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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비판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비판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

 

 

 

 

 

이행기 강령과 제4인터내셔널

 

 

 순수한 정치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는 노동자 국가로 파악하는 트로츠키 개념은 그가 단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 만 아니라,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1938년, 그의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인 「자본주의 죽음의 고뇌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좀 더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행기 강령」 (Transtional Programme)에서 명확해진다. 우리는 이 강령을 다루면서 방법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도이처(Deutscher)의 피상적인 이해를 기초로 트로츠키가 레닌의 정치적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역사적 상황과 자본주의를, 그가 문제제기하지 않았던 범주에서 분석하려 했다. 새로운 사례들이 그의 분석과 모순되자, 그는 맑스주의적 원칙을 토대로 철저히 재분석하고 그에 따라 범주를 수정하는 대신, 그것들을 왜곡하여 이미 내린 결론에 맞춰버렸다.  우린 이미 러시아 경제에 관한 그의 분석에서 이러한 방법을 보았다. 그가 처음에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쥐고 있으므로 노동자 국가라고 논쟁하다가, 이 주장이 유지하기에 너무 당혹스런 것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에 대한 경제적 주장을 뒤섞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차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제국주의가 동유럽 국가들을 그 지배 아래에 두었을 때,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의 열등한 후계자들 (파블로 Michel Pablo, 만델 Ernest Mandel, 그란트 Ted Grant, 캐넌 James Cannon)은 그들의 교사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 따라, 이들 국가들은 마찬가지로 노동자 국가가 틀림없다고 결정했다. 비록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그 체제가 순수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동적 자본주의 원형의 관료주의도 진보적이며 노동자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러시아가 노동자 국가라는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맑스주의와 진실은 끊임없이 희화화되고 왜곡되었다. 영구혁명, 즉 후진국 노동자와 농민은 부르주아지가 힘이 없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국민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주장 역시 영구위기 이론과 마찬가지로 방어되었다. 이 이론들은 트로츠키의 분석적 틀의 대들보를 형성했으며, 매우 유용하게 여겨졌다. 이 이론들을 자기모순에 의해 붕괴되도록 두는 대신, 트로츠키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영역을 포기하는 희생을 무릅쓰고, 방법론적으로 이 이론을 버팀목으로 버텼다.

 

 대신 트로츠키가 우리에게 준 것은 손쉬운 슬로건, 즉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회관계와 새로운 시기의 정치적 의무를 파악하는 그의 무능력을 감추는 데 실패한 슬로건이 된 영구위기와 영구혁명에 대한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행기 강령에 있었던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는 이미 완수되었다는 정확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 강령으로 퇴보하게 만든 그 전망에 대한 경제적 무지와 정치적 즉시성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 이 무지의 가장 눈에 띄는 예는 경제적 영역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인류의 생산력이 정체되었으므로 자본주의는 혁명에 무르익었다고 한다. (이행기 강령 11쪽, WRP 팸플릿) 이것은 1930년대에는 옳았을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 단순한 통계치 하나로 진실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쓴 서구 자본주의 전체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GNP가 몇 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실증적 증거는 그 진술의 유효성을 무효화하기에도 충분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실제 자본의 운동을 이해하는 그의 방법상의 실패이다. 자본주의는 맑스가 많은 경우에 썼듯이, 생산도구의 지속적 혁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 선언)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쇠퇴시기도 그 근본요소를 바꾸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축적 사이클은 상업적 위기로 잠시 정기적으로 멈칫거렸을 뿐 끝나지도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의 다른 점은 이런 위기들의 부르주아 해결방식이 단순한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하게 하는 몇몇 파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흥은 오직 세계적 토대 위의 자본의 대량 파괴를 거쳐서 오는 제국주의 전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사이클은 지금 시대에 호경기-불경기-전쟁-재건-호경기로 계속되는 하나의 순환이 되었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현재 시스템의 쇠퇴를 설명하는 것이 생산력의 정체가 아니라 생산은 증가하지만 남반구의 영속적 기아, 결핍, 전 지구적 주기적 전쟁의 대가로 인류의 이해에는 어떤 의미로도 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산력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기 전에, 생산관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속박과 그들의 가치법칙은 분쇄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본질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은 사실 사회주의 투쟁의 토대로서  「이행기 강령」을 완전히 파기시켰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를 임노동의 잉여가치 추출을 통해서만 오직 존재할 수 있는 가치법칙에 기초한 체제로서가 아니라 죽음의 고뇌속의 시스템으로 간단히 정의함으로써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은 자본주의 순환의 단 한 가지 측면(불황기)의 즉각적 틀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1938년 자본주의가 죽음의 고뇌에 빠져있다고 판단하면서, 트로츠키는 이를 파괴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실패를 설명해야 했으며, 이 실패를 극복할 처방을 내놓아야 했다. 바로 여기서 트로츠키가 사회민주주의로 돌아선 것이다.

 

 

 

 

이행기 강령과 당

 

자본주의 내부의 역동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이행기 강령」은 프롤레타리아적 조직문제에 순수하게 주의주의적 해결책만 내놓는다. 정확히  「이행기 강령」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선결조건은, 자본주의 하에서 성취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이미 보편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1938년 이것은 여전히 진실이었으나 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멍에를 지고 자본주의에 종속되었나? 트로츠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정치적 상황 전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리더쉽의 역사적 위기에 의해 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 지도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이지만, 트로츠키는 이런 의미가 아니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조직이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원을 받아 왔음을 보아왔다.  먼저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은 그들의 대중조직(노동조합)과 함께 그들의 정부의 도움을 받아 출범했고, 모든 각각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이 정당들은 그들이 대량학살을 지원하거나, 독일에서처럼 계급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대량학살을 조직했을 때, 노동자들의 대의로부터 스스로 분리했다.

 1914년 제국주의 질서의 가장 확실한 적은 레닌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이론적으로 무장된 볼셰비키 당이었고, 이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을 때, 이것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였다. 그러나 이전에 설명했듯이 쇠퇴의 과정은 시작되었고, 그 과정은 사회민주주의의 갑작스런 배신보다도 더 음흉한 과정이었다. 1922년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통일전선론 채택은 이 쇠퇴의 중요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1926년까지의 반대파의 축출, 1927년 중국에의 재앙스런   정책들도 이와 같았다. 1938년까지 트로츠키조차도 부르주아지 편에 선 코민테른의 변질이 일어났음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트로츠키의 보증으로 남아있는 그 별난 논리의 꼬임으로 인해, 그는 제2, 제3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보수적 관료주의적 기관으로 보았다.

 다른 말로, 대량 학살과 배신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들은 지도력이 바뀔 수만 있었더라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35년 그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해 통일전선과 사회민주주의로의 개입에 대한 지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정통 트로츠키주의는 혁명적 조직의 물리적 패배와 함께 일어난 이데올로기적 패배를 아직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체들(사회주의당, 노동자당, 그리고 그들의 노동조합)은 비록 가끔 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수백만의 지원으로 선거에 이겨도, 사실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계급 체제의 일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노동자 투쟁을 선거라는 안전지대로, 혹은 한 산업이나 공장의 고립된 경제투쟁으로 돌림으로써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약점에 대한 트로츠키 분석의 극단적으로 간단한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의 위기가 그들이 그들 계급의 독립과 혁명적 열망을 지켜줄만한 정당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제4인터내셔널은 그 구성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영역에서 지나치게 작동하여, 스스로 그 창설에서부터 계급정당이 되기에는 부족하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진정한 구성에 장애물이 되었다. 필요한 것은 구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의 사회적 보존에 반대하는 가차 없는 투쟁이었다.

 오늘날 트로츠키주의는 여전히 이 노동조합과 정당에 의한 배신만을 이야기하며, 그러므로 그들이 노동자 계급 내에서 할 진정한 역할을 드러내지 못한다.

 국제 공산주의 좌파(이탈리아 좌파)가 그 당시 문제제기 했을 때, 제4인터내셔널은 1920년대 혁명적 파고의 패배에 따른 정치적 해명이라는 필수적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이라고 주장 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가 조심스럽게 피했던 그런 명확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정당의 부활과 역사적 교훈을 고려한 공산주의 강령의 재구성에 필수적인 단계였다. 독립적 계급운동이 없어서 1938년에는 계급정당이 없을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는 여전히 그들 조직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트로츠키는 오직 제4인터내셔널의 선언만이 그 단순한 의지의 노력에 의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의지의 부족은 아니다. 당의 중앙집권주의자로서, 지도자로서, 행동하는 계급의 안내자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제4인터내셔널의 설립은 혁명과 반혁명의 경험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수행했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 없이 이루어졌다.

 

 정당이란 무에서, 시간과 공간의 고려 없이 스스로 창조할 수 없다. 계급정당의 부재는 비록 독일에서 1918-1919년에 있었던 것처럼, 혁명적 리더쉽의 위기가 역사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이 역전되는 객관적 요소였을 지라도, 단순히 그 리더쉽 위기의 결과는 아니다. 트로츠키의 정당에 대한 개념에 따르면, 정당은 계급투쟁의 필수적 부분이 되는 대신, 그 성원들의 결정에 의해 인류의 역사적 반란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하는 구원자(deus ex machina)의 관념적 형태를 가정한다. 이것은 강령의 이행 요구들을 분석할 때 훨씬 뚜렷해진다.

 

 

 

이행기 강령 요구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본을 파괴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행기 강령」, 「자본주의 죽음의 고뇌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 권력 쟁취를 위한 준비로서 이행의 요구를 둘러싼 대중의 동원」 은 제목이 이야기 해 주듯, 맑스의 이행 개념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트로츠키에게는, 30년대에 아무런 혁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죽음의 고뇌 속에 있었고, 때문에 이미 이행의 시기는 도래했다는 것이 명백했다. 맑스에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나서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871년 파리꼬뮨의 교훈이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근본적 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개념과 관계없이 움직였다. 사실 트로츠키는 최소의 요구를 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로 되돌아갔고, 이는 그런 최소의 요구조차 부패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믿었다는 단순한 차이밖에 없었다.

 

현재 시대는 혁명정당이 일상적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혁명의 실질적 과업과 분리될 수 없이 수행되도록 되었기 때문에 구분된다.

 요약하면,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은 이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최대강령이 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혁명적 타파 없이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차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C.Slaughter, 이행기 강령의 WRP 편집판의 서문」

 

 이 명백한 난센스는 「이행기 강령」 의 요구를 가장 피상적으로 관찰만 해도 없어진다.

  트로츠키가 우리에게 준 것은 프롤레타리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선행하는 은행의 국유화, 산업의 노동자 통제, 공공근로, 임금의 물가연동제와 같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혁할 거대한 계획이다. 명확히, 그런 발본적 요구들은 트로츠키의 동시대 인물인 케인즈에 의해 자본주의를 구원할 명백한 계획으로써 이미 주창되었고, 사실 모든 수단들은 자본주의 질서의 보존을 위해 부르주아 국가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동유럽에서 은행의 국유화,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통제, 이 둘은 근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스칼라 모바일(scala mobile)같은 임금의 물가연동제 공공노동 등은 실제로는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떠받치기 위한 단계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국가 역할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것은  「이행기 강령」 이 가진 당연한 결과였다. 국가를 자본가 집합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은, 트로츠키는 여전히 국유화를 사회화와 동일시 여기며, 사회주의의 주 과업을 임노동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파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행기 강령」은 1890년의 에르푸르트 강령보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대의 혁명적 부분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겨우 한 번 언급되었으며, 그것도 우연히 그러했고,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다음의 「이행기 강령」의 목적에 대한 언급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과 대중의 현재 요구 사이의 가교를 찾기 위하여 일상적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 있는 그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현재의 요구란 잠재적으로 혁명적이라고 이미 지적했다. 부족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 강령에 따라 대중과 함께 투쟁할 당뿐이었다. 트로츠키의 끝없는 실패는 이 강령을 현시대 자본주의에 맞춰 정교화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요구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이것들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진행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행기 강령」의 요구와 같이, 그 요구들은 쉽사리 자본주의에 의해 복구된다. 1848년 혁명 이후,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공식화된 각 요구들은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운동의 초기에는, 노동자들은 어떤 직접적 공산주의적 수단들을 제안할 수 없다. 그러나 ... 만약 소부르주아지가 철도와 공장을 매점매석할 것을 계획한다면, 노동자들은 반드시 그것들이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몰수되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만약 요구가 비례세를 제안하면, 그들은 누진세를 요구해야 한다. ...  그 비율은 매우 가팔아서, 결과적으로 자본은 곧 박살날 ... 만약 민주주의자들이 국가부채의 조정을 요구한다면, 노동자들은 그 지불거부를 요구해야할 것이다. (공산주의자 연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연설)

 

 이 변증법적 개념은, 변질되고 있던 코민테른, 특히 3차 대회의 해묵은 창고에서 트로츠키가 집어낸 사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코민테른에서는 대중들이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의식적으로 대표하여 투쟁하지 않을 때, 투쟁의 단계를 구성하는 정밀한 요구들이 있다고 언급되었다. (Frank, 앞의 책 61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단지 노동자 대표라고 불리는 이들의 의회 투쟁을 단순히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시위로 도와줘야한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생각 없는 대중으로 밖에 보지 않는 카우츠키의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투쟁은, 그 단결을 이뤄내는 요구뿐만 아니라 투쟁의 진정한 목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요구를 정의함으로써, 그 속에서 함께 있음으로서 그 투쟁을 더 큰 단결로 이끌고 그럼으로써 더 큰 목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혁명가들의 상이한 요구를 만든다. 이것은 「이행기 강령」 이 회피해오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작점이 역시 마지막 점인 대중의식의 즉각적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그러므로 그가 제2,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의 약점을 극복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약점은 대중과 함께 싸웠던 그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부르주아 국가 전복의 필수성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진 리더쉽을 제공하지 못한 무능력에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비판하는 대신, 트로츠키는 이를 미덕으로 삼았다. 프롤레타리아 패배 시기의 대중의 획득은 그의 주의주의의 중심이었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모든 (실패한)전략은 통일전선에서 최소강령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프로그램은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는 트로츠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그는 그의 프랑스 지지자들에게 SFIO(제2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섹션)에 가입하여 “그들의 요새에 가서 개량주의에 도전하라” 그리고 “대중에게 혁명적 프로그램을 전하라”고 말했다. 그는 코민테른의 1935년 인민전선 정책의 채택을 비판하는 위치에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편에 옮아가는 것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은 지속적이지 않았다. 특정한 반혁명 논리 -코민테른의 정책(프랑스, 영국, 제국주의와 동맹하여 중유럽의 파시스트 정책에 저항한) - 가 있는 동안, 트로츠키의 사회민주주의로의 입당주의는 전혀 의미가 닿지 않았는데, 특히 그가 예견했듯이 혁명이 코앞에 다가왔다면, 더욱 그러했다.

 

 우리는 선언한다. 코민테른의 처방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노동계급정당의 비혁명적 정책을 인정하더라도 상황은 혁명적인 것만큼 혁명적이다. 이 상황을 극도의 성숙한 혁명으로 몰고 가기 위해, 즉각적이고 정력적이며 쉴 새 없는 대중의 동원이 있어야 하며, 이는 권력 쟁취의 슬로건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혁명 이전 상황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유일한 방법이다.

 

 1920년대의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깨닫지 않았기에 1938년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가 수행한 제국주의 전쟁에 무방비로 있었다. 그러므로  「이행기 강령」이 레닌의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혁명이론인 혁명적 패배주의의 핵심지점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함께 끝났어야 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가 2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 양 편에 모두 가담하도록 했다.

 

 

 

제2차 제국주의 전쟁

 

 「이행기 강령」은 분명히 다음 시기에 혁명정당은 주로 전쟁 문제에 대한 정책의 성공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31쪽)

 

 그것은 심지어 공산주의 원칙의 기본인 제국주의 전쟁에서 주요한 적은 그 자신의 국가에 있다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트로츠키는 곧 소련의 본질 분석 실패와 구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정책에 대한 재검토의 실패가 그로 하여금 공산주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했음을 밝힌다.  「이행기 강령」의 같은 페이지에서, 그는 제국주의가 아닌 다른 억압받는 나라뿐만 아니라 소련이건 다른 노동자 정부이건 간에 그들을 지원하고 방어하는 똑같은 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의 소련의 생산관계 분석 실패는 러시아가 제국주의 동맹의 네트워크에 참가하는 것에 직면하여 그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독일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기려 했던 스탈린의 정책이 있었던 1930년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 스페인과 중국에서의 이 정책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 1939년 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해 히틀러와 맺은 스탈린 조약에도 불구하고 : 필란드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 트로츠키는 그가 죽는 날까지 러시아가 자본주의도 제국주의도 아니라는 허구에 집착했다. 사실, 1939년에 쓰인 그의 글,   「소련과 전쟁」에서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의 정치 전체를 반동적 성격으로 비판했지만, 노동자 국가가 보나파르트주의 엘리트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사소한 논쟁을 제외하고는, 왜 소련이 반동적 정책을 취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같은 글에서 트로츠키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는 반대로 소련에서의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스탈린을 탈스탈린 화시켰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소비에트 관료주의의 문제제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소련의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문제에 종속되며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제임스 (CLR James), 버냄 (Burnham), 샤흐트만 (Schachtman) 등 러시아의 본질에 대한 다른 분석을 했던 이들과 제4 인터내셔널을 분열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논쟁에서의 트로츠키의 글은 「맑스주의 방어」라는 제목으로 잘 수집되어 출간되었다. 부적절한 제목이었음에도 그의 글은 지금 그를 패배하게 한 일관성의 위기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의 그의 논쟁, 즉 만약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맑스주의는 반박될 것이며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논쟁은 그가 1939년 쓴   「소련과 사회주의」에서 이미 썼던 것의 좀 더 확고한 변형에 불과하다.

 

 모든 가능성과 반대로 만일, 10월 혁명 (소련을 의미함 -편집자)이 지금 전쟁의 과정에서, 혹은 그 직후의 과정에서 어떤 선진국에서 지속하는데 실패한다면, 그리고 만약,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전선으로 되돌려 보내진다면, 우리는 의심 없이 현재 시대와 그 추동력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교정해야 하는 문제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방어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범주에 기초하지 않은 분석의 논리다.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는 그 약점을 1938년에 맑스주의가 아닌 관념론에 무게를 둔 의지의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다. 이것은 트로츠키의 오류의 끝이 아니었다.

 「맑스주의 방어」에서 그는 소련의 방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늪의 방어를 요구하며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길을 따라 훨씬 더 나아갔다. 이것은 소련, 영국, 미국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결성된 제국주의 동맹을 야기한 1941년 히틀러의 러시아 공격전이었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러시아 분석으로 분열되었다면,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 또한 독일과, 제국주의 동맹에 대한 방어문제로 분열되었다!  <민족 혁명 운동의 혁명 프랑스>가 억압 없이 히틀러와의 협력을 요구하는 동안, 베리떼(Verite)의 제4인터내셔널 위원회는 몇 세대의 프랑스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축적한 부의 보호를 요구했다. (1940년 9월)

 

 트로츠키주의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개관은 이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 이 시기의 원칙적이지 못한, 많은 분열의 첫 번째 문제는, 여기서 보았듯이, 현재 시대와 추동력의 개념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실패에 대한 비판은, 공산주의 강령과 국제 공산주의당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파괴할 만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어디서든 우리의 시각을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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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기구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곳이 어느 곳이든

자본주의 국가이든,  가짜 사회주의 국가이든, 복지국가이든,  현존하는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이든...

 

경찰(police)은   권력과 자본의 상설화된 폭력기구일 뿐이다.

특별히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겐 일상화 된 폭력의 가해자이며,  당장 물리쳐야 할 (enemy)의 대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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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7/23 13:08
  • 수정일
    2011/10/27 16:58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이형로

 

 

 

<노동계급의 자립화에 대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노동자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독자적인 혁명의 수행이 어려웠던 시기 다른 계급과의 연대나 협조가 필요했을 때 적절한 용어였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 자기조직화로 표현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 는 맑스의 테제는  현실운동에서 미래의 혁명을 위해 무시되거나,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이상적인 문구가 아니다.  현실운동에서부터  노동자계급은 자립성을 획득하려는 노력들을 해야만 계급의식이 고양되고 계급투쟁이 전면화되었을 때, 반혁명적 괴저와  대리주의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없이 자기권력창출과 자기해방으로  나아갈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자립적인 계급의 조직을 스스로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자평의회이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의 생성과 권력창출, 자기해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와 지도력 획득의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은 사회 내부의 모든 다른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혁명 활동을 위해 하나의 불가분한 전제조건을 나타내는데, 노동자계급만이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계급의 정치조직인 혁명당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인민전선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주의 제도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들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가 이용될 수 있었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계급의 정강을 위한 선전 및 선동가능성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참여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참여, 그것과 관련된 각종의 선거 연합들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정강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자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선거에 대한 개입전술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에 부응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낡은전술이 되어버렸다.
 


<선거연합에 대하여>

선거 시기 정당들의 연합이란, 자본가 지배계급이 강력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연합하는 것일 뿐, 그것의 결과가 승리이던 패배이던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선거가 끝나면 누가 이기든 바로 그들을 위해 투표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향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는 체제내로의 포섭을 통해, 다른 한편에서는 부르주아 법, 제도의 정교화를 통해 부르주아에 적대해 자립하려 하는 세력에 대해 공격을 가해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 북미의 좌파 당(사민주의, 공산당, 사회당을 포함한 세력들)의 역사에서도, 10여년의 짧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가 투표를 하거나 누군가를 지지하라고 투표를 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참여의 한계를 제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민주적으로 선출’ 한다는 것은, 선출된 그들끼리 권력투쟁을 하던 일부가 특정계급을 대표하던 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려는 세력이 스스로의 물리력을 갖춘 상태에서 선출되지 않는 한, 결국에는 지배계급이 원하는 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에 복종해야 한다.’ 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선(집권) 가능성'인데, 이 당선가능성은 선거에 돌입하면서 정강이던, 정책이던, 계급이던, 그 무엇이던 모든것을 삼키어버린다.  더욱이 당선가능성에서 가장 불리한 노동자계급의 후보(정당)는 그들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고유임무인 계급투쟁을 멈추고 선거에 몰입해야 한다.  당선가능성 마저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속에서만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는(사실은 이용당하면서) 급진주의자들은 선거시기에도 선거가 끝난후에도  노동자계급의 자립화가 아닌 또다른 당선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온갖 전술과 환상들을 생산해낸다. 그래서 그들의 비대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선거와 당선가능성을 위한 정책, 조직라인은 보강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부르주아와의 계급전쟁에 대한 개입전술은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반계급적이기까지하다. 여전히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은 혁명과 권력의 주체가 아닌 계몽과 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부르주아지와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다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투표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이고 삶에 절실한 투표인, 노동자계급의 파업을 위한 투표나 투쟁을 위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에 대해서는 온갖 법 제도의 세부조항과 규칙들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해 인정하지 않거나, 철저히 무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지배계급이 반세기 동안 반공이데올로기를 세뇌시켜 왔다면, 80년대 이후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대중의 뇌리에 각인 시킨 것은 선거=민주=합법 대 파업=폭력=불법이었음을 상기해보자.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우리가 그들의 민주주의 규칙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합법성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계급투표란>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노동자후보나 정당을 지지하여 투표함에 넣는 행위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현장과 투쟁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정치의식의 표현과 저항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회주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주장하는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과 투표함에 동원되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투표함을 거부하고, 투쟁현장과 계급연대의 공간에 정치발언대를 만들어 투쟁을 결의하고 , 광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총회를 열어  계급적 연대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자본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노동자계급에게 위기를 전가하여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과 생존권 위기에 몰려있는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조직 확장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전 계급적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립적인 총회 조직들과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을 통해 가능하다.


진정한 계급투표란 노동계급을 대리하는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그 책임을 유지할 계급의 투사를 뽑고, 투쟁을 결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투표함에 갇힌 대리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정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선거의 공간에서 항상 분리되고 분열되었던 노동자계급이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장이어야 하고, 그 공간은 부르주아지의 투표소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공개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이 압도적으로 표출되는 곳이어야 한다.


<기권주의를 넘어 적극적인 보이콧과 광장점거 전술로>

따라서 노동계급의 자립화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진보대연합도, 노동계급의 정치를 선거와 정강내용으로 제한시키는 대리주의 적 비판적 지지노선도 노동자계급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기세가 약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혁명적 원칙은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 전망이며, 이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일어서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선거기간 선거운동과 선거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지역의 투쟁사업장과 투쟁의 현장에 가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준비하는 계급연대를 조직하고 직접행동하자. 고립되거나 앞선 투쟁,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거나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노동자 투쟁에 형식적 연대가 아닌 자기자신의 투쟁으로 계급적으로 연대하자. 선거기간과 무관하게 노동자계급이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계급적 연대의 표시로 투쟁에 함께하고 거리를 광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총회를 열어 자본과 권력을 규탄하고 항거하는 직접정치행위를 하는 것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로 가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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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7/01 09:29
  • 수정일
    2010/07/01 09:29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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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계급적 관점에 대하여>

                                                                                                                                                                                                                          by lee





1. '평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은 '평화'를 단순한 ‘전쟁반대’나 ‘긴장완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의 본질인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자본주의적 전쟁반대', '전쟁의 원인인 모든 제국주의 반대', '자본주의 타도를 통한 노동계급의 항구적 평화쟁취'로 연결 시켜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가 전쟁을 잉태한 체제이고, 경쟁과 경쟁의 극단적 표현인 전쟁 없이는 유지 불가능한 것이 현재 인류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알려 내는 것, 즉 전쟁의 계급적 본질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한반도에서 '분단 상황·긴장상황'을 이용한 자본가계급의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억압과 위협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의 기본임무이다. 하지만 , 자본주의적 분단해소(통일)와 남북 지배권력 간의 협조(협정)를 노동계급의 평화체제인 양, 민족(자주)적 권력을 세우는 것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인 양 호도하는 관점은 계급 협조적 민족주의적 관점의 전형이다.



남북한 권력과 제국주의 체제


2. 남한 정권이 노골적인 친 제국주의적, 친 자본가적, 친 냉전(적에 대한 규정이 분명한)적 부르주아 정권이라면, 북한은 노동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체제일 뿐이라는 사실과, 이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군사적 긴장을 이용해 자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야만과 파시즘적으로 통치하며 미국이건 중국이건 그들을 비호하는(자본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제국주의 세력과 노골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천안함 사태와 북 핵 위기 문제를 야기 시킨 장본인이며, 좀 더 호전적이지 않은 좋은 정부-민족(자주)적 정부가 들어선다고 이 체제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오바마가 여전히 아프간 전쟁을 확대시키고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통해 자본의 이해(군수산업 자본과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견제)를 대변해주듯이, 자본주의하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거나 평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각각의 자본을 대변해주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본주의 일반의 법칙들이 자본의 치명적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자본과 권력을 지배하는 핵심자본들이 국가를 앞세워 전쟁을 전면전이나 국제전쟁으로 확대시켜 위기를 일시적으로 비껴가거나 자본과 시장의 재편을 통해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 와서는 전쟁의 성격도 자본주의 위기를 지연시키거나 완화하는 역할에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즉,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2차 대전 이전 제국주의 국가가 세계의 어느 부분(비자본주의/반자본주의 영역)에서 자본주의를 정착(확장)시키는 역할을 했을 때 자본주의는 풍부해졌고 넓어졌다. 이때의 군사력은 어느 경우 세계자본주의에 있어서 생산력 발전의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경쟁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전쟁은 전리품의 재분배를 가져올 뿐, 새로운 정복은 불가능해졌다. 그 시기부터 한 자본주의 강대국은 다른 국가를 희생시킴으로써만 군사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세계 자본에게 전쟁은 내부적 분열과 재난 낭비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이와 같은 군사지출을 통한 출구는 각 나라 경제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군사지출은 자본에게 그리고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엄청난 낭비다. 지난 몇 십년간 미국은 평균적으로 매년 잉여의 1/3을 군수품으로 전환시켰다. 이 지출이 생산적 상품에 사용되었다면 미국 경제성장은 33% 가속되었을 것이다.


이제 군사적 자극제가 자본주의의 영원한 확장을 결코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비생산적 유형에 그렇게 거대한 부분을 바치는 것일까? 그것은 군수산업의 발전이 제국주의간 적대의 격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쟁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전적으로 분열된 그리고 모든 경쟁자들이 나누어 갖기에는 너무 작은 조각들로 이뤄진 세계에서 각국의 군사적 힘은 그 나라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국주의간 적대의 첨예한 표출이 상시적으로 분출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 주변이며, 남북의 군사력은 각자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도구이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불해야할 대가인 것이다. 비생산적 영역인 군사력은 결국엔 자본에게 짐이 되고 낭비일 뿐이지만, 제국주의 간 적대체제, 세계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상품을 수출하고 이윤을 추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의 자본가들은 군사비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한(물론 노동계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을 기꺼이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의 지배계급 또한  미·일을 겨냥한 군사적 방어선을 사수하고 미국에 대한 적대의 표출을 대리하면서 중국·러시아에 도움을 받으며 내부적으로는 자국의 인민들을 초과 착취하고 군사화로 동원하며 생존을 연장해가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낭비들의 악순환은 지배 권력과 자본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정권의 변화- 특정 자본분파의 이해관계 -에 따라 ‘전쟁 없는 긴장상태’, ‘평화 없는 경제교류’를 오가며 두 착취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의 남북 지배 권력 간의 평화협정이라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강제하는 군사적 영역을 침해할 수 없고 극도로 제한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 뿐이고, 언제든지 제국주의 세력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는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착취와 이윤추구의 자본주의 경쟁관계 ,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절시켜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천안함 사태의 진실과 자본의 이해관계


3.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두고 의혹이 큰 만큼 공방도 치열하고, 국제적인 진실게임의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게 천안함 사태의 진실은 없다. 천안함 사태 때문에 계급투쟁이 유보되었거나 영향을 받을 거라는 사고도 글로벌화 된 자본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분석하지 못한 과도한 표현이고, 더욱이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듯이 무조건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장하는 과대망상가들 이야말로 노동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반공세대-정신적 피해자들일 뿐이다.


천안함 사태를 북의 소행으로 발표하던 날, 자본은 전쟁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수조원이 증발된 주식시장과 환율폭등을 대비했고, 해외의 자본시장과 상품시장에 전쟁위기가 없을 것임을 설득했다. 또한 천안함 사태의 장기화가 상품수출과 이윤추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본들은 적당한 선에서의 정리를 원하고 있고, 자본의 또 다른 축에서는 천안함을 접고 경제위기를 피해나가는 일에 강력하게 북, 중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들이 자본분파들 간의 투쟁에서 승리할 때 평화협정, 자유 왕래 등은 기본카드일 뿐이다. 그들이 이윤추구의 근거지를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기상황 - 위기의식 조장' 이상의 실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현재의 평화와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이며, 더욱 완전한 평화 속에서 북을 이윤추구의 장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평화체제의 완성이다. 따라서 천안함 사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 있는 지배계급 일부의 권한은 제한되어 있으며, 자본의 일부분파가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국내외 핵심자본과 국내자본 전체의 이익을 일방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 체제로서의 한국자본주의이며 현재적 자본의 구성인 것이다.


그래서 전쟁위기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측면은, 평화체제 유지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본의 분파들이 북을 자본주의 체제에 온전히 편입시켜, 민족적·경제적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북의 노동계급을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착취와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한 시장 확대로 이용하고, 그것의 한축으로 한국노동계급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고용과 임금의 상대적 안정을 일부에게 보장해주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면, 자본이 주도하는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남북의 노동계급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노동계급이 주도해야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그런 측면에서 소위 '자본의 위기전가' 내용이 '부문적'이거나 '일국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전투적이고 잘 조직된 계급일부(부문, 국가)의 계급투쟁의 지엽적인 성과물들이 자본이 착취해간 것들을 다시 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취약한 부분의 초과착취-희생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면 자본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것이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투쟁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투쟁으로 진전시킬 전망을 갖지 못하는 한,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무차별 공격과 발 빠른 행보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며, 자본은 본연의 임무인 이윤추구를 위해 노동계급을 분할 통치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리직과 생산직, 대기업 노동과 중소영세 노동, 선진국 노동과 후진국 노동으로 분리시키고 한쪽을 희생시키면서 혁명적 분출을 막기 위한 온갖 방책과 환상들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본의 덫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빼내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분할과 분열을 고착화시키는 노동조합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도 반드시 버려야한다.


 

‘평화’와 노동자국제주의


4.노동계급은 천안함을 누가 가라앉혔는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남북의 통일이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될 건지, 아무런 계급적 이해관계가 없다. 그런 의제들은 자본가 분파들의 이해관계일 뿐이다.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란 오직 군사적 긴장상황을 이용한 부르주아계급의 온갖 명분의 공격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방어하는 것과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모든 전쟁과 전쟁책동에 조건 없이 반대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평화'그룹들과 시민단체들, 민족주의-사민주의자들, 좌파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전쟁(책동)중지·평화협정 체결'을 향한 다양한 연합들이 말하는 ‘평화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평화주의자들은 유엔에 그리고 국제 법에, 부르주아 권력 간의 협정에 호소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그 법의 장벽들을 파괴할 때에만 확장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간, 북중 간 제국주의적 군사동맹과 연관된 모든 조약(협정)을 파기하고 실질적 연결 관계를 끊는 것이 남북 평화협정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자본의 서커스 판에 메뉴로 올려 진 천안함 사태에 부화뇌동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야만적인 상태로 몰리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정신적 피로를 가중시키지 말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진실이 가려질 거라는 유아적 상상도 이제 그만하자. 진실은 훗날의 혁명만이 밝혀줄 것이며,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진실을 접근해야 한다.


혁명을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패배의 누적과 보이지 않는 전망으로 극도의 정신적 피로에 쌓여 계급의식이 하강되어가는 노동계급에게 혁명적 분출구를 제시하거나 함께 뚫고 나가자고 앞선 결의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북조선에 있는 노동계급도 중국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미국에 있는 영어 잘하는 workers도 모두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전쟁을 막는 일도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도 궁극적으로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야만 실질적으로 자본가를 타격하고 노동계급을 방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망과 흐름들만이 노동자국제주의와 세계혁명의 기본임을 노동자계급 스스로 인식하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인 것이다.

 

 

결론


5.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은, 오직 방어 할 어떤 국가적인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운동에 의해서만 -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운동에 의해서만 - 저지될 수 있다.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간의 어떠한 연대도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들의 기만적 연대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내려는 시도들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첫걸음이다.


평화주의자들 말하는 '전쟁반대 - 이명박 반대'는 '양심'과 '이성'에 호소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계급들의 연합을 주장하고 결코 민족적 이해관계를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부르주아의 군사적 연합에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에 관한 진정한 계급의식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반도 안에서의 '평화'와 관련된 계급투쟁이 나가야할 길은 '계급평화-계급연합-체제간의 평화'가 아닌 남북한 부르주아 지배 권력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한 계급적 연대와 국제적인 투쟁을 통해 전쟁을 실질적으로 억제해내는 투쟁이어야 한다.


끝으로 천안함 사태를 굳이 정세의 중심에 두고 사고하거나 그것과 관련된 현실투쟁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시민단체 혹은 민족주의세력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 좌파 내 평화주의세력들 수준에서 주장하는 비 계급적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적/노동자 국제주의적 전망을 제시해야 하겠다.


-자본가권력과 제국주의세력이 주도하는 그 어떠한 조사내용도 남북을 포함한 세계의 노동계급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그 어떠한 사후조치나 제재조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천안함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차원의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조사단에 의해 정보가 철저히 공개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절차에 따라 규명되어야 할 것


-과학적 혹은 객관적 물증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주요원인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을 근거로 한 제재조치가 해당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전가하는 것에 사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영향을 주는 그 어떠한 제재조치(경제봉쇄, 군사적 제재 등)도 조건 없이 반대한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방적 희생만을 초래하는 어떠한 명분의 전쟁과 전쟁위협, 전쟁책동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노동계급을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연대투쟁으로 방어해낼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전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전쟁을 잉태한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시킬 것


-이모든 요구사항을 알려내고 관철시키기 위한 남북 노동자계급과 세계노동자계급의 연대와 투쟁을 호소하고 조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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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 - 계급투쟁을 최우선으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6/04 16:13
  • 수정일
    2010/06/04 16:1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G20: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 - 계급투쟁을 최우선으로!


 


다가오는 G20 회담을 둘러싼 환경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다.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와 인류의 삶을 파괴하고 있고, 부르주아지는 궁지에 몰려있다. 금융 시장에 주입된 거대한 대출금, 비슷한 규모의 거대한 예산 적자 정책, 그리고 최근의 ‘양적 완화’(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시중에 뿌리는 정책) 회의로 부르주아지는 주요 국가들에서 금융 시스템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나 이것은 근원적인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부르주아지는 세계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가장 참혹한 침체의 늪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일본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은 수출과 산업 생산에서 숨 막히는 붕괴로 고통 받고 있다. 동유럽의 많은 지역들도 아이슬란드 이어 그리스 정도 규모의 엄청난 재앙에 위협받고 있다. 아일랜드, 포르투갈,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신흥 시장들’도 긴장하고 있다. 중국만 해도 구조조정 인원이 무려 천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경제 부문들도 세계 경제의 나머지 부문과 똑같은 쓰나미를 맞고 있다. OECD와 IMF는 이제 세계 경제 전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마주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전후 벼락 경기가 끝나고 40년, 부르주아지가 위기를 조절하기 위해 썼던 모든 정책들은 실패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국가 개입(다른 말로 국가자본주의)의 몇 십 년은 부르주아지를 낭떠러지 위에 세웠다. 대규모 과잉생산에 직면해 수요를 유지하는 주요 메커니즘 - 신용의 양을 크게 늘려버리는 등의 - 은 경제가 항생제를 과다 복용한 환자의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러한 대응책의 효과가 실제로 바닥났다는 이야기이다. 더욱 나쁜 것은 신용이 문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는 이제 말 그대로 파산했다.


 이러한 결과가 노동자 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은 명백하다. 40년 동안 번영의 오아시스처럼 보였던 일자리, 임금, 그리고 삶의 조건에 대한 잔인하고 야만적인 공격이 그것이다.

 

 

 

민중을 최우선으로?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이 사회의 국가에 대해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지금까지 세계가 달려온 방식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이 모든 것은 건강하다. 오늘날 시위의 문제는 그들 조직이 제공한 대안, ‘민중을 최우선으로’에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국가기구의 기반에 도전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정부와 국가의 현존하는 체제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국제적 금융 시스템을 개혁할 투명하고 그럴 듯한 과정”으로써 “모든 정부, 의회,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와 핵심 역할을 할 UN의 협의”를 요구한다. 그들은 “이러한 충고들은 세계적 지도자들이 경기침체를 벗어날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완전한 종합 정책을 제공”하며, “인간과 지구를 위한 경제를 추구하는 새로운 체제”, 또는 “경제에 대한 민주적 지배”, “모두를 위한 번듯한 일자리와 공공 서비스”, “녹색 경제” 등등의 길을 열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의 환상을 퍼뜨리다


이러한 운동들은 자본주의나 국가가 절대로 개혁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이해를 표현해왔다. 좌우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대공황 이후 80년 동안 서투르게 자본주의 체제에 국가 개입이라는 방법을 써왔다. 40년 동안의 국가 개입은 이 체제 내부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이것이 현재 위기의 가장 명백한 교훈이다. 전쟁, 대량실업, 가난과 환경 파괴는 ‘나쁜 정부’의 탓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 노쇠한 체제, 인류에게 쓸모없어지고도 목숨을 부지해온 사회적 규칙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자본주의가 국가로 인해 더욱 민주적이고 친환경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대신, 우리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이 그 뼛속까지 반인간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은 이윤을 축적하는 동력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그 동력은 인간의 우선순위를 가장 뒤로 둘 것이다. 이것이 왜 현존하는 생산 관계들 - 임금노동과 시장을 위한 생산 - 을 완전히 뒤집고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 - 국가도 없고 자본도 없이 모든 생산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뤄지는 공동체,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 로 대체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UN을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 지구적 정치 기구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려 한다. 만약 현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면, 이런 기구들은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혁명에 의해 해체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대안은 있다 - 계급투쟁


혁명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계급투쟁에만 가능성으로, 그리고 필연성으로 포함되어 있다. ‘민중을 최우선으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미묘한 환상과 싸우는 동안, 진정한 계급투쟁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2003년 이후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의 무대로 돌아왔다. 뉴욕에서 난징까지, 노동자들이 나이, 종교, 국가의 분리를 넘어선 연대를 다시 발견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은 집합적인 힘을 움직이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생들의 시위와 집회, 그리스를 휩쓴 총궐기와 폭동, 이집트와 방글라데시의 대중파업, 영국 정유공장 노동자들의 실업에 맞선 싸움, 한국의 쌍용차 공장점거투쟁, 터키의 테켈 노동자 투쟁. 오직 소수밖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한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의 공통된 이해를 보여주는 국제적인 운동의 일부다.


 이러한 투쟁들은 오직 이 사회를 정말로 바꿔야 하겠다는 전망을 가진 개별적 투쟁들, 우리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투쟁들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이 투쟁들을 그들 눈앞의 목표에만 머물지 말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자본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운동을 건설해야만 한다. ‘민중을 최우선으로’와 같은 캠페인은 계급의식의 심화에 장애물 이 될 뿐이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야만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캠페인이 유포하는 환상을 극복해야만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 세계적 규모에서의 계급투쟁-저항을 준비 하는 것- 만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안이다.  < World Revolution >


 

 -번역  left communist group   (http://cafe.daum.net/leftcommu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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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좌파 진영에 호소함

 

공산주의좌파 진영에 호소함 (호주)
 
 
 

 

 
 
 동지들!


오늘날 인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말했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시대의, 제 1차 세계대전 전야 직후와 같은 최후 통첩적인 문제 제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곳에서 임금 동결, 일자리 삭감 그리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있고, 노동계급에게 강력한 공격을 가하며,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 재앙의 위협은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현실화 되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인 갈등이 지구 곳곳에서 -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말리아에서 수단에서, 콜롬비아에서 멕시코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절멸하고 쇠퇴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풍기는 이러한 악취들과 비교해서, 우리는 세계 노동계급의 계급투쟁 속에서 - 착취와 억압이 없는, 빈곤과 결핍이 없는, 전쟁과 국가 경계가 없는 –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의 기원을 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좌파는 1920년대 국제 혁명의 물결이 후퇴함에 따라 기회주의자들이 변절하고 퇴행하는 것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응답으로서 출발한 코민테른 좌파 흐름의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좌파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러시아 등에 기반을 둔 당시 세계혁명에서 중요하고 대표적이었던 나라들에서 나타났습니다. 1920년대 말에 시작된 반혁명의 시기에, 공산주의 좌파는 혁명적 물결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서 가장 비타협적이고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방어를 입증해 왔습니다.


호주에서도 공산주의 좌파의 동조자들이 활동하면서 존재해 왔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공산주의 좌파 경향들은 단지 개별적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고립으로 인해 크게 고통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계급투쟁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공통의 입장과 원칙에 기초해서 자신들을 정치_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시기에 이러한 그룹을 즉시 형성하는 것은 아직 호주에서의 의제가 아닙니다. 지금 시기에 당장 필요한 것은 현재의 공산주의자 강령을 분명히 하는 (특별히 지리적으로 고립된) 동지들과 집단적으로 정치적 명확성의 입장을 밝히고 유지-발전 시키는 만남과 토론을 목표로 하는 국제주의자들의 형성에 있습니다.


따라서 호주에 있는 모든 공산주의 좌파의 동조자들 사이에 조직적인 토론의 시작을 호소합니다. 국제주의자 공산주의자 네트워크의 이름으로 토론이 제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가의 기준을 현재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제안했습니다.


-제국주의 전쟁과 민족(주의)운동의 모든 종류들은 노동계급에게 죽음과 파괴 이외에 안겨줄 것이 없습니다. 노동계급은 모든 부르주아 진영에 반대해야 합니다.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의 분파싸움에 동원하면서,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을 분할시키고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인 형제와 자매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의회와 부르주아지 선거는 가장 무도회 입니다. 자본가의 ‘민주주의’는 자본가 독재와 어떠한 형태를 취하던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의회(주의) 서커스에 참여하자는 모든 손짓과, 피착취 계급에게 선거를 통해 권리를 행사하라고 하는 어떠한 선택도 거짓말을 강화할 뿐입니다.


-모든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둥이자, 자본의 도구이며, 자본주의 서비스를 위해 행동 합니다.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역할은 노동계급을 감시하며, 노동계급의 투쟁을 파괴하는 것에 있습니다.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궁극적인 혁명을 만들기 위해서도,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에 맞서 노조 밖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All who may be interested in taking part are encouraged to write to:
InternationalistWorker@gmail.com
We also welcome any comments, questions and criticisms.

With fraternal communist greetings,

Fabius, Jack, Max, Niccolo, Thomas

 

 
번역 :   left communist group   ( http://cafe.daum.net/leftcommun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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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주의 비판

“평의회주의” 문제


 

1. 평의회주의(Councilism)는 평의회공산주의운동 내에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며 퇴행이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 PT독재, 당, 집권화에 대해서 수천번 부르주아지에 의해 주장되고, 무정부주의에 의해 반복된 입징에 “맑스주의적” 형식을 입히려는 공개적이고 기회주의적 시도이다.

 

2. 여기서는 러시아 경험에 기초하여,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두 가지 축인 PT혁명의 국제주의적인, 본질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평의회주의가 공격하는 것을 살펴본다.

 

3. 세계혁명인가, 일국사회주의인가?

 

1) 평의회주의가 일국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적 입장을 반대하지만 PT가 “세계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임노동과 상품을 폐절시키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문밖으로 내버린 입장을 다시 창문으로 불러드리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세계적 건설과 일국사회주의 건설 사이의 중간은 없다.

2) 부르주아혁명과 PT혁명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부르주아혁명은 목적과 수단에서 민족적이지만 PT혁명은 목적에서(공산주의) 그리고 수단에서(혁명과 새로운 사회 건설의 국제적 성격) 역사상 최초의 세계혁명이다.

3) 국제주의적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1926~27년에 스탈린주의는 “일국사회주의” 테제를 주장한다. 트로츠키와 좌익공산주의(독일-네덜란드 공산주의자 포함)의 모든 경향은 이러한 입장을 반역으로 보았으며 이태리 좌파 Bilan은 그것을 코민테른의 죽음으로 보았다. 이점에서 무정부주의의 논리는 스탈린주의와 기본적으로 같다. 반집권화가 “일국사회주의”의 정식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자율”과 “자주관리”의 기반위에 “한 마을”과 “한 공장”에서의 사회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민주적” 외양과 “대중주도권의 존중”을 갖는 것 같지만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동일한 방향으로 이끈다.

4) 평의회주의의 상이한 요소들의 진화가 있다. GIK가 채택한 “볼셰비즘에 대한 테제”(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 본질)는 가장 최악의 혼란의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GIK 세계PT혁명의 본질을 공개적으로 의문시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경제적 성격”에 대한 주장과 당의 부정은 암묵적으로 늪으로 빠지게 했다. 그 후 평의회주의 집단(특히 1930년대)은 공개적으로 “지방적 및 민족적” 사회주의 건설의 테제를 이론화했다.

 

4. 경제혁명인가 정치혁명인가

 

1) 평의회주의는 PT혁명의 첫날부터의 추진력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20세기 초 세계시장의 형성을 완성했다. PT기지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PT권력은 본질적으로 전체적이고, 승리한 지역의 본질적 역할을 세계혁명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평의회주의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에 매달리는 이유는 PT혁명이 “정치수준에서 가로막혀” 노동계급의 조건에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착취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정복을 진행시킬 수 있는 경제권력을 옛 사회 내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궤적, 즉 세계 수준에서의 정치권력 획득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3) 평의회주의는 PT혁명의 경제적 성격을 방어하는데 PT의 착취기반이 경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폐절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적 경제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적 진화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독립적인 두 가지 요인,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지형(경제적 요인), 다른 한편으로 계급투쟁(정치적 요인)이 개입한다. 경제적 요인의 비중이 압도하는 부르주아혁명과 달리 PT혁명은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의식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PT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투쟁의 마지막 결과이다. 주체적 요인(PT 대중의 의식, 통일, 단결, 자신감)의 기본적인 원칙 차원은 역사상 최초의 대중적이고 의식적 혁명인 PT혁명의 정치적 성격의 우선성이다.

 

5. 실천에서의 평의회주의의 “경제적 혁명”

 

1) 평의회주의의 러시아 혁명의 대차대조표는 이렇다 ; 정치의 물신화와 “머나먼 혁명”의 희망 대신에 공장의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조치,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채택하여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평의회공산주의를 유혹하고 평의회주의가 오늘날 속물화시킨 주장이다. 평의회주의가 이러한 교훈을 끌어낼 때 그것은 맑스주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무정부주의와 경제주의와 연결되게 만든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은 프루동에 이어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으로 이어졌으며 1917~23년 오스트로-맑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으로, 그리고 오토 룰레와 AUUD의 이론가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1936년 스페인에서의 무정부주의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학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2) 공장통제는 생산이 비용과 이윤율에 종속되어있을 때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에 의해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가? 임노동은 노동시간 인환권으로 철폐되지 않고 상품폐지는 “공장사이의 회계”로 대체되지 않는다.

3) 자본주의 해체의 시기에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통제”, “자주관리”의 이름으로 평의회주의가 주장했던 미시적 개혁을 하고 있다. 따라서 위험은 계급이 역사적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


 

「러시아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International Review, 1st Quarter, 2004, 19~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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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비판

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비판

- 카요 브렌델  1999



1.


“중앙 지도력이 올바른 방식으로 생산되어진 모든 것들을 분배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러한 사실이 유지된다할지라도, 생산자는 생산의 기계류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계류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좌절시키는데 사용될 것이다. 불가피한 결론은 현존하는 지도력을 반대하는 그러한 집단들이 힘으로 억눌려지는 것이 될 것이다. 중앙 경제 권력은 동시에 정치적 권력 또한 장악할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 정치적 문제나 경제적 문제에 대한 어떤 반대의 생각이 어떠한 가능한 수단으로 억압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맑스가 규정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연합 대신에, 이전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교정시설(노역장)일 것이다.”


이러한 인용은 70년 전이 지난 오래된 텍스트를 자유롭게 옮겨다 놓은 것으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의 생산관계가 맑스와 엥엘스가 이해한 공산주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그렇게 인용된 팜플렛은 30년대의 테러를 앞에 두고 출판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예언이었다.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비판을 불러온 정치적 사건은 없었다. 이러한 비판은 경제적인 분석에서 제기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발생한 기반은 국가자본주의적 착취에 속하는 경제적 체계의 정치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단지 스탈린주의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언급한 집단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그룹들에 속한 저자들의 텍스트이며, 팜플렛의 의미는 옳았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민주주의 뿐 만 아니라 볼세비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 노동자계급의 일상의 경험들을 세밀하게 분석한 그룹이 바로 이 집단이었다. 그래서 그 집단은 계급투쟁에 대한 새로운 사고로 나아간다. 그 경향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세비즘을 ‘오래된 노동자운동’으로 규정하고, 이와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운동’을 주장한다.


가장 초기에 이러한 경향의 대표자들은 독일과 네덜란드 맑스주의자였는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 좌파에 속했다. 그들은 오래 지속되었던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더욱더 비판적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가장 잘 알려진 두 명의 네덜란드인은 안톤 판네쿡(1872-1960)과  헤르만 고터(1864-1927)이며, 두 명의 독일인은 칼 스로더Karl Schroder(1884-1950)과 오토 륄레Otto Ruhle(1874-1943)였다. 최근에는 매우 젊은 폴 매틱Paul Mattick(1904-1980)이 중요한 이론가의 일원이 되었다.


판네쿡의 생각은 철학에 대한 맑스주의적 반성의 세기의 전환기 이후에 잠깐 주의를 끌었다. 1906년부터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그는 독일에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독일사회민주당 당연수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가 독일로부터 추방의 위기에 몰렸다. 그는 브레멘에서 다양한 좌파문건은 썼다. 판네쿡이 브레멘에 있는 동안, 항만 노동자의 아주 중요한 비공인파업(wildcat strike)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계급투쟁에 대한 사상과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볼세비키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을 아주 이른 시기에 거부하게 된다.


오토 륄레는 독일노동운동에서 어떤 경향으로 자신을 정립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이해를 망각해 본적이 없다. 판네쿡처럼 그도 1920년대 볼세비즘을 거부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이 부르주아혁명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완전히 다른 조직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정립한 최초의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은 당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궤변을 그는 거부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당의 과업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과업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더욱 더 세밀하게 되어가고, 그 경향의 성격들은 평의회 공산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20세기 초반의 독일과 러시아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평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방어하고, 당의 권력을 거부한다. 그것은 볼세비키와 볼세비즘으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였고,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것의 기원에서 그 의견들로부터 아주 멀리 나갈 만큼 이후에도 발전되었다.


2.


시작할 때는, 평의회공산주의는 레닌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륄레는 제 3인터네셔널의 당들을 공산주의자 중의 하나로 간주하지 않았다. 몇 년 이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더욱 더 분명히 볼세비즘과 구별하게 되었다. 이른바 10월 혁명은 짜리즘을 붕괴시켰고, 봉건관계를 끝장내고, 자본주의적인 혁명 중에 하나의 방식임이 분명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는 더 나아갔다. 그들은 러시아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노동력이 상품인 경제로 일컬어질 수 있으며, 잉여가치 생산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을 원하는 경제로 얘기될 수 있었다. 생산수단의 전취자로서 잉여가치가 사적인 자본가에게 나오느냐 국가에게서 나오느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맑스가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와 상관없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의 생산이  계급적 사적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동일한 법칙이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맑스가 말했듯이, 착취는 임노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종식될 수 있는 것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를 언급하면서, 공산주의가 더 이상 아닌 것으로 설명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사이의 구별은 더욱 더 분명해 졌고, 더 완전해 졌다.


3.    


이제까지 얘기한 것을 평의회 공산주의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독특한 비판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볼세비즘 일반에 대한 비판이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결실을 제거한 일종의 반혁명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탈린주의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문을 열게 한 10월 혁명의 결실이었다. 스탈린은 볼세비즘과 볼세비키 혁명의 계승자이다. 이러한 이론의 전개는 사회발전의 경우처럼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생각과 자신의 실천을 바꾸어 나갔다. 최초로 독일과 폴란드에서 평의회 공산주의자 당이 설립되었다. 이전에 당들은 노동계급의 과업이 아니라고 언급했던 륄레와 같은 의견과 반대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륄레는 이러한 당들로서 조직을 완전히 새로운 성격으로 보았다. 더 이상 당이 아닌 당으로 말이다.


그러나 1924년 륄레는 다른 말을 연설한다. “하나의 당이 프롤레타리아적 단어 상의 의미로 볼 때,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것의 혁명적 성격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단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변할 때 말이다.” 그는 완전히 올바랐으며, 그러한 이유로 이른바 불합리성은 10 년간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거기에는 약간의 예외가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이후로 곧 그 표현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동시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성장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다름아니다는 것을 배웠으며, 러시아 경제가 국가자본주의에 다름아니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새로운 연구를 충분히 성숙시킬 만큼 과업들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 외의 것들은 이전에 분명히 분석되지 못했지만, 이제는 더 명확히 올바르게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이 판네쿡에 의해 1938년에 완성되었다. 그는 레닌의 철학에 대한 분석의 팜플렛을 출판하였으며, 볼세비즘에 대한 더 심오한 분석을 생산했다. 판네쿡은 레닌의 맑스주의가 하나의 신화에 다름 아니며, 실질적인 맑스주의와 대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러시아에서 짜르주의에 반대한 투쟁은, 오래전 유럽에서 봉건제에 반대한 투쟁과 닮아 있었다. 러시아의 교회와 종교는 현존권력을 도왔다. 그런 이유로 종교에 반대한 투쟁은 사회적 필연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역사유물론을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유물론과 거의 구분되지 않게 사고했다. 유물론이란 교회와 종교에 반대한 영혼의 무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혁명 전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와 혁명적 프랑스의 사회적 관계의 유사성도 사고할 수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그의 당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자코벵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것들은 러시아 부르주아혁명에서 그들의 당은 프랑스의 자코벵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7년 10월에서 5달이 지난 1918년 3월 볼세비즘은 이미 최소화된 권력이었던 소비에트를 야만적으로 공격하는데, 그것은 -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 10월 혁명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소비에트는 국가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정치적 상부구조로는 적합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평의회 공산주의가 말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는 그러한 시스템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 독재는 임노동의 폐절과 노동착취의 절멸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생산자의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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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좌파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공산주의좌파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에 실린 글




1. 1920년대 중반 국제적인 혁명의 물결이 패배한 이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맑스주의라는 용어보다 더 왜곡되고 남용된 예도 없을 것이다. 이전의 동구권의 스탈린주의적 체제들 또는 현재의 중국, 쿠바 및 북한과 같은 나라들이 공산주의나 맑스주의의 표현들이라는 생각은,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지배계급의 모든 정파들에 의해 영구적으로 보존된, 20세기의 진정 가장 커다란 허위이다. 1935년에서 45년까지의 제국주의 세계대전동안, "반파시즘" 및 "민주주의의 수호"와 함께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라는 신화가 인류역사상 가장 커다란 살육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러시아 안팎에서 이용되었다.

그 허위는, 미국과 러시아의 주도권 아래 두 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들 사이의 경쟁들이 지배적이었던 1945 -89년 사이의 기간 동안 훨씬 더 강력하게 이용되었다: 동구권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서구권에서는 제국주의적 충돌에 대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차폐물이자("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한 민주주의의 수호")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음해하는 수단으로서: 러시아 강제노동수용소를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는 것 - 만약 저것이 사회주의라면, 그 모든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 주제는, 동구 블록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그리고 심지어는 노동자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을 때, 더욱더 귀청을 울리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의 선전에 부가적인 역할을 한것은 자본주의의 "극" 좌파,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들은 스탈린주의 체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노동자 계급적인 토대를 인정했다.


2. 이러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왜곡들은 또한 20세기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연속성과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맑스주의의 잘못된 옹호자들 - 스탈린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학자적인 "맑스학주의자들", 근대화자들 및 철학자들 -이 집중조명을 점유한 반면에 그 진정한 옹호자들은, 더 직접적으로 억압되고 침묵되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무의미한 파벌들로, 차츰 더, 잃어버린 세계로부터의 화석들로 격화된 채 주변화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세기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연속성을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Communist Manifesto)속에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선언에서 부터, 맑스주의는 고립된 천재적 "사상가들"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실제적인 운동의 이론적인 표현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래서, 그것은 피착취계급의 직접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관계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서 피착취계급의 운동에 대한 그것의 충실성을 증명하는 그러한 투쟁이론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옹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같은 근본적이고 변경할 수 없는 원칙들에 대해 충실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함과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경험들과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결합된 맑스주의 이론의 지속적인 풍부화를 또한 포함한다. 게다가, 집단적인 노동과 투쟁을 체화하는 계급의 산물로서 맑스주의 자체는 단지 조직화된 집합체들을 통해서 - 혁명적 부분들과 정당들을 통해서 -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 선언은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 조직 즉, 공산주의 연맹(Communist League)의 강령으로서 나타났다.


3. 자본주의가 여전히 팽창하고 상승하는 체계였던 19세기에, 부르주아는, 검은 것이 마치 흰 것인 양, 자본주의가 진정 사회주의인 양 꾸밈으로써 그 자신의 지배의 착취적 본성을 숨길 필요가 덜했다. 이러한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도착들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에 있어서 전형적이고 "맑스주의" 자체를 신비화의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부르주아의 노력들에 의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가차 없는 압력은, 노동자들의 운동 속으로 밀수입되는 사회주의의 잘못된 판본들의 형태를 빈번하게 취했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주의 선언은 스스로를 "봉건적",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로부터 구별해야만 했고, 제 1 인터내셔널 내부의 맑스주의 부분들은 한편으로는 바쿠닌주의에 대항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쌀레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항한 두 방면의 전투를 벌어야만 했다.


4. 제 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맑스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창설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자운동 내부의 상이한 경향들의 일종의 연합이었던 제 1 인터내셔널로부터의 중요한 한 걸음 전진을 나타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에너지에 있어서, 개혁을 위한 투쟁이 핵심이었던 거대한 자본주의 성장기에 그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자본주의 체계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압력들에 특히 취약했다. 이러한 압력들은,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들은 "수정되어"야 하고 어떤 혁명적인 단절 없이도 사회주의를 향해 평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한 개혁주의적 흐름들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당들 내부에서 표현되었다.

이 시기동안 - 특히 1890년대 말엽과 1900년대 초엽 - 맑스주의의 연속성은, 기본적인 맑스주의의 원칙들의 옹호에 있어서 가장 비타협적이었으며, 자본주의가 그 상승기의 한계에 도달하면서 나타나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최초로 인지했던 "좌파" 흐름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을 구현했던 아래 이름들은 잘 알려져 있다 - 러시아의 레닌(Lenin), 독일의 룩셈부르크(Luxemburg), 네덜란드의 판네쿡(Panneko) ,이태리의 보르디가(Bordiga) - 그러나 이러한 투쟁가들 중 어느 누구도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기회주의의 괴저(壞疽)가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점점 더 그들은 그들 각각의 정당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들 - 러시아의 볼세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등 - 로서 활동해야만 했다.


5.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의 비젼을 확인했고, 노동자운동 내부에서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그 기원을 가진 조직들이 처음으로 바리케이트의 서로 다른 편에 서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그 대부분이 예전의 "개혁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졌던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전 시기의 맑스의 저술들을 환기시키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돌이킬 수 없이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의 전쟁을 위한 신병소집 하사관들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들이 되었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충실성은 위선적인 선언들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매우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대학살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든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들에서 발생했던 파업들과 봉기들을 주도한 것도 모두 좌익 흐름들이었다. 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이들 동일한 흐름들이었다.


6. 1919년은 전후 혁명물결의 최고정점이었고 그 창설총회에서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입장들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진보된 입장들을 표현했다: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전적인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이러한 강령적인 명확성은 혁명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 그것은 낡은 정당들 내부의 좌익 정파들의 정치적 이론적 공헌들에 의해 그 이전에 준비되어 있던 것 이었다: 그래서, 권력으로 가는 길에 대한 카우츠키의 합법주의적이고 점진주의적 비젼에 대항해 룩셈부르크와 판네쿡은 혁명의 토양으로서의 대중파업개념을 구상해 냈다; 카우츠키의 의회주의적 백치주의(Parliamentary cretinism)에 대항하여 판네쿡, 부하린 및 레닌은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코뮨국가"의 창설의 필요성에 대한 맑스의 주장을 부활시키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들은 혁명의 시간이 시작되면 실천적인 정책들의 문제로 될 수 있었다.


7. 혁명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러시아의 소비에트권력 내부에서 변질과정을 야기했다. 볼세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 및 참여기관들 -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및 적군- 에 대해 반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다. 인터내셔널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활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 -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에서의 활동에 대한 증가하는 강조, "동양의 인민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의 호소 및 무엇보다도,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자본주의적 본성에 관한 힘들게 획득된 명확성을 모두 내던져 버린 통일전선 정책 -을 초래했다.

그러나 제 2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의 성장이, 좌파 흐름들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의 반작용을 자극했듯이,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좌파 흐름들이 제 3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 풍조에 대항해 저항했다 - 판네쿡과 보르디가와 같은 많은 대변자들은 이미 그 이전의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맑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스스로를 증명했었다. 공산주의 좌파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에서 그 표현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들은 맑스주의의 전통이 가장 강했던 바로 그 나라들, 즉 독일, 이태리 및 러시아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8.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실제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거대한 기세와 결합된 맑스주의 전통의 깊이는 이미, 혁명물결의 절정 당시, 특히 의회 및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서 가장 진보된 정치적 입장들의 일부를 도출 시켰었다. 그러나 그러한 좌파 공산주의는 독일공산당(KPD)과 인터네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의 최초의 징후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출현했고, KPD 내부의 좌익 분파가 비원칙적인 책략에 의해 축출되어 1920년 형성된 KAPD에 의해 선도되었다. 비록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 지도부에 의해 "소아적"이고 "무정부 노동조합 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 지라도, 낡은 의회 및 노동조합 전술들에 대한 KAPD의 거부는,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맑스주의적 분석에 기반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러한 전술들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들,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볼세비즘으로 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강령적으로 명료한 핵으로서의 당 개념을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의 낡은 "대중당" 개념에 대한 KAPD의 거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KAPD는,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들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들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쿡과 호르터(Gorter)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들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이것은, 20세기 초 독일의 공산주의좌파가 주요한 약점들로부터 고통 받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쇠퇴를 장기간의 몰락과정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최종적인 "죽음의 위기"의 형태로 바라보는 그것의 기조 때문에, 그것은 혁명물결의 퇴조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자발주의(voluntarism)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의 영구적인 단절을 결과 시킨 조직문제에 대한 약점들 및 1922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립하려던 헛된 노력도 이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갑옷에 난 이러한 틈새들로 인해, 그것은 1920년대 동안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데 방해를 받았고 결과적으로는 파편화라는 재앙적인 과정을 겪어야만 했으며, 이는 별개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평의회주의(councilism)"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부분 이론화되었다.


9. 한편, 이태리에서 공산주의좌파 - 처음에 이태리공산당 내부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유했던-는 조직문제에 있어서 특히 명료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변질되는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에 대항해 용감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운동의 난파를 무사히 살아남아 반혁명의 어두운 시기동안 맑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하나의 공산주의자 정파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반, 부르주아 의회로부터의 거부를 주장하고, "대중적인 영향력"의 환상을 주기 위한 중심주의적 거대 정당들과 공산주의 전위 사이의 융합에 대항하며, 통일전선 및 "노동자정부"의 슬로건에 대항한 그것의 주장들 또한 맑스주의적 방법론의 심오한 파악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현상 분석 및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모든 반파시즘 전선에 대한 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보르디가의 이름은 이태리 공산주의좌파의 역사에서 이 시기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 투쟁가의 공헌의 거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태리 좌파는, 볼세비즘이 레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로 환원 될 수는 없다. 이태리 좌파와 볼세비즘 양자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운동의 유기적 산물들이다.


10. 러시아에서 혁명의 고립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노동자계급과 더욱 더 관료적인 국가기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를 초래했다 - 이러한 괴리의 가장 비극적인 표현은, 크론슈타트 노동자 병사 반란에 대한, 점점 더 국가와 뒤엉켜가던,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볼세비키당에 의한 진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기 때문에, 또한 볼세비즘은 그 자체의 변질에 대항한 수많은 내부적인 반응을 만들어냈다. 레닌 자신- 1917년에 그 당의 좌익의 가장 분명한 대변인이었던- 은 당이 관료주의에 잠식되어 가는 것에 대해, 특히 그의 생애의 말기에, 매우 적절히 비판했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시기에, 트로츠키는 당 내부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규범들을 회복하려 시도했던 좌파의 주요한 대표자가 되었는데, 이 좌파는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의 가장 악랄한 표현들에 대항한, 특히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항한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대부분에 있어서 볼세비즘이 국가와의 융합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로서의 그 자신의 역할을 침식했기 때문에, 당 내부의 가장 중요한 좌파 흐름들은 국가기구에 대하여보다는 계급에 대하여 친밀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던 덜 유명한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었다.

이미 1919년에, 오신스키(Ossinski), 스미르노프(Smirnov) 및 사프라노프(Sapranov)에 의해 주도된 민주중심주의(Democratic Centralism) 그룹은 소비에트의 "위축"에 대해 그리고 파리콤뮨의 원칙으로부터의 점증하는 이탈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유사한 비판들이 1921년 콜론타이(Kollontai)와 슬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의 주도하의,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그룹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이것은 "데시스트(Decist)"그룹에 비해서 덜 엄밀하고 덜 영속적인 임이 판명되었다. 데시스트 그룹은 20년대 동안 줄곧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이태리 좌파의 그것과 유사한 접근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1923년 미아스니코프(Miasnikov)에 의해 주도된, 노동자 그룹(Workers' Group)은 그것의 선언을 발행했고 그 해에 있었던 노동자들의 파업들에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 입장들과 분석들은 KAPD의 그것과 가까웠다.

이 모든 그룹들은 볼세비키당 으로 부터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원래 원칙들로의 회귀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당 내부에서 투쟁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반혁명 세력들이 당 내부에서 입지를 획득해감에 따라서, 다양한 반대파들이 이 반혁명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것의 조직화된 표현들에 대한 어떤 감상적인 충성과도 단절하는 능력이 핵심적인 논점이 되어갔다. 이것은 트로츠키와 러시아공산좌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입증하게 된다: 트로츠키가 소련의 옹호 관념에 심지어는 스탈린주의 당들의 노동자 계급적 본질에 집착한 채 평생 동안 남아있었던 반면에, 좌파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의 승리 - 많은 트로츠키 추종자들을 혼란시켰던 그것의 "좌편으로의" 전향을 포함해서 -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적(敵)의 승리를 의미하며 새로운 혁명의 필요성을 암시함을 인식했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적 반대파 중에서 많은 우수한 자들은 -소위 "비타협적인 자들"- 자신들이 20년대 후반 및 30년대 초반에 공산좌파의 진영들로 넘어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테러는 30년대의 말엽 즈음에 이들 그룹들을 거의 확실하게 제거해버렸다.


11. 1930년대는,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들로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들이, 혁명운동이 그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특히 그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되는 고립에 직면에 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들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트로츠키가 이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좌익반대파는 "대중의 정복"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점점 더 기회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 사회민주주의적 정당들 속으로의 "프렌치 턴(French turn)" 회귀, 반파시즘으로의 투항 등등. 이러한 노정의 최종 결과는, 트로츠키 자신에게 있어서 보다는 트로츠키주의에 있어서, 1940년대 동안 부르주아 전쟁기계로의 편입이었다. 그이래 트로츠키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및 스탈린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정치도구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의 모든 가장들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연속성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


12. 이러한 궤도와는 반대로, 평론지 빌랑(Bilan) 주변의 이태리좌파 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다: 첫째, 전쟁으로의 행진에 직면해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혁명물결의 특히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 대조표(balance sheet)"를 초안할 것, 그리고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당시 혁명가들에게 특히 혹독한 시험이었고, 많은 혁명가들이 반파시즘의 나팔소리에 사로잡혀서, 그 전쟁이 양 진영 모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이며,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총연습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빌랑(Bilan)은 꿋꿋이 나서서, 제 1차 대전시 레닌이 양쪽 진영 모두를 비판했듯이, 파시스트들과 부르주아의 공화파들 양자 모두에 대항한 계급투쟁을 호소했다.

동시에, 이 흐름 - 이후에 벨기에, 프랑스 및 멕시코에서 부분들을 포함하는-에 의한 이론적 공헌들은 매우 거대하며 진정 대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관한 그것의 분석 -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에서, 미래의 과도기 문제들에 대한 그것의 연구들에서, 경제위기와 자본주의쇠퇴의 기초들에 대한 그들의 작업들에서, "민족해방"투쟁들을 위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옹호입장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서, 당과 분파의 이론의 정교화에서,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치 흐름들과의 부단한 하지만 형제애적인 논쟁들에서, 이러한 그리고 다른 많은 분야들에서 이태리 좌파분파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위한 강령적 기초들을 세우는 그 임무를 의심할 여지없이 수행해냈다.


13. 독일에서 공산주의좌파 그룹들의 파편화는,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 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 지라도, 나치 테러에 의해 완결 되었다. 1930년대 동안, 독일좌파의 혁명적 입장들의 옹호는, 비록 폴 매틱(Paul Mattick)에 의해 주도된 그룹에 의해서도 미국에서도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특히 국제공산주의자그룹(the Group of International Communists)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빌랑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좌파는 국제적인 학살로의 길을 준비하는 모든 지역적 제국주의 전쟁들에 직면해서,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유혹에 저항하여 국제주의를 견지했다.

네덜란드 좌파는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있어서 노동자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들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에 의해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한 - 그리고 그러한 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그것이 볼세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이점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들이었다. 비록 네덜란드에서의 좌파공산주의가 나치점령 하에서도 계속 되었고 전후의 중요한 한 조직- 당을 찬성했던 KAPD의 입장들로의 복귀했던 스파르타쿠스동맹 (Spartacusbund)-이 탄생하게 했을 지라도, 네덜란드좌파의, 조직문제에 있어 무정부주의에 대한  용인 때문에, 이후에 그것이 어떤 종류의 조직화된 연속성으로 남아있는 것을 점점 어렵게 되었다. 현재 이 흐름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14. 한편, 이태리좌파는 비록 반혁명에게 그 값을 치르긴 했지만, 일종의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했다. 전쟁 직전, 이태리좌파는 세계대전의 절박한 위험을 부정하는 "전쟁경제이론"에 의해 혼란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의 활동은 제국주의적 충돌의 시기에, 특히 한 프랑스부분의 출현에 의해 계속되었다. 전쟁의 말기에 즈음하여, 이태리에서의 주요한 프롤레타리아 투쟁들의 발생은 그 프랑스부분의 위상에 있어서 한 층 더한 혼란을 유발했고, 그 다수는 이태리로 되돌아가서, 20년대 후반 이래 정치적으로 비활동적이었던 보르디가와 함께 이태리국제공산당(the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 in Italy) 을 창립했다. 이 당은 비록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불명확한 강령적 기초 위에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한 잘못된 분석을 가지고 창립되긴 했지만, 혁명전투의 일종의 준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방향은, 그 시기가 승승장구하는 반혁명의 시기로 남아있고 그래서 자신의 임무들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음을 더 재빠르게 인식한 프랑스부분의 대다수에 의해 반대되었다. 프랑스공산좌파 (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는 빌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들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태만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및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전이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들을 이뤄냈다. 이태리좌파에 매우 전형적이었던 확고한 맑스주의적 방법을 유지하는 한편, 그것은 독일-네덜란드좌파의 가장 훌륭한 공헌들의 일부 또한 그것의 전체 강령적 병기고에 통합할 수 있었다.


15. 그런데, 1952년경, 프랑스공산주의 좌파(GCF)는 제 3차 대전의 촉박한 위험에 대한 잘못된 확신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같은 해에 이태리국제공산당(ICP)은 "보르디가주의" 경향과, 파시즘시기 도안 이태리에서 정치적으로 활동적으로 남아있었던 투쟁가인 오나라토 데이먼(onarato Damen)에 의해 주도된 한 경향 사이의 불화에 의해 분열되었다. "보르디가주의" 경향은 그 시기의 반동적인 본질의 이해에 있어서 더 명료했지만, 맑스주의를 확고히 옹호하려는 그것의 노력 속에서 독단주의로 퇴보하는 경향이 있었다. "맑스주의의 불변성"에 관한 그 경향의 (새로운!) 이론은 그것이 30년대에 그 부분에 의해 이루어진 진전들을 점점 더 외면하고 많은 논점들에 있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통"으로 회귀하도록 만들었다. 현재의 다양한 보르디가주의 그룹들(그것들 중 적어도 3개의 그룹은 스스로를 "국제공산당(International Communist Party)"로 칭한다)은 이 경향의 직접적인 후예들이다.

데이먼(Damen) 경향은 당의 역할, 노동조합, 민족해방 및 국가자본주의 등과 같은 기본적 정치적 문제들에 있어서 훨씬 더 명료했지만, ICP의 창립 시에 의해 행해진 실수들의 근원들에 결코 접근하지 않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러한 그룹들은 정치적으로 정체되었고, 특히 보르디가주의 경향은 파벌주의의 장막 뒤에서 자기를 "방어"했다. 부르조아는, 현재의 혁명조직들을 노동자운동의 위대한 전통들로 연결하는 생명선을 절단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모든 조직화된 표현들을 거의 모두 제거하는 정도까지 나아갔다.


16. 그러나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들의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공산주의 입장들의 명료성을 추구하는 정치적 인자들의 새로운 새대를 낳았고, 기존의 혁명그룹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결국은, 좌파공산주의의 유산들의 쇄신을 모색하는 새로운 조직들을 출현시켰다. 처음에, 이 새로운 정치적 환경은, 볼세비즘의 "권위주의적" 이미지에 대항하여 평의회주의에 의해 깊이 고취되었지만, 그것이 성숙함에 따라서, 점점 더 그것의 반조직적인 편견들을 버리고 맑스주의적 전통 전체와의 연속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현존하는 혁명적 환경 내부의 대부분의 그룹들이, 조직문제 및 손상되지 않은 혁명전통의 보존필요성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던 이태리좌파 경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르디가주의 그룹들과 혁명당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양자 모두가 이태리 국제공산당의 상속자들인 한편,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은 대부분에 있어서 프랑스 공산주의좌파의 후예이다.


17. 60년대 말의 프롤레타리아의 부활은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전진과 후퇴의 운동들을 거치며, 노정에 많은 장해물들, 특히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장해물이었던, 공산주의 자체의 죽음에 대한 부르주아의 거대한 캠페인- 그 일부가 공산주의좌파에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포함했던-과 직면하였으며, 나치가스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정주의적 (negationist)" 흐름의 원천으로서 잘못 비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의 곤경들은 혁명적 환경 자체의 노정에 많은 곤경들을 부과했고, 그것의 성장을 지연시키고 그 단일화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좌익공산주의"운동은 진정한 맑스주의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세계 공산당의 형성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가교"로서 남아있다. 이 시기에 전세계에 걸쳐 계속 발전하는 새로운 투쟁가들이 공산주의좌파의 그룹들과 대면하여, 그들과 논쟁하고, 궁극적으로 그들과 합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새로운 투쟁가들은 혁명당의 구성에 스스로 공헌하게 될 것이고, 그것 없이는 어떤 성공적인 혁명도 불가능할 것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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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노조에 맞서는 세계의 계급투쟁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4/20 09:46
  • 수정일
    2010/04/20 09:46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국가와 노조에 맞서는 세계의 계급투쟁

 

 

 


(1) 터키

  터키에서는 총파업을 하거나 다른 노동자와 연대파업을 하는 것이 불법이다. 지난 연대파업 중 가장 최근의 것은 1991년 광부 파업에 대한 지지 파업이었다. 2010년 2월 4일, 사유화된 테켈(Tekel) 담배회사의 노동자와 연대하는 노동조합의 하루 총파업이 있었다. 테켈 노동자들은 2009년 중순부터 앙카라에서 항의해 왔다.

  노조 지도자들은 ‘파업’을 말하지 않고 ‘총행동’을 말하며, ‘일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고 전국적인 시위가 있었다.

  2009년 12월 14일, 테켈의 수천 노동자들이 터키 십여 곳의 도시로부터 앙카라로 가기 위해 그들의 집과 가족을 떠났다. 노동자들의 행진은 자본주의 질서가 강제한 끔찍한 조건에 맞서는 투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들의 투쟁은 터키 정부의 4-C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이 정책은 사유화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데 따른 조치다. 이 정책을 통하여 국가는 임금 삭감 이외에도 공공부문 노동자를 다른 부문으로 이전시킬 수 있는 등, 노동자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갖게 되었다(노동시간과 임금에 대한 자의적 결정 등).

  2009년 12월 5일, 터키 수상이 참석한 개회식에 테켈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 참여하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정부를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4-C 정책을 강변하는 수상의 연설에 분노했다. 이들이 속해 있는 노조(주류, 담배 노조)는 앙카라로 모일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심각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수도 앙카라로 모이기 위해 도로를 점거했다. 폭동진압경찰은 테켈 공장이 집중되어 있는 쿠르드 지역 도시로부터 나오는 노동자들을 막았다. 그러나 서부, 지중해, 흑해 지역의 노동자들은 통과시켜서 계급운동을 인종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도록 했다. 그러나 쿠르드 지역 밖의 노동자들은 경찰의 이러한 조치와 싸우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수도 앙카라로 모이도록 하는 데 단결력을 보였다.

  12월 15일, 테켈 노동자들은 앙카라의 ‘정의발전당’ 중앙당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가장 무자비한 공격은 12월 17일에 있었다. 경찰 진압에 흩어진 노동자들은 노조 관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조직하여 ‘터키노총’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비공인 파업-Wildcat 투쟁). 테켈 노동자와 노조 사이의 투쟁은 2010년 1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앙카라의 노동계급과 노동자 배경을 지닌 학생들은 테켈 노동자들이 머물 곳을 찾는 등,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동자 투사들은 ‘주류, 담배 노조’와 ‘터키노총’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았고, 그들의 요구를 노조에 전달할 목적으로 파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의 요구 중에는 노동자들이 ‘터키노총’ 앞에 파업 텐트를 치고, 집단적으로 새해를 축하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또한 테켈 노동자들은 똑같은 4-C 조건에 놓인 설탕공장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을 설명하기 위해 인근과 대학에 초청받았다. ‘터키노총’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테켈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투쟁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비밀투표에서 99%가 투쟁을 택했다. 그동안 노조가 제시한 행동계획을 토론했는데, 1월 15일 이후 3일간 농성, 3일간 단식 파업, 3일간 죽음의 단식이라는 세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단식 파업이 좋은 생각이라고 보았다.

  농성과 시위가 진행되고 수만의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었는데, 터키노총은 테켈 노동자들을 연단으로부터 멀리 배치하고, 연단 앞에는 금속노동자들을 배치시켰다. 테켈 노동자들은  터키노총 위원장의 연설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연단으로 밀치고 나가 연단을 점거하고, 그들의 요구를 외쳤다. 노조 지도부에서 확성기를 껐지만, 테켈 노동자들은 시위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요구를 전달했다. 노조는 노동자들끼리, 그리고 학생들과 서로 싸우도록 자극했지만 150여 명이 터키노총 앞의 관료적 봉쇄를 뚫고 건물을 점거했다.

  여러 도시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총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비공식적인 대중 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쿠르드 노동자와 터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정권의 온갖 책동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인종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항하는 단결을 보여주었다. 테켈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들을 지원한 소방대원들에게도 크게 기여했다.


(2) 그리스

  1년 전, 청년 아나키스트를 경찰이 살해하자 그리스 시가에서 3주간의 대중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거리와 학교에서의 투쟁은 작업장에서의 투쟁과 연결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오직 초등학교 교사들의 하루 파업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 노동자들의 행동은 저항운동을 넘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노동부 장관은 유로권에서 그리스를 축출하겠다고 위협하며 국가 부채위기를 해결하려는 조치가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는 시위, 집회, 파업의 자유를 보호하는 헌법 조항을 유예할 수 있는 국가비상통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을 통합시키려 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2012년까지 예산을 12.7%에서 2.8%로 삭감하려는(노동계급에 대한 공격) ‘개혁’이 발표되기 전에도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있었다. 부두 노동자, 통신 노동자, 쓰레기 수거자, 의사, 간호사,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사, 택시 기사, 철강 노동자,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겉으로는 다른 이유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노동자가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강제하는 국가와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것이었다. (EU가 승인한) 내핍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전, 그리스 수상은 그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0년 1월 29일 구체적 세칙이 발표되기 전, 아테네의 소방대원과 다른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성난 시위가 있었다.

  정부의 3개년 계획에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과 10% 수당 삭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5%~15%의 임금 삭감과 맞먹는다. 퇴직하는 공무원은 대체되지 않고, 퇴직연령도 연금비용을 줄이기 위해 연장하는 계획도 있다.

  그리스 노조는 투쟁을 분리시키고 있다. 2월 4일~5일 항구와 국경을 폐쇄하는 세관원과 세무원의 48시간 공식 파업이 있었는데, 농민은 폐쇄 조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파업의 ‘기대되는 반발’은 공공부문 파업 계획과 의회국의 행진을 포함하고 있었다. 2월 10일 Adedy 노조와 연금 공격에 대한 항의, 2월 11일 스탈린주의 노조의 파업, 2월 24일 2백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가장 큰 노조 GSEE의 민간부문 파업 같은 것이다.

  노동계급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분리되면, 그리스 정부를 항복시키지 못한다. 실제로 노조는 스탈린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노동계급의 분노가 커지자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쇼를 알아보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노조는 노동자들이 희생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들의 반발도 고려해야만 한다.

  노동자투쟁 발전의 미래를 볼 때, 노동자들은 노조뿐만 아니라 ‘잘못된 친구들’을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계급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지닌 ‘그리스 공산당’은 1년 전 시위자를 ‘어두운 외부 세력’의 비밀요원으로 부른 바 있다. 파시스트와 우익에 대항하고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라고 노동자를 모으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다. 노조와 그 동맹 세력은 그리스 주변 국가인 터키에서의 파업이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과제를 그리스 노동자만의 문제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리스 상황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공공건물을 폭파하는 다양한 무장그룹의 확산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국가의 억압만 부추길 뿐이지 주류 투쟁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불꽃 세포의 음모’, ‘테러주의자의 게릴라 그룹’, ‘허무주의 분파’ 같은 이름의 그룹들은 노동계급에게 무엇도 줄 수 없다. 노동자들은 집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급진주의자가 설치한 폭탄을 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 속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조직을 발전시키면서 계급의 단결, 의식, 그리고 자신감을 쌓아간다.


(3) 알제리

  1월 동안 알제리에서는 수많은 파업과 거리시위가 있었다. 동알제리 아바나의 실업 노동자, 모든 지역의 빈민 시위, 도시 외곽 산업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은 관제보도를 통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언제나 노동운동의 요구인 임금, 연금, 강제 휴직에 대한 것들이다. 2009년 말 정부는 노동자들이 조기 퇴직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서 만 명 이상이 파업했고, 이는 불꽃처럼 번졌다. 노동자들은 도심에서 폭동진압경찰과 충돌했으나 노조는 이를 방조했다. 새로운 노사정 합의가 법제화된 이후 알제리노총 위원장은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4) 스페인

  비고에서는 6만의 실업자가 생겼는데, 2009년에 엔지니어링 부문에서만 8천의 실업 노동자가 생겼다. 발사에서는 약 7백만 명의 휴직 노동자가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의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투쟁했는데,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실업 노동자가 외국 노동자의 고용에 반대한다”며 악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로 노동계급을 분리시키는 책동에 맞서 싸우며, 실업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 사이의 연대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2010년 3월 2일).


(5) 인도

  2009년 10월 18일, 리코자동차 노동자들이 10월 3일부터 시작한 파업을 폭력으로 중단시키려는 파업 파괴자들에 맞서 투쟁했다. 파업 파괴자들과의 충돌로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를 계기로 구르가온과 마네사 지역 공업벨트의 3만 노동자가 분노하여 투쟁이 확대되었고, 10월 20일에는 두 도시를 폐쇄하면서 10만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했다. 노조는 이 투쟁을 노조권리의 방어 투쟁으로 왜곡하려 했다.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번역  left communist group   (http://cafe.daum.net/leftcommu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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