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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영원한 사회주의자’ 오세철 동지

[심층인터뷰] ‘영원한 사회주의자’ 오세철 동지
 
 
<1회> “자본주의는 노동-자본 ‘적대’ 조정하지 않아... 국가는 자본과 동맹하는 기구에 불과”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이 수업을 듣는 대부분은 졸업해도 경영자가 되기 힘들 겁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가 되겠죠. 그래도 어떤 회사가 어떻게 경영되는지는 알아야겠죠. 억울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죠. 임노동자의 입장에서 수업을 진행할 것입니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79)가 재직시절 새학기 첫수업 신입생들에게 늘 던진 말이었다. 학생들은 경영학을 공부하며 마르크스를 읽었다. ‘경영자 이건희’도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한다. 임노동자들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해서였다는 블랙코미디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대기업 회장들과 임원들이 마르크스를 읽으면 읽을수록 노동탄압은 더욱 흉포해져갔다.
 
백골단이 기승을 부리던 1987년 어느 날은 오 교수 인생의 큰 전환기였다. 6월 항쟁 당시 이한열이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다. ‘강단 맑스주의자’였던 오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듣던 제자가 숨지자 이때부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후 이명박 정부 때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었고, 용산참사-쌍용차 사태 등 각종 시국사건 변론에 앞섰다,
 
오 교수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라는 것. 지구상에 사회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적도 없다고 덧붙인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한도, 중국도, 러시아도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 국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북한 체제 역시 붕괴될 대상이라고 늘 주장해온 그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를 비롯 북한, 중국, 쿠바 등을 사회주의 국가로 오해했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 국가가 보여주었다.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내에서 완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들도 비판의 대상이다. 실제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전쟁의 위험 역시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지속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는 것.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 교수는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자본계급과의 동맹하는 기구”라며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자본 계급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자본계급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노동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얼마전엔 오 교수와 늘 함께 거리에서 싸워온 원로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선생이 영면했다. 백 선생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오 교수는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노선은 달랐지만 백 선생과도 인연이 깊었던 오 교수는 여전히 착잡한 심정. 원로로서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지 않느냐 묻자 “내가 왜 원로야, 원로라는 표현은 빼달라”며 멋쩍게 웃는다. 원로라는 표현을 ‘극 혐오’ 하는 오 교수. 영원한 ‘청년 맑스주의자’ 오세철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오 교수의 요청대로 외국어 발음은 되도록 그대로 싣기로 했다. 이를테면 코뮤니즘의 경우 우리말로 ‘공산주의’라는 용어로 잘못 번역 되고 있고, 이는 특히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 남미 등의 민중주의와 구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요즘 근황이 어떤가.
 
▲ 여전히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북한, 중국, 러시아 등도 다 가짜다. 역사 이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적 없었다. 그러니 사회주의자로서 예나지금이나 입장변화가 없다.
 
 
-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분위기와 달리 과거 정권과 별반 차이 없다는 비판 등이 제기되고 있다.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국제적으로는 국제 부르주아지(자본 계급) 사이의 경쟁·갈등이 제국주의 전쟁의 길을 열어놓고, 국내적으로는 역시 자본 계급 분파들의 담합과 쟁투가 계속되고 있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은 몇 가지 표어를 내걸었다. 첫째는 ‘함께 잘살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함께 잘살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사회는 억압, 착취가 사라지고 상품, 화폐. 시장, 계급 그리고 국가가 소멸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평화’다. 남북이든 북미이든 간에 제국주의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계급전쟁이 항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평화는 위장일 뿐이다. 셋째는 ‘공정한 사회’다. 차별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과 차별 자체를 넘어서자는 말은 다르다. 이 역시 자본주의를 폐절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맑스주의의 진정한 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외 자본 계급의 현란한 수사나 ‘사이비 사회주의’에서는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으로부터 혁명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길이 인류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 정권이 바뀌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바뀌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 과거와 현실을 진단하자면.
 
▲ 정치권력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삼권 분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영역의 분리, 기능의 독립성으로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가 자본 중심의 민주주의의 골격이다. 코뮤니스트는 이러한 분리를 반대하고 평의회에 기반을 둔 대중(노동자, 병사 등)과 지역의 선출된 권력을 노동계급 민주권력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자본계급 선거와 의회를 둘러싼 자본계급 정치세력을 다루지 않는다. 여야를 불문하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그 권력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386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민주화운동세력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사독재와 싸울 세력으로 우리사회 자본계급 민주주의의 정착에 공헌한 세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세력은 앞으로 자본계급 의회에 진출할 예비세력으로 그들의 전임자들과 유사하다. 이들의 부류는 대학, 언론, 사법부, 노동 등에 몸담았다가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계급 이데올로기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사적, 개인적 인간관계로 문재인 정부에 가담했다고 본다. 이들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지만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낮은 의미에서의 자본 계급)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자본 권력에 편입되기를 갈망하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기회주의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청와대, 정부, 의회, 법원, 언론기관 등에서 보이는 이른바 엘리트(교수, 판사, 정부관료, 청와대, 언론가, 시민운동 활동가, 노동조합 관료)들이 문재인 정부를 떠받드는 소부르주아 세력의 실체이다. 앞으로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계급 세력이 보수주의 자본계급 세력과 언제, 어디서나 연대하고 연합할 수 있는 세력임을 알게 될 것이다.
 
 
 
<2회> “어느 정권이든 집권 1년이면 실체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 벌여”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오세철 교수 제공
 
- 코로나 문제를 떠나 전 세계는 경제위기를 수차례 겪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들여다봐야 하는지.

▲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커다란 제국주의의 팽창은 극적인 성장률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이 개선되면서 예기지 못한 번영과 진보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유리한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으로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 증가의 덕이었고 개량주의의 출현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형태로 수정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자본주의 몰락 이론으로 나타났다. 위기 극복과는 거리가 멀게 카르텔과 신용을 통한 자본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응이며 이는 더 크고 많은 파괴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잉여가치의 추출과 그 실현과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잉여가치 추출의 과정에서는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 그리고 잉여가치 실현의 과정에서는 시장 포화의 한계 법칙이 위기의 기본이 된다. 이 두 가지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틀이 요구된다. 지금의 위기는 잉여가치 실현의 막다른 골목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한편으로는 위기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 자본주의 쇠퇴와 위기는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쇠퇴에 대한 인식은 대공황 시절과 같은 위기의 순간과 위기를 지금의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1914년 이래 쇠퇴의 상태에 있음과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괄목할 성장률이 사실은 자체 재생산의 조건 창출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 체제의 죽음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 지구상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태동된 적 없다는 입장을 늘 고수해왔다. 수정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의 본질이 흐려졌다는 지적인데.

▲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크든 작든 제국주의가 아닌 국가는 없다. 이 때문에 전쟁의 위험 역시 늘 도사리고 있다.


-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무엇이 문제인가.

▲ 핵 폐기를 대가로 한 식량원조와 물질적 보상을 통해 북한 경제를 산업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중국자본주의에의 의존과 미국 및 한국자본주의에서의 의존이라는 다른 선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김정은 권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다. 동시에 낮은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로 읽어야 한다. 북한 자본주의를 파멸시키는 역사적 책무는 북한 주민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이는 남북한을 비롯 동아시아의 노동계급의 단결과 세계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혁명투쟁에 달려있다.


- 한국사회는 여전히 노동 문제, 평등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자면.

▲ 문재인 정부의 노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전망이다.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노동계급과 동맹하는 기구이다.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자본 계급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자본계급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노동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구체적 모습은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한 법제화에서 드러난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이 착취체제와 이를 규정하는 법을 반대하고 없애려는 투쟁을 몇 백 년 해오고 있다. 메이데이가 노동시간의 단축 투쟁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원칙을 계층사이의 이해로 조정하고 노동시간을 변형근로제로 후퇴시키는 문재인 정부의 모습을 보며 노동계급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했는가? 반노동으로 나아가는 정부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집권한 지 1년이 되자 그 실체가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을 벌였다. 어느 정권도 예외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어디 있는가? 노동운동은 여전히 운동인가?


- 남북관계 문제는 사회주의자로서 난감한 과제일 수 있다. 통일 문제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촛불이 매개 되어 10년의 이른바 ‘적폐’가 정권교체의 문을 열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국가와 민족도 자유로울 수가 없고 남과 북도 예외일 수 없다. 남, 북, 미 그리고 세계의 공통화두는 평화와 번영이다. 평화는 계급전쟁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며 번영은 이윤과 계급불평등을 사라지게 하는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일 뿐이다. 갈라진 남, 북이 표면적이고 가시적 적대를 넘어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부분 집합으로 나아가는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를 상상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리고 우여곡절의 과정을 겪어도 이 과정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통합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개혁, 개방을 통해 점진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로 공고해지고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연합, 연대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주의 건설을 말하는 형용모순이 존재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삼척동자도 알게 될 것이다. 이 효과는 남쪽의 우리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아직도 보수주의 자본가들이 자유주의-민족주의 자본계급(특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세력을 ‘좌파’, ‘빨갱이’, ‘친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러한 대립이 허위이며 지금이 그런 대립을 주장할 마지막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두 가지 형태의 자본 세력은 자본주의의 양면이며 보완적 관계임을 깨닫게 될 날이 멀지 않았고 이는 세계 노동자 투쟁과 혁명적 실천이 보여줄 것이다. 물론 이념적 재편 과정에서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존재했던 ‘진보’,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등의 개념이 정리되면서 자본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코뮤니스트 이념과 실천이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3회> “민중 심리와 의식 왜곡시켜 자본계급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 항상 경계해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오세철 교수 제공
 
- 백기완 선생이 얼마전 영면했다. 노선은 달랐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었다. 어떤 생각이 드나.

▲ 백 선생은 통일운동가이면서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pd(민중민주주의) 계열에선 민족주의자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비판을 일삼았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운동 진영은 서로를 그렇게 비판하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백 선생은 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했는데, 농담반 진담반 식으로 “백 선생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받아치곤 했다. 백 선생은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사회운동을 했고, 백 선생의 영면으로 이제 그 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마감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우리 노선에서는 애초 민중통일 운동보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오고 있다. 백 선생의 시대가 어떻게 마감되고 있느냐, 앞으로의 시대와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 전쟁 위기를 종식시킬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한국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심과 주변의 차이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의 긴장과 충돌은 제국주의 사이의 필연적 과정이다. 이 대결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것 역시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세계전쟁의 가능성은 100년 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자본계급에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전쟁의 화약고는 늘 수면 아래 있다. 전쟁을 막아내고 진정한 계급의 평화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내고 인류를 구원할 대안은 오직 자본주의를 대체한 코뮤니즘밖에 없다. 전 세계의 코뮤니스트들과 노동자들은 100년 만에 다시 한번 혁명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코민테른의 교훈을 상기하고, 100년의 ‘사이비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본주의의 질곡과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혁명적 무기, 세계 혁명당 건설을 함께 선언하고 그 구체적인 역사적 과업에 나서야 한다.


-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특성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 인간의 필요가 아닌 이윤을 위한 생산, 노동계급 착취를 대가로 한 비용효과의 영원한 추구, 피착취자 삶의 조건에 대한 폭력적 공격, 국가와 기업 사이의 치열한 경쟁 등이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는 바이러스’다, ‘혁명은 백신’이라는 구호가 일반인 입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몇 개월 동안 세계 사람들은 코로나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응 방식을 지켜보고 있다. 지역봉쇄, 이동금지, 거리 두기, 재정지원, 실업급여 등의 재정금융 지원, 그리고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한 노동자, 민중 행동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과 폭력, 인종주의, 민족주의를 이용한 적과 희생양 만들기 등등 100년 동안 자본주의 위기 시기마다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계급이 활용한 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두는 알고 있다.


- 대안은 무엇인가.

▲ 지금은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투쟁이 건강, 삶, 안전, 공장폐쇄 등의 방어적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투쟁이 지구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고 계급영역 내의 기본투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인종주의, 민족주의 외피를 쓰고 노동계급을 포함한 민중의 심리와 의식을 왜곡시켜 자본계급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코뮤니스트들과 그들 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항, 혁명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 노동계급과 함께 전쟁, 억압,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세상을 세계혁명을 통해 만드는 길이 코로나 이후 시대의 역사적 임무일 것이다.


- 끝으로,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 옛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주의가 어느 정도 민족 선구자 뒤에서 실현될 수 있고 세계 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의 점진적 융합 과정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혼란스런 생각이 가능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처럼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코뮤니즘이 결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어야만 한다.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내에서 건설될 수 없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수한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이러한 입장이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에까지 파고들어와 계급투쟁을 희석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는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이 위기를 과잉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그런데 과잉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체제로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열어갈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노동계급의 과제는 무엇일까. 우선은 비타협적인 자발적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일이다. 계급의 투쟁을 엇나가게 하고 자본의 분파와 연결시키는 모든 세력(노동조합, 좌파당, 민족해방전선 등)으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과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국제적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투쟁도 국제적이어야 한다. 나아가 세계의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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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론슈타트의 교훈들 : 반혁명의 100년

크론슈타트의 교훈들 : 반혁명의 100년

 

<편집자 주>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크론슈타트의 비극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크론슈타트의 교훈은 혁명과 반혁명,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 이행기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의 폭력 문제로써 오늘날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 혁명적 원칙을 세워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글은 그동안 크론슈타트 문제에서  ICP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코뮤니스트 좌파 경향의 입장이며, 곧 발행될 코뮤니스트」 13호에서  더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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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노동자 운동에서 비극적인 실수

 

1921년 3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작은 코틀린섬에 있는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년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해외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의 반혁명 책동에 맞선 내전에서 피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반란은 이러한 반혁명 시도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10월 혁명의 선두에 섰던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노동계급 당파의 반란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의 수많은 권력남용과 참을 수 없는 탈선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에 앞장섰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유혈진압은 전반적으로 노동자 운동에 커다란 비극을 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 그것은 1914~1918년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노동계급의 응답이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 도상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10월 봉기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과정의 일부였다.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두둔했다. 봉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 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고립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의 진정한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난 혁명은 전(全)유럽과 다른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동계급의 여러 노력에도 국제적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그 자체는 기나긴 피의 내전에 의해서 찢겨나가서 경제는 황폐해졌고, 소비에트 권력을 떠받드는 기둥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가 제거되고, 점차 소비에트가 국가기구에 종속되었으며, 노동자 민병대가 파괴되었다. 내전 동안 긴장된 시기가 이어지면서 점차 사회 전반이 군사화되었고, 이와 함께 여러 관료적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들 전반이 러시아혁명이 타락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타락이 만개하여 진행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였다. 차츰 “당-국가”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 현재 당면한 시기에는 반혁명 세력에 맞서서 군사적 투쟁을 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효율성”의 원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원칙들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효율성의 원칙이 지배하면서 국가는 노동의 군사화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시와 극단적인 착취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복종시켰다. 공장위원회를 이미 약화시켰기 때문에 국가가 “일인관리”와 테일러주의 착취 시스템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과거에 레닌은 테일러주의 시스템을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전쟁경제의 혼란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더욱 증폭되어 국가 전체를 기근의 위기에 빠뜨렸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그조차도 종종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공업지대들이 전반적으로 조업을 중단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시골에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서 함께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국가는 주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국가는 구(舊)소유계급에 대항한 투쟁으로 자신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미숙련공, 소농 등 각 부문에 따라서 내전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는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백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 조건이 앞으로 덜 가혹해질 것이며, 경제와 사회생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항상 전쟁으로 야기된 생산의 파괴에 직면하여,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어떠한 조치를 하는 것도 다소 내키지 않아 했다.

 

크론슈타트 봉기

 

1920년 말, 탐보프주, 중부 볼가, 우크라이나, 서부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을 가로질러 농민봉기가 퍼져나갔다. 군복 입은 농민인 적군이 빠르게 무장을 해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 반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 반란의 주요 요구는 곡물 징발 중단과 농민 스스로 자신의 생산물 처분 결정권을 갖게 하라는 것이었다. 1921년 초, 반란의 기운은 10월 봉기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크론슈타트 등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자발적인 파업들이 일어났다. 공장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식량과 의복 배급 증가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만들과 결합되어 다른 좀 더 정치적인 요구들 또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중단하고, 투옥된 노동자들을 석방하며,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들을 원했다. 틀림없이 몇몇 반혁명 분자들,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러한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운동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생활조건에 대한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노동자들이 봉기 이후의 국가, 그들에 의하면 “노동자 국가”에 맞서서 파업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파업 노동자들을 선동자, 게으름뱅이, 개인주의자로 비난했다.

 

이러한 것들이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론슈타트의 사회적 문제들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조차, 트로츠키가 “혁명의 영광과 명예”라고 묘사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미 관료적 경향과 붉은 함대 내에서의 군사적 규율 강화에 맞서서 저항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이 도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수병들은 즉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 대표를 보냈다. 같은 날 순양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선원들은 회합을 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이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경제적∙정치적 요구안들을 제출했다. 특히 요구안에는 가혹한 “전시 공산주의” 방책들의 중단과 연설의 자유, 출판의 자유, 그리고 모든 정당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속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재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3월 1일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승무원들과 만나서 그들의 결의안을 규탄하고 만약 수병들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즉각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건방지고 자극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3월 2일에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재선거를 하였으며, 300명의 대표들이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안에 찬성투표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평화로운 재편”을 위한 동의안을 채택했다. 대표들은 시행 정부를 떠맡는 “지역 혁명위원회”와 어떠한 정부의 무장개입에라도 맞서기 위한 방어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크론슈타트 코뮌이 탄생했다. 크론슈타트 코뮌은 그 자신의 『이즈베스티야』(정부 기관지, 역자)를 발행하기 시작해서 첫 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이 나라의 지배자인 코뮤니스트당은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출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최근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사건들은 코뮤니스트당이 노동대중의 신뢰를 상실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코뮤니스트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만들이 반혁명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코뮤니스트당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코뮨의 반란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았다. 그들이 “세 번째 혁명”이라고 부른 반란을 확대하기 위한 반란자들의 소집 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 대표를 파견했음에도, 소책자들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배포했음에도, 붉은 함대의 요청은 전체 러시아 노동계급을 결집하는데 실패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반란자들의 강령에 공감했을 수도 있으며 그 반란을 완전히 지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 투쟁을 중단했으며 계엄령 하의 일터로 돌아갔다. 내전의 혼란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사기를 꺾어놓았으며 분해해버렸다.

 

크론슈타트 코뮨의 분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 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 병사,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 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티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 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대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 동시에, 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게 하려고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 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체카는 약식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선고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 운동의 오류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모든 반(反)레닌주의 조류들이 계속해서 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 볼셰비키의 오류를 전체 노동자 운동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추방된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과 조류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반대 분파인 노동자 반대파는 반란 진압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분파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녀의 분파 성원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에 앞장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심지어 그들의 입장이 콜론타이처럼 반란의 진압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볼셰비키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1) 크론슈타트 반란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 음모라는 주장을 두둔했으며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좌파의 투사인 헤르만 호르터는 볼셰비키의 방책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농민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혁명 봉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내에서, 빅토르 세르쥬는, 비록 그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맞서서 무장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진압에 맞서서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비극적인 오류는 볼셰비키 당과 그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단지 비극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행했을 뿐이다. 다만 이 정책은 당시 전체 노동자 운동이 반혁명은 봉기 이후에 국가 그 자체로부터 자라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7년에 “구더기는 이미 과일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계급정당의 존재가 언제라도 그 안에 반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고립 때문에 볼셰비키가 국가로 흡수되고, 국가 그 자체가 자신을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 당시의 전체 노동자 운동의 오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출현한 제도장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생각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Internationalism, Vol. 123, 2002년 가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난 뒤 4년째, 지금(2001년)으로부터 80년 전인 1921년 3월, 볼셰비키당은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핀란드 만의 작은 섬 코틀린에 주둔하고 있는 발트 함대의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일으킨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볼셰비키당은 러시아와 외국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군대에 맞선 몇 년 동안 피로 물든 내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는 새롭고 달랐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지지자가 내부로부터 일으킨 봉기였다. 그들은 10월 혁명의 전위였고, 이제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왜곡과 새로운 권력의 남용을 바로잡으려는 계급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볼셰비키가 이 투쟁을 무력으로 짓누른 것은 그때부터 줄곧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지닌 뜻을 이해하는 데서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왔다.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 맑스와 레닌을 스탈린과 굴락(gulag)에 연결하는 끊어질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하는 오늘날,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이해는 더욱더 중요하다.

 

우리의 의도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에 실린 이전의 논문들은(“크론슈타트의 교훈들,” International Review n°3과 “1921: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이행기 계급,” International Review n°100) 이미 상세하게 그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와 달리 우리는 이번 기념일을 기회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아나키스트는 크론슈타트 사건을 맑스주의자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 당이 지닌 권위주의적 반혁명의 본질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다. 두 번째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여전히 있는 생각, 즉 반란을 짓누른 것은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방어하려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견해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볼리네(Voline)에 따르면: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거나, 또는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당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맑스주의자,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어떠한 자유 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자유로운 대중을 믿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신들의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위험에 빠트린다고 믿었다. ……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사회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인민이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일으킨 시도였다. 그 시도는 정치적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서 직접, 단호하게, 대담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3의 혁명, 사회 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무너졌지만, 크론슈타트에서 봉기한 사람들은 과업을 해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봉기에 참여한 대중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흐릿한 미로에서, 크론슈타트는 올바른 길을 밝혀주는 밝은 횃불이었다. 봉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들이 권력이라는 말과 생각을 모두 없애지 않고 그 대신에 협력과 조직화, 관리를 말하면서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에 바친 마지막 찬사였다. 노동계급 스스로가 토론과 조직화와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얻어낸다면,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에서 참된 길을 찾아낸다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2)

 

아나키스트들은 볼리네(Voline)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진압은 볼셰비키가 지닌 맑스주의 사상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결과였다. 당의 대리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당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이행기 국가의 형성은 볼셰비키가 믿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권위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다. 볼리네에 따르면, 볼셰비즘은 억압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볼리네는 크론슈타트를 그저 봉기였다고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크론슈타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 만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업(협력, 조직화, 관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적 과업에 대해 잊었다면(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발언), 그것을 교훈 삼아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 이를테면 지도자 없고, 당이 없는, 국가가 없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도 없는 사회, 즉각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나키스트가 끌어낸 첫 번째 교훈은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한다.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양쪽 모두 위계제도와 폭정과 독재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와 우애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 부르주아지는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 맞서 무력으로 개입하고 경제 봉쇄를 이끌었던 반혁명 세력의 잔인성을 정당화하려고 10월 혁명에 반하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으로 이용했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가 볼셰비즘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딪혀야만 했던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녹여 없애는 순진한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확증한 것처럼, 아나키스트가 지닌 순진성 때문에, 그들은 맑스가 세운 혁명에 대한 역사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부르주아 진영이 일으킨 실제 반혁명 앞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볼리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권력욕 때문에 근본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그와 견주어 볼 때 역사의 진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 만일 볼셰비키가 끝내 권력만을 탐했다면, 왜 그들은 사회민주당의 다수와는 달리, 제국주의 전쟁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되도록 요구함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추방당할 운명을 지웠는가? 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는 달리,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을까?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아주 뒤떨어졌고 부르주아지를 뒤엎기에는 수적으로도 모자라다고 여긴 대부분의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10월에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량을 믿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연합국의 봉쇄를 이겨내고 반혁명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유럽과 나머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혁명의 시도에서 러시아의 지도를 따르도록 세계 노동계급을 고취시켰는가? 어떻게 볼셰비키당은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창건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왜 당을 국가 기구로 통합하는 과정과,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 조직에 대한 권리 침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에 맞서 무력의 사용은 하룻밤 새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질질 끌다 일어난 것인가?

 

볼셰비키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더러운 속성을 지녔다는 이론으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또는 구체적으로 크론슈타트를 설명하지 못한다.

 

1921년쯤 러시아에서 혁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볼셰비키 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독일과 다른 국가로 혁명의 확산은 1919년과 견주어 볼 때 훨씬 가망 없는 것으로 보였다. 세계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러시아 안에서 내전을 이겨냈지만, 반혁명 군대의 거듭된 공격과 국제 부르주아지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경제적 질식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업 기반은 무너져 버렸고,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희생되었거나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떼 지어 몰려갔기 때문에 크게 줄어들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지방에서 일련의 폭동을 일으킨 농민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1921년 2월 중순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점점 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크론슈타트가 일어났다.

 

어떻게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 특히 유럽의 노동계급 혁명에서 지연된 도움을 기다리면서 세계 혁명의 요새로 남고 노동계급의 불만과 경제적 붕괴를 이겨낼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는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우위, 권력의 집중화, 혁명의 국제적 팽창,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회로 이행기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배반과 반혁명 행위로 다루게 한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오늘날 혁명가들이 지닐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가늠자를 갖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때 그저 노동자 운동의 이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노동자 운동은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권력을 보유하는 몹시 어려운 과업에 부딪혀야만 했다. 성공적인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계도, 부르주아 국가를 필연적으로 분쇄하게 될 이행기 국가에 대한 이러한 두 계급 조직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고, 차츰 노동자평의회와 공장위원회를 국가에 통합하면서, 볼셰비키당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노동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 혁명에 대한 주요한 위험은 새로운 국가 기구 밖에서, 즉 국제 부르주아지와 추방된 소작농과 러시아 부르주아지에서 나왔다. 비록 볼셰비키당 내부에 그때 정권의 관료화에 맞서 경고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어떠한 경향들도, 심지어 좌파도 대안의 전망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콜론타이와 쉴라프니코프의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자평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조직으로서 국가를 초월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국가의 과도함에 맞서 노동자를 방어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볼셰비키당 내부에는 봉기를 분쇄하는 데 반대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 운동에 결합했던 크론슈타트 당원들도 있고 훗날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적 해결을 반대했던 가브릴 미아니스코프(Gavriil Miasnikov)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 내 있는 좌파 경향은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했지만, 폭력의 사용을 도왔다. 심지어 노동자 반대파도 진압 세력에 자원했다. 당의 독재에 반대했던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맞선 군사적 행동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요구는, 볼리네의 의견과는 달리 대안의 전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맥락 안에서 주로 틀지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보루)와 세계적 상황에 대한 더 폭넓은 내포(함의)들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요구들은 전위당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변하지 못했다.(3)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그것을 주도했던 혁명적 흐름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려고 애쓴 혁명가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교훈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 그리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적들에 의한 책략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폭력과 강압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를 잃어버리는 편이 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바탕,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했던 행동의 내용을 바꾸는 결과이다. 

Octobre」, 1938년, Italian Fraction of the Communist Left에 의해 편찬됨

 

코뮤니스트 좌파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즉 국가가 노동계급에 맞서 폭력을 쓰는 데서 볼셰비키당은 자신을 반혁명의 수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거둔 승리는 볼셰비키당이 노동계급에 맞서 러시아 국가의 도구로 되었다는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코뮤니스트 좌파는 또 다른 대담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전위로 남으려는 코뮤니스트 좌파는 현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진보를 막으려는 필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율성을 지켜야만 한다.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의 견해

 

그러나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에서 이러한 결론은 전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좌파의 몇몇 부분은, 특히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는 1938년 이탈리아 분파(Italian fraction)의 태도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를 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크론슈타트를 진압하게 한 끔찍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탄생이나 강화의 과정에서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부닥쳐야만 한 끔찍한 문제의 제거는 장밋빛이 감도는 안경과,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이, 트로츠키에 따르면, “비극적 필요”였지만 필요이고 심지어 의무였다는 이해를 통해 혁명의 비전에 대한 비판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 ,Programme Communiste n°88, 국제코뮤니스트당의 이론적 기구, 1982년 5월

 

그들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을 회피한, 보르디가주의 경향은 볼셰비키당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를 방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향은 또한 볼셰비키의 실수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 당과 혁명이 왜 타락했는지 하는 문제에서 배울 수 없게 한다.(4)

 

그들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계급과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 대한 당의 관계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주의의 문제, 즉 어떻게 각각의 상황에서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커다란 투쟁은 그저 프롤레타리아계급 안에서 끔찍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당이 혁명을 만들 수 없거나 대중없이 또는 대중에 반하여 독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의 의지는 ‘수적 다수’ 또는 심지어 더 모순되는 것으로서 만장일치 합의를 찾기 위해 선거 협의체나 의견 투표(여론 조사)에 의해 나타내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 의지는 투쟁의 등장과 좀 더 정확한 투쟁 방향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분파가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전과 독재의 변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태도와 관계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의해 노동자, 준-노동자 또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모든 계층에 대한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중요성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트로츠키는 자신의 책 『테러리즘 또는 코뮤니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구인 소비에트에 참가할 권리가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에 따라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어떠한 ‘헌법상의 규칙’도 어떠한 ‘민주주의 원칙’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부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없다. 어떠한 비책도 지역적 필요와 국제적 혁명의 요구 사이의, 직접적 필요와 역사적 계급투쟁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의 반대 속에서 드러났던 모순을 풀 수 없다. 어떠한 형식주의도 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분파와 계급의 혁명적 투쟁 조직인 당과,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통해 서로 다른 정도로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의 관계를 분류할 수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대중의 정신을 관찰하고 대중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당도 때때로 대중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당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찾고 있다(같은 글)

 

1921년에 볼셰비키당은 그들을 지도할 이전의 경험이나 요소 없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불합리하게도 볼셰비키의 실수에서부터 장점을 끌어오고 "원칙은 없다."고 선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공통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비웃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실행하는 문제를 마술로 쫓아버린다.

 

아주 유동적인 상황에서 합의를 세울 수 있는 결코 완벽한 수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가 전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의지를 담아내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비록 1918년의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드러난 경험이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트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회복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대중없이 혁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웠지만, 당을 통해 그리고 당의 허락하는 것을 빼고는 대중은 전체 계급으로서 그들의 혁명적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당은 필요하다면 크론슈타트에서처럼 기관총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두 가지 모순적인 표어(슬로건)를 갖는다. 즉 혁명 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혁명 후에는 : “모든 권력은 당으로.”

 

Octobre의 편집진과 달리,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혁명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업이 소수집단에 대표될 수 없지만, 자기 의식적인 다수를 통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둘 다 마치 기만인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는 수단인 소비에트와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계급 내의 긴장과 차이를 담아내고 조절하는, 그리고 이행기 국가를 통한 무장 권력을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이어야만 한다. 당은, 특정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나머지보다 명확히 앞서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위는, 이러한 권력을 노동계급 자체와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비록 “원칙적이지” 않지만, 당이 노동자를 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하면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마치 이러한 결론의 끔찍함에서 피하려는 것처럼, 크론슈타트 봉기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때 레닌의 규정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크론슈타트는 백군 반동세력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혼란되고 심지어 반동적 생각들이 크론슈타트의 모반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리고 몇몇 내용은 강령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반혁명 세력의 조직된 군대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는 그들 자신을 1917년 혁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의 통합 부분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소비에트의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 사회 혁명의 획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이기거나 죽을 것이다. (the Kronstadt Pravda, p. 82)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아무리 혼동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건 요구는 또한 비참한 생활조건, 국가 관료제의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쇠퇴한 소비에트에서 정치적 권력의 손실에 부닥쳤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해들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볼셰비키가 반란자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대리인으로서 낙인을 찍은 시도는 물론 힘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 안에 있던 끔찍한 위험과 복잡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핑계였다.

 

코뮤니스트 좌파가 역사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지혜와 이론적 작업 때문에, 우리는 일련의 추론이 지닌 기본적 오류를 볼 수 있다. 즉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고 반(反)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절대 권력인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스트를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비에트를 다시 세우려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노력들을 진압하고,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볼셰비키는 알지도 못한 채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백군의 복원보다 노동계급에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반혁명 과정의 가속화를 도왔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세력은 자신을 코뮤니스트로 선언하면서 승리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살아있는 사회주의의 체현이며 10월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 선상에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계급 대중에게 끔찍한 혼동과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 우리는 여전히 1989년 이래로 부르주아지가 코뮤니즘의 죽음과 스탈린주의의 사망을 같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 대한 이러한 왜곡의 결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1921년의 비극적인 실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비극적” 필요가 아니라, 되풀이되어야만 할 코뮤니스트의 의무이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조직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무장된 의지를 이끌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 1917년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를 그들의 이전 권력의 그림자로 축소시키고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시켰던 1921년의 볼셰비키당 사이에 있는 모든 모순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현재 캠페인들에서 볼셰비키를 마키아벨리적인 압제자들로서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돕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혁명적 비타협의 극치로서 찬양한다.

 

그러나 코뮤니스트좌파는 볼셰비키 유산에 관계하면서도 그 이름에 걸맞게 실수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은 가장 해롭고 끔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International Review, 2001, vol. 104,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혁명의 변질과 볼셰비키 당의 오류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자신의 특권을 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이전 지배계급에 대항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폭력은 지배 계급의 국가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무엇보다도 사회관계를 목표로 해야 하며, 개인을 향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복수의 정신을 혐오한다. 그 폭력은 항상 노동자 평의회의 전체적인 통제 아래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 폭력은 프롤레타리아 도덕성의 기본 원칙 –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반드시 사람들 간의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창조라는 목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이는 부르주아지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반대이다 – 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적색 테러 반대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비록 구 지배계급의 반혁명 음모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고, 그들의 억압을 목표로 하는 체카와 같은 특수한 조직의 건설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소비에트의 통제에서 벗어나 구사회 질서의 정신적, 물질적 타락에 오염되어갔다. 무엇보다도, 그 폭력은 곧 지배계급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내전 동안의 실제 경제적 비참함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볼셰비키 정책에 비판적인 아나키스트들과 같은 이들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조직 등 노동계급 내의 다른 의견을 가진 분파들에까지 향해졌다. 이 과정의 절정은 1921년 크론슈타트 노동자 선원 진압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과 소비에트 부활의 깃발을 들었음에도 반혁명 분자들로 비난받았다. 이것은 ‘그 자신의 아이들을 파멸시킨 혁명’의 진정한 표현으로, 소비에트 권력이 내적으로 파괴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폭력이 러시아 노동계급에 주었던 심각한 파괴적 충격은 노동계급 내의 폭력 관계가 반드시, 언제나 거부해야 함을 강조한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2017. 10,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주>

 

 1)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그들은 1920년에 코민테른의 입장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특히 “공동전선”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되었다. 

 

 2) Voline, 『알려지지 않은 혁명』(The Unknown Revolution), Black Rose Books, 1975, p. 534-538.

 

 3) 크론슈타트 반란이 내건 강령(platform)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International Review 3, 51쪽을 참조하시오.

 

 4) 코뮤니스트 좌파의 또 다른 부분인,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 *현재는 ICT - 국제코뮤니스트경향)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No 23, 1986)에 출판된 논문은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이 깊이 불리한 조건들을 반영했고, 그것이 많은 혼란스럽고 반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크론슈타트 반란의 아나키스트적 이상화를 거부한다. 동시에 그 논문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진압이 당의 독재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성이었다고 하는 보르디가주의자의 생각을 비판한다. 그것은 크론슈타트의 기본적인 교훈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계급 자체에 의해서 즉,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서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요새의 고립이라는 전체적 정황에서, 당과 소비에트 당국 모두의 내부적 타락을 가속화시켰던,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볼셰비키 세력의 실책들을 보여준다. 그 논문이 그 반란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특징화 짓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계급의 불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답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노동자 운동에서 느린 고투의 장으로 열릴지라도 그것을 반혁명의 조종 결과로서, 그 반란의 진압은 더욱 정당화된다고 심지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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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보다 안전한 방역은

코로나19로 시작해
코로나19 희생으로 마무리한 작년

 

그리고 연장선상에 있는
2021년 새해도 어느덧 2월이 저물고
봄이 생동하는 3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국도 오늘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자본주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백신보다 안전한 방역은
이윤을 위한 생산체제를 멈추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치료제는
전쟁과 야만의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세상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
코뮤니즘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유튜브로 영상 보기>
https://youtu.be/_S0XGHPoL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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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노동자계급이 핵심인 이유

노동자계급이 핵심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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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왜 계속해서 노동자계급에 관해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노동자계급은 임금을 위해 일하고 상품을 생산하며 국가(그리고 세계)의 경제생활을 이루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여러분은 소매출납원웨이터포장하는 사람간병인교사간호사버스 운전사청소원택배기사 또는 보일러 제작자일 수 있다아니면 실업자일 수도 있고노동 예비군의 일부일 수도 있다여러분이 어디에 살고여러분이 누구이든 그리고여러분이 어떠한 특정한 활동을 수행하든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여러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생산수단을 소유하고(사적 소유든 국가든여러분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이나 자본가계급을 구성한다노동자로서 우리가 이 사회의 모든 가치를 창출하지만그것으로부터 이윤을 얻는 것은 자본가계급이다이 두 계급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존재한다우리는 임금과 조건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지만자본가들은 최소비용으로 그들의 이윤을 증가시키기를 원한다.

 

노동자계급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만약 우리가 일을 멈춘다면전체 시스템이 멈출 것이다.

 

실업의 유령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오늘날주요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필수 노동자라고 불리는데이는 우리가 감염병에도 불구하고 쉬지 못하고 그들의 이윤 창출을 위해 계속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지금까지 경제를 걱정했던 정부는 이제 비필수’ 부문에서도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현대 세계 질서의 기초를 이룬다그러나 사회가 항상 이렇게 조직된 것은 아니다. 500년 전여러분은 그들의 땅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주에게 임대료와 의무적인 노동을 지불하는 농민이었을지도 모른다. 2000년 전에 여러분은 노예로 납치되어 주인에게 복종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10,000년 전에 여러분은 부족과 공동으로 일하는 수렵채집가이었을지도 모른다어떤 사회도 영원하지 않다이는 임금노동 이후의 미래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무력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우리의 독특한 위치는 또한 우리가 이 제도와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굴복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함께 다른 어떤 계급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자본가계급은 이윤을 위해 우리가 필요하지만우리는 삶의 본질을 창조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이 필요하지 않다위기 시기에 노동자계급은 자신을 해방하려 시도해왔고, 1871(파리 코뮨)과 1917(러시아혁명)과 같은 날짜가 우리 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다이러한 시도는 무력에 진압당하거나 지배계급에 다시 굴복하는 등 성공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최근의 사건들은 자본주의 체제 중심이 얼마나 많이 썩었는지 보여주고 있다노동과 자본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전면화하였다지배계급은 폭풍을 헤쳐나갈 수 있는 그들만의 정치적 나침반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지배계급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것을 찾아야 한다우리 목표는 오늘날 서로 분리된 투쟁의 당면한 요구를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국가가 없고 계급이 없고 돈이 없는 사회인 코뮤니즘이라는 역사적 강령과 연결시킬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시위와 투쟁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차원적 위기를 진지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적 관점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우리는 고된 임금노동과 실업의 빈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우리에게는 쟁취할 세계가 있다!    오로라(Aurora)52

 

2020년 8월 6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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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나에게 돈은 목숨이다

김용균 동지 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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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돈은 목숨이다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시

 

 

 

 

 

컨베이어벨트 위 석탄으로 실려 가 본 적 있는가

 

       분진을 나르며 굉음을 내는 컨베이어벨트는 죽음을 운반하지 낙탄이 됐다가 삽이 됐다가 나는 찰리채플린처럼 시커매져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는 별처럼 아득해지는 눈

 

     스물네 살의 눈빛은 영롱하지 아니 참혹하지 누가 날 멈추지 않는 기계 속으로 떠밀었나 나에게 감성팔이를 하지 말라 하청과 비정규직이란 말은 나도 안다

 

열심히 일한 것이 죄인가

 

      부릅뜬 눈으로 벨트와 함께 돌다가 속도에 휘말려보라 숨통을 틀어막다가 숨이 헐떡거리다가 먼지의 뽀얀 사막 속에서 길을 잃어 보았는가

 

컵라면 하나가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다

 

나의 일터는 목숨을 거는 전쟁터다 엄마가 말했지 용균아 오늘도 무사히 일하고 와야 해 컨베이어벨트는 엄마 말을 집어 삼켰지

 

컨베이어벨트는 키득키득 지금도 누군가의 목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詩 봉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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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비정규

김용균 동지 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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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에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씻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詩 | 최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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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적 봉쇄, 부르주아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내다.

국민적 봉쇄부르주아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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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 대참사에 직면하게 된 세계 각국의 부르주아지는 인구의 절반 이상인 거의 40억에 달하는 국민을 격리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만약 자본주의 국가와 그들의 보건 시스템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을 어떻게든 막을 능력이 한계에 달함으로써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이라면부르주아지의 진정한 주된 관심사는 가능한 한 그들의 경제를 보호하는 것이고손해를 최소한으로 막고자 함이다이런 이유로가장 취약한 계층을 유지하고 보호한다는 핑계로 지배계급은 전 국민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려는 진지한 고민을 해왔다나머지 인구의 사망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그러나 바이러스의 전파는 통제 불능에 빠질 것이며세계 경제는 마비될 위험이 크다그래서 강대국은 봉쇄(lockdown) 전술을 택했는데말하자면 시행할만한 다른 보건 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중세의 관습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이는 바이러스 희생자들을 1/4로 줄이기 위해 고립소외격리한 것이었지만이번에는 전 지구적 규모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세계 인구에 있어서필수적 봉쇄는 그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을 악화시켰을 뿐이다그들 대부분은 위험하고비좁고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또 수백만 인구가 밀집해 있는 위험한 대도시에서 살아간다.

 

봉쇄의 결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임금을 받는 피착취계급이다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와 같은 후진국의 경우수천만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이미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광범위한 고립사회적 상호작용을 규제한 것과밀한 가정이동과 여행을 제한한 것은 건강에그것도 특히 국민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이런 조건하에 있는 피착취계급에 대한 격리로 인한 트라우마는 부르주아계급이 필요한 모든 물질적 풍요를 갖춘 넓은 주거시설에 살아온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따라서 격리조치는 사회계급으로 나뉜 사회에 가증스럽고 소름 끼치는 불평등을 더욱 부각시켜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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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과 집단생활의 위험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부르주아지가 우리에게 믿도록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인생의 역경에 직면했을 때 모두가 동등한 건 아니다봉쇄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든지 이 부패한 체제가 양산한 비극에 과도하게 육체적인 대가를 치른다이들 피착취계급의 가장 취약한 이들혹은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보기에 쓸모없어진’, 그리고 원치 않는’ 이들이 그것의 비인간성과 야만주의의 결과로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2년 나이트 쉘터’(Night Shelter)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매해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노동자계급 보통의 생활 여건에서 비극의 밤으로 추락한다그들은 침전물처럼 사회의 나락으로 침묵 속에 추락한다더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만큼 쥐어짜 낸 자본주의로 인해 닳아버린쓸모없어진 요소가 된 인간쓰레기는 쇠 빗자루로 쓸려나갔다.”

 

부패한 자본주의는 물질적 궁핍에 더해 계속하여 개개인을 주변화시키고원자화시켰다가족 관계는 파괴되었고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과 노약자는 배제당했다... 이는 자유 기업의 이름으로 불행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말하자면 노동할 의무살기 위해 착취당해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맹목적 분노 속에서자본주의는 신성한 이윤의 제단에 피착취계급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시킨다노동자계급 내의 모든 인간적 유대를 파괴하고특히 고독에 대한 감정적 유대를 파괴한다이들 지배계급이 우리들 사이에 있는 취약한 이들과 노인누구보다도 특권이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위선 떨었을 때그들은 파렴치하게도 거짓을 말했다우리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을 제공하는 복지가 수명이 다해 와해되어 가고 있는 것을그리고 이에 대한 정책의 결과를 보고 있다이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으로 숨겨지고 말 것이다그들은 대유행 동안 국가가 가장 취약한 이들을 돌볼 것이라고 우리를 믿게끔 할 것이다사실 국가 자신은 전염병이 야기한 모든 사회적이고정신적이며육체적인 고통에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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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부터 버려진 노인들

 

전 세계적으로 요양 병원의 휴먼드라마는 끝이 없다처음에는 부르주아 국가에 의해 침묵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추악하게 드러나는 현실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그것은 뉴스가 되었다프랑스 가정의 공식 사망자 수는 이미 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기록되었다스페인에서는 지난 5월 1만 6천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기록됐는데수백 구의 시체들이 수일간 버려져 침대에 뉜 상태로시설에서 발견되었다비슷한 극단적 사건들은 다른 많은 국가에서도 벌어졌다자본주의에 있어서 노인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넘쳐나는 입에 지나지 않게 되자사회로부터 그들을 격리하여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얼마나 최선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는 운명에 맡겨진 채 자신들의 가정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모든 다른 이들을 간과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요양 중인 노인들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해줄 적절한 지원의 부족은봉사자들의 부족까지 더해져 너무도 분명한 냉소와 뻔뻔한 태만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책임져야 할 사실상 대참사를 양산한 것이다.

 

이 최후의 시설의 이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프랑스에서만 70만이다.), 극도로 취약하며 적절한 보호도 없이 바이러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렇기에 격리를 나머지 국민들에게 적용하면서까지 노인들을 그들의 방에 감금하고고립시키고격리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그들의 가족친척또는 바깥에 살고 있는 여전히 건강한 친구들과 모든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된 것이다보육원구치소난민시설이주민수용시설소년원은퇴자의 집과 같은 곳들은 감염이 확산하기 쉬운 용광로인데특히 이들은 이미 나이나 질병으로부터 취약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먼드라마의 풍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대유행으로 인한 피해에 더해피해자로 불리는 이들은 그들의 선을 위해’ 고립되어 암울하게 절망하도록 강제하고사랑하는 이들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노년기 우울증의 피해자로 진단받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뼈저린 상실감과 고독을 느끼게 할 뿐이다이는 삶에 흥미를 완전히 잃게 만들고 심지어는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게 한다대유행으로 사망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그들 또한 탄식과 고독으로 자살하게 할 뿐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은 가족에게 사회의 야만성을 목도하도록 하는 것이다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녕과 도움을 주기 위한 시도들이 벌금형에 처해 졌다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기 위해 금지 규정을 어길 용기를 내어 약 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사람혹은 요양 시설에 거주 중인 남편에게 인사를 하려고 바로 건너편 옆집에서 요양원으로 건너온 여성의 경우다.

 

보다시피격리조치 기간 동안 국가는 사회적 격리를 아주 강력하게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여기에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사회적 연대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었고특히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한 것이 그랬다.

 

반대로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키겠다고 주장함으로써취약한 이들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두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함으로써국가는 사회에 악취가 진동하는 통제와 과도한 강제 정책을 펼쳤다금지를 넘어그다음에는 강제적 규제를 시행했다경찰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다이러한 사회에서는 죽음 역시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이기 때문에대유행의 시기에 그것은 매우 이윤이 남는 것이다프랑스의 장례 업체는 파리 근교의 거대 도매식품시장인 Halles de Rungis 앞에서 15분 동안 가족 모임을 하는데 250유로를 청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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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자본주의 봉쇄의 또 다른 희생양

 

학생은 상황이 위태로울 것으로 지목되는 이들이다이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상당수는 별난 직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업을 수행한다가정으로부터 떨어져 살며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리한 고독을 경험할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미래가 어떨지 보장할 수 없는 심오한 불안을 경험할 것이다봉쇄는 이러한 생활상을 악화시켜온 것일 뿐이다수년 동안 학생의 자살이 증가해왔다보기를 들어 몇 달 전 좌절한 프랑스의 한 학생이 리옹 대학교의 학생회관(Centre Régional des Œuvres Universitaires et Scolaires) 밖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별난 직업의 감소전반적 폐쇄가족 방문에 대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제한이 현실이 되었다.

 

심리치료센터로 걸려오는 절망에 찬 전화가 그토록 끊임없던 적이 없었다그리고 이는 최강 선진국(미국캐나나영국프랑스 등)을 포함한 몇몇 국가에서만 증가할 것이다이들 국가는 학생 보건에 대한 권위가 실효성이 없어졌고수많은 대학이 새 학기를 재개하지 않기로 했으며강의실 수업을 온라인 과정이나 화상회의로 대체하기로 했다이제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이 전무한 채 컴퓨터를 뒤에 두고 온종일 작은 방 안에 고립되어 남겨질 것이다이는 사회적 고립 및 사회 개별 구성원에 대한 분자화로의 또 다른 이행이다.

 

결국 부르주아 국가가 사회에서 수많은 노인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했지만미래의 프롤레타리아를 다루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그들 다수는 실직이라는 암담한 미래에 직면해 있으며경제 위기가 가속화되고 악화할수록 훨씬 더 위태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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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아이들을 상대로 한 폭력의 증가

 

몇 주아니 몇 개월 사이 미디어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압력을 행사해 왔다. ‘가정에 머무르시오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시오자신과 타인을 보호하시오!’ 물론 이러한 지침을 따르지 않은 이들은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았고그것이 아니라면 건강과 생명을 위태롭게 한 것이었다결국 모범 시민으로 보이지 않는 이 모든 이들이 바이러스를 전파했다고 비난받는 것이다.

 

사실 봉쇄는 고집스러우리만치 잘 지켜졌다국민 대부분은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방어벽을 치는 것이 필요했다그러나 봉쇄가 삶 다른 모든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관한 측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동등한 권리에 대한 환상을 퍼뜨린 것이다지배계급은 대다수의 거대한 노동자계급그것도 가장 취약한 이들과 실직한 이들의 삶인 가난과 열악한 주거환경을 모른 척한다전 가족이 밤낮으로 비좁고 갑갑한 방에서 살아야 한다또다시 이윤 및 시장 권력이 주택의 품질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다.

 

만약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 불행하게도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면이러한 봉쇄 환경에서 (폭력은심각하게 증가할 것이다국가의 관심은 오직 경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삶이 두려워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긴급 번호를 누르라고 제안하는 사회 복지 외에는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거의 없다사람들은 폭력의 조류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가정 폭력이 급소도로 확산하였는데프랑스에서는 경찰 신고가 48% 증가하여 (가정폭력은) 30% 증가했다유럽의 응급 구조대 호출은 60% 증가했다튀니지의 여성에 대한 폭행은 다섯 배 증가했다인도의 가정폭력 사건 수치는 곱절 이었다브라질에서 가정 폭력으로 보고된 사건은 40에서 50% 증가했다멕시코의 폭력 사건 신고는 방역 기간 동안 60% 증가했으며여기에 200건의 여성 살해 사건이 추가되었다페루에서는 900여 명의 여성들이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런데도 부르주아지에 이들 인재(人災)는 종이에 적힌 숫자혹은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빠르게 그것을 망각한다건강관리복지를 삭감한 지 수십 년 이래어린이 보호폭력으로부터의 여성 보호취약자라든지 심각한 장애를 지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복지 모든 영역에 충분한 예산을 들이지 않았다.

 

실질적 고통의 규모가 얼마나 클 것인가하루의 끝에 숨겨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클 것인가봉쇄와 격리와 같은 상황으로 인하여 쌓여 온 고통과 우울그리고 자살 시도 사례가 얼마나 많겠는가?

 

심각한 봉쇄 조치와 사회활동에 대한 제약은 국민의 몫이었다. ‘경제를 지키기’ 위해 감염될 위기를 안고 그들의 동료들과 함께 가칭 바이러스 총알받이가 되어 일터로 끌려나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이고 추상적인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강조해왔다.

 

바이러스가 몇몇 대륙으로 지속해서 확산하고재확산 국면에 접어든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상당한 호전을 보여주자미디어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오명을 씌우기 시작했다그들을 노인과 일반 국민에게 무책임하다 했다몇 주간의 격리가 지나자 그들이 대규모로 무리지어 모였기 때문이다이는 세대 간에 이데올로기적인 분열 이상을 일으키려는 목적이다물론 모든 예방 조치는 받아들여져야 하겠지만이들 모임은 사회적 연대에 대한 갈증과 몇 달간의 고독과 심리적 고립 이후 가족과 친구친척들과 만나고 싶은 갈망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사회화된 존재의 필수적 욕구인간 종()으로서의 그것을 표출할 뿐이다유럽에서 그들을 바이러스 급속 확산의 새로운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미디어가 몇 주 동안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부르주아 사회의 잔인성과 비인간성 그 이상을 증명하는 것이다.

 

위기의 시기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회모두에게 자리가 주어지고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의 열쇠를 쥔 계급으로 보이기를 바란다하지만 이 엄청난 규모의 건강경제사회적 위기가 강타하자장막은 걷히고자본주의 착취의 뻔뻔한 끔찍한 모습이 등장 한다삶이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상품이 되는 체제그것이 이윤이 될 것 같고너무 값나가지 않는 조건에서 인정받는 체제경제 위기로 이들 사회는 혼돈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극도의 비인간성의 나락으로 타락하고점차 무책임하며 생명까지 위협하는 정책들이 삶 자체에 적용된다이런 거짓말쟁이 계급언론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쏟아내는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미래의 세계는 더는 이전의 세계와 같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는 더 나은 보건 서비스가 있을 것이다’, ‘마스크가 있고 실험을 할 것이다’, ‘세계는 더욱 단결될 것이다’, ‘요양원의 노인들을 돌볼 것이다’, ‘고독은 끝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등을 오늘의 우리는 믿어 버린다이 위선적이고 장황한 이야기들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것이라거나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부르주아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광범위한 야만주의의 갱신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바짝 뒤쫓아 왔다그러므로 이후의 세계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리라는 말은 진실이다세계는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부르주아지의 약속은 믿기 원하는 이들에게만 확신을 줄뿐이다하지만 부르주아지가 사회에 잉태시킨 고통 받고 있는 세계악몽의 세계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더 이상의 어떤 환상도 가질 수 없다.

 

 

2020년 5월 2

(Sam)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옮긴이 지나

 

<원문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17/population-lockdown-bourgeois-state-shows-its-brut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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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을 깨우지 말고 혁명의 심장을 깨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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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이름 없이 싸우다 간 노동자를 기리는 새긴 돌(시비)을 세우자

백기완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함께 했던 시간과 투쟁을 기억합니다.

 

고단하고 험난한 투쟁의 길에서 먼저 가신 동지들께

반성과 성찰, 그리고 코뮤니스트의 실천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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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싸우다 간 노동자를 기리는 새긴 돌(시비)을 세우자

 

오세철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문명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다다시 한 번 야만인가 새로운 대안 사회인가를 선택해야하는 길목에 서 있다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거나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수억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지키는 짐승 같은 삶을 살고 있다세계 곳곳의 생태계 파괴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자는 그 노동력을 팔 시장에서 쫓겨나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는 공권력에 쓰러지거나 감옥에 갇히고 있다.

 

약육강식과 이윤의 법칙에 철저한 이 자본주의 문명은 인류의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전쟁터로 힘없는 노동자들을 민족과 국가의 이익이라는 미명아래 총알받이로 내몰고 극악한 파시즘 체제 속에 가둔다경제의 위기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인류는 진정으로 자유와 평등이 살아 숨 쉬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를 갈망하고 있다이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위대한 혁명가나 투사만이 아니고 이름 없이 싸우다 죽어 간 노동자들이었다.

 

누가 그들을 기억하는가지배세력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추앙하고 그들의 죽음도 떠받들어 미화한다노동운동민중운동 세력 역시 명망가나 지도적 인물들만 기록하고 역사에 남긴다.

 

인간다운 삶과 사회를 만들려고 싸우다 죽은 이름 없는 노동자와 민중을 기리는 역사적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유럽 등지를 가보면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지배세력과 싸웠던 투쟁의 현장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기념비에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박물관이나 묘지에만 가두어 놓지 않고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어떤가열사들의 묘역을 몇 군데 만들기는 했으나이름 없는 노동자 민중의 기록과 현장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일용노동자 가대기 언니

 

얼마 전 백기완 선생의 회고록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읽다가 눈에 띄는 이야기 내 눈을 띄어준 스승가대기 언니에서 백 선생의 뜻 깊은 제안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그가 열서너 살 때 만나 스승으로 받아드렸던 이름 없는 일용노동자 가대기의 이야기였다가대기란 창고나 부두에서쌀가마니 따위의 무거운 짐을 갈고리로 찍어 당겨서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을 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제 어깨 밖에 없는 그가 진짜 싸움에 대해 깨우쳐 준 말이다. “싸움은 턱없이 뺏어대는 놈있는 놈하고 하는 거야 임마 가진 것이라고는 ’ 밖에 없는 놈끼리 붙어봐야 코만 터져이놈들아였다.

 

그러면서 백 선생은 나는 그적지까지 가장 따르고 싶은 이가 있다면 몽양도 아니고 백범도 아니고 조소앙 선생도 아니었다그 누구보다도 가대기 언니였다고 고백한다.

 

백 선생은 제안한다서울역 어딘가에 새긴 돌(시비)이라도 하나 세워 예순 해도 앞서서 일러준 노동자의 철학을 지금의 노동자들에게 이어주고 싶다는 것이다이 땅에 가대기 언니가 하나뿐이겠는가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울 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싸우다 간 노동자들을 기리는 시비를 투쟁의 현장 곳곳에 세우는 운동을 펼치자고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제안한다.

 

<출처다시 혁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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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코뮤니스트 새해 인사

 

 

 

동지들께 설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영상으로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올해도 작년과 다름없이, 언제나 변함없이

투쟁하는 동지들이 희망입니다.

 

<영상 보기>  

https://youtu.be/_S0XGHPoL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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