미리 알려둔다.

 

파리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운전에만 집중했기에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하지만대형마트와 렌터카 회사에서 노동자들이 손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편하게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일하는 모습기다리는 데 익숙해져서인지 급한 일에도 재촉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이 느낌은 이번 여행에서 낯선 풍경에 적응하거나 착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물론 파리에 50여 년 거주하신 정선생님은 내게 파리에서는 서두른다고 되는 일도 없고설득해서 안 되는 일도 없으니 느긋하게 대처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기억과 망각의 도시하나 롱쥬모(Longjumeau)에서 마리로즈(Marie-Rose)까지

 

둘째 날, 가장 많은 일행이 도착하는 날이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해 동지들을 픽업했고엄청나게많은 짐을 풀기 위해 숙소로 먼저 향했다예상대로 공항 가는 길은 많이 막혔고다른 공항 터미널에서 찾아오는 일행도 길을 헤맸다하지만넓고 안락한 숙소에 도착하자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한 느낌이었고매우 여유로운 여정이 되겠다는 착각에도 잠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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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각자 가져온 식량,  가방의 절반을 풀기도 전에 식탁이 가득 찼다.

 

숙소에서 짐 정리와 잠시 쉬고 나서 우리는 첫 방문지로 망명 시절 레닌과 볼셰비키 동지들이 머물렀던 파리 남부의 롱쥬모(Longjumeau)라는 작은 도시를 찾아갔다.

 

 

1911년 롱쥬모에서는 망명 중인 볼셰비키들이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당의 비합법 학습조직을 운영했고지노비에프 등이 가르쳤다고 한다이에 앞서 레닌은 파리에서 이네사를 만나고, 1910년 7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 회의에 로자 룩셈부르크트로츠키 등과 함께 이네사를 초대한다그 후 이네사는 롱쥬모에 학교를 만들어 볼셰비키와 함께하며 레닌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롱쥬모에 있는 볼셰비키의 활동(학습장소를 찾아갔다현지 주민들도 모를 정도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창고 같은 건물을 다행히도 찾아냈다아주 오래된 건물이었지만학습하고 훈련하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무엇보다 침탈에 대비해 도피하기 좋은 구조였다이곳에서 학습하고 토론하고 혁명을 꿈꾸던 볼셰비키의 모습을 그려보니 기본적인 학습조차 게을리 하는 지금의 활동가들과 많이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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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3롱쥬모 볼셰비키 비밀 학교

 

다음은 레닌의 흔적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남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예정에 없던 곳이었으나, 여행을 준비하면서 파리의 정선생님이 사전답사하면서 알게 된 곳이었다.) 이곳도 롱쥬모에서 레닌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이네사도지노비에프도다른 동지들도 자주 들렀을 곳이다지금은 케밥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다여기에서 반전은 레스토랑 주인이 어떻게 알았는지레닌을 기억하고 가게 상호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제는 레닌 간판이 사라지고메뉴판에 작게 적혀 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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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롱쥬모 레닌의 숙소, 현재는 케밥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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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5레닌 케밥 레스토랑 메뉴판

 

건물 내부를 보려고 들어가 보니볼셰비키의 비밀 학교와 같이 이 동네의 오래된 건물은 구조가 거의 같았다최근엔 이 작고 오래된 도시에도 우파의 집권으로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실제로 한가로운 골목길 담벼락에 신축주택 광고가 줄지어 붙어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의 작은 도시를 한가롭게 거닐며 109년 전을 떠올릴 무렵 다음 여정이 우리를 파리로 이끌었다물론 우리는 그곳에서 레닌 이야기가 아닌 저녁에 먹을 음식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레닌과 그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나데주다 크룹스카야이네사는 1911년 여름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이들은 삼총사라 불릴 만큼 가까웠는데레닌 부부와 이네사는 파리폴란드스위스 등 망명지에서 가족처럼 지냈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파리로 향했다레닌은 1909년 7월부터 1912년 6월까지 파리 14구 마리로즈(Marie-Rose)가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살았다처음 들렀던 롱쥬모는 파리 망명 생활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레닌이 살던 마리로즈(Marie-Rose)가 4번지 아파트도 간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물론 일부 매체와 특별한 방문객들의 여행 후기에서 이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지만롱쥬모와는 정반대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동안 프랑스 공산당에서 이 집을 레닌의 소형 박물관처럼 활용하다가 방문객이 줄어들고 재정난에 허덕이자 결국 처분했기 때문이다예전에는 “1909년 7월부터 1912년 6월까지 레닌 이곳에 살다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명패가 떨어져 나간 곳에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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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레닌이 살던 마리로즈가 4번지 아파트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마지막 흔적마저 지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하지만당시의 레닌은 이곳에서 밀려드는 망명자들을 만나고러시아의 상황을 전해 들으며미래의 혁명을 도모했다레닌은 자주 자전거를 타고 몽수리 공원(Parc Montsouris)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했고몽파르나스(Montparnasse) 지역의 카페에서 동지들을 만나 술도 마셨다고 한다한번은 동지들이 망명 자금으로 어렵게 마련해준 자전거를 잃어버려 매우 상심했는데다시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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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7레닌이 자주 찾았다는 카페

 

이외에도 레닌의 파리 망명 생활에 대한 다양한 일화와 장소에 대해 들었지만무겁게만 들려왔다기억하려는 사람과 망각하려는 도시 사이에서 나는 도시의 일부가 되려던 생각을 잠시 보류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우리는 장기간 먹고 사용해야 할 물품을 사기 위해 근처 대형마트를 찾았다한 시간 넘게 여러 명이 꼼꼼하게 장을 보고 계산을 하려는데계산대 앞의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잠시 후 알아보니 전산이 마비되어 계산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한국 같았으면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누구도 항의하지 않고 더 기다리거나다른 방법으로 계산하거나그냥 돌아가는 것이었다우리도 허탈하지만그냥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서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으므로...”

 

 

기억과 망각의 도시둘 바노(Vaneau)에서 아르장퇴이(Argenteuil)까지

 

셋째 날, 어제의 레닌에 이어 오늘은 맑스의 발자취를 따라 파리 7구의 바노(Vaneau)가로 향했다. 1843년 초 예니와 결혼한 맑스는 1843년 10월 말 신혼여행지로 파리를 택한다맑스와 예니는 파리 7구 바노(Vaneau)가 38번지 아파트에서 17개월간 머물렀고, 1844년에는 큰딸 예니 롱게가 태어난다맑스는 파리에서 시인 하이네와 알게 되고, 1789년의 프랑스혁명 연구에 몰두했으며영국 고전 경제학 저술도 읽었다물론 평생 동지 엥겔스와의 만남은 극적이었다.

 

맑스와 예니의 신혼집은 영화에도 나올 만큼 유명하지만레닌의 집과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우리는 첫 번째 신혼집(38번지)과 근처에 있는 두 번째 집(23번지)까지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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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8맑스와 예니의 신혼집바노가 38번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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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9맑스와 예니의 두 번째 신혼집바노가 23번지 아파트

 

이 집들은 젊은 맑스가 신혼 생활을 시작하고당대의 혁명가들을 만나고이론을 공부했던 곳이다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신혼 생활 이후 가난한 생활고로 세 아들을 모두 잃은 맑스·예니 부부의 비극적인 미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프랑스 TV ‘문화’ 프로그램에서 아르테(Arte)가 맑스의 가난에 대한 원인을 맑스나 그의 부인이 유복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가정경제를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암시한 것은 큰 왜곡이다실제로 맑스는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연대에 철저했으며정기적으로 그의 적은 수입을 혁명운동에 사용했다.)

 

나는 맑스 가정사의 비극 대신, 1844년 8 파리의 프랑스 극장 앞 광장 카페에서 엥겔스와의 역사적 만남을 가졌던 일을 떠올리며, “나의 역사적 만남은 언제쯤일까이미 평생의 혁명 동무를 만난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파리 북서부 아르장퇴이(Argenteuil)로 가는 길서울 주변의 도시와 다르게 한가로워서 길을 잘못 들어도 다시 돌아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이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맑스의 큰딸 예니 롱게의 집이 있고이곳에서 병든 맑스가 자신의 말년 일부를 딸의 가족과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파리와 다르게 맑스의 딸이 살았던 곳에는 칼 맑스 길()도 있고예니 롱게의 집에는 “1882년 맑스가 머물렀다는 명판도 붙어있다현재의 주소는 27 Boulevard Karl Marx, 95100 Argenteuil이다맑스와 레닌이 살았던 곳 주변에는 늘 혁명가뿐 아니라 예술가들이 머물렀는데예니 롱게의 옆집도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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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0예니 롱게의 집아르장퇴이 맑스가 27번지

 

이곳에는 아직도 동유럽이나 아시아(중국베트남)의 관광객들이 종종 찾는다고 한다여기서 사진을 찍고 있던 우리와 마주친 이탈리아 방문객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한국의 코뮤니스트들이 이렇게 많이 방문한 것에 놀라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다차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동네 주민들이 코뮤니스트’ ‘코뮤니스트’ 하면서 엄지를 세워 보였다.

 

이 도시는 어제 방문한 망각의 도시와 다르게 특별한 것까지 기억하는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맑스와 그의 아픈 가족사를 제대로 기억하는지는 의문이었다예니 롱게의 집과 맑스 가족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우리를 안내해주신 분의 설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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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아르장퇴이칼 맑스 거리

 

아르장퇴이에서의 맑스는 파리 신혼집에서의 청년 맑스가 아니었고수많은 망명지와 영국에 정착한 혁명가 맑스도 아니었다늙고 병든 인간 맑스였을 뿐이다앞서 말한 생활고로 인한 비극적인 가족사를 간직한 채말년을 맞이한 맑스는 요양하면서 딸들에게 쓴 편지에서 애정 넘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럽여행12IP4A0218.jpg  <사진12> 클로드 모네가 살았던 집, 아르장퇴이 맑스가 25번지

 

 

예니 롱게에게 보낸 우편엽서

1882년 5월 26

 

아주 귀여운 아가,

너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는 언제나 행복하단다너의 올드 닉이 너에게서 몇 시간씩 잠을 훔쳐 가서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쾌청한 날씨 때문에 내 건강도 많이 회복되고 있다. 6월 초 칸느에 가서 한 일주일 머물다 올까 한다이 모든 계획은 의사의 소견과 초여름 날씨에 달려있다. (...)

내 마음은 너와 네 아이들 곁에 있단다보고 싶구나아주 싫었던 일련의 의학적 경험을 치른 후 전혀 서두를 것이 없어졌다어쨌거나 곧 너희들 곁으로 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너의 올드 닉 (알제리에서의 편지칼 맑스 지음 정준성 옮김)

 

*올드 닉(Old Nick)은 맑스가 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애칭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맑스는 이 편지에서 한 약속처럼 예니 롱게의 집으로 갔다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혁명가들이 잠시라도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현장인가가족인가동지의 곁인가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장소인가돌아갈 곳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하기에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몰았다파리와 대서양 방향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방어운전을 하다 차선을 잘 못 들어 한참을 서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혼자만의 여행이었으면어차피 잘못 들어선 김에 대서양까지 달렸을 것이다다행히 지름길로 가서 늦지 않았다그리고 시라크 장례식 전날이라 통제하는 구간이 많아 골목길로 돌다 보니어느새 세느강 가장 가까운 강변길을 천천히 구경하며 드라이브하는 호사를 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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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3> 강폭이 좁은 세느강

 

2019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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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심 재판, 윤석열 징계 논란 : 계급 착취 왜곡하는 검찰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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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심 재판윤석열 징계 논란 :

계급 착취 왜곡하는 검찰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 폐지!

 

  지난 12월 23(서울중앙지법은 자녀 입시 비리와 사모펀드 등의 의혹을 대부분 인정하며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게 징역 4년에 벌금 5억 원을 선고했다여기에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시장경제 질서를 흔드는 중대 범죄와 증거 인멸 지시 등의 수사 방해를 덧붙였다이른바 조국 사태에서 비롯된 정경심 동양대 교수 재판은 1년여 이상을 끌어오면서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치열한 여론전뿐만 아니라 검찰개혁사법개혁 등의 이슈를 부각시켰다정 교수 측은 재판 내내 "가족이 비판 없이 혜택을 누렸던 건 반성하지만조 전 장관 낙마를 위한 표적 수사"였다며 무죄를 주장해왔다, 검찰개혁의 이면에는 국가 권력 기구에 대한 지배계급 내부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그 싸움은 그들이 계급 이해관계에 얼마나 투철한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요구는 환상이다그것은 막강한 검찰권을 행사하는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노동자의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게 검찰을 통제하려는 시도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을 개혁하는 것즉 검찰을 덜 독점적이고 덜 부패한’ 기관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지배계급 안에서의 통제 방향만 바꿀 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생산소비분배는 겉으로는 폭력을 배제하고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그러나 자본 임노동 관계는 계급 적대적이고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강권을 확보해야 한다이 모순이 겉으로는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분리된 공적 권력체계인 국가기구로 조직되었다이는 자본주의 국가를 초계급적 성격으로 왜곡하게 된 근원이고 국가 참여를 통한 사회개혁과 변혁이 가능하다는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따라서 이러한 적대적 계급 관계가 사라지지 않은 한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노동자민중의 요구에 따라 개혁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지배계급 내부 분파 간의 권력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노동자/반민주적 검찰 권력을 비판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가짜 검찰개혁을 지지해서는 안 되고반대로 부르주아 정권인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서 검찰과 언론의 논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누가 이기든 노동자들은 이용만 당할 뿐이고노동자의 통제력 강화가 아닌 지배계급의 독재(부르주아 민주주의안에 갇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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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가 주장하는 공정성 – 부르주아 이해관계의 수단

 

  권력 기구에 대한 (민주당 주도권을 보장하는개혁안을 갖고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던 조국 전(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정권은 개혁의 근거로 공정성을 내세웠다공교롭게도 검찰 역시 정경심 재판에서 같은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정경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번 사건을 특권층의 반칙이자 신종 정경유착으로 규정하였다그러면서 "형사재판에서 평등의 원칙은 사회 고위층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부르주아 분파의 공정성그 공정성의 실체는 무엇인가한마디로 부르주아 분파의 밥그릇 싸움이자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에서 기회와 과정과 결과의 공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그렇다면 부르주아 정당들이 공정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 물음 속에는 당연히 기회과정결과에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는 논리를 전제로 깔고 있다이러한 전제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지배한다는 부르주아의 허구가 재생산되고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노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다하지만자본주의 탄생 자체가 인민을 폭력적으로 생산수단에서 분리해 무산자를 양산하면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은 기회와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지배계급의 아주 작은 일상만을 보여주는 조국의 사례에서만 보아도 조국 딸은 고등학생 때 의대 실험실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의대 교수와 함께 논문을 작성해 제저자가 되었다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상상 너머의 현실이다즉 공정성은 계급 간 불평등을 덮으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장치일 뿐이다부르주아 공정성의 범위에 노동자는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부르주아의 공정성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격수단이자 계급지배 수단이다결국 노동자들 스스로 무능력을 체화시킴과 동시에 노동자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키고단결과 연대보다는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물리게 한다이렇게 해서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논리 속으로 단결된 노동자계급이 아닌 개별적 노동자로 포섭한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검찰개혁의 유일한 적임자라고 호명한 조국의 행태는 부와 지위를 세습하려는 부르주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검찰개혁의 대상인 검찰이든 수사권 독립의 혜택을 얻게 될 경찰이든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역할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그런데도 문재인 정권은 사법개혁이 마치 공정한 국가정의로운 국가의 밑거름인양 떠들면서 사회적 불평등은 철저하게 침묵과 왜곡으로 일관한다이처럼 사법개혁의 본질은 계급 지배의 정당성을 공고하게 할 부르주아의 철옹성에 지나지 않는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검찰/경찰/사법기관도 친자본-반노동자적 억압 기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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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억압 기구 폐지!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제청을 받아 재가한 징계 결정에 대해 윤석열 총장은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고서울행정법원은 이를 일부 인용했다이에 따라 직무에서 배제된 윤 총장은 8일 만에 직무에 복귀했다직접선거로 선출되고 의회의 압도적 다수파까지 차지한 문재인 정권이 통제할 수 없는 검찰 권력을 선출되지 않은’ 또 다른 국가기구인 공수처에서 견제할 수 있을까검찰 개혁은 추미애-윤석열 갈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인적 청산으로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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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주아적 개혁은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점진적 변화'가 아니다정치 검찰부패한 검찰을 민주적이고 청렴한 기구로 바꾸는 것으로는 검찰의 반노동자성이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 폭력을 종식할 수 없다. ‘덜 해로운’ 정치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고 부르주아 정부가 기능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듯이검찰을 개혁하고 그것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한다고 해서그들 모두가 자본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라는 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따라서 이 사회의 다수인 노동자민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폭력으로 통치하는 그들은 견인이나 포섭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검찰과 사법기관이 구조적으로 저질러 온 범죄행위는 '사건 재조사와 진상 규명',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과 책임자 처벌'만으로는 종식할 수 없다그것은 오직 그들과 적대하는 사회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물리적 힘과 집단 이성으로 그들이 독점하고 남용하는 모든 특권을 폐지해야 가능하다따라서 검찰 개혁사법개혁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대안은 코뮤니스트 혁명을 통해 모든 억압적 국가기구를 폐지하고노동자평의회/프롤레타리아트 총회 같은 계급 조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새로운 세상에서도 특권계층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개인과 특정 집단이 갖는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모든 공직자가 노동자 평균 급여를 받으며사회 전체의 통제(선출자의 소환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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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개혁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과 논쟁은 자본주의 위기코로나19 팬데믹 재앙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노동자민중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이었다하지만그것은 지배계급이 현재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면서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데 유효했고계급의식을 왜곡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따라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지배계급 내의 여러 분파와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그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민중에게 진정한 검찰개혁은 오직 자본주의 억압적 국가기구와 착취 체제의 폐지뿐이다그것은 어떠한 급진적 부르주아적 개혁으로도어떠한 부르주아 진보좌파의 집권으로도 불가능하다그래서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사회혁명은 그들의 개혁보다 훨씬 힘들고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어떠한 권력보다 더 큰 힘이 있다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고 분열되어 있는 한 그 힘은 지배계급을 위해 쓰일 뿐이다따라서 비록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정치세력에 의탁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부르주아 공정성/민주주의의 위선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의 미래다.

 

2020년 12월 28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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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2) : 3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2)

역사의 경로를 중심으로와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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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국주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적 계급투쟁

 

3-1.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ICT는 제국주의 시대의 지구적 전쟁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잠시 해결하는 자본의 통제’ 방식으로 규정하면서 단순히 약자에 대한 자본주의의 강력한 권력의 정책이 아니라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중심의 금융과 산업이 주변국으로부터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11)

 

현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길고 거대한 구조적 위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이윤율 저하로 자본은 생산적 투자를 희생하면서 투기로 내몰고 주식시장을 거품이에 따른 금융위기그리고 국가기업 및 가계의 부채 증가는 모든 곳에서 직접간접 및 유예된 임금에 맞서는 지속적 공격으로 그 효과를 보고 있다이러한 경제 위기가 만드는 전쟁은 자본주의의 영원한 국면이 되었다따라서 오늘날 전쟁은 자본의 가치 저하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집중으로 새로운 축적 주기를 여는 유일한 방법이다.(12)

 

ICT는 ICC와 달리 제국주의 전쟁인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인가의 문제는 역사적 의제에 놓여있고전쟁으로의 자본주의의 돌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노동조건에 대한 대대적 공격으로 표현된다고 규정한다.(13)

 

제국주의 전쟁을 제국주의 국가들의 재무장 측면에서 살펴보자세계적인 지속적 긴급 상태가 경제와 금융뿐만 아니라 국가 사이의 무역외교 및 군사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현재의 힘의 균형과 전통적인 영향력 영역 사이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불편한 제국주의는 미국의 지배적 제국주의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훼손한 소련의 몰락 이후 40년 미국은 더는 세계의 채권자가 아니라 최대의 채무국이며세계 생산의 21%인 중국 다음으로 15%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따라서 미국은 중국을 주적으로 보고 있다. 2019년 중거리 핵무력 협정(INF)으로부터 미국이 탈퇴한 이유는 반()중국 수단으로 태평양 영역에 미사일 설치를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며중국의 일대일로 정책(One belt, One road)과 2025년 중국 만들기를 미국 이해관계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보고 있고중국의 실크로드는 세계 제1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역사적 필요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14)

 

2019년 4월 말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자료에 의하면 세계 군사비는 세계 GDP의 2.1%에 해당하는 1조 8천 220억 달러인데, 2018년보다 미국은 450억 달러 증가(7%)했고중국은 110억 달러 증가(5%)했다최근 몇 년 동안의 정치경제군사 영역의 사건들을 보면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다가오고 있고 다른 주요 강대국은 주인을 믿고 복종하는 길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군사비의 지속적 증가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강대국과 제국주의 중소국 사이의 동맹의 갑작스럽고 잦은 변동은 새로운 군사 충돌의 위기이며영구적 위기의 자본주의가 새로운 세계적 프롤레타리아 학살로 새로운 젊은 세대를 몰아넣는 유일한 수단이므로 이러한 전망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국제코뮤니스트 혁명이다.(15)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일반적 전망은 공통분모로 하지만미국과 이란의 경쟁 관계를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ICT는 최근 글 미국/이란 경쟁 전쟁은 아니지만계급전쟁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16)에서 미국과 이란이 세계적인가 지역적인가를 떠나 제국주의 국가임을 인식하고 평의회를 요구하는 이란 노동자에 대한 전적인 연대와 지지로 제국주의 쇠퇴기의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을 호소하고 있다.

 

이 글은 전쟁이지만군대 사이가 아닌 사회경제적 구성체를 포함하는 전쟁어떠한 협상도 없이 죽음으로 내모는패자의 무조건적 항복만이 있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보면서 중동에서의 미국과 이란 사이의 경쟁적 관계는 직접적인 공개 전쟁으로 나아가지 않겠지만항상 다른 편이 후퇴하게 되는’ 본질을 지닌다고 분석한다.

 

핵협정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을 이란이 승인했지만그들에게는 오바마 시절부터 남아 있던 경제적 제재가 가중되어 왔고트럼프가 이를 거부하는 미제국주의의 실질적 힘을 보여주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여름 아사드가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이란제국주의는 다시 움직이고 있다그러나 소부르주아와 전문직 계층이 주도한 레바논의 민중 시위, 2018년 저임금에 저항하는 해프트타페(Haft Tapeh)에서의 이란 노동자의 파업, 21개 도시와 70개 지역에서의 저항운동의 확산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란 정권은 파산의 끝에 와있다공식 통계로 실업률이 10%이지만이란 청년들은 27%에 달하고 대졸자들은 40%를 넘는다. 1천 6백만 명이 빈곤 이하의 수준에 놓여 있다.

 

이란을 포함하여 중동(시리아이라크이란쿠르디스탄리비아)을 수십 년간 제국주의 강대국의 전쟁터로 만든 자본주의의 전쟁으로의 추동에 대한 경제적 배경을 분석한 글은 에너지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의 기생적 착취의 효과적 도구인 원유와 셰일가스(shale gas)의 보고인 중동의 지정학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17) 미제국주의가 이란제국주의를 공격하는 목적은 이란과 가장 가까운 경제적상업적 동반자인 중국을 타격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결국이 글은 맑스주의와 국제주의를 거론하면서도 민족해방’, 인종종족종교 등에 기만당해 국제 부르주아지의 어느 한쪽을 편드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혁명인가 야만인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

 

이란과 미국의 절박한 충돌이 3차 세계대전으로 가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는 앞의 분석과 비슷한 입장은 레바논이라크이란 등의 민중 저항운동이 착취와 억압 없는 사회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고정부 관료선거제도 등의 변화에 대한 요구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들의 저항운동이 이라크 민족주의나 이란의 민족주의 같은 잘못된 반()제국주의의 흐름으로 매몰되기 때문에 현실적인 가능성은 미국 블록과 중국-러시아 블록 사이의 3차 세계대전의 위험성에 있다고 분석한다.(18)

 

따라서 3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과 자본주의의 경제 위기에 맞서 자신의 삶을 방어하려는 전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이 줄기차게 지속되는 계급전쟁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이러한 투쟁은 노동자/실업자공장과 산업언어신념젠더민족을 넘어 삶의 조건을 방어하는 투쟁의 통일성부르주아 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통일에 대한 방해에 맞서는 투쟁노동계급의 무장을 통해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을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점점 사람들이 이전 세대보다 덜 안전하고 풍요하지 않다는 것그리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이다자본주의는 정부의 형식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에 의한 다수의 노동계급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양식이라는 것이다. 2019년 칠레프랑스멕시코이란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의 집합적 투쟁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동자들을 보았고,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자본에 맞서는 계급전쟁의 산물로 결정되는 역사적 대안 선택임을 알았다.(19)

 

여기서 우리는 계급전쟁에 대한 기본원칙을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기회주의 경향의 평화주의는 제국주의 전쟁이 계급사회의 소멸 없이 극복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카우츠키의 의회적 유토피아주의에 맞서 강력한 비판을 한 네덜란드 맑스주의자 안톤 판네쿡은 계급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의 유일한 진보 세력이라고 이해했고제국주의에 대한 해답은 의회의 정치가들이 아닌 조직된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평화주의의 첫 번째 오류는 부르주아 의회의 정치가들이 자본주의의 군사주의와 의미 있게 싸울 능력이 있다는 관점이며두 번째 오류는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보다 전쟁의 잔악성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 제국주의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전쟁을 요구하고 전쟁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제국주의는 단순히 군사적 관계가 아니라 더 근본적 수준에서의 경제적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평화공존이 있을 수 없고전쟁인가 위기인가의 선택만이 국제 부르주아지에 있으며국제 자본의 만족하지 못하는 욕구 때문에 제국주의 반대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반대 투쟁이라는 점이다(反 )제국주의와 민족자결을 기반으로 분파를 방어하는 입장은 또 다른 깃발로 제국주의를 불가피하게 지지하게 된다.(20)

 

맑스주의자는 인본주의 때문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이 국제노동계급을 서로에 맞서는 살육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우리는 자본주의의 최악의 징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맞서야 하며혁명적 패배주의를 통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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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최근 세계의 계급투쟁과 그 의미

 

제국주의 전쟁인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인가의 근본 문제에 대한 위의 논의를 전제로 하면서 우리는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진 노동계급과 민중의 투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 글에서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 투쟁이나 민중 투쟁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른바 사회 반란 투쟁(Social Revolts)이 자본주의와 맞서는 계급투쟁인가 그리고 혁명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와 그렇지 않고 삶의 조건 개선이나 자본주의 체제 내의 개혁 투쟁에 머무는 소부르주아 운동에 머물 것인가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선 프랑스에서의 연금개혁에 맞선 파업 투쟁은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의 주요 분석 대상이었다퇴직 시 빈곤해지는 젊은 노동자를 위협하는 새로운 연금체계를 내용으로 하는 프랑스의 연금 개혁에 대한 비공인파업에 대해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대다수가 투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정부의 일시적 양보안에 대해 이른바 개혁주의 노조인 CFDT와 UNSA는 찬성한 반면좌파노조인 CGT, FO, SUD, FSU는 연합하여 정부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IGCL은 이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노조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으며이 때문에 노동자 스스로를 조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분석한다.(21)

 

ICC도 프랑스 정부와 노동조합이 손잡고 연금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특히철도노동자보건노동자 등이 연대하여 노동자의 삶의 조건에 대한 직접적 공격에 맞서고 있으며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 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계급의식 발전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22) ICT 역시 프랑스 파업을 국가와 노동조합에 맞서는 노동자로 규정하면서노동자를 분리 통제하려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 대중집회와 총회를 통한 효과적 투쟁으로 진전하고 있음을 분석하고 있다.(23)

 

홍콩과 칠레그리고 미국과 인도에서의 투쟁을 다루는 기사를 논평한 A Free Retriever’s Digest(24)는 사회 반란과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아나코-코뮤니스트 그룹인 바바리아(Barbaria) 그룹의 홍콩과 칠레의 투쟁 기사와 보르디가주의 그룹인 국제코뮤니스트당(ICP)의 미국과 인도의 투쟁 기사를 평가하고 있다이 국제주의 매체의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⓵ 투쟁은 우리 계급의 직접적인 인간 욕구로부터 뻗어 나오기 때문에 사회적 투쟁이다.

⓶ 최초의 물결을 일으킨 이유를 넘어서 각기 다른 직접적 요구는 일반화된다.

⓷ 사회적 투쟁은 아직 코뮤니즘의 사회적 혁명과 거리가 멀지만역사적 전망을 열고 있다따라서 카탈루냐와 쿠르디스탄의 투쟁은 민족해방투쟁의 영역에 있음으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적 역사적 맥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⓵ 긴 후퇴를 끝내려는 계급사이의 격돌로 특징 지워진 우리는 획기적 변동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⓶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자본주의는 소진되고 있고 사회혁명의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⓷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물결은 공통의 주장을 담고 있다혁명의 필요와 이해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음을.

⓸ 운동이 말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투쟁이 우리 계급의 직접적인 요구로부터 나오는 한 부르주아 정치영역으로 움직이는 민족주의적이거나 정치-선거 투쟁과는 매우 다른 투쟁이다.(25)

 

홍콩 가두 투쟁의 계급 간 성격에 대해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은 바바리아 그룹과 달리 매우 비판적이다. ICP는 홍콩 저항운동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신호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으며, ICC는 홍콩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발적 계급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에는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ICT 역시 홍콩의 운동이 민주주의로 나아가고 노동계급의 요소는 지역의 자본주의의 이해에 승복함으로써 국제 노동계급 연대의 잠재력과 국제 혁명적 정치조직으로 뻗어 나갈 가능성이 훼손되었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칠레의 민중 투쟁이 위기와 참상으로 몰아가는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해답은 아니라고 비판하는 ICC에 대해 이 평가 글은 칠레이란인도의 투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저개발’, 원시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즐기지 못한다고 폄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그리고 부유한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위기에 몰린 자본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는 ICC의 생각은 코뮤니스트가 격렬하게 싸워야 할 환상이라고 규정한다.(26)

 

이어서 이 글은 ICC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위험성과 코뮤니스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선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ICC의 글이 심술쟁이 노인의 부정적 논조를 띠고 있으며스스로 절망에 빠져 자본과 국가에 맞서는 사회투쟁을 자본주의 해체 시기의 룸펜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미국의 제너널 모터스(GM)의 파업을 다룬 ICP는 이 파업이 국가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 United Automobile Workers of America)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통일을 이루려는 파업노동자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며국가노조에 맞서는 노동계급노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인도의 혼다 마네사르(Honda Manesar)의 공장점거 투쟁을 다룬 기사에서는 작업장에서의 연좌 투쟁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27)

 

사회 반란 투쟁에 대한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은 분명히 그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으로 한 걸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입장에서부터 전혀 그 가능성이 없다는 입장까지 편차가 있다노동계급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혁명 세력과 혁명당의 과제이기도 하다여기서는 사회투쟁이 세계자본주의가 위기와 참상으로 돌진하는 것에 진정으로 맞서는 해법이 아니라는 ICC, IGCL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세계 각국의 노동자 투쟁을 포함한 사회투쟁의 과정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왜 그러한지 아니면 사회혁명으로의 진전할 가능성이 있는지 코뮤니스트는 따져보아야 한다.

 

ICC는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끊임없는 희생에 맞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마당이 되었고칠레에콰도르타이티이라크이란알제리레바논 등에서의 대중운동이 폭력과 유혈적 억압을 수반하고 있지만이러한 민중 반란에 설사 노동자가 포함되더라도 그들은 자본에 대한 적대적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국민’ 안에 침몰되어 있고, ‘미래가 없다는 생각만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러한 운동은 부르주아지의 억압과 공작에 의해 무력화된다고 진단한다또한계급 간 상호주의는 민주적 요구와 맹목적 폭력만을 야기시켜 깨끗한 체제를 위한’, 민주적 요구를 통한 합법화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특권화 된 권력 형식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규정한다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물음 없이 민주적’ 영역에 갇힌전망을 상실한 홍콩 투쟁이 대표적인 보기이다이러한 운동의 맹목적 폭력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은 이러한 민중 반란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으로부터 계급투쟁의 실질적 본질을 가리게 만든다고 결론짓는다.(28)

 

IGCL은 2019년 여름부터 세계 모든 국가에서 벌어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전진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 심화와 제국주의 전쟁을 향한 추동에 대한 대대적인 세계적 계급투쟁의 시기가 열렸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IGCL은 이들 투쟁의 일부가 전형적인 소부르주아 요구에 머물러있지만일부는 노동계급의 요구에 기반을 두는 면모를 보임을 상기시키며 ICC의 세계 노동자 투쟁에 대한 입장이 그들의 해체이론에 근거한 패배주의자의 입장이며계급투쟁에 대한 소부르주아의 관념적 입장이라고 비판한다.(30)

 

 

여기서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코뮤니스트」 11(이번호)에 실리는 코로나19’ 특집을 도입부로 하면서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대대적 공격으로 전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물결이 파도치는 미래를 전망하면서,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역사적 경로에 대한 논쟁과 계급투쟁을 통한 코뮤니즘의 전망을 세계 코뮤니스트들과의 대화와 토론으로 이어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2020년 5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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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경향(ICT)의 강령」, 2020년, 4쪽, 8쪽

http://www.leftcom.org/en/node/36775

 

12. 윗글, 9쪽

 

13. 윗글, 17쪽

 

14. 「국가들의 세계적 재무장」, [COMMUNIST LEFT] 46호,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 2020년 3월 17일, 107~9쪽

http://www.international-communist-party.org/CommLeft/CL46.htm#Ecocatastophim

 

15. 윗글, 110~112쪽

 

16. 「Aurora」 50호,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2-27/usiran-rivalry-what-no-war-but-the-class-war-really-means

 

17. 「세계는 영원한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죄수로 잡혔다.」,  A Free Retriever’s Digest, 2020년 2월 22일

 

18. 「3차 대전을 향한 이란-미국의 임박한 전쟁?」, A Free Retriever’s Digest, 2020년 1월 15일

 

19. 「현재의 위기와 코뮤니스트의 과제」, [혁명적 전망] 15호,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19년 11월, 9쪽

 

20. 「평화주의에 반대하며」, ICT, 2020년 1월 18일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1-18/against-pacifism

 

21. 「연금파업에 대한 두 번째 성명」, IGCL, 2020년 1월 3일

http://igcl.org/2nd-Communique-on-the-Strikes-in-544

 

22. 「프랑스 파업 : 노동계급은 스스로 깨닫기 시작하다」, [세계혁명] 185호, ICC, 2020년 봄

 

23. 「프랑스의 파업 : 국가와 노동조합에 맞서는 노동자」, [Aurora], CWO, 2020년 봄

 

24. 이 매체(웹 사이트)는 코민테른의 퇴행에 맞서는 투쟁에서 코뮤니스트 좌파가 이해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방어하는 논평 글을 싣고 있다.

 

25. 「사회 반란과 제국주의 전쟁(1/2)」, A Free Retriever’s Digest, 2020년 1월, 1~2쪽

26. 윗글, 4~7쪽

 

27. 「사회 반란과 제국주의 전쟁(2/2)」, A Free Retriever’s Digest, 2020년 1월, 2~3쪽

 

28. 「민중 반란은 위기와 참상으로의 세계 자본주의의 돌진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국제평론] 163호, ICC, 2019년 겨울

 

29. 「피할 수 없고 극적인 모순에 대한 자본주의의 ‘해법’에 맞서자. 대대적인 국제계급투쟁으로!」, IGCL, 2020년 2월 1일

http://igcl.org/Against-Capitalism-s-Solution-to

 

30. 「국제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혁명이냐 전쟁이냐] 14호, IGCL, 2020년 1월 30일

 

 

<이전 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8758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2)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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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2) : 1~2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2)

역사의 경로를 중심으로와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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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코뮤니스트」 10(2019)에서 나는 역사의 경로를 둘러싼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내부 논쟁을 정리하면서 그 논쟁을 불러일으킨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하 ICC)의 23차 대회(2019년 5월 개최)를 소개하면서 이후 계속되는 논쟁을 논쟁(2)에서 다루기로 한 바 있다.(1)

 

그런데 그 이후 논쟁은 또 하나의 코뮤니스트 좌파 조직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이하 ICT)과의 불꽃 튀는 대결로 이어지지 않았고오히려 소그룹인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 그룹」 (International Group of the Communist Left, 이하 IGCL)과의 적대적 반응과 ICC의 적대적 대응 그리고 ICC의 역사의 경로에 대한 보완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논쟁의 중심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정세 분석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역사의 경로에 대한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내부 논쟁(2),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적 계급투쟁을 연결시켜 앞으로의 논쟁의 발전을 전망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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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의 경로를 둘러싼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내부 논쟁(2)

 

ICC의 23차 대회에 대한 평가를 가장 극렬하게 비판한 IGCL은 그들의 기관지 전쟁인가 혁명인가」 12(2019년 7특별호)에서 ICC의 23차 대회가 역사의 경로를 폐기하고 계급투쟁을 포기했다고 결론지으며새로운 혁명 세력에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이론이라는 독물을 가져왔다고 비난했다코뮤니스트 좌파의 경험과 강령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한 정치적인 쟁점 대신 기생주의에 대한 토론을 제안한 ICC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ICC와 기생주의의 타당성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영역토론과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고이는 역겹고 파괴적인동지들은 어떻게든 입증할 수 없고같은 바닥에 추락함으로써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피의자가 되든개인 심리학이나 이른바 개인행동에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

 

IGCL에 대한 ICC의 반비판이 본격화되기 전 IGCL은 ICC에 대한 두 번째 비판문을 내놓았다이 글은 스페인의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인 해방과 그들의 블로그 신경로(新經路)」 (Nuevo Curso, 이하 NC)에 대한 ICC의 비난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루었다.(3) ICC의 글은 NC가 IGCL처럼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기생집단이라고 결론 짓는다.

 

IGCL이 보기에 ICC가 자신들을 경찰의 첩자로 축출한 것과 NC를 비난하는 것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이는 ICC가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자본주의 해체이론과 기생주의의 미명하에 실천해왔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4) ICC 23차 대회는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이라는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중심 원칙을 ICC가 청산했다는 증거이며소규모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을 비난하는 ICC의 국제적 캠페인의 정치적 의미는 현재 진행되는 이들 세력의 정치적 출현발전재구성과 명확화를 저해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ICC와 IGCL 사이의 비판을 넘어선 비난과 반비난의 배경에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과의 활발한 소통을 하는 IGCL의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IGCL은 자신들의 원칙적 입장을 ICT의 정치 강령과 원조 ICC'(이 조직이 1990년에 채택한 관념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해체이론의 문제를 통합하지 않은)의 정치 강령의 틀 안에 있다고 밝히고두 개의 역사적 경향(ICT와 ICC) 사이의 주요한 역사적‘ 괴리는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정치적 소수파가 당면한 본질적 문제이며다가올 미래에 대답해야 할 과제라고 설명한다첫째, ICT와 ICC 강령에 대한 2014년 입장즉 혁명인가 전쟁인가에 동의한다는 점둘째근본적인 이론적정치적 틀은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의 궁극적 표현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인가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인가의 역사적 선택이라는 점셋째이들 근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조직이 ICT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5)

 

또한걸프만 코뮤니스트 분파」 (Gulf Coast Communist Fraction, 이하 GCCF)와의 소통에서는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과 건설 중에 있는 당의 진행 사이의 끈을 강화시키려는 긍정적 공헌임을 인식한다는 서한을 받았다.(6) 그리고 ICC가 코뮤니스트 좌파가 아니라고 비판한 NC와의 소통에서는 다음과 같이 토론이 이루어졌다.(7) 이 편지는 NC와의 소통의 어려움이 트로츠키주의와 강령적이론적정치적 그리고 전투적 단절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첫째,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흐름으로서의 트로츠키주의와 하나의 제국주의 진영과 손잡음으로써 공개적으로 계급원칙을 포기한 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이후 제4차 인터내셔널에서 굳어진 트로츠키주의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둘째좌익반대파인가와 코뮤니스트 좌파인가를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NC의 개인들의 계급적 입장으로 보여 집합적 조직으로서의 정치적으로 통일된 강령과 정치원칙이 아닌 것 같이 보인다셋째트로츠키주의의 좌익반대파가 추진한 통일전선은 코뮤니스트 좌파와의 근본적인 차이다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 3, 4차 대회에 채택한 통일전선 전술에 충실하여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후퇴와 혁명적 러시아의 고립을 초래하였고프롤레타리아트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징집하는 이념적정치적 무기가 되었다물론 NC가 어떠한 통일전선 전술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모순과 질문이 남아 있다무니스가 1943~5년에 방어하는 1930년대 사용된 통일전선 전술이 유효한가그렇다면 오늘날 이 전술이 더 이상 왜 유효하지 않은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더 깊은 토론을 제안하고 있다.

 

이제 ICC의 역사의 경로에 대한 추가 보완 설명을 살펴보면서 이 논쟁의 본질에 한 걸음 다가가기로 한다. ICC는 역사의 경로에 대한 보고서 서문(8)에서 소련동구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에 따른 세계정세의 변화가 서구 블록의 해체로 이어져 자본주의의 해체기로 들어섰다고 진단하면서양대 제국주의 블록의 소멸로 혁명인가 세계전쟁인가라는 선택은 더 이상 의제에 오를 수 없다고 보았다따라서 1914년 사라예보로부터 1989년 소련의 몰락시기 동안 적용되었던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의제가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의 경로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동일하지도 않고 동의어도 아니라고 하면서그들의 1978년 이 문제에 대한 텍스트는 이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음을 시인하다그러면서 이제 시작된 논쟁의 대차대조표(평가)를 만들 시기는 아니며비판적 논쟁은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킬 맑스주의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논쟁을 열어놓고 있다.

 

이어지는 역사의 경로의 문제에 대한 보고서(9)에서는 서문의 의미를 다시 강조한다맑스주의가 강조한 사회주의인가야만인가라는 의제는 20세기 대부분 시기를 사회주의인가 세계 제국주의 전쟁인가의 형식으로 물질화된 후원자무기의 발전으로 지난 몇십 년 동안 사회주의인가 인류의 파괴인가라는 전율적 형식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설명한다그러면서 소련동구 블록의 몰락 이후에도 이러한 전망은 유효하다고 한발 물러선다. ICC가 수정한 개념은 전쟁이 아니라 인류의 파괴이다이러한 파괴는 일반화된 전쟁인가?’, ‘사회의 해체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부연 설명한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전복만이 사회의 해체를 멈출 수 있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 쇠퇴의 일반적 역동성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에 의해 더 이상 직접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이 어떠하든 간에 세계전쟁은 더 이상 의제에 올라있지 않지만사회적 해체가 각축하는 계급의 통제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쇠퇴의 길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ICC는 결론적으로 역사의 경로’ 개념은 더 이상 현 세계정세의 역동성과 자본주의 해체 시기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힘의 균형을 정의할 수 없다고 그들의 해체 이론을 재강조한다.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역사의 경로에 대한 논쟁을 요약해보자.

 

첫째, ICC는 역사의 경로’ 개념이 해체’ 시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는 반면, ICT, IGCL, NC, GCCF 등은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의제가 여전히 유효하며, ICC는 계급투쟁을 폐기했다고 비판한다이는 근본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이해 등의 근본적 논쟁을 내포하기 때문에 더욱 심화된 문제 제기와 논쟁이 요구되는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자.

 

둘째해체 시기를 양대 제국주의 블록의 소멸(소련의 해체로 인한)로 보고 계급의 힘의 균형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ICC는 소련을 포함한 이른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기 때문에이미 세계자본주의 틀 안의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을 자본주의 해체라는 새로운 의미로 규정하기에는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다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계급투쟁은 필연적인 역사발전의 동력이기 때문에 해체의 문제를 자본주의를 넘어선 인류의 파괴로 본다면 우주적 차원의 더 넓고 깊은 인식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셋째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논쟁이 맑스주의 원칙정치노선강령 등의 본질적 개념과 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회주의’, ‘기생주의라는 조직 문제에 한정되고 서로를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세계혁명과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루어 낼 세계혁명당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의 경로’ 논쟁이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이글을 정리하는 과정에 ICC의 동조자가 ICC에 대한 IGCL의 공격을 새로운 기생주의적 공격이라고 비난하면서 ICC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10) 내용은 코뮤니스트」 10호 논쟁(1)과 이 글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생략한다다만 이 동조자는 마지막에 ICT가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이름으로 ICC에 연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자연스럽게 이글은 제국주의 전쟁과 계급투쟁의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계속>

 

2020년 5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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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5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07~116쪽 참조

 

2. 「코뮤니스트」 10호, 2019년 5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47쪽

 

3. 「스페인 코뮤니스트 좌파인 NC는 누구인가」,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02/who-who-nuevo-curso

 

여기서 ICC는 NC가 코뮤니스트 좌파와 트로츠키주의 사이를 혼동하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좌파와 NC 사이에는 강령적 연속성이나 정치원칙의 연속성이 없고, NC의 활동이 맑스주의 비판과 거리가 멀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NC의 주요 활동가인 Gaizka가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 당(PSOE)」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를 자유주의자이거나 극우세력의 일부분이라고 비난한다.

 

4. 「국제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맞서는 ICC의 새로운 공격」, IGCL, 2020년 2월 1일

 

5. 「IGCL과 코뮤니스트 그룹에 함께 하려면」, IGCL, 2019년 8월 15일

 

6. GCCF의 편지, 2019년 11월 30일

 

7.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와 제4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주장에 대한 [해방-NC]에 대한 편지」, 2019년 11월 15일

 

8. 「역사의 경로에 대한 보고서 서문」,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06/introduction-report-historic-course

 

9. 「역사의 경로의 문제에 대한 보고서」,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05/report-question-historic-course

 

10. 「새로운 기생주의 공격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ICC와의 연대를 호소하며」, TV / 2020년 2월 19일,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29/appeal-solidarity-icc-proletarian-milieu-faced-new-parasitic-attack

 

 

 

<이전 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8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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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부르주아 정부의 부동산정책 허구

부르주아 정부의 부동산정책 허구

-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만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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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계급적 본질

 

문재인 정부는 지난 7월 10일 21번째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다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 6.0% 상향조정, 1년 미만 보유한 주택을 파는 경우 양도소득세율 70%, 2년 미만 보유한 주택을 파는 경우 양도소득세율 60% 부과, 2주택 소유자의 경우 취득세율 8% 인상, 3주택 이상 소유자와 법인 12% 인상, 4년 단기임대 및 8년 아파트 장기 일반매입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 폐지.

 

그 이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집값 안정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색내기용 여론전에 불과했다물론 그렇다고 7·10 대책이 투기 억제 및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투기와 거품 그리고 욕망으로 상징되는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 집값 하락은 부실채권 증가와 거품 붕괴에 따른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더불어 부동산 가격 폭락과 대량의 부실채권은 금융산업건설업과 관련한 제조업 전반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다이것은 지금의 경제 위기를 더욱더 증폭시킬 것이다부르주아 권력인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런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값 상승을 막는 흉내만 냈다말로는 집값 억제를 떠들었지만실제 부동산정책은 집값 폭락을 막는데 맞춰져 있었다그 단적인 사례가 TV 토론회에 출현한 민주당 진성준의 기만적 태도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주택공급 확대라는 명목으로 재개발 규제 완화책까지 들먹이며 건설자본 이윤을 위해 건설 경기 부양책을 계속 발표했다용산 미니신도시 개발, 3기 신도시 개발 등을 발표하며 사실상 투기를 조장했다자본주의 소유 관계와 부르주아 정부의 주택공급 사례를 보면 이러한 건설 경기 부양책들이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그동안 정부는 주거난 해소보다 자본주의 경제를 떠받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며 부동산 거품을 키워왔다.

 

디지털/그린 뉴딜에서 드러난 문재인 정부의 계급 본질은 부동산정책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노동자의 삶은 2008년 이후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와 최근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게다가 노동자인민의 불만은 실질 임금상승률보다 훨씬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택 가격으로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부르주아 정부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노동자인민을 현혹할 수 있는 부동산 안정화 대책이 필요했다이것이 그동안 부동산정책이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한 7·10 대책을 내놓은 배경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부르주아 정치쇼에 불과하다집값 억제를 위해 보유세를 비롯한 양도세취득세 세율을 올리면서도 아파트 공급 확대를 분명히 했다아파트 공급 확대는 자본에 개발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길만 열어줄 뿐 집값 억제와는 관련이 없다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었고수도권도 100%에 가까운 상황이다주거 문제는 공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와 건물주택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그렇기에 아무리 주택을 많이 공급해도 무주택자가 아닌 자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 더 현실성 없는 고위정책 관료층과 국회의원에게 1가구 1주택의 퍼포먼스까지 진행하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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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제 해결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저금리정책은 필연적으로 유동성을 증가시켰고그 대부분은 대자본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다자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투자는 관심 밖이다이윤이든 지대든 자본에는 부가가치 증가만이 목적이다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을 폭등시켰다이처럼 부동산 가격 폭등의 배후에 작동하는 힘은 자본주의 쇠퇴기 경제 위기와 이것이 유발하는 초저금리와 천문학적인 유동성 증가이다부동산 가격 폭등은 그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집값을 억제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정권의 몰락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겉으로는 갈지()’자 행보처럼 보이지만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한 문재인 정부는 자본주의 쇠퇴기심화하는 위기 때문에 더욱 노골적으로 노동자의 목을 죄어 올 것이다자본주의 쇠퇴기에 이윤율 하락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체제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경제 위기라는 배경에서 부르주아의 계급적 선택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착취와 고통을 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7·10 대책은 집값 안정을 결코 해결할 수 없지만집값 안정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 있다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로는 어떠한 정책을 내놓아도 주거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자본주의 소유 관계는 토지와 주택에 대한 사적 소유와 매매와 임대를 통해 소유주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장한다또한부동산 가공을 통해 증가한 부가가치까지도 보장한다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올리고 공급을 확대해도 더 비싼 집값의 형태로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노동자에게 전가될 뿐이다결국노동계급은 주택 가격 안정이 아니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부르주아 정부의 집값 안정책이 얼마나 실효가 있는지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떠한 정책을 내놓더라도 노동자인민에게는 1가구 1주택과 주거환경 개선은 현실화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냥 둔 채 주택 투기와 개발 이익에 대한 사적 취득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환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국가가 이를 환수하여 양과 질을 담보로 한 공공임대주택을 마련하는 것 또한공상에 불과하다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자본의 총체로서 전자본의 이익을 보호하기 때문이다1) 따라서 노동자인민에게 양질의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가 폐지된 사회즉 인민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토지와 주택을 비롯하여 사유재산과 착취계급 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모든 토지와 (거주 목적 이외의주택도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몰수하여 평의회의 통제 아래 사회화시킨다이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제공된다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자인민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복지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평등한 사회이다주택뿐 아니라 의료와 건강권교육권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2)이 처음으로 실현되는 사회이다코뮤니스트는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와 무상 주거권 쟁취를 내걸고 근본적으로 투쟁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만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혁명만이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모두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2020년 8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윤태상

 

 

<주>

 

 

1. 스웨덴의 연대 임금정책과 적극적 노동 시장정책은 대기업에 큰 이윤을 가져다주었지만대기업은 세금을 적게 내려고 해외에 투자했다이에 따라 고용 창출이 이루어지지 않고 소득 불평등은 증가했다그래서 나온 대안이 임노동자기금이다임노동자기금은 대자본의 초과이윤과 노동자 임금 일부를 헌납받아 대자본의 주식을 매입하여 노동조합이 대기업의 주인이 되면 대기업은 노동자시민을 위한 경영을 하리라고 전망했다하지만 자본의 거센 반발로 결국 폐기된다

 

2. 코뮤니스트 사회에서의 행복 추구권

코뮤니스트 혁명을 통해 모든 사람은 가장 광범위한 자유와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개인의 행복을 최대한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모든 사람은 신체와 정신에 어떠한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사회에서 보편적인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물품을 얻고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노동할 권리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사회는 모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보장해주고일을 수행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사회적 필요와 개인적 의지에 따라 사회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교육 자원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모든 교육기관은 무상교육을 하고모든 사람은 평생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와 건강권은 무상으로 제공하며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한다.

모든 사람은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누릴 권리와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막을 의무가 함께 있다.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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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코로나19, 그리고 다른 상상에 대한 짧은 이야기1.

코로나19, 그리고 다른 상상에 대한 짧은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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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수많은 이야기로 넘쳐난다여기서 이야기란 인간이 살면서 표현하며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그 이야기들은 세상에 살아왔고 살아가는 인간의 수만큼그리고 그들이 머물렀고 머무르는 시간과 공간그리고 맺었을 만남의 모습과아직 오지 않은 오늘에 비례하여 무한 수에 가깝게 많고 다양할 것이다아니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가 다양하고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물의 뇌는 자신의 안과 밖을 이야기로 비추어 이해하고 붙들며 만나는 가운데 살아가도록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러기에 지금까지 존재했고 존재할 인간의 삶에 의해 이야기는 넘쳐흘러 왔고 흐를 것이다그리고 그 이야기 하나하나는 각기 나름대로 살았고 사는 인간 한명 한명의 삶을 담고 있을 것이다.

 

허나이 수많고 다양한 이야기 모두가 세상에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 회자되어 기억되거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중심점을 형성하여 돌기 시작한다중심점을 갖게 된 이야기들은 그 중심과의 거리에 의해 의미와 가치라는 평가의 서열을 갖게 된다그 서열은 이야기가 얼마나 기억되고 지속되는가의 힘을 갖게 한다.

 

하나의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서열 괘도는 그것이 삶에 의해서 태어난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동시대를 살아가는 삶과 그것의 이야기들을 거꾸로 다시 규정한다가장 중심의 이야기는 강력한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되고괘도의 밖으로 밀려난 이야기들은 무의미와 무가치의 세상에서 떠돌다 결국 이야기라는 이름마저도 잃게 되기도 한다.

 

이 중심점과 괘도는 그 중심이 형성되며 돌기 시작할 때의 힘만큼의 영역으로 다르게 만들어진 궤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거나 겹쳐진다그러다 결국 그 중심점은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중심점에 의해 사라지거나새로운 중심점이이전의 궤도와는 사뭇 다르게 만든 이야기의 서열 안에 재구성되기도 한다그렇게 이야기의 흐름은 이어지고 오늘에 이른다.

 

거기에 맞추어 이야기의 중심 괘도에서 멀어진 많은 이야기들을 담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의 존재가 아닌계량적으로 헤아려지는 숫자로 남거나 무시되어 이야기마저 상실할 처지에 놓인다.

 

이 중심점은 왜 생기고 변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다양한 이야기로 발견되었고될 것이지만나는 그것은 삶의 필요와 요구에 의한 필연적인 움직임에 의한 것이며삶의 필요와 요구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것이다하지만그렇다고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기에는 결핍이 있었기에그것을 넘어서려는 삶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인간의 삶에서바닷가 모래알의 수만큼 떠다니는 이야기 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 괘도를 만든다고 말하고삶에서 이야기가 필요하고 가져야 한다는 것은삶이란 이야기의 공허함 속에서그저 무의미와 무가치라는 말과 다른 말들과의 경계를 나누며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넘어가기 위한 뇌의 속임수일 뿐아무런 쓸모도 필요도 없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은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필연적인 필요와 쓸모 있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더불어 그 무언가를 가져야 하는 데는 그만큼 살고자 하는 노력과 수고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여긴다면그 삶은 누군가의 노력과 수고를 빼앗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눈 감고 귀 막고 있는 것일 뿐이다그것이 인·(·)이란 말로 규정되어 이야기되는 생물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지금 인간은 그 결정적인 결핍을 만드는 제약을 넘어설 수도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이 말은 인간 스스로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흐르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모든 삶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지속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어하나하나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이야기로서 모두에게 회자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그 전에 현재에 가장 강력한 중심점으로 작용하는 이야기의 괘도를 파괴하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오늘날 가장 강력한 중심점으로 괘도를 만드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너무 당연한 것일지 모르나그것은 자본주의 세상을상품 더미 위에 올리어진 세상을살아있는 노동력이 상품이 되어 거래되는 세상을부르주아지의 자기화한 세상을 지탱하는 이야기일 것이다그리고 이 이야기를 확대하고 강화시켜주며 지탱해주는 과학과 기술학문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거대한 정보와 지식의 집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물론 이것도 상품의 목록에 올려져 있다종교예술법 등등을 포함해서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또 낡고 대책 없는 철 지난 이야기로 세상과 삶을 환원하고 협소화해서불순한 목적으로 제대로 된 답도 없이 무언가로의 강제를 반복하려는 것이라고.

 

그래도 상관없다지금은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할 필요와 요구가 우리에게 던져진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코로나19란 바이러스로 연유되어 벌어진 팬데믹사회적 거리두기마스크 대란자가 격리 등과 같은 말들로 회자되는 최근의 일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필연적으로 그것을 요청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것이 오늘날 이야기의 중심점을 살피고 질문하라고 필연적으로 요청했을까그건 간단한 이유다세상의 중심점으로 모든 이야기를 돌리고 있는 이름하여 자본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부실하고 나약한 것인지를최근의 현미경으로나 봐야 알 수 있는 미생물과 세포보다 더 작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이야기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강력해서 쉬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본주의의 이야기를 팬데믹이란 이야기가 짧은 시간에 흔들면서 멈출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만들고어쩌면 다른 중심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요구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이라는 방식으로 발견되는 물리의 시간과 생물 진화의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짧은 인간의 시간사회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이야기에서긴 시간 제약과 결핍으로 작용했던 것을 그 긴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인간이 넘어서도록 이끈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단 몇 개월의 시간이 넌 끝났어!’라고 말하며 조롱하는 것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삶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삶은 어찌 됐든 이어진다안타깝게도 죽음의 소식 역시 이어지고 있으나따지고 보면 충분히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일을 할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그것을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이건 자본주의란 중심점이 아니어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그런데 왜 하필 이야기라는 조금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테두리로 장황하게 글을 이어가고 있는가나는 연극이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연극이 공연 예술의 한 형태이기에위에서 언급한 중심 궤도를 벗어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최근에 벌어진 코로나19 사태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삶을 사는 이들보다 심각할 정도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침소봉대일까코로나19로 벌어지는 상황 아니어도 이 일을 업으로 하며 사는 데는 늘 생존 그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러나 그 어려움이 더 커진 건 사실이다.

 

연극이라는 일은만들어진 이야기-공연을 위한 대본에서 시작하여 배우와 여러 효과를 통해 구성된 무대그 무대를 지켜보는 이들-관객이 만나는 현장에서이미 지정된 경로로 진행되나 현재로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직접 대면의 형태로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런데 거리두기마스크자가 격리 등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선 연극이란 일 자체가 쉽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또한연극과 같이 유사한 형태로 이야기를 만드는 여러 일 중에서 이 일은 세상 이야기의 중심점에서 외곽의 괘도에 위치하며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엄살일지 모르나 사실이 그렇다오죽하면 국가 시스템에서 마치 던져주듯 지원하는 국가 보조금 아니면 연극을 하면 사는 삶 그 자체의 존립마저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그럼에도 다수의 연극인들은 최근 두 달여 동안 멈춰진그러나 조심스럽게 준비하며 어떻게든 이 일을 계속하려고 궁리한다왜 그런지 그 속내를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나는,........

 

거꾸로 생각하면 어쩌면 그만큼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자유로울 수도 있다어차피 이러나저러나 힘들다면 이왕 편한 맘 먹고 전혀 다르게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그렇다고 설마 굶어 죽는 일이 벌어질까전혀 그런 개연성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그 경우의 수는 다수의 다른 일을 하며 사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그렇다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지금 열리고 있는 분명히 뭔가 다른 현실에서 연극이라는 일을 하는데내게 필요한 요구되는 요청은 과연 무엇일까? (다음 호에 계속.....)

 

연극연출가 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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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쇠퇴기, 코로나19 이후 세계에 대한 토론 : 리버테리언 코뮤니즘

자본주의 쇠퇴기코로나19 이후 세계에 대한 토론 :

리버테리언 코뮤니즘

 

 

<편집자 주>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겪으며 이후 세계에 관한 대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하지만대부분 현 자본주의 개혁 수준이거나 자본주의 체제를 내버려 둔 채 몇 가지 사회주의적제도를 도입하려는 제안에 머물고 있다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를 대체할 유일한 대안으로 코뮤니즘을 주장해왔다우리는 코뮤니스트 혁명(세계혁명)을 통하지 않고 사회주의/코뮤니즘을 건설하자는 거짓 대안에 반대한다.

 

아래는 리브콤(libcom.org)에서 발행한 '리버테리안 코뮤니즘'에 대한 짧은 소개 글이다이 경향은 정치 원칙에서 우리(코뮤니스트 좌파)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지만, '당의 역할‘ 문제 등에서 다르다이 글은 자본주의 쇠퇴기/코로나19 이후 세계에 대한 토론 자료로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의 원리'로 참고할 점이 많아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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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노동자 총회

 

1. 소개

 

우리는 코뮤니즘(공산주의)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 한다첫째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의 원리로 각자의 능력에 따른 원칙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른 원칙으로의 전환둘째오늘날 세계에서 코뮤니스트 사회를 향한 현실 운동에 관한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후자인 현실 운동에서부터 설명해 나갈 것이다.

 

 

2. 현실 운동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묘사하고자본의 필요(이윤과 축적)가 어떻게 노동계급으로서 우리의 필요와 반대되는지를 지적할 것이다.

 

자본가는 임금연금일자리를 삭감하고노동 시간을 연장하고노동 속도를 높이고환경을 파괴하려 한다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노동자를 자본에 대항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저항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할 때임금 삭감이나 과도한 노동에 반대하여 파업을 조직하거나 규칙을 만들 때우리가 협력할 때직접 행동과 연대로 우리의 요구를 주장할 때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 기반을 쌓기 시작한다.

 

협력연대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코뮤니스트 사회.

 

따라서 운동으로서의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협력상호부조직접행동 그리고 끊임없는 저항의 흐름이다.

 

때때로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전후(戰後비공인 파업 물결, 19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또는 1978년 영국의 불만의 겨울 또는 2010년 이후 그리스에서의 긴축반대 저항과 같은 사회의 불안과 현장 투쟁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엄청나게 많은 노동계급을 참여하게 했다.

 

때로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심지어 혁명적인 사건의 폭발로 귀결되었다보기를 들면 1871년 파리, 1917년 러시아, 1919~1920년 이탈리아, 1921년 우크라이나, 1936년 스페인과 1956년 헝가리이러한 사건들은 노동계급이 집단행동을 통해 자본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에 따라 사회를 재조직하려고 했던 운동들이다.

 

 

3.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잘 준비된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인 또는 정치 단체가 세상에는 널려있다그러나 코뮤니즘은 정당 또는 개별 정치인이 존재를 선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수많은 참여와 실험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세상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은 구소련이나 현재의 쿠바북한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이들은 단지 국가라는 하나의 자본가가 존재하는본질에서 자본주의 사회이다그리고 집권당이 공산당이라고 자칭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자본주의 국가 중의 하나를 감시한다는 중국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혁명적인 사건(이전에 언급한 사건의 일부)에서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코뮤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실험을 했다이 과정에서그들은 자신의 계급이익을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실질적인 경험뿐만이 아니라 코뮤니스트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에 대한 원칙을 수립했다.

 

자본가 없는 사회

 

개인이나 국가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토지공장사무실 등등)의 소유 또는 통제 대신에코뮤니스트 사회는 그 수단의 공동소유 및 통제를 기반으로 한다그리고 교환과 이윤을 위한 생산 대신에코뮤니즘은 안전한 환경을 위한 요구를 포함하여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생산을 의미한다.

 

이미 오늘날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고 모든 서비스를 하는 것은 우리 노동자이다우리는 도로를 건설하고집을 짓고열차를 운행하고환자를 돌보고아이들을 양육하며음식을 만들고제품을 설계하고옷을 만들고다음 세대를 가르친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종종 우리를 돕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노동자가 효율적으로 작업장을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예는 풍부하다그리고 사실 자본가들이 위계적으로 조직한 작업장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최근의 한 예로 국가 산업의 3분의 1이 노동자 통제 아래 있었던 아르헨티나에서의 2001년 봉기 기간에 점거한 공장이 있다그리고 역사적으로 더 크고 더 광범위한 예가 있다.

 

보기를 들면, 1936년 스페인 내전 기간스페인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산업 대부분을 장악하고 집단적으로 운영했다그것이 가능했던 어떤 지역에서는 노동자가 화폐를 폐지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상품을 무료로 배분하는 등 코뮤니스트 사회에 근접하게까지 나아갔다.

 

1919년 시애틀에서는 총파업 기간 노동자들이 도시를 점거하여 운영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가 자본가들의 권리를 돌려주기 전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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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36년 스페인, 공장을 장악한 정비노동자들

 

임금 없는 사회

 

코뮤니즘은 또한 우리의 활동과 생산물이 더는 사고파는 상품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 돈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뮤니스트 사회가 과연 인간이 임금 체계에 의해 강요된암묵적인 빈곤의 위협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충분한 생산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산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빈곤이나 기아의 위협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우리는 돈이나 임금노동이 없었지만필요한 일은 여전히 행해졌다.

 

보기를 들어수렵 채집사회는 일과 놀이 사이에 차이가 없는 전적으로 평화스럽고 평등한 사회였다.

 

오늘날에도 필요한 많은 일이 무료로 이루어진다보기를 들면영국에서는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사람들(주로 여성)이 매일 3시간 이상 무급 가사 일을 한다이 사람들의 10% 가까이는 무급 돌봄 일을 하고 있으며영국 성인의 25%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자원봉사하고 있다전 세계적으로, 2011년 무급 노동의 경제 가치는 연간 약 11조 달러로 추정되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유용한 일의 형태 역시 임노동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무료로 수행한다이것이 임노동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작물 기르기아이 돌보기음악 연주하기차 수리하기청소하기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환자 돌보기컴퓨터 프로그래밍옷 만들기제품 설계하기... 이러한 형태의 일은 끝없이 많다.

 

연구에 따르면 돈이 복잡한 업무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동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자유와 통제를 가진 사람들그렇게 하는 건설적이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이유가 최상의 동기부여가 된다.

 

무료 소프트웨어 운동 같은 것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을 위한 비()위계적이고 집단적인 조직이 이윤을 위한 위계적인 조직에 비해 얼마나 우월할 수 있는지그리고 사람들이 생산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임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윤 동기가 없다면어떤 기술의 발전이 노동자를 해고하고 나머지 일을 더 힘들게 만드는(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것이 아니라작업 과정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수록 우리는 모두 일을 조금 덜 할 수 있고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한 소개에서 우리는 정부를 소수의 사람에 의해 통제되고 운영되는 조직... 주어진 지역 안에서 정치적법적 결정을 내리고필요한 경우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직으로 정의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분할이 없다면더는 부자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빈곤임노동그리고 심지어 기아까지 강요하는 경찰과 같은 소수의 사람이 통제하는 조직적 폭력기관이 필요하지 않다그리고 자본을 축적하거나 이윤을 창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는 군대가 새로운 시장과 자원을 확보할 필요가 없다.

 

물론 여전히 반사회적이거나 폭력적인 개인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이것은 폭력성과 심지어 살인조차 거의 항상 처벌받지 않는 무책임한 경찰이 아니라위임되고 소환 가능하며 순환하면서 역할을 맡는 조직에 의해지역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다.

 

집단적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현재 대부분의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우리는 직접 민주주의를 제안한다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보통 부유층개인들을 선출하여 몇 년 동안 우리를 대신해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반면다른 결정들은 심지어 시장의 독재자들에 의해 기업의 이사회에서 무책임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직장동료 그룹에서부터 직장 및 지역 모임(회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투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며통신 기술을 이용해 광대한 지역에 걸쳐 서로 협력할 수 있고위임되고 소환 가능한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투쟁을 조직할 수 있듯이노동계급이 때때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우리는 결국 스스로 사회를 조직 할 수 있다보기를 들어, 1956년 헝가리 봉기 동안 노동자들이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를 요구함에 따라 사회 운영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자평의회가 만들어졌다더 최근에는, 1994년 봉기 이후 멕시코의 치아파스 지역은 지도자가 없는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공무원의 임기는 2주로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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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반군

 

4. 결론

 

많은 사람이 코뮤니즘이 좋은 생각 같지만실제로 작동할지 의심한다그러나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가?”이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부자들과 함께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빈곤 속에 살고 있고환경재앙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아우성치고 있다완벽한 시스템은 없지만우리는 코뮤니스트 사회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잘 기능할 것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심지어 자신의 부에도 불구하고 종종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에게도 말이다.

 

코뮤니스트 사회라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코뮤니스트 사회는 광범위한 빈곤과 환경파괴와 같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이로 인해 우리는 훨씬 더 흥미로운 문제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일하고더 많이 생산하고더 많이 축적해야 할 필요성 대신우리는 어떻게 하면 일을 적게 하고해야 할 일을 더 즐겁게 하고더 흥미롭게 하고더 많은 행복을 느끼고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에 집중 할 수 있다.

 

한 사회의 성공을 GDP로 측정하는 대신에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삶과 행복으로 측정할 수 있다. '직원' '고객' '감독또는 '경쟁자'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대신에 인간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 생애에는 아마도 완전한 (리버테리안코뮤니스트 사회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현실 운동인 코뮤니즘은 자본의 이윤에 맞서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는 일상의 싸움은 현재 우리의 삶을 개선하고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의 생활노동 조건뿐만 아니라 지구를 보호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현실 운동으로서의 코뮤니즘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서 코뮤니즘의 토대를 마련하는 진정한 운동즉 우리의 현재 조건을 방어하고 개선하기 위한 일상의 투쟁이다.

 

그동안 이 운동은 아나키스트 코뮤니즘’ '리버테리언 코뮤니즘또는 단순히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이라고 불려 왔다그러나 중요한 것은이름이나 이데올로기적 꼬리표가 아니라 그 존재이다즉 미래의 이상이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우리의 요구욕망과 저항 정신의 생생한 구현이다불의와 착취가 있는 모든 사회와 권력에서 이러한 저항 정신은 항상 존재하고 존재해 왔다그래서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에 대한 가능성은 열려 있다.

 

리브콤(libcom.org)

 

번역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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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20/12/11 17:56
  • 수정일
    2020/12/11 17:56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임성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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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작업을 하던 노동자 세 명이 질식했다지하에 들어차 있던 가스 때문이었다세 명의 노동자들이 나오지 못하자작업반장은 맨홀 안으로 다시 세 명의 노동자들을 내려보냈다그들도 역시 나오지 못하고 쓰러졌다질식한 세 명의 노동자를 포함해서 구조하러 간 사람 중의 한 명까지 네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재료 분배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회사에 안전고리의 교체를 요구했다고리가 낡아서 사고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회사는 작업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안전고리를 교체해주지 않았다그 노동자는 작업 중에 고리가 끊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결국 그는 사망했다이것이 과연 안전사고일까?

 

맨홀이나 탱크 같은 밀폐공간에서 작업을 할 때는 사전에 환기가 필수이다이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점검과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노동자를 무조건 밀어놓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행위가 작업책임자의 과실이며 안전을 등한시한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회사에서 안전고리 하나만 제 때 교체를 해주었으면 낙하물에 의한 사망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업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업의 부도덕과 안전불감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누가 봐도 명백한 '살인'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노동현장 곳곳에서 일어난다똑같은 사고가 똑같이 반복된다날마다 노동자를 죽이는 '살인'은 지속된다그러나 기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사망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다.

 

2018년 12월 11일 새벽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다김용균은 스물네 살사회에 첫발을 디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그는 끝내 스물다섯 살이 되지 못했다김용균의 죽음 이후노동자들에겐 무엇이 바뀌었고 노동현실은 무엇이 달라졌는가김용균의 죽음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법이 27년 만에 국회에서 개정되었지만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변한 게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민주노총 등 249개 단체(2020년 9월 23일 현재)가 참여하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이번 정기국회 내 진행시킬 것을 요구하며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매일같이 5~6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다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 우리 곁에 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멀쩡한 팔다리가 잘리고머리가 터지고허리가 끊기고온몸이 피투성이로 짓이겨져 목숨을 잃고 있는가핏물이 타고 뼈마저도 녹아서 없어지는가어떤 악독한 살인자들이 무기를 쥐고 있는가친기업 정부라고 하는오로지 자본가를 위한 권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살인교사자'들은 아닌가?

 

어제의 김용균이 오늘의 김용균이다어제의 김용균이 오늘도 손전등을 들고 밤을 꼬박 새우고 있다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까마득한 철제 난간 위에서지하의 깊은 가스실 안에서 비좁은 기계 틈을 기어가고 있다살이 발린 생선가시처럼비 맞은 새처럼 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나라인가자꾸만 되묻지 않을 수 없다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자랑만 넘쳐난다한국은 전 세계 200여 개의 국가 중에서 경제규모 11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한다군사력은 세계 6위 수준의 강국이라고 한다한국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고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풍요와 번영의 나라라고 하는데노동자들은 OECD 국가 산재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어간다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힘들고 어디에서건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있다하루아침에 푸른 생명의 종지부를 찍고 통곡 속에 누워 있다.

 

우리는 기억한다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민호라는 특성화고 학생이 야간일을 혼자 하다가 기계에 몸이 눌려서 죽은 일을민호는 한 달 잔업만 100시간이 넘었다고 한다열여덟 실습생을 그렇게 죽도록 부려먹다가 끝내 죽이고야 말았다그와 같은 일은 50년 전에도 있었다전태일을 분신하게 만들었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다락방 소녀들도 그랬다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산업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30년 전에도 그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우리는 세계가 놀랄만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아마 이대로 간다면 3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고 다쳐도 그들의 고통을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무수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기업도 정부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심지어 떼죽음을 당해도 뉴스에서는 그저 흔히 발생하는 사고로만 보도한다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노동문제가 되거나 사회적 의제가 되는 경우는 김용균의 경우처럼 극히 일부일 뿐이다.

 

2020년 5월 21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의 발표문에 따르면현대중공업에서는 창사 이래 467번째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한다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아무 탈 없이 배를 만든다최고경영자는 467명의 목숨을 앗아간 책임을 진 적이 없다예방조치를 취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별다른 비용을 쓰지도 않았다기업에겐 볼펜 값도 안 되는 돈으로 과태료나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한국의 대기업건설현장고위험사업장하청업체 등 모든 곳이 다를 바 없다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네공정개선 명령을 내리네하면서도 기껏해야 현장 소장이나 과장 같은 하급책임자를 기소하면 끝이다노동자의 사망사고로 기업주가 인신 구속된 적은 거의 없다벌금이라야 고작 몇 백만 원에 불과하고 많아야 1000~2000만 원이 상한선이다결과적으로 노동자를 죽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참으로 나쁜 정부와 더 못된 시어미 노릇을 하는 국회에서 노동자를 살릴 수 있는 보호법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야말로 노동자의 사망을 살인의 범주로 보지 않고 단순한 과실로 처리하는 노골적인 방관행위이다.

 

꿈 많은 청년 김용균의 몸이 찢겼지만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컨베이어는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 돌았다주변엔 비명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본래 정규직이 담당했던 일은 외주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맡겨졌고그의 젊은 피는 한줌의 검은 먼지를 가라앉히는 데 쓰이지도 못했다.

 

김용균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은 문재인 대통령비정규직과 만납시다라고 적힌 손팻말이었다그의 유품은 작업모를 쓴 사진과 고장난 손전등그리고 컵라면 세 개였다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김 군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면서 일하다 가방 속에 컵라면을 남겨두고 갔다두 죽음이 닮은 것은 컵라면뿐일까이들의 죽음은 원청과 하청외주화와 용역간접고용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한국 노동자들의 적나라한 현실이다이윤이 종교가 된 기업노동자의 하소연이 들리지 않는 정부의 공모가 어제의 김용균과 오늘의 김용균이라는 죽음을 낳고 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컵라면과 촛불을 분향소에 놓고 외쳤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죽음의 외주화를 멈춰라" "일하다 죽지 않게 해달라"그러나 김용균 2주기가 되는 올해에도 2000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사망했다김용균의 죽음 이후에도 끼임추락압착 등의 인재에 가까운 중대재해로만 한정해도 매년 600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차고 넘치는 김용균의 죽음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으니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죽음의 아가리에서 꺼낼 수 있을까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드리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믿음은 퇴색되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마저도 관철되지 않는 나라는 분명 큰 문제가 있다노동자가 노동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복지국가 대한민국'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김용균이 죽어야 정상적인 사회가 될까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국·캐나다·호주 등 외국은 '기업 살인법'으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는다사망사고는 매출액보다도 많은 벌금을 물려 기업의 문을 닫게 하기도 한다.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기업의 주의 의무와 책임 태만에 따른 근로감독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노동자의 목숨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그것이 일하는 사람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그럼에도또 그럼에도 저기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청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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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용균

 

내 영정을 들고

내가 걸어가네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부르르주먹을 쥐었다 펴면

핏빛 햇살 한 줌

저기 떨어진 내 머리

저기 끊어진 내 몸통을

내가 끌고 가네

맑게 빛나는 내 눈이

차갑게 감긴 내 눈을 보네

내 영정에 양복을 입히고

파란 넥타이 꿈을 동여매고

울먹울먹 절하네

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내가 먼저 가네

차마 돌아서지 못한 나를 안고

내가 울며 붙잡고 있네

 

詩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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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수많은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

김용균 동지 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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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  2020. 10. 15 

 

수많은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

 

 

12월 10일이면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먹먹함과 함께 김용균과의 약속을 얼마나 실천했는지를 생각하는 반성의 글이 쉽지만은 않다.


 

시키지도 않은 일과 충실하게 업무지시를 따른 죽음

 

2년 전 그날사고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 태안화력으로 허둥대며 출근을 했다공공운수노조 담당 간부에게 전화로 사고 소식을 전하고 TT- 04C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119 대원들과 현장 조합원들이 함께 수습하는 중이었다현장은 혼란스러웠고 정신이 없었다.

 

작업 중지 명령과 함께 현장 대기실에서 보낸 하루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사고에 대한 정황과 예측들에 서로들 놀라며김용균이 고통스러워했을 순간을 떠올리며 그저 괴로운 마음뿐이었다.

 

퇴근 후 빈소가 마련된 태안의료원에 갔을 때는 김용균의 부모님께서 그 짧은 하루에 당하신 여러 가지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나는 평소 고집스러웠던 용균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회사의 어처구니없는 말이었고다른 하나는 한국발전기술의 태안사업소 간부가 하도급 업체 노동자들과 함께 몸소’ 사고 현장을 깨끗하게 물청소를 했다는 것이다.

 

한국발전기술의 임원이 채용 당시 면접에서나마 보았을지도 모를 입사 3개월 차의 신입사원인 김용균의 고집스러움까지 기억하시고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하청 업체가 가진 안전사고에 대한 의식 수준과 유가족을 상대로 그들이 행해왔던 재해 당사자에게 책임 떠넘기기식 사고수습 방식까지모든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현장을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게 직접 물청소한 것도 문제이지만원청인 서부발전의 지시가 있었던 없었던 하청 업체 간부의 사고 현장 증거인멸과 은폐는 변하지 않는다회사 측의 업무지시에 따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작업을 하다가 죽음에 이른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시가 없었는데도 스스로 은폐하려 물청소에 임한 자는 생과 사로 나뉘었다.

 

현장의 설비개선과 발전사의 한결같은 삽질

 

발전사 출신 하청업체 임원 및 간부들의 아낌없는원청 발전사에 대한 사랑은 현실에서 인력구조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김용균 사고 이후 분명 현장이 바뀐 것은 있다대표적으로 2인 1조로 함께 작업한다는 것과 랜턴 없이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두려웠던 그 컨베이어 벨트 현장이 놀라울 정도로 밝은 LED 조명으로 바뀐 것이다어디서 나를 지켜볼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시카메라와 함께 말이다현장을 밝히는 불빛의 용도인지 현장 작업자들의 근무를 감시하기 위함인지 모르겠다.

 

2인 1조에 충원된 인원들은 1년 계약직이고정규직 전환과 관련한 노사전 협의체가 운영되는 동안은 하청업체 용역 계약의 3개월 단위 연장에 따라 근로계약도 연장은 되고 있다하지만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요즘의 상황에서 3개월 이후는 점쟁이나 알 일인지 모른다.

 

더욱 웃지 못할 사항은 그 자리가 여전히 발전사 퇴직자들의 재취업 창구로 기능한다는 것이다컨베이어 벨트와의 일상적인 사투와 낙탄 삽질을 경험하지 않은 발전사 퇴직자들 말이다.

적응하지 못한 채 퇴사에 따른 빈 공백은 교대근무 다른 과 인원의 대근으로 채우는 실정이다.

 

김용균 사고 이후 구성돼 운영되었던 설비개선 TF는 수많은 설비개선 항목의 공감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남기고 원청의 결정에 따른 셀프 설비개선 계획으로 마무리하였다그래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낙탄 회수 장치는 650m 구간을 200m 구간에만 설치했고그마저도 무용지물로 재공사를 해야 해서 지금은 정지되어 있다여전히 그 넓은 공간과 길이를 삽질로 처리하고 있다.

 

분진 저감장치는 제작사의 제어시스템 외주화로 업체는 사라지고 현장 설비와 자동제어는 엇박자가 나게 되어 그 문제를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돌아온 것은 중점관리로 인한 노동 강도의 증가다벨트에서 떨어지는 낙탄을 물을 흘려 처리하는 워터크리닝은 보여주기식으로 김용균 사고 현장 타워 내부에만 설치했고다른 구간은 낙탄에 막혀 물이 역류하는 상황이라 사용을 못 하고 있다.

 

산더미 같이 쏟아지는 낙탄을 치우느라 그저 한결같이 삽질이다오죽하면 근로감독관이 점검창을 열어 보고서 쏟아지는 낙탄량에 탄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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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향신문.  2020. 10. 15 

 

원청 발전사와 김용균이 있던 자리

 

태안사업소의 휴게실에는 아직도 버젓이 2019년 2월 자고용노동부 천안지청장 명의의 벽보가 붙어있다. ‘사망사고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온다.’

 

최근 태안화력의 화물노동자 사망사고에 따른 태안화력 본부장의 특별안전교육 문서에 내용은 더욱더 가관이다.

 

“2018년 12월 중대 재해 이후 국민 눈높이에 맞게 현장 환경개선 및 안전관리에 최선을 다했으나최근(9월 10안전사고 재차 발생함발주사는 안전의식이 많이 개선되었으나협력사는 아직도 부족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원청 발전사는 설비의 법적 소유권을 갖는다그러나 현장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손님일 뿐이다아무 권한도 없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손님 소유의 설비에 문제와 하자가 있다고 소리쳐도 소유권을 가진 발전사는 싫은 사람이 나가라고 한다그곳이 김용균이 일하던 발전소 삶의 현장이다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기업 발전소가 이렇듯 상식 밖의 내용으로 운영되는 실상을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

 

얼마 전 노웅래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추석 명절 기간에 태안화력을 방문했다국정감사를 앞두고 환노위 소속 의원으로 화물노동자 사망사고와 김용균 사고 이후 실태를 점검하러 방문했다늘 그래 왔듯이 국회의원 방문을 앞두고 대대적인 청소 지시가 떨어졌다함께한 근로감독관들조차 깔끔해진 현장에 놀라워했다.

 

방문 다음 날화물노동자 사망사고에 따른 특별근로감독 기간 중에도 또다시 하청 비정규직 정비노동자의 안전사고가 일어났고사고를 당한 노동자는 대퇴부를 크게 다쳐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다해마다 반복되는 죽음의 현장인 태안화력은 특별근로 감독이 아닌 상시 근로감독이 필요하다그들이 말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높아진’ 발주사의 안전의식만큼 높은 수위의 책임과 처벌이 강제되도록 중대 재해기업 처벌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한국발전기술의 임금협상 과정에서 실명을 지칭하며 고액연봉자라는 표현이 나왔다 한다하지만김용균의 급여명세서가 보여주듯이 그들은 최저임금 보다 고작 9만 원을 더 받았다그것도 임금협상의 결과이지 회사 측에서 알아서 올려준 것이 아니다그동안 하청업체는 발전퇴직자의 재취업 창구로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강소기업으로 키워졌고원청은 그 하청업체를 통해 이윤을 남긴다.

 

수도권에 공급하는 전력의 비중이 높은 영흥당진의 화력 발전소와 함께 태안화력은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위해 9, 10호기에만 2만 톤에 가까운 석탄을 매일 컨베이어 벨트로 이송한다하루 상탄량은 정해져 있고저장 탱크의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개의 상탄 라인을 가동한다.

 

그러나 설비의 돌발 상황과 정비 시간을 고려하면 두 개 라인의 상시가동은 가능하지 않다이것이 태안화력의 설비 조건이다한 달 전쯤 모든 타워와 벨트의 점검창에 벨트 기동 중 점검창 개방금지라는 큼지막한 스티커가 부착되었다부착되기 전에는 어떠했을까아니 부착된 후에는 달라졌을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든 작업의 지시와 작업 상황을 카톡방에서 공유받는다원청의 지시사항은 사무실의 발전사 퇴직 간부들에게 전달되고각 교대근무의 파트장에게 지시된다벨트의 마찰열에 의한 자연발화를 해소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를 정지하고 낙탄을 처리해야 하지만그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안전하지 않은 작업과 위험이 판단되면 바로 작업 중지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실제 그럴 수 있을까이것이 태안화력의 현장 상황이다.

 

부상과 죽음이 이어지는 태안화력 상황과 조건이 발주사의 자의적인 안전의식 개선으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현장에 가끔 손님처럼 나타나서 지시사항을 남기고 사라지는 원청의 모습에서 개선된 안전의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현장의 조건과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안전사고와 죽음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2년 전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김용균이 서 있다그 자리가 절망과 죽음의 자리가 되지 않도록 남아 있는 우리가 싸워야 한다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을 바꾸기 위해 꾸준히제대로투쟁해야 한다.

 

김경진 김용균재단 운영위원한국발전기술지부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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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엥겔스 탄생 200주년 : 마르크스를 번역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엥겔스 탄생 200주년 : 마르크스를 번역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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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올가을 예정된 평가와 계승에 대한 토론에 앞서 혁명 동무 맑스와의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는 편지글, 맑스 저서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자는 엥겔스의 글을 소개한다.

 

 

 자본」 1권은외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관련해서는공공의 재산이다그러므로 영국 사회주의 집단 안에서는 번역이 마르크스 유작 관리자의 책임 아래 준비되고 출간될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잘 알려졌지만텍스트가 충실하고도 제대로 변환되기만(rendered: translate와 구분하기 위해서 변환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옮긴이한다면 그 번역이 다른 사람에 의해 먼저 이루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투덜거릴 권리가 없다.

 

존 브로드하우스(John Broadhouse)에 그런 식으로 시도한 번역 첫 몇 페이지가 투데이(To-Day) 10월호에 실렸다분명하게 말하겠는데그것은 결코 텍스트의 충실한 변환이 아니며이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마르크스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몇 명의 옥스퍼드 대학생이 노가 네 개 있는 보트로 노를 저어 도버 해협을 건너고 있을 때그들 중 한 명이 노를 헛 저었다(caught a crab)”1)고 신문에 보도되었다쾰른 신문(Cologne Gazette)의 런던 통신원이 이것을 그의 신문에문자 그대로 그리고 충실하게, “게가 노 젓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노에 걸려 잡혔다라고 보도했다런던 한복판에서 수년간 살아온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기예의 기술적인 용어들에 마주치게 된다면 바로 그와 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겠지만단순한 독일어로 된 책에 대해서 꽤 쓸 만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독일 산문 작가 중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글을 번역하는 일에 착수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이제 정말로 브로드하우스 씨가 게를 잡는 일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이 더 있다마르크스는 이 시대에 가장 정력적이고 간결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그를 적절하게 변환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에도 통달해야만 한다하지만 브로드하우스 씨는 분명 존경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재주와 언어 구사력을 지녔지만관습적인 유명 문필가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용되는 제한된 범위의 영어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이런 상황에서 그는 너무 쉽게 행동한다하지만 이런 식의 영어는 자본이 번역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강력한 독일어는 그것을 변환하기 위해 강력한 영어가 필요하며 최상의 언어 자원에 의존해야만 한다새로 만들어진 독일어 용어는 영어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야만 한다하지만 브로드하우스 씨가 그러한 어려움에 봉착하자마자그의 언어 자원은 그를 저버리고 그의 용기마저 꺾어버렸다이단 같은 모험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제한된 밑천을 아주 조금 확장하고일상적인 문헌의 관습적인 영어에 아주 조금 혁신을 가하면서그는 자신의 귀에는 거슬리지 않지만저자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다소 불명확한 용어로 어려운 독일어 단어를 변환한다설상가상으로 그는 그 용어가 다시 등장할 때전문 용어는 언제나 같은 어구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완전히 다른 용어들로 그것을 번역한다그리하여 그는 첫 번째 절의 제목에서, grösse가 크기 또는 한정된 양에 상응하는 명확한 수학 용어지만규모(extent)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Werthgrösse을 가치 규모(extent of value)”라고 번역한다그리하여 Arbeitszeit의 뜻으로 단순히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들로 변환한다. (1) “시간-노동,” (2) “노동의 시간,” (3) “노동-시간,” 그리고 (4) “노동 기간.” (1) “시간-노동은 오히려 시간으로 지급한 노동이나 힘든 노동에 시간을 제공하는” 사람이 수행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4) “노동 기간은 2권에서 마르크스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했던 용어(Arbeitsperiode)이다지금은 잘 알다시피노동-시간의 범주는 책 전반에 걸쳐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중의 하나인데, 10쪽도 안 되는 곳에서 그것을 네 개의 서로 다른 용어로 번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상태 그 이상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어떤 상품이 자신을 나타내는 첫 번째 측면은 유용성의 대상이라는 측면이고그와 같이 그것이 지닌 질이나 양으로 고려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완전체즉 수많은 질이나 속성들의 총체이고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용할 수 있다이 서로 다른 방식들따라서 어떤 물건의 다양한 용도를 발견해 내는 것은 역사 행위이다유용한 물건들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척도를 찾아내고 확정하는 일 또한 그렇다상품을 측정하는 방식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는 측정되는 대상의 본성 때문에또 부분적으로는 관습 때문에 발생한다.”2)

 

이것이 브로드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변환한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결국 대상이 유용하게 쓰일 다채로운 양식은 간의 과업이다결국. 유용한 물건들의 양의 사회적 측정 수단을 발견하는 일 또한 그렇다상품들의 크기(bulk)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 그 서로 다른 본성 때문에 발생한다.”

 

마르크스에게서물건들의 다양한 유용성을 찾아내는 것은 역사 진보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브로드하우스 씨에게서그것은 시간의 과업에 지나지 않는다마르크스에게서는인정된 공통의 척도를 확정하는 데도 같은 조건이 적용된다브 씨에게서는또 하나의 시간의 과업이 유용한 물건들의 양의 사회적 측정 수단의 발견에 있는데마르크스는 분명 측정 수단의 종류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그런 다음 그는 Masse(측정 수단) Masse(크기)로 오인하고그리하여 지금까지 잡힌 가장 멋진 게들 가운데 하나를 마르크스에게 뒤집어씌우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서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용가치는 부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건 그 부를 구성하는 재료를 형성한다.”(부의 사회적 형태그것에 의해서 부가 보유되고 분배되는 전유의 특별한 형태). 브로드하우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용가치는 항상 사회적 형태를 띠는 부의 실질적인 토대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것은 가식적인 상투어이거나 완전히 무의미(터무니없는 말)이다.

 

상품이 자신을 나타내는 두 번째 측면은 그것의 교환가치이다모든 상품은교환가치를 지니는 것들 사이의 대비를 통해서 변화하는 비율로교환 가능하다는 점이 사실은 모든 상품이 그것들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나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여기서 마르크스 책에 있는 가장 섬세한 분석들 가운데 하나를 재생산할 때 저지르는 부주의한 방식은 건너뛰고바로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로 나아가겠다. “모든 상품에 공통된 이 무엇이 기하학적물리학적화학적 또는 기타 자연적 속성일 수는 없다상품들의 물질적 속성들은 그 상품들을 유용하게 만드는 한에서만즉 그것들이 상품들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한에서만 고려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상품들의 교환관계의 특징점은 분명히 상품들의 사용가치로부터 추상()을 만드는3) 바로 그러한 행위이다이 관계 안에서하나의 사용가치는그것이 같은 비율로 제공되는 한에서다른 어떤 사용가치와 동등하다.”

 

이제 브로드하우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겉보기에 분명하게 상품들의 교환-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추상적인 형태의 이것들의 사용가치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용가치는 그것이 동일한 비율로 존재하는 한에서 꼭 다른 사용가치만큼 가치가 있다.”

 

따라서 사소한 실수를 제쳐놓더라도브로드하우스 씨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의 정반대 것을 말하도록 만든다마르크스에게서상품들의 교환관계의 특징은 추상 전체가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로 구성되며그것들은 사용가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고려된다는 사실이다그의 해석자는 교환율(여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의 특징은, “추상적인 행태에서” 취해질 뿐인바로 그것들의 사용가치라고 말하게 만든다그런 다음에 몇 줄 지나서그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문장을 제시한다. “사용가치들로서상품들은 오직 다른 질일 수 있고교환가치로서 그것들은” 추상적이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은, “오직 다른 양일 수 있으며따라서 사용가치를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이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거듭해서 같은 오해를 반복하는 브로드하우스 씨를 발견하게 될 때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막 인용한 그 문장 다음에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상품들의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면) “그것들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즉 노동 생산물들이라는 속성만 남는다그러나 이 노동 생산물조차 이미 우리 수중에서 변화를 겪었다우리가 그것의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고 하면우리는 또한 노동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유형의 요소와 형태들로부터 추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브로드하우스 씨에 의해 영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사용가치를 상품들의 실질적 재료로부터 분리한다면오직 하나의 속성즉 노동 생산물의 속성만 남는다. (어디에사용가치에 아니면 실질적 재료에?: 엥겔스그러나 노동 생산물은 이미 우리 수중에서 변형되었다우리가 그것에서 그것의 사용가치를 추출한다면우리는 또한 그것의 사용가치를 구성하는 스태미나와 형태를 추출하는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관계에서그것들의 교환가치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사용가치와는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서 나타났다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노동 생산물의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면앞에서 우리가 확정한 것처럼우리는 그것들의 가치에 도달한다.” 이것을 브로드하우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율에서 그것들의 교환가치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사용가치와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우리가 이제 노동 생산물들에서 사용가치를 사실상 추출한다면그때 확정되었던 것처럼우리는 그것들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브로드하우스 씨는 서랍이나 금고에서 돈의 추출과 같은 유형의 것들 이외에 어떤 다른 추상 행위나 양식들에 대해서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그러나 추상과 빼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번역가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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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의 의미를 영어의 무의미로 변화시키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마르크스의 가장 우수한 연구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이중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사용가치의 생산자로 여겨진 노동은같은 노동이 가치 생산자로 여겨질 때의 노동과는 다른 특성의 것이고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다전자는 방적·직조·쟁기질 따위의 구체적인 종류의 노동이고후자는 방적·직조·쟁기질 따위에 공통된인간의 생산적인 활동의 일반적인 특성으로하나의 공통된 용어즉 노동(labour) 안에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전자는 구체적인 형태의 노동이고후자는 추상적인 형태의 노동이다전자는 기술적 노동이고후자는 경제적 노동이다요약하면(영어에는 양자에 대한 용어가 존재한다전자는 labour는 별개의 것으로서 work이고후자는 work와 별개의 것으로 labour이다이 분석 이후에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처음에 상품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것으로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타났다그다음에 우리는 노동도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에서그것이 지닌 능력으로서 그것에 속하는사용가치 창조자와 같은 특성을 더는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브로드하우스 씨는 자신이 마르크스의 분석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면서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는 첫 번째로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합물 간주했다그다음에 우리는 노동이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에서그것이 사용가치 생성자인 한에서의 저 특성을 소유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마르크스가 희다라고 말할 때브로드하우스 씨는 왜 검다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만하면 충분하다이제 더욱 재미있는 것을 보자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민 사회에서는모든 사람이 상품 구매자로서 이 모든 상품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법적 가설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시민 사회(Civil Society)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영어이고퍼거슨(Ferguson)의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책은 백 년도 더 된 것인데도브로드하우스 씨에게는 이 용어가 이해하기 힘겨운 것이다그는 그것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으로 변환하고그래서 그 문장을 무의미로 바꾸어버린다그들이 구매해야 하는 상품의 본성과 가치에 무지하여소매업자들 등에 의해 사기당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의 생산(Herstellung)은 사용가치의 확립으로 변환된다마르크스가 만약 아주 적은 양의 노동으로 석탄을 다이아몬드들로 변형시키는 데 성공한다면그것들의 가치는 벽돌의 가치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라고 말할 때보아하니 브로드하우스 씨는 다이아몬드가 탄소 동소체 형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석탄 콜라로 바꿔버린다그와 비슷하게 그는 브라질 다이아몬드 광산의 총 산출량을 모든 산출량의 이윤 전체로 변형시킨다그의 수중에서 인도의 원시적 공동체들은 숭고한 공동체들이 된다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그 고유의 목적에 알맞은 일정한 생산 활동 또는 일정한 유용 노동이 들어 있다.” [“들어 있다(contained)” 독일어(steckt)는 잘 번역된 것이다상품의 사용가치 생산은 그 시점에 이미 소비되었기 때문이다브로드하우스 씨는 분명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일정한 양의 생산 능력 또는 유용한 노동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질을 양으로 바꾸어버릴 뿐 아니라 막 소비된 생산 활동을 소비될 생산 능력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제 그만하자나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모든 면에서 마르크스를 번역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보다 열 배 더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특히 그는 정말로 진지한 과학적인 저작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ederick Engels)

1885년 10월 작성

 

옮긴이 | 김종원

 

 

 
<주>
 
1. 단어 그대로 옮기면, “게를 잡았다”가 된다. (옮긴이)
 
2. 이 구문과 다음 구분에 있는 강조는 모두 엥겔스가 추가한 것이다.
 
3. “make abstraction from”으로,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고, ‘추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추상’이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 옮겼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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