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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20/12/11 17:56
  • 수정일
    2020/12/11 17:56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임성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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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작업을 하던 노동자 세 명이 질식했다지하에 들어차 있던 가스 때문이었다세 명의 노동자들이 나오지 못하자작업반장은 맨홀 안으로 다시 세 명의 노동자들을 내려보냈다그들도 역시 나오지 못하고 쓰러졌다질식한 세 명의 노동자를 포함해서 구조하러 간 사람 중의 한 명까지 네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재료 분배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회사에 안전고리의 교체를 요구했다고리가 낡아서 사고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회사는 작업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안전고리를 교체해주지 않았다그 노동자는 작업 중에 고리가 끊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결국 그는 사망했다이것이 과연 안전사고일까?

 

맨홀이나 탱크 같은 밀폐공간에서 작업을 할 때는 사전에 환기가 필수이다이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점검과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노동자를 무조건 밀어놓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행위가 작업책임자의 과실이며 안전을 등한시한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회사에서 안전고리 하나만 제 때 교체를 해주었으면 낙하물에 의한 사망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업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업의 부도덕과 안전불감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누가 봐도 명백한 '살인'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노동현장 곳곳에서 일어난다똑같은 사고가 똑같이 반복된다날마다 노동자를 죽이는 '살인'은 지속된다그러나 기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사망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다.

 

2018년 12월 11일 새벽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다김용균은 스물네 살사회에 첫발을 디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그는 끝내 스물다섯 살이 되지 못했다김용균의 죽음 이후노동자들에겐 무엇이 바뀌었고 노동현실은 무엇이 달라졌는가김용균의 죽음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법이 27년 만에 국회에서 개정되었지만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변한 게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민주노총 등 249개 단체(2020년 9월 23일 현재)가 참여하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이번 정기국회 내 진행시킬 것을 요구하며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매일같이 5~6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다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 우리 곁에 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멀쩡한 팔다리가 잘리고머리가 터지고허리가 끊기고온몸이 피투성이로 짓이겨져 목숨을 잃고 있는가핏물이 타고 뼈마저도 녹아서 없어지는가어떤 악독한 살인자들이 무기를 쥐고 있는가친기업 정부라고 하는오로지 자본가를 위한 권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살인교사자'들은 아닌가?

 

어제의 김용균이 오늘의 김용균이다어제의 김용균이 오늘도 손전등을 들고 밤을 꼬박 새우고 있다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까마득한 철제 난간 위에서지하의 깊은 가스실 안에서 비좁은 기계 틈을 기어가고 있다살이 발린 생선가시처럼비 맞은 새처럼 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나라인가자꾸만 되묻지 않을 수 없다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자랑만 넘쳐난다한국은 전 세계 200여 개의 국가 중에서 경제규모 11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한다군사력은 세계 6위 수준의 강국이라고 한다한국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고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풍요와 번영의 나라라고 하는데노동자들은 OECD 국가 산재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어간다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힘들고 어디에서건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있다하루아침에 푸른 생명의 종지부를 찍고 통곡 속에 누워 있다.

 

우리는 기억한다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민호라는 특성화고 학생이 야간일을 혼자 하다가 기계에 몸이 눌려서 죽은 일을민호는 한 달 잔업만 100시간이 넘었다고 한다열여덟 실습생을 그렇게 죽도록 부려먹다가 끝내 죽이고야 말았다그와 같은 일은 50년 전에도 있었다전태일을 분신하게 만들었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다락방 소녀들도 그랬다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산업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30년 전에도 그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우리는 세계가 놀랄만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아마 이대로 간다면 3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고 다쳐도 그들의 고통을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무수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기업도 정부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심지어 떼죽음을 당해도 뉴스에서는 그저 흔히 발생하는 사고로만 보도한다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노동문제가 되거나 사회적 의제가 되는 경우는 김용균의 경우처럼 극히 일부일 뿐이다.

 

2020년 5월 21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의 발표문에 따르면현대중공업에서는 창사 이래 467번째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한다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아무 탈 없이 배를 만든다최고경영자는 467명의 목숨을 앗아간 책임을 진 적이 없다예방조치를 취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별다른 비용을 쓰지도 않았다기업에겐 볼펜 값도 안 되는 돈으로 과태료나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한국의 대기업건설현장고위험사업장하청업체 등 모든 곳이 다를 바 없다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네공정개선 명령을 내리네하면서도 기껏해야 현장 소장이나 과장 같은 하급책임자를 기소하면 끝이다노동자의 사망사고로 기업주가 인신 구속된 적은 거의 없다벌금이라야 고작 몇 백만 원에 불과하고 많아야 1000~2000만 원이 상한선이다결과적으로 노동자를 죽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참으로 나쁜 정부와 더 못된 시어미 노릇을 하는 국회에서 노동자를 살릴 수 있는 보호법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야말로 노동자의 사망을 살인의 범주로 보지 않고 단순한 과실로 처리하는 노골적인 방관행위이다.

 

꿈 많은 청년 김용균의 몸이 찢겼지만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컨베이어는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 돌았다주변엔 비명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본래 정규직이 담당했던 일은 외주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맡겨졌고그의 젊은 피는 한줌의 검은 먼지를 가라앉히는 데 쓰이지도 못했다.

 

김용균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은 문재인 대통령비정규직과 만납시다라고 적힌 손팻말이었다그의 유품은 작업모를 쓴 사진과 고장난 손전등그리고 컵라면 세 개였다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김 군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면서 일하다 가방 속에 컵라면을 남겨두고 갔다두 죽음이 닮은 것은 컵라면뿐일까이들의 죽음은 원청과 하청외주화와 용역간접고용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한국 노동자들의 적나라한 현실이다이윤이 종교가 된 기업노동자의 하소연이 들리지 않는 정부의 공모가 어제의 김용균과 오늘의 김용균이라는 죽음을 낳고 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컵라면과 촛불을 분향소에 놓고 외쳤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죽음의 외주화를 멈춰라" "일하다 죽지 않게 해달라"그러나 김용균 2주기가 되는 올해에도 2000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사망했다김용균의 죽음 이후에도 끼임추락압착 등의 인재에 가까운 중대재해로만 한정해도 매년 600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차고 넘치는 김용균의 죽음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으니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죽음의 아가리에서 꺼낼 수 있을까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드리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믿음은 퇴색되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마저도 관철되지 않는 나라는 분명 큰 문제가 있다노동자가 노동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복지국가 대한민국'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김용균이 죽어야 정상적인 사회가 될까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국·캐나다·호주 등 외국은 '기업 살인법'으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는다사망사고는 매출액보다도 많은 벌금을 물려 기업의 문을 닫게 하기도 한다.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기업의 주의 의무와 책임 태만에 따른 근로감독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노동자의 목숨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그것이 일하는 사람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그럼에도또 그럼에도 저기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청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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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용균

 

내 영정을 들고

내가 걸어가네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부르르주먹을 쥐었다 펴면

핏빛 햇살 한 줌

저기 떨어진 내 머리

저기 끊어진 내 몸통을

내가 끌고 가네

맑게 빛나는 내 눈이

차갑게 감긴 내 눈을 보네

내 영정에 양복을 입히고

파란 넥타이 꿈을 동여매고

울먹울먹 절하네

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내가 먼저 가네

차마 돌아서지 못한 나를 안고

내가 울며 붙잡고 있네

 

詩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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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수많은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

김용균 동지 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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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  2020. 10. 15 

 

수많은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

 

 

12월 10일이면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먹먹함과 함께 김용균과의 약속을 얼마나 실천했는지를 생각하는 반성의 글이 쉽지만은 않다.


 

시키지도 않은 일과 충실하게 업무지시를 따른 죽음

 

2년 전 그날사고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 태안화력으로 허둥대며 출근을 했다공공운수노조 담당 간부에게 전화로 사고 소식을 전하고 TT- 04C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119 대원들과 현장 조합원들이 함께 수습하는 중이었다현장은 혼란스러웠고 정신이 없었다.

 

작업 중지 명령과 함께 현장 대기실에서 보낸 하루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사고에 대한 정황과 예측들에 서로들 놀라며김용균이 고통스러워했을 순간을 떠올리며 그저 괴로운 마음뿐이었다.

 

퇴근 후 빈소가 마련된 태안의료원에 갔을 때는 김용균의 부모님께서 그 짧은 하루에 당하신 여러 가지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나는 평소 고집스러웠던 용균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회사의 어처구니없는 말이었고다른 하나는 한국발전기술의 태안사업소 간부가 하도급 업체 노동자들과 함께 몸소’ 사고 현장을 깨끗하게 물청소를 했다는 것이다.

 

한국발전기술의 임원이 채용 당시 면접에서나마 보았을지도 모를 입사 3개월 차의 신입사원인 김용균의 고집스러움까지 기억하시고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하청 업체가 가진 안전사고에 대한 의식 수준과 유가족을 상대로 그들이 행해왔던 재해 당사자에게 책임 떠넘기기식 사고수습 방식까지모든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현장을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게 직접 물청소한 것도 문제이지만원청인 서부발전의 지시가 있었던 없었던 하청 업체 간부의 사고 현장 증거인멸과 은폐는 변하지 않는다회사 측의 업무지시에 따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작업을 하다가 죽음에 이른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시가 없었는데도 스스로 은폐하려 물청소에 임한 자는 생과 사로 나뉘었다.

 

현장의 설비개선과 발전사의 한결같은 삽질

 

발전사 출신 하청업체 임원 및 간부들의 아낌없는원청 발전사에 대한 사랑은 현실에서 인력구조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김용균 사고 이후 분명 현장이 바뀐 것은 있다대표적으로 2인 1조로 함께 작업한다는 것과 랜턴 없이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두려웠던 그 컨베이어 벨트 현장이 놀라울 정도로 밝은 LED 조명으로 바뀐 것이다어디서 나를 지켜볼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시카메라와 함께 말이다현장을 밝히는 불빛의 용도인지 현장 작업자들의 근무를 감시하기 위함인지 모르겠다.

 

2인 1조에 충원된 인원들은 1년 계약직이고정규직 전환과 관련한 노사전 협의체가 운영되는 동안은 하청업체 용역 계약의 3개월 단위 연장에 따라 근로계약도 연장은 되고 있다하지만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요즘의 상황에서 3개월 이후는 점쟁이나 알 일인지 모른다.

 

더욱 웃지 못할 사항은 그 자리가 여전히 발전사 퇴직자들의 재취업 창구로 기능한다는 것이다컨베이어 벨트와의 일상적인 사투와 낙탄 삽질을 경험하지 않은 발전사 퇴직자들 말이다.

적응하지 못한 채 퇴사에 따른 빈 공백은 교대근무 다른 과 인원의 대근으로 채우는 실정이다.

 

김용균 사고 이후 구성돼 운영되었던 설비개선 TF는 수많은 설비개선 항목의 공감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남기고 원청의 결정에 따른 셀프 설비개선 계획으로 마무리하였다그래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낙탄 회수 장치는 650m 구간을 200m 구간에만 설치했고그마저도 무용지물로 재공사를 해야 해서 지금은 정지되어 있다여전히 그 넓은 공간과 길이를 삽질로 처리하고 있다.

 

분진 저감장치는 제작사의 제어시스템 외주화로 업체는 사라지고 현장 설비와 자동제어는 엇박자가 나게 되어 그 문제를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돌아온 것은 중점관리로 인한 노동 강도의 증가다벨트에서 떨어지는 낙탄을 물을 흘려 처리하는 워터크리닝은 보여주기식으로 김용균 사고 현장 타워 내부에만 설치했고다른 구간은 낙탄에 막혀 물이 역류하는 상황이라 사용을 못 하고 있다.

 

산더미 같이 쏟아지는 낙탄을 치우느라 그저 한결같이 삽질이다오죽하면 근로감독관이 점검창을 열어 보고서 쏟아지는 낙탄량에 탄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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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향신문.  2020. 10. 15 

 

원청 발전사와 김용균이 있던 자리

 

태안사업소의 휴게실에는 아직도 버젓이 2019년 2월 자고용노동부 천안지청장 명의의 벽보가 붙어있다. ‘사망사고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온다.’

 

최근 태안화력의 화물노동자 사망사고에 따른 태안화력 본부장의 특별안전교육 문서에 내용은 더욱더 가관이다.

 

“2018년 12월 중대 재해 이후 국민 눈높이에 맞게 현장 환경개선 및 안전관리에 최선을 다했으나최근(9월 10안전사고 재차 발생함발주사는 안전의식이 많이 개선되었으나협력사는 아직도 부족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원청 발전사는 설비의 법적 소유권을 갖는다그러나 현장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손님일 뿐이다아무 권한도 없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손님 소유의 설비에 문제와 하자가 있다고 소리쳐도 소유권을 가진 발전사는 싫은 사람이 나가라고 한다그곳이 김용균이 일하던 발전소 삶의 현장이다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기업 발전소가 이렇듯 상식 밖의 내용으로 운영되는 실상을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

 

얼마 전 노웅래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추석 명절 기간에 태안화력을 방문했다국정감사를 앞두고 환노위 소속 의원으로 화물노동자 사망사고와 김용균 사고 이후 실태를 점검하러 방문했다늘 그래 왔듯이 국회의원 방문을 앞두고 대대적인 청소 지시가 떨어졌다함께한 근로감독관들조차 깔끔해진 현장에 놀라워했다.

 

방문 다음 날화물노동자 사망사고에 따른 특별근로감독 기간 중에도 또다시 하청 비정규직 정비노동자의 안전사고가 일어났고사고를 당한 노동자는 대퇴부를 크게 다쳐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다해마다 반복되는 죽음의 현장인 태안화력은 특별근로 감독이 아닌 상시 근로감독이 필요하다그들이 말하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높아진’ 발주사의 안전의식만큼 높은 수위의 책임과 처벌이 강제되도록 중대 재해기업 처벌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한국발전기술의 임금협상 과정에서 실명을 지칭하며 고액연봉자라는 표현이 나왔다 한다하지만김용균의 급여명세서가 보여주듯이 그들은 최저임금 보다 고작 9만 원을 더 받았다그것도 임금협상의 결과이지 회사 측에서 알아서 올려준 것이 아니다그동안 하청업체는 발전퇴직자의 재취업 창구로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강소기업으로 키워졌고원청은 그 하청업체를 통해 이윤을 남긴다.

 

수도권에 공급하는 전력의 비중이 높은 영흥당진의 화력 발전소와 함께 태안화력은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위해 9, 10호기에만 2만 톤에 가까운 석탄을 매일 컨베이어 벨트로 이송한다하루 상탄량은 정해져 있고저장 탱크의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개의 상탄 라인을 가동한다.

 

그러나 설비의 돌발 상황과 정비 시간을 고려하면 두 개 라인의 상시가동은 가능하지 않다이것이 태안화력의 설비 조건이다한 달 전쯤 모든 타워와 벨트의 점검창에 벨트 기동 중 점검창 개방금지라는 큼지막한 스티커가 부착되었다부착되기 전에는 어떠했을까아니 부착된 후에는 달라졌을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든 작업의 지시와 작업 상황을 카톡방에서 공유받는다원청의 지시사항은 사무실의 발전사 퇴직 간부들에게 전달되고각 교대근무의 파트장에게 지시된다벨트의 마찰열에 의한 자연발화를 해소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를 정지하고 낙탄을 처리해야 하지만그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안전하지 않은 작업과 위험이 판단되면 바로 작업 중지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실제 그럴 수 있을까이것이 태안화력의 현장 상황이다.

 

부상과 죽음이 이어지는 태안화력 상황과 조건이 발주사의 자의적인 안전의식 개선으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현장에 가끔 손님처럼 나타나서 지시사항을 남기고 사라지는 원청의 모습에서 개선된 안전의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현장의 조건과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안전사고와 죽음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2년 전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김용균이 서 있다그 자리가 절망과 죽음의 자리가 되지 않도록 남아 있는 우리가 싸워야 한다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을 바꾸기 위해 꾸준히제대로투쟁해야 한다.

 

김경진 김용균재단 운영위원한국발전기술지부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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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엥겔스 탄생 200주년 : 마르크스를 번역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엥겔스 탄생 200주년 : 마르크스를 번역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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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올가을 예정된 평가와 계승에 대한 토론에 앞서 혁명 동무 맑스와의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는 편지글, 맑스 저서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자는 엥겔스의 글을 소개한다.

 

 

 자본」 1권은외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관련해서는공공의 재산이다그러므로 영국 사회주의 집단 안에서는 번역이 마르크스 유작 관리자의 책임 아래 준비되고 출간될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잘 알려졌지만텍스트가 충실하고도 제대로 변환되기만(rendered: translate와 구분하기 위해서 변환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옮긴이한다면 그 번역이 다른 사람에 의해 먼저 이루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투덜거릴 권리가 없다.

 

존 브로드하우스(John Broadhouse)에 그런 식으로 시도한 번역 첫 몇 페이지가 투데이(To-Day) 10월호에 실렸다분명하게 말하겠는데그것은 결코 텍스트의 충실한 변환이 아니며이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마르크스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몇 명의 옥스퍼드 대학생이 노가 네 개 있는 보트로 노를 저어 도버 해협을 건너고 있을 때그들 중 한 명이 노를 헛 저었다(caught a crab)”1)고 신문에 보도되었다쾰른 신문(Cologne Gazette)의 런던 통신원이 이것을 그의 신문에문자 그대로 그리고 충실하게, “게가 노 젓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노에 걸려 잡혔다라고 보도했다런던 한복판에서 수년간 살아온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기예의 기술적인 용어들에 마주치게 된다면 바로 그와 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겠지만단순한 독일어로 된 책에 대해서 꽤 쓸 만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독일 산문 작가 중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글을 번역하는 일에 착수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이제 정말로 브로드하우스 씨가 게를 잡는 일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이 더 있다마르크스는 이 시대에 가장 정력적이고 간결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그를 적절하게 변환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에도 통달해야만 한다하지만 브로드하우스 씨는 분명 존경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재주와 언어 구사력을 지녔지만관습적인 유명 문필가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용되는 제한된 범위의 영어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이런 상황에서 그는 너무 쉽게 행동한다하지만 이런 식의 영어는 자본이 번역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강력한 독일어는 그것을 변환하기 위해 강력한 영어가 필요하며 최상의 언어 자원에 의존해야만 한다새로 만들어진 독일어 용어는 영어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야만 한다하지만 브로드하우스 씨가 그러한 어려움에 봉착하자마자그의 언어 자원은 그를 저버리고 그의 용기마저 꺾어버렸다이단 같은 모험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제한된 밑천을 아주 조금 확장하고일상적인 문헌의 관습적인 영어에 아주 조금 혁신을 가하면서그는 자신의 귀에는 거슬리지 않지만저자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다소 불명확한 용어로 어려운 독일어 단어를 변환한다설상가상으로 그는 그 용어가 다시 등장할 때전문 용어는 언제나 같은 어구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완전히 다른 용어들로 그것을 번역한다그리하여 그는 첫 번째 절의 제목에서, grösse가 크기 또는 한정된 양에 상응하는 명확한 수학 용어지만규모(extent)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Werthgrösse을 가치 규모(extent of value)”라고 번역한다그리하여 Arbeitszeit의 뜻으로 단순히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들로 변환한다. (1) “시간-노동,” (2) “노동의 시간,” (3) “노동-시간,” 그리고 (4) “노동 기간.” (1) “시간-노동은 오히려 시간으로 지급한 노동이나 힘든 노동에 시간을 제공하는” 사람이 수행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4) “노동 기간은 2권에서 마르크스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했던 용어(Arbeitsperiode)이다지금은 잘 알다시피노동-시간의 범주는 책 전반에 걸쳐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중의 하나인데, 10쪽도 안 되는 곳에서 그것을 네 개의 서로 다른 용어로 번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상태 그 이상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어떤 상품이 자신을 나타내는 첫 번째 측면은 유용성의 대상이라는 측면이고그와 같이 그것이 지닌 질이나 양으로 고려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완전체즉 수많은 질이나 속성들의 총체이고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용할 수 있다이 서로 다른 방식들따라서 어떤 물건의 다양한 용도를 발견해 내는 것은 역사 행위이다유용한 물건들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척도를 찾아내고 확정하는 일 또한 그렇다상품을 측정하는 방식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는 측정되는 대상의 본성 때문에또 부분적으로는 관습 때문에 발생한다.”2)

 

이것이 브로드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변환한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결국 대상이 유용하게 쓰일 다채로운 양식은 간의 과업이다결국. 유용한 물건들의 양의 사회적 측정 수단을 발견하는 일 또한 그렇다상품들의 크기(bulk)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 그 서로 다른 본성 때문에 발생한다.”

 

마르크스에게서물건들의 다양한 유용성을 찾아내는 것은 역사 진보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브로드하우스 씨에게서그것은 시간의 과업에 지나지 않는다마르크스에게서는인정된 공통의 척도를 확정하는 데도 같은 조건이 적용된다브 씨에게서는또 하나의 시간의 과업이 유용한 물건들의 양의 사회적 측정 수단의 발견에 있는데마르크스는 분명 측정 수단의 종류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그런 다음 그는 Masse(측정 수단) Masse(크기)로 오인하고그리하여 지금까지 잡힌 가장 멋진 게들 가운데 하나를 마르크스에게 뒤집어씌우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서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용가치는 부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건 그 부를 구성하는 재료를 형성한다.”(부의 사회적 형태그것에 의해서 부가 보유되고 분배되는 전유의 특별한 형태). 브로드하우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용가치는 항상 사회적 형태를 띠는 부의 실질적인 토대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것은 가식적인 상투어이거나 완전히 무의미(터무니없는 말)이다.

 

상품이 자신을 나타내는 두 번째 측면은 그것의 교환가치이다모든 상품은교환가치를 지니는 것들 사이의 대비를 통해서 변화하는 비율로교환 가능하다는 점이 사실은 모든 상품이 그것들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나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여기서 마르크스 책에 있는 가장 섬세한 분석들 가운데 하나를 재생산할 때 저지르는 부주의한 방식은 건너뛰고바로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로 나아가겠다. “모든 상품에 공통된 이 무엇이 기하학적물리학적화학적 또는 기타 자연적 속성일 수는 없다상품들의 물질적 속성들은 그 상품들을 유용하게 만드는 한에서만즉 그것들이 상품들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한에서만 고려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상품들의 교환관계의 특징점은 분명히 상품들의 사용가치로부터 추상()을 만드는3) 바로 그러한 행위이다이 관계 안에서하나의 사용가치는그것이 같은 비율로 제공되는 한에서다른 어떤 사용가치와 동등하다.”

 

이제 브로드하우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겉보기에 분명하게 상품들의 교환-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추상적인 형태의 이것들의 사용가치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용가치는 그것이 동일한 비율로 존재하는 한에서 꼭 다른 사용가치만큼 가치가 있다.”

 

따라서 사소한 실수를 제쳐놓더라도브로드하우스 씨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의 정반대 것을 말하도록 만든다마르크스에게서상품들의 교환관계의 특징은 추상 전체가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로 구성되며그것들은 사용가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고려된다는 사실이다그의 해석자는 교환율(여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의 특징은, “추상적인 행태에서” 취해질 뿐인바로 그것들의 사용가치라고 말하게 만든다그런 다음에 몇 줄 지나서그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문장을 제시한다. “사용가치들로서상품들은 오직 다른 질일 수 있고교환가치로서 그것들은” 추상적이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은, “오직 다른 양일 수 있으며따라서 사용가치를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이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거듭해서 같은 오해를 반복하는 브로드하우스 씨를 발견하게 될 때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막 인용한 그 문장 다음에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상품들의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면) “그것들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즉 노동 생산물들이라는 속성만 남는다그러나 이 노동 생산물조차 이미 우리 수중에서 변화를 겪었다우리가 그것의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고 하면우리는 또한 노동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유형의 요소와 형태들로부터 추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브로드하우스 씨에 의해 영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사용가치를 상품들의 실질적 재료로부터 분리한다면오직 하나의 속성즉 노동 생산물의 속성만 남는다. (어디에사용가치에 아니면 실질적 재료에?: 엥겔스그러나 노동 생산물은 이미 우리 수중에서 변형되었다우리가 그것에서 그것의 사용가치를 추출한다면우리는 또한 그것의 사용가치를 구성하는 스태미나와 형태를 추출하는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관계에서그것들의 교환가치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사용가치와는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서 나타났다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노동 생산물의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면앞에서 우리가 확정한 것처럼우리는 그것들의 가치에 도달한다.” 이것을 브로드하우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율에서 그것들의 교환가치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사용가치와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우리가 이제 노동 생산물들에서 사용가치를 사실상 추출한다면그때 확정되었던 것처럼우리는 그것들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브로드하우스 씨는 서랍이나 금고에서 돈의 추출과 같은 유형의 것들 이외에 어떤 다른 추상 행위나 양식들에 대해서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그러나 추상과 빼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번역가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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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의 의미를 영어의 무의미로 변화시키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마르크스의 가장 우수한 연구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이중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사용가치의 생산자로 여겨진 노동은같은 노동이 가치 생산자로 여겨질 때의 노동과는 다른 특성의 것이고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다전자는 방적·직조·쟁기질 따위의 구체적인 종류의 노동이고후자는 방적·직조·쟁기질 따위에 공통된인간의 생산적인 활동의 일반적인 특성으로하나의 공통된 용어즉 노동(labour) 안에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전자는 구체적인 형태의 노동이고후자는 추상적인 형태의 노동이다전자는 기술적 노동이고후자는 경제적 노동이다요약하면(영어에는 양자에 대한 용어가 존재한다전자는 labour는 별개의 것으로서 work이고후자는 work와 별개의 것으로 labour이다이 분석 이후에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처음에 상품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것으로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타났다그다음에 우리는 노동도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에서그것이 지닌 능력으로서 그것에 속하는사용가치 창조자와 같은 특성을 더는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브로드하우스 씨는 자신이 마르크스의 분석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면서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는 첫 번째로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합물 간주했다그다음에 우리는 노동이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에서그것이 사용가치 생성자인 한에서의 저 특성을 소유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마르크스가 희다라고 말할 때브로드하우스 씨는 왜 검다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만하면 충분하다이제 더욱 재미있는 것을 보자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민 사회에서는모든 사람이 상품 구매자로서 이 모든 상품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법적 가설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시민 사회(Civil Society)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영어이고퍼거슨(Ferguson)의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책은 백 년도 더 된 것인데도브로드하우스 씨에게는 이 용어가 이해하기 힘겨운 것이다그는 그것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으로 변환하고그래서 그 문장을 무의미로 바꾸어버린다그들이 구매해야 하는 상품의 본성과 가치에 무지하여소매업자들 등에 의해 사기당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의 생산(Herstellung)은 사용가치의 확립으로 변환된다마르크스가 만약 아주 적은 양의 노동으로 석탄을 다이아몬드들로 변형시키는 데 성공한다면그것들의 가치는 벽돌의 가치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라고 말할 때보아하니 브로드하우스 씨는 다이아몬드가 탄소 동소체 형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석탄 콜라로 바꿔버린다그와 비슷하게 그는 브라질 다이아몬드 광산의 총 산출량을 모든 산출량의 이윤 전체로 변형시킨다그의 수중에서 인도의 원시적 공동체들은 숭고한 공동체들이 된다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그 고유의 목적에 알맞은 일정한 생산 활동 또는 일정한 유용 노동이 들어 있다.” [“들어 있다(contained)” 독일어(steckt)는 잘 번역된 것이다상품의 사용가치 생산은 그 시점에 이미 소비되었기 때문이다브로드하우스 씨는 분명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일정한 양의 생산 능력 또는 유용한 노동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질을 양으로 바꾸어버릴 뿐 아니라 막 소비된 생산 활동을 소비될 생산 능력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제 그만하자나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모든 면에서 마르크스를 번역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보다 열 배 더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특히 그는 정말로 진지한 과학적인 저작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ederick Engels)

1885년 10월 작성

 

옮긴이 | 김종원

 

 

 
<주>
 
1. 단어 그대로 옮기면, “게를 잡았다”가 된다. (옮긴이)
 
2. 이 구문과 다음 구분에 있는 강조는 모두 엥겔스가 추가한 것이다.
 
3. “make abstraction from”으로,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고, ‘추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추상’이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 옮겼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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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20/12/07 14:39
  • 수정일
    2020/12/07 14:4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임성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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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작업을 하던 노동자 세 명이 질식했다지하에 들어차 있던 가스 때문이었다세 명의 노동자들이 나오지 못하자작업반장은 맨홀 안으로 다시 세 명의 노동자들을 내려보냈다그들도 역시 나오지 못하고 쓰러졌다질식한 세 명의 노동자를 포함해서 구조하러 간 사람 중의 한 명까지 네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재료 분배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회사에 안전고리의 교체를 요구했다고리가 낡아서 사고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회사는 작업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안전고리를 교체해주지 않았다그 노동자는 작업 중에 고리가 끊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결국 그는 사망했다이것이 과연 안전사고일까?

 

맨홀이나 탱크 같은 밀폐공간에서 작업을 할 때는 사전에 환기가 필수이다이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점검과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노동자를 무조건 밀어놓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행위가 작업책임자의 과실이며 안전을 등한시한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회사에서 안전고리 하나만 제 때 교체를 해주었으면 낙하물에 의한 사망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업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업의 부도덕과 안전불감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누가 봐도 명백한 '살인'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노동현장 곳곳에서 일어난다똑같은 사고가 똑같이 반복된다날마다 노동자를 죽이는 '살인'은 지속된다그러나 기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사망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다.

 

2018년 12월 11일 새벽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다김용균은 스물네 살사회에 첫발을 디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그는 끝내 스물다섯 살이 되지 못했다김용균의 죽음 이후노동자들에겐 무엇이 바뀌었고 노동현실은 무엇이 달라졌는가김용균의 죽음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법이 27년 만에 국회에서 개정되었지만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변한 게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민주노총 등 249개 단체(2020년 9월 23일 현재)가 참여하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이번 정기국회 내 진행시킬 것을 요구하며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매일같이 5~6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다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 우리 곁에 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멀쩡한 팔다리가 잘리고머리가 터지고허리가 끊기고온몸이 피투성이로 짓이겨져 목숨을 잃고 있는가핏물이 타고 뼈마저도 녹아서 없어지는가어떤 악독한 살인자들이 무기를 쥐고 있는가친기업 정부라고 하는오로지 자본가를 위한 권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살인교사자'들은 아닌가?

 

어제의 김용균이 오늘의 김용균이다어제의 김용균이 오늘도 손전등을 들고 밤을 꼬박 새우고 있다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까마득한 철제 난간 위에서지하의 깊은 가스실 안에서 비좁은 기계 틈을 기어가고 있다살이 발린 생선가시처럼비 맞은 새처럼 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나라인가자꾸만 되묻지 않을 수 없다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자랑만 넘쳐난다한국은 전 세계 200여 개의 국가 중에서 경제규모 11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한다군사력은 세계 6위 수준의 강국이라고 한다한국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고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풍요와 번영의 나라라고 하는데노동자들은 OECD 국가 산재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어간다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힘들고 어디에서건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있다하루아침에 푸른 생명의 종지부를 찍고 통곡 속에 누워 있다.

 

우리는 기억한다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민호라는 특성화고 학생이 야간일을 혼자 하다가 기계에 몸이 눌려서 죽은 일을민호는 한 달 잔업만 100시간이 넘었다고 한다열여덟 실습생을 그렇게 죽도록 부려먹다가 끝내 죽이고야 말았다그와 같은 일은 50년 전에도 있었다전태일을 분신하게 만들었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다락방 소녀들도 그랬다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산업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30년 전에도 그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우리는 세계가 놀랄만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아마 이대로 간다면 3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고 다쳐도 그들의 고통을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무수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기업도 정부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심지어 떼죽음을 당해도 뉴스에서는 그저 흔히 발생하는 사고로만 보도한다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노동문제가 되거나 사회적 의제가 되는 경우는 김용균의 경우처럼 극히 일부일 뿐이다.

 

2020년 5월 21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의 발표문에 따르면현대중공업에서는 창사 이래 467번째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한다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아무 탈 없이 배를 만든다최고경영자는 467명의 목숨을 앗아간 책임을 진 적이 없다예방조치를 취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별다른 비용을 쓰지도 않았다기업에겐 볼펜 값도 안 되는 돈으로 과태료나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한국의 대기업건설현장고위험사업장하청업체 등 모든 곳이 다를 바 없다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네공정개선 명령을 내리네하면서도 기껏해야 현장 소장이나 과장 같은 하급책임자를 기소하면 끝이다노동자의 사망사고로 기업주가 인신 구속된 적은 거의 없다벌금이라야 고작 몇 백만 원에 불과하고 많아야 1000~2000만 원이 상한선이다결과적으로 노동자를 죽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참으로 나쁜 정부와 더 못된 시어미 노릇을 하는 국회에서 노동자를 살릴 수 있는 보호법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야말로 노동자의 사망을 살인의 범주로 보지 않고 단순한 과실로 처리하는 노골적인 방관행위이다.

 

꿈 많은 청년 김용균의 몸이 찢겼지만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컨베이어는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 돌았다주변엔 비명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본래 정규직이 담당했던 일은 외주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맡겨졌고그의 젊은 피는 한줌의 검은 먼지를 가라앉히는 데 쓰이지도 못했다.

 

김용균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은 문재인 대통령비정규직과 만납시다라고 적힌 손팻말이었다그의 유품은 작업모를 쓴 사진과 고장난 손전등그리고 컵라면 세 개였다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김 군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면서 일하다 가방 속에 컵라면을 남겨두고 갔다두 죽음이 닮은 것은 컵라면뿐일까이들의 죽음은 원청과 하청외주화와 용역간접고용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한국 노동자들의 적나라한 현실이다이윤이 종교가 된 기업노동자의 하소연이 들리지 않는 정부의 공모가 어제의 김용균과 오늘의 김용균이라는 죽음을 낳고 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컵라면과 촛불을 분향소에 놓고 외쳤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죽음의 외주화를 멈춰라" "일하다 죽지 않게 해달라"그러나 김용균 2주기가 되는 올해에도 2000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사망했다김용균의 죽음 이후에도 끼임추락압착 등의 인재에 가까운 중대재해로만 한정해도 매년 600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차고 넘치는 김용균의 죽음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으니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죽음의 아가리에서 꺼낼 수 있을까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드리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믿음은 퇴색되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마저도 관철되지 않는 나라는 분명 큰 문제가 있다노동자가 노동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복지국가 대한민국'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김용균이 죽어야 정상적인 사회가 될까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국·캐나다·호주 등 외국은 '기업 살인법'으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는다사망사고는 매출액보다도 많은 벌금을 물려 기업의 문을 닫게 하기도 한다.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기업의 주의 의무와 책임 태만에 따른 근로감독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노동자의 목숨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그것이 일하는 사람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그럼에도또 그럼에도 저기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청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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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용균

 

내 영정을 들고

내가 걸어가네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부르르주먹을 쥐었다 펴면

핏빛 햇살 한 줌

저기 떨어진 내 머리

저기 끊어진 내 몸통을

내가 끌고 가네

맑게 빛나는 내 눈이

차갑게 감긴 내 눈을 보네

내 영정에 양복을 입히고

파란 넥타이 꿈을 동여매고

울먹울먹 절하네

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내가 먼저 가네

차마 돌아서지 못한 나를 안고

내가 울며 붙잡고 있네

 

詩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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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엥겔스 탄생 200주년 : 가족, 편지, 혁명 동무

엥겔스 탄생 200주년 가족편지혁명 동무

 

 

<편집자 주>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올가을 예정된 평가와 계승에 대한 토론에 앞서 혁명 동무 맑스와의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는 편지글맑스 저서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자는 엥겔스의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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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가 죽은 다음해인 1884년 10월 출간된 책은 미국 인류학자 모건(1818~1881)의 <고대사회>와 모건의 원시사회 저술의 문단을 인용한 마르크스의 노트에 의존했다엥겔스는 루이스 모건의 연구에 비추어라는 부제를 붙였다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모건은 인간 사회의 네 가지 본질적 특성으로 발명과 발견정부가족재산을 든다엥겔스는 이들 특성을 가족사유재산과 국가 발전의 통합된 연결 주제로 삼았다여성가족노동계급 재생산에 대한 역사적·이론적·포괄적 분석을 시도한다그는 사유재산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족이 가부장제와 연결된다고 봤다국가는 곧 억압·착취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국가라고 통찰한다앞서 모건은 재산을 관리할 수 없는 권력이라고 결론냈다.

 

엥겔스는 국가 출현에 대한 자신과 마르크스의 관심에 따라 야만으로부터 문명으로 이행에 초점을 맞추었다자본주의 대규모 역사적 영향 분석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 <자본>의 관점여성해방·인간해방 조건인 집합적 노동과정 참여를 통한 정치적 권리라는 엥겔스 관점이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성과 노동자에 비유하면 실질적 사회평등에 대한 투쟁을 통해 두 집단은 법적으로 평등권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자본에 의한 착취가 철폐되고 가사노동이 공공산업으로 전환될 때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뤄진다는 분석은 엥겔스의 탁월한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가족과 국가를 지배와 착취 이데올로기로 삼는 한국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려면 필요한 책이다올해는 엥겔스 탄생 200주년이다마르크스에 가려진 그를 기리려면 읽어야 할 책이다.

 

오세철의 내 인생의 책, 2020년 1월 1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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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의 편지칼 마르크스

 

병마에 고통받던 마르크스는 1883년 314일 영원한 혁명 동무 엥겔스 곁에서 눈을 감았다. 65세 때다서한집은 사망 한 해 전인 1882년 봄과 여름요양하러 간 알제리와 리비에라에서 딸 예니와 사위 롱게 등 가족과 엥겔스에게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질베르 바디아는 서한집의 해설에서 마르크스의 심경을 헤아리며 끝마쳐야 할 많은 일들에 대한 감정으로 그냥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탕탈(Tantal)의 욕망에 의해 고통당한다는 것을 우리의 마르크스는 절대 수용하지 않았으리라고 썼다.

 

편지 대부분의 수신자는 엥겔스였다두 혁명가의 인간적 관계가 편지에서 드러난다햇볕 때문에 예언자 같은 수염과 모발을 제거했다(1882년 428)는 일상·일신의 변화를 알렸다자신을 괴롭히는 병죽음 같은 슬픈 상념에 관한 암시를 딸들에게는 하지 않았다그 고통과 상념은 오직 둘도 없는 동무 엥겔스에게만 숨기지 않고 토로했다.

 

엥겔스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영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매사에 무관심해진다네”(1882년 58)라고 적었다마르크스는 항상 편지를 끝내면서 자네의 늙은 무어인이라고 적었다엥겔스는 12년을 더 살며 마르크스가 남기고 간 저술들을 완성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번영하는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파리코뮌을 보았던 마르크스는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의 시작으로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혁명가나 노동계급이나 자신들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마르크스의 마지막 서한집은 병들어 고통받는 위대한 혁명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다혁명의 객관적·필연적인 과제를 다시 곱씹어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오세철의 내 인생의 책, 2020년 1월 13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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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체류의 마르크스질베르 바디아

 

칼 마르크스는 1882년 초 마르세이유 항에서 출발하여 알제리로 가 그곳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으며, 5월 4일 프랑스로 되돌아와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한 달을 보냈다.

 

이 여행의 동기는 순전히 건강상의 이유에서다마르크스는 그의 가벼운 늑막염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는 있었으나기관지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런던의 여러 의사와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알제의 햇볕이 마르크스가 전에 머물었던 와이트 섬의 기후보다 좋아 그의 병세의 회복과 완쾌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를 돌보고 있던 엥겔스와 의사 돈킨은 마르크스가 알제에 가도록 강력히 권고하였다당시 영국에서 프랑스 리비에라처럼 요양지로 이름난 곳이 알제리였다. 1865년과 1870년 사이에 천명 이상의 영국인들이 겨울 시즌의 몇 주 또는 몇 달을 알제리에서 보냈다.

 

1882년 겨울은 특별히 포근하지도 않았고, 3월 날씨치고는 비가 계속 내렸다항해조건이 그의 건강상태를 더 나빠지게 하였다. 3월 6일 피를 토해 내었고각혈은 일주일동안 멈추지 않았었다유능하고 적극적인 의사 스테판이 마르크스의 병의 재발(늑막염)을 진단하였는데 또 다시 진료를 받을 수 있을는지마르크스에게 산책을 하지 못하게 하고독서와 담소도 줄이라고 권고하였다마르크스가 도착하자 즉시 오랜 산책을 한 페르메에게 마르크스가 중환자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고 의사선생은 충고하였다.

 

이와 동시에 마르크스의 지적활동은 거의 중단상태에 있다일은 하면 안 되고 신판을 내기 위한 자본론의 손질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의 서신교류는 직계가족과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한해서 2월말부터 6월까지 3개월에 걸쳐서만 이루어졌다마르크스는 그의 곁에 손자들을 두고 싶어 했고그들의 놀이 광경에서 재미있는 경탄과 놀람의 연극에도 참여하는 상상을 하고 제일 큰 외손자 죠니(장래의 쟝 롱게)에게 특별한 애정을 나타냈다그는 늘 초조하게 세 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으며특히 9월에 딸을 출산할 예니(롱게)에게 주어질 가사노동과 그녀에게 딸린 네 아이의 교육 등에 대해서도 안쓰러워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오래전부터 마르크스 가족의 일원이었다절친한 친구로 베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마르크스의 각종 병 치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마르크스가 건강의 실상을 들어내려고 노력하지만 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건강에는 이상 징후가 없다고 얘기하였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번씩이나 엥겔스에게는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고 있다너희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까지도 너희들은 희생시킬 수 있어회복기에 있는 환자에게 이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지라고.

 

그의 친구에게 무엇이 불만인가엥겔스가 자신을 알제리로 보냈고프랑스 리비에라에 가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이러한 마르크스의 불만은 근거가 희박하다어느 누구도 그 해 알제의 봄 날씨가 그 정도로 엉망일 줄은 예측할 수가 없었다더 나아가 본래 겨울철 프랑스 리비에라 날씨는 대개 건조한데 1882년은 이상한 해로 마르크스가 이곳에 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불만은 엥겔스(사위인 라파르그에게도 같은 불평을 하고 있다)가 마르크스 보고 하루 종일 거실이나 서재에 있지 말고 좀 오랫동안 걷기도 하고바깥공기도 마시고 하라고 종용했던 것이다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자기가 뭘 하든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10년 전 마르크스의 영애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1870년 11월 19)에 다음과 같이 썼다아빠(마르크스)의 건강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양호합니다이는 무엇보다 우리의 엥겔스 박사가 신경을 써준 덕택이지요… 그는 무어인(마르크스의 별칭)에게 장시간 걷게 함으로써 약 이상의 더 좋은 처방을 한 것입니다. 라고.

 

엥겔스에게 한 마르크스의 불평불만을 보면서, 1차 세계대전 때 로자 룩셈부르크가 옥중에서 쓴 서신 중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생각하였다. 지난날 나는 심술궂고불행하고그리고 병들었다이를 거꾸로 배열해보면 어떨까나는 병들었고불행했으며고약했을까?” 그렇다마르크스가 생애 처음으로 그의 친구에게 부당한 태도를 보이는데이는 그가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리라.

 

알제리에서의 편지, ‘질베르 바디아의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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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에게

 

 

친애하는 프레드,

 

이 엽서에 앞서 자네에게 전보를 쳤었다이 엽서가 쓸데없는 걱정을 줄 것 같아서 염려된다사실 별로 중요치 않지만 일련의 좋지 않은 일들(항해를 포함해서때문에 2월 2일 알제 도착했을 때 뼈 속까지 얼어 내 몸이 많이 상해있었어.

 

1881년 12월 날씨는 엉망이었으나 1월은 화창했다고 하네공교롭게도 2월부터 날씨가 춥고습기 차 제일 추웠던 2월 20, 21, 22일 3일간 아주 혼이 났다네불면식욕저하심한 기침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고덩치 큰 돈키호테처럼 심한 우울증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네.

 

쓸려고 가져온 경비로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는데선실에서 보낼 두 밤 동안 지겨운 기계소리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것을 상상하면이런 날씨를 피해 사하라 사막 초입에 있는 비스크라로 곧 바로 떠나볼까 생각도 해보았다그러나 연락관계나 교통편을 생각해보면 이런 새 여행이 7~8일은 잡아먹고 아주 고통스러울 것 같아 여행 시 여러 어려운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 얘기로는 비스크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고*가 날 경우 한 순간이라도 부상자에게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그러네!

 

2월 22일 오후가 되자 온도계가 따뜻한 날씨를 일러주고 있었지내가 도착하던 날 마음씨 좋은 페르메 판사가 도와줘 함께 알제 동쪽* 성벽 외곽 언덕에 위치한 빅토리아 팬션 호텔로 짐을 꾸려 올라가면서 오리엥 그랜드 호텔을 떠났어. (글쎄 이 호텔에 밥 맛 없는 급진주의 철학자 애쉬턴 딜키가 묵고 있었고영향력 있는 신문 프티콜롱이나 알제 지역신문의 종사자*모든 영국인은 귀족이라는 인상을 주며 브래드로그에서 왔다는 귀족들도 투숙하고 있다네). 내 방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지중해로 둘러싸인 알제항만언덕을 타고 계단식으로 늘어선 빌라들 (언덕아래 계곡이나 언덕위의 협곡에 자리 잡고 있는)*더 멀리는 많은 산들이 보이는데마티푸산 넘어 카빌리산맥의 눈에 쌓인 쥬르쥬라*산 정상이 보인다네(앞서 얘기한 것처럼 모든 산은 석회질 성분이라네). 아침 8시에 보는 이러한 파노라마 이상 더 좋은 경치가 어디 있겠나 싶다공기초목유럽 아프리카의 경이로운 혼합 등등매일 아침 10시나 9시에서 11시 사이 내 방* 위쪽에 있는 계곡과 언덕 사이를 산책하네.

 

이 모든 생활에 먼지는 빠지지 않지. 2월 23일과 26일 사이에는 화창한 날씨였으나지금은 여기서 폭풍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천둥 번개가 없이 한바탕 소란만 피우는 바람이 닥치고 있다네.(여기 알제에서도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와이트섬에서 입었던 것과 다르지 않네지금까지 빌라 안에서 얇은 외투를 코뿔소 가죽 옷으로 바꿔 입었을 뿐그 외에 현재까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원주민들도 그 위력에 놀라 위험하고 할퀴는 날씨라고 부른다네(2월 27일부터 9일 정도는 계속 될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3일만 좋은 날이었어이런 조건에서 내 기침은 고약한 가래*와 함께 갈수록 더 심해졌어내 몸 왼쪽 부위는 병의 악화에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잠도 설치고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있어그래서 스테판 의사를 불렀지(알제에서 최고의 의사라네). 어저께와 오늘 두 번에 걸쳐 나를 진찰하였다네무엇을 해볼까?

 

그가 해준 처방전으로 약을 사러 알제시내로 가는 중이야청진기로 자세히 검진한 후 이 의사의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1. 솔을 이용하여 칸다지스 콜로디온*을 바르고, 2. 적당한 양의 물에 탄 비산염 소다를 식사할 때 스프 한 숟가락 정도로 해서 들고, 3. 밤에 기침이 심할 경우*에만 코데인과 물약*을 섞어 스프 한 숟가락 정도와 먹을 것. 8일후 다시 왕진 오겠다고 했네나보고 체력단련은 적당히 하라고 하였네소일거리의 독서 외에는 진정한 의미의 지적활동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네상태가 안 좋아 예정보다 빨리(아니 오히려 늦게)런던으로 돌아 갈 수가 없을 것 같아환상을 가지거나 장밋빛으로만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네.

 

편지 쓰는 것을 멈춰야 할 것 같네알제 시내 약국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건 그렇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보다 더 감정표현을 싫어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지내 아내에 대한 추억을 내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겠지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런던의 내 딸들에게 이 늙은 닉에게 편지쓰라고 일러주게애비가 먼저 편지를 보내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간창조라는 주요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펌스는 어디 있나내 안부를 전해 주게.

 

헤렌무어 셜머모두에게도.

 

나의 고우에게

 

자네의 무어인

 

아참나의 친애하는 돈킨 의사에게처럼 스테판 의사선생에게 줄 코냑*을 잊지 마!

 

1882년 3월 1

 

빅토리아 호텔 팬션알제시 봉아퀘이대로 상 무스타파로

 

 

 

알제리에서의 편지칼 마르크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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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8 :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과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8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과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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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탄생한 노동자국가는 1920년대 후반까지는 노동자 권력 아래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한 시도들이 수행되었지만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 1930년대부터는 노동자계급에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우리는 러시아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1917년 신분제 폐지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군대 계급 폐지, 1,886개 전략회사 몰수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실시낙태법 제정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사회주의 적군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위와 같은 법적제도적인 혁명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노동자계급은 소비에트 생산 주체권력 주체가 되지 못했다최초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 10월 혁명이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사회주의로 이행이 실패하게 된 것이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 재도입과 1인 경영 강제 그리고 혁명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즉 정치반대 분쇄짜르 관료 재고용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재부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 틈새를 벌려놓고 말았다이 과정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고세계혁명의 연이은 실패는 볼셰비키를 고립시켰다.

 

결과적으로당시 러시아는 1차 대전 패배와 내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세계분업 내 후진적이고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일부 자본주의적 이행 형식을 들여와 이행을 추구한 것이다이러한 상황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5개년 계획 도입과 농업 집산화로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지만오히려 일국사회주의와 반노동자 계급적인 당 독재 강화를 가져왔다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판단 속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당이 노동자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레닌 죽음과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이것은 사회주의가 승리한 세계혁명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그러나 볼셰비키가 러시아 국가와 경제경영에서 엉키면 엉킬수록 고립되고 낙후한 상황에서라도 성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향한 단계를 더욱더 이론화하기 시작했고그중 하나인 원시적 사회주의 축적이론은 산업 성장을 노동계급 이해와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실제로 러시아의 산업 성장은 노동계급 착취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한마디로원시적 사회주의 축적은 본질에서 자본축적을 의미했다유럽 혁명운동 패배와 러시아에서 반혁명 과정은 코민테른을 구성하는 당들에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하고동시에 그 당들이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하면서 코민테른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일국사회주의는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법률상의 소유형식만을 바꾸어 놓았다그것들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진정한 성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단지 개인 소유의 법률상 측면만을 폐지한다노동자는 생산수단 사용에 있어서 어떤 진정한 통제력도 소유하지 않으며생산수단들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결국생산수단들은그것들을 소유하고 공동으로 담당하는 관료 조직을 위해 단지 집산화 되었을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일반화된 상품생산 체제이며자본주의 생산 목적은 잉여가치 획득과 축적이다여기서 자본주의가 단순히 상품생산과 시장의 무정부성에 기반을 둔 이윤추구 체제라는 기본인식을 넘어자본주의 핵심이 자본의 사회적 관계 지배이며자본은 본질에서 소외된 노동의 자기 확장임을 인식해야 한다소련 노동자들은 임금을 위한 교환을 위해 일했으며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소외시켰고 자본을 생산했다소련에서 잉여가치는 사적 자본주의와 같이 새로운 잉여가치를 추출하기 위하여 생산과정에 재투자되었다소련은 이러한 자본과 임노동의 사회관계가 생산수단과 생존수단의 국가 소유 제도로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으며스탈린주의 옹호자들의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국유화)가 전체인구에 의한 소유를 의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허위임이 밝혀졌고이것은 단지 소유형태의 법적인 형식이었을 뿐 전혀 노동자계급 소유가 아니었다결국국가와 그 관료 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 폐지를 향한 한 걸음 진전이 아니라단지 이것을 더 효과적으로 성형하기 위한착취강화를 위한 한 수단에 불과했다따라서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사적 소유의 부재(사회주의 경제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임에도)는 그것 자체로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반혁명은 국가가 주도하고 명령하는 특수한 형식을 취했고이것은 10월 혁명 이행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핑계로 민족경제 재조직화로 나타났다이 과정은 그 후 중국동유럽쿠바북한 등등에서 추진되었고이들 모든 국가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사회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를 참칭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인 자본과 관료 독재가 가장 쇠퇴한 형식으로 지배할 뿐이다특히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제국주의 동맹체제 안에서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중국은 러시아와 다르게 프롤레타리아혁명을 한 적이 없고따라서 단 한 번도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가진 적이 없어 현재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과거의 마오주의 이데올로기 모두 자국 자본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희생시키면서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데에 사용되었음을 되새겨야 한다.

 

소련 경험은 첫째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국가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소련에서의 국가는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일국사회주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노동자국가에 대한 환상은 이러한 은폐에 모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둘째명령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며사적 소유 철폐와 국가 소유로 전환만이 아니라생산수단 사회화와 국가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이어야 한다셋째러시아혁명 교훈은 국가기구가 반혁명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며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 관계 문제의 복잡성과 난해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으며이것을 해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넷째, 노동자국가, 코뮤니스트 사회와 전혀 관련이 없는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부르주아 착취체제는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통해 전복하고 진정한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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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으로아래로부터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코뮤니스트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 역할은 필수적이다하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따라서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즘은 혁명 시작과 함께 사회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이 집단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코뮤니즘 생산 관계는 생산수단 국유화와 사적 소유 철폐를 넘는 생산수단 사회화이며생산수단 사회화는 노동자평의회의 전 사회적 권력이라는 전제가 되어야 가능하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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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소련, (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세계혁명

소련, (국가자본주의그리고 세계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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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맑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2012년 故 김수행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라는 의미 있는 책을 쉽게 풀어 출간했다그는 한국에 맑스의 자본을 처음으로 번역하여 대중화시킨 원로 맑스주의 경제학자로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다그는 그때까지 러시아 혁명 이후 존재했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그 성격을 규정한 적이 없다맑스주의자들 사이의 토론과 논쟁에서도 그들의 국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앞으로 올 세계혁명에 대한 실천적 쟁점을 정면으로 다루고 언급하지 않았다당시 <사회실천연구소>가 개설한 자본」 강의가 끝난 후 수강생들과 함께 종강 뒤풀이를 하는 시간에 막역한 친구이며 동지인 그와 함께 그의 책 이야기를 하며 비로소 현실 사회주의와 미래사회에 관한 입장을 같이하게 되었다그의 책에서 몇 단락을 옮겨보자.

 

노동자가 해방되니 자본가도 해방되어 인간이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가 공산주의이고 사회주의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실상 소련이나 동유럽 나라들은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당과 정부의 관료들이 점점 더 인민 대중을 옥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자본론을 조금만 읽었더라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결국 소련식 자본주의가 내부의 위기 때문에 일반적 자본주의로 성장 전환한 것이 바로 1990년의 소련 사회의 붕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김수행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한울아카데미, p.4)

 

노동하는 개인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노동력을 국영기업이나 콜호스에즉 국가 자본에 판매하여 화폐를 얻고 이 화폐로 상품을 사기 때문에소련의 상품과 화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상품·화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생산수단이 국가 소유로 되었기 때문에 사적 소유는 없어지고 사회적 소유로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추론입니다… 이 경우 [사회적 소유] ‘사회는 개인들을 초월하여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라자각한 개인들의 연합을 가리키거나 연합한 개인들 그 자체입니다따라서 소련의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폐기되어이런 연합한 개인들의 사회적 소유가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국가 소유는 실질적으로 노멘클라투라의 소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앞의 책, pp. 158159)

 

나는 2008년 8월 <아우프헤벤그룹의 소련은 무엇이었나를 번역하는 도중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건으로 잡혀가는 바람에 번역이 지연되어 2009년 6월에 그 책을 발간하면서 다음과 같이 옮긴이의 말을 적었다.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실 사회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였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하지 않고 반혁명적 스탈린주의에 대한 옹호로 갇혀있는 맹목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1930년대에 가졌던 소련에 대한 방어 논리의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머지않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들이 혁명으로 쟁취해야 할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이러한 문제가 정리되지 않는다면반혁명의 참담한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아직도 혁명의 허상으로 붙들고 있거나스탈린주의를 교조로 삼는 사람들이 맑스주의자들이라면이 글과 같은 분석을 내놓기를 바랄 뿐이다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자.”(아우프헤벤오세철 옮김소련은 무엇이었나빛나는전망, pp. 5~7)

 

 

2. 소련은 무엇이었나 코뮤니스트 좌파

 

나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좌익공산주의자로 불렀고코뮤니스트 좌파 정치적 입장과 혁명 전략에 동의해 왔다소련을 국가 자본주의로 보는 그들의 입장과 분석에 원칙적으로 지지를 보냈지만위에 번역한 <아우프헤벤그룹의 자본주의로 보는 견해에도 비판적 지지를 하게 되었다그러면서 이 그룹의 글이 지니는 강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맑스주의 역사를 철저하게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면서 맑스의 가치론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트로츠키의 고뇌와 한계를 넘어서서 소련을 분석한 신트로츠키주의 이론가인 틱틴의 분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셋째국가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로 보는 견해(코뮤니스트 좌파와 제2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중심 입장)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소련이 본질에서 자본주의 상품생산에 기초하지만자본주의로 강제적 이행한 역사적 형식의 결과로써 생산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상품교환에 기초한 사회로서의 외양 사이에는 탈구가 있었다고 본다그리고 이 탈구는 가치 불구화와 사용가치 불량을 가져왔으며 이 두 가지는 소련의 비자본주의적 특성을 유지하는 기초가 되었고결국 소련의 궁극적 쇠퇴와 해체로 이끌었다고 본다. (앞의 책, pp. 6~7)

 

우선 코뮤니스트 좌파가 보는 자본주의와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먼저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은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제국주의 시대 자본의 실질적 형식인 금융자본 재산으로서 자본주의 본질을 바꾸지 않았다고 보면서 엥겔스가 반뒤링에서 … 주식회사로 전환도국가 소유로 전환도생산력 자본주의로서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그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 기관자본가 국가관념상 총자본가이다현대 국가가 생산력을 더 많이 자기 소유로 떠맡으면 떠맡을수록그것은 더욱더 현실적 총자본가가 되며국민을 더욱더 착취하게 된다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노동자로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자본 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라고 한 말을 강조하고 있다. (오세철 편저좌익공산주의빛나는 전망, pp. 499~500)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 자본주의 특수한 형식이었고 국가는 생산의 물질적 수단을 직접 통제하고 시장에 대한 독점을 장악했으며소련의 비참한 종말은 10월 혁명을 러시아 블록 몰락과 분리된 오랜 세월 동안 코뮤니스트 좌파가 발전시킨정치경제학 비판이나 맑스주의에 근거한 분석을 입증시키고 있다고 보았다따라서 국가 소유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한 비극은 이른바 소비에트 사회가 고전적(곧 서구자본주의의 조직적이고 법적인 구성으로 돌아온 종말을 보여주었다고 결론짓는다.

 

국가 자본주의에 기반한 러시아에서 반혁명은 유럽 혁명운동의 패배와 맞물렸다반혁명 과정은 당에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여했으며 동시에 그들 당이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게 했다당 없는 혁명의식을 생각할 수 없지만러시아 경험의 교훈은 가장 계급의식적인 당일지라도 소비에트와 고립되어 혁명을 유지할 수 없음을 입증했다지치고 죽은 노동계급에서 고립되었을 때 볼셰비키 지도부의 손에 남은 권력은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었다. (앞의 책, pp. 503~4)

 

한편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자본주의의 쇠퇴기 보편적 경향으로 국가 자본주의 출현을 설명한다쇠퇴기에는 어떤 민족자본도 제한 없이 발전할 수 없고각각의 민족자본 모두 무자비한 제국주의적 경쟁에 직면해 있어서 밖으로는 경쟁자들에 대항해 자신을 경제·군사적으로 가장 잘 방어하기 위해안으로는 증대하는 사회모순의 첨예화에 대응하기 위해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조직화한 것이 국가라고 설명한다경제 영역에서 국가 자본주의로의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인 특징들인 가치법칙경쟁 또는 생산 무질서를 소멸시키지 않는다생산 무질서가 국가적인 계획화 때문에 감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그것은 세계적 차원에서는특히 국가 자본주의가 방지할 수 없는 심각한 체계 위기 동안에는그만큼 더 강화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합리화이기는커녕자본주의의 붕괴 표현에 불과하다. (앞의 책, pp. 458~460) 또한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국가자본주의로 경향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 극도의 전체주의적 형식 속에서든 또는 민주주의 가면 아래 은폐된 형식들 속에서든국가기구와 특히 그 집행력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통해 표현된다.

 

국가 손에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국가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일국 사회주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사회주의’, ‘코뮤니즘’ 국가들이나 사회주의로 노정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허구는 이러한 은폐에 모두 뿌리를 두고 있다국가 자본주의로의 경향에 의해 초래된 변화들은 생산 관계의 수준에서가 아니라법률상 소유형식에서 발생한다또한프롤레타리아 잉여노동 점유 및 국가 자본 축적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행사하는 국가 관료조직은 일종의 계급을 이룬다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 국가의 형태를 띤 낡은 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국가와 그 관료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의 폐지를 향한 진전이 아니라 착취 강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이를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승리는국가 자본주의의 가장 발전된 형식들을 적용했고이러한 혁명들은 ‘10월 혁명 속행으로서’,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로서 냉소적으로 제시했던 일종의 민족경제 재조직화로서 표현되었다이러한 예는 그 후 다른 곳에서도 추구되었다중국동유럽쿠바북한인도차이나 등등 … 이들 모든 국가에서 코뮤니스트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프롤레타리아적인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으며역사상 가장 커다란 허위의 무게 아래에 자본 독재가 가장 쇠퇴한 형식으로 지배할 뿐이다이 나라들을 위한 그 어떤 비판적또는 조건부의’ 변호도 전적으로 반혁명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앞의 책, p.462)

 

 

3. 소련을 탐구하다

 

바로 이 시기에 소련을 탐구하다1)라는 방대한 소련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우리말로 옮겨져 출간되었다. <사회실천연구소>를 맑스주의 연구자들과 함께 만들면서 우리는 번역 시대를 다시 열자고 했다훌륭한 맑스주의 연구논문들을 번역 소개하여 맑스주의 사상이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 맑스주의적 실천에 이바지하자는 것이었다그 글들은 실천지에 계속 실렸다이 책을 옮긴 황동하는 실천지에 린던의 책을 번역 연재했고드디어 이를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 출신 서구 맑스주의자와 동유럽·소련 저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장기 전망으로 1917년에서 2005년까지 서구 맑스주의 사상을 따르면서만일 더 짧은 시간 축을 적용했다면 모호해졌을 연속성과 변화를 확증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90년 동안 이루어진 소련에 관한 탐구를 망라하여 정리한 저작은 처음 있는 작업이며 연구 역사와 구조를 큰 틀에서 인식하게 하는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맑스주의자이거나 맑스주의자가 되려는 모든 연구자와 실천 활동가는 자신이 특정한 정치 노선을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지침서로 손색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그러나 이 책에 망라된 연구에 직접 다가가 꼼꼼하게 검토하는 몫은 저자의 몫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 몫이다.

 

저자는 특히 서구 자본주의 안정과 활력에 대한 인식을 1917년부터 4단계로 구분하면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있는데첫 번째 단계는 1917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로 일반화된 상품생산이 지배했던 체제 쇠퇴하락붕괴를 강조하는 인식 유형두 번째는 1950년 초부터 1960년대 말까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역사적으로 보기 드물 만큼 경제가 성장하고 번영한 시기세 번째로 1960년대 말부터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경제위기에 빠졌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시기그리고 네 번째로 그 위기 속에서도 자본주의가 당분간 세계를 계속 지배할 것이라는 인식의 시기이다이 책이 2005년까지 연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2009년부터 진행된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쇠퇴와 파국의 경향을 고려한다면 아마 우리는 다섯 번째 단계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2장 10월 혁명에서 스탈린 시기까지(19171929), 3장 스탈린의 대도약에서 대조국전쟁까지(19291941), 4장 대조국전쟁에서 동유럽의 구조적 융합까지(19411956), 5장 소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프라하의 봄’ 탄압까지(19561968), 6장 프라하의 봄 탄압에서 페레스트로이카까지(19681985), 7장 소련 붕괴와 그 여파(1985년에서 현재까지), 8장 결론을 대신하며, 9장 메타 이론적 주석으로 짜여있다.

 

출판물 수는 28(19171928), 53(19291940), 130(19411956), 63(19571968), 402(19681985), 107(19862004)으로 총 783편이며 이를 시기별로 자본주의관료적 집산주의타락한 노동자국가 그리고 다른 이론으로 분류하여 연구자별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저자에 따르면 1917년부터 논쟁의 규모는 차츰 증가했고, 19571968년 동안에는 얼마간 줄어들었으며, 1968년 뒤 폭발적으로 늘었고, 1980년대 뒤부터는 다시 꽤 줄었다. (마르셀 판 데르 린던 지음황동하 옮김서구 마르크스주의소련을 탐구하다서해문집, p.373)

 

그는 서론에서 소련에 대한 이론화에 영향을 준 세 가지 요소로 서구에 대한 인식소련에 대한 인식그리고 맑스주의적 사회분석에 대한 해석을 꼽았는데 그 세 가지 영향도 여러 단계를 거쳤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정리하고 있다. (앞의 책,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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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론적으로 소련에 대한 이론 전개가 네 가지의 분명히 다른 단계로 구분된다고 정리한다.

 

1) 1917~1929년은 고전적 단선주의가 지배했다혁명 이후 사회가 성공적이든 또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든그도 아니면 실패로 끝날 운명이든 사회주의로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던 시기였다.

 

2) 1929~1968년은스탈린주의적 전환의 결과로서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형태가 소련에서 출현했다고 인식하던 시기였다세 가지 중요한 변종이 이 기간에 제시되었다즉 ① 국가 자본주의 이론과 ② 타락한 노동자 국가 이론이다두 가지 이론 모두 여전히 단선적 도식을 고수했다그뿐만 아니라 ③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도 나왔는데이 이론에 따르면 관료집단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기능했다그 이외에 주의 깊게 네 번째 접근을 한 시도(‘이름표 없는 이론들’)가 1940년대 초기에 (페드호사힐퍼딩), 그리고 특히 1950년대 초 서독에서 출현했으나이것들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었고 다시 잊혔다.

 

3) 1968~1985년의 시기에는 논쟁이 다시 활기를 띠었고네 번째 접근법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세 가지 오래된 접근법은 정체하는 경향을 보였다.

 

4) 1985년 뒤부터는 논쟁의 강도가 약해졌다그런데도 특별히 새로운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수가 많이 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앞의 책, p.376)

 

그러면서도 저자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면서 타락한 노동자 국가이론과 관료적 집산주의론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먼저 정통 맑스주의 관점에서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의 몇 가지 근본적 문제들을 지적하는데 첫째관료적 현상의 일시적 본질에 대한 의문둘째생산 영역과 분배 영역 구분이 맑스와 모순되는 점셋째분배와 관련된 기생적 기능을 관료 것이라고 봄으로써 관료가 생산 영역에 뿌리를 둘 수 있음을 부인했다는 점넷째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의 분리 모순을 들고 있다.

 

그는 노동자 국가 이론은 부분적으로는 정통에 어긋나고 부분적으로는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결론 짓는다. (앞의 책, pp.382~385) 이어서 소련을 지배계급이 있는 새로운 사회형태로 보는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에 대해 그는 첫째이론 전체가 맑스 틀에 맞지 않는다는 점즉 자본주의 뒤에 다른 추가적이고 온전한 역사적 단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맑스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고 잘라 말한다둘째관료계급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와 관련하여 논자들이 서로 모순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음을 들었고셋째이 이론이 옳다면 권력을 잡기 전에는 존재한 적도 없었던 지배계급이 출현했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점 때문에 맑스의 정설과 일치할 수 없다고 본다. (앞의 책, pp. 385~387) 또한저자는 1968년 이후 이름표 없는’ 이론의 급속한 확산과 정교화가 옛 이론들의 강점과 약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아닐지라도소련이 독특한 생산양식을 가진다는 점을 부인했던 네 번째 경향의 출현은 이해할만하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저자가 지적한 대로 1985년 이후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며특히 소련 붕괴 이후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이 책 37장 소련 붕괴와 그 여파(1985년에서 현재까지)에서 저자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제시한 몇몇 그룹을 간략하게 소개한다우선 <혁명당 동맹(LRP)>의 이론가인 월터 다음을 들 수 있는데그는 1990년 그의 책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에서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이행에 대한 새로운 시대 구분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트로츠키가 소련의 전개 과정을 분석했던 것처럼 소련이 발전했지만전환점이 된 1936년부터 몇 년 동안 자본주의 복원에서 정점에 다다른 반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그는 이를 국가화된 자본주의라고 불렀으며경쟁을 자본주의 본질로 보지 않았다그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추진력을 축적 노동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근본적으로는 임금체계를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로 규정했다. (앞의 책, pp. 320~322)

 

두 번째 영국의 반-볼셰비키 코뮤니스트 프로젝트에서 활동한 페르난데스는 그의 책 소련의 자본주의와 계급투쟁(1997)에서 자본주의 세 가지 결정적 특징(상품과 임노동과 이윤을 위한 생산)으로 생각한 것이 모두 소련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이 책 요약은 소련은 무엇이었나(아우프헤벤 지금오세철 옮김빛나는 전망)의 부록에 실려 있다. 219~233쪽을 볼 것)

 

세 번째는 <아우프헤벤그룹은 자본주의를 사적 소유와 시장의 무정부 상태를 기초로 한 이윤 추구체계로 보는 정통 맑스주의의 진부한 해석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본질이 소외된 노동의 자기 확장이라고 보았다소련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더라도 소련 노동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것이다이 그룹은 틱틴을 따를 것을그리고 소련을 이행기 사회구성체로 여길 것을” 제안했다그러나 보르디가와 이탈리아 좌파의 통찰을 따르는 우리는 소련을 자본주의로부터 이행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이행기에 있는 사회구성체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라고 말해 코뮤니스트 좌파의 국가 자본주의론과 차별성을 보인다. (더 자세한 것은 위에 언급한 책 소련은 무엇이었나를 볼 것)

 

7장 결론에서 저자는 비록 소련이 초기에 광범위한 공업화 방법과 경제외적 강제를 사용하는 데 성공했지만소련은 비효율성이 늘어나고 집중적인 성장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구화하는’ 세계 자본주의와 경쟁에서 경제적·군사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제성장 모델이었다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상 경향에서 차츰 지배적으로 되었다.”(앞의 책, p.369)고 결론짓는다.

 

타락한 노동자국가 이론과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이 정통 맑스주의 원칙에서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저자의 평가와 국가 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평가는 다르다그의 평가를 점검해 보자첫 번째 국가 자본주의 이론가들이 (국가자본주의 본질을 해석하는데 네 가지 관점을 지녔다고 보았다① 노동계급의 존재(제임스매틱레오), 또는 잉여가치 생산(위럴), 생산수단의 임금노동자 착취(홀룸베리), ② 이윤을 실현하고 시장계약을 통해 그들 사이 재화를 교환하려고 시도하는 개별 기업 사이의 분리(보르디가베틀랭샤토파디야), ③ 임금이 최소화되어 있고잉여가치가 투자와 비생산적 소비를 위해 사용될 경우(그란디소), ④ 이윤 극대화를 통해 유발된 자본 사이의 경쟁(클리프)이 그것이다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 본질을 임노동에 초점을 맞추는 대부분 이론이 마르크스 일면만을 강조했다고 해석한다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맑스가 보기에몇몇 요소를 구성요소로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한다이때 임금노동은 몇몇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만일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언급된 저자들은 맑스의 의미에서즉 체제에 내재하는 논리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생기는 소련에서 기업경쟁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 실패하고따라서 소련 국가 자본주의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어쨌든 임노동은 자본론」 1권에서 다루어졌지만경쟁은 자본론」 3권에서 폭넓게 다루어졌다.”(앞의 책, p.380)

 

그러나 일부 저자가 임노동을 가장 중요한 유일 조건으로 보았다고 해서 국가 자본주의 이론 전체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그의 결론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이는 1985년 이후 제기된 국가 자본주의 이론(다음페르난데스아우프헤벤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저자는 국가 자본주의 이론 문제를 지배계급 존재 문제로 본다몇몇 저자들이 이와 관련해서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않고 사적 자본가 존재만을 부인했지만대다수 저자는 부르주아지가 러시아 자본주의를 지배했다는 것을 부인했다는 것이다이는 맑스가 자본가 계급이 자본주의를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한 것과 모순된다는 의미이다다만 클리프와 베틀랭만이 소련에서 부르주아지 존재를 상정했고 경쟁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고 보았다그러면서 그는 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어느 한 가지 이론도 사실과 일치하면서 정통 맑스주의에 부합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라고 결론짓는다.

 

위에 언급한 이론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저자는 열 한가지의 잠정적 관점을 확인하고 있다.

 

① 볼셰비키 체제와 나중에 스탈린 체제는 근대화 독재 정권을 만들어냈다.

② 소련은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유사점을 나타냈다.

③ 소련 사회는 잡종’ 사회구성체, ‘비논리적’ 현상인간 역사 도중에 있는 막다른 길이었다.

④ 볼셰비키주의 그리고/또는 스탈린주의는 역사적으로 제한된일시적 현상이었다.

⑤ 소련 사회는 계급 사회와 무계급 사회 사이의 이행기 단계의 한 예가 되었다.

⑥ 스탈린주의와 파시즘 또는 국가 사회주의는 같은 사회형태의 두 가지 변종이다.

⑦ 소련은 정치에 대한 경제의 종속 또는 완전히 자율권을 획득한 국가가 되었다.

⑧ 지배 엘리트 권력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분리에 기반을 두었다.

⑨ 소련에서 노동자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자가 아니었다.

⑩ 소련이 오래 존속하면 할수록 비효율성이 더욱 증가하거나생산력과 생산 관계 모순이 더욱 커졌다.

⑪ 소련의 역동성은 서구와 경쟁하면서 만들어졌다. (앞의 책, pp. 388~390)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가 탐구한 소련 연구의 역사를 검토한 후 내린 열한 가지 잠정 결론에서 명시적으로 소련이 (국가자본주의인지타락한 노동자국가인지 관료적 집산주의인지아니면 또 다른 사회구성체인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국가자본주의 이론에서 본 소련 사회분석과 상당 부분 공통된 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 책은 1917년부터 지금까지의 소련에 관한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소개한 최초의 연구 성과로서 소련 연구의 지침서적이자 사전이라고 볼 수 있기에 주요 논쟁을 자세하고 깊게 다루지 않았고 각각의 연구에 대한 접근을 역사를 공부하는 맑스주의자 몫으로 남겨 놓았다.

 

 

4. 소련, (국가자본주의그리고 세계혁명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는 위기와 모순을 보면서 100년 만에 제대로 된 세계혁명의 가능성과 코뮤니스트 사회 건설을 위해 계급투쟁의 주체적 조건을 만들어 가고 있다그런데도 자본주의사회주의코뮤니즘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과 이해에 무지하거나 왜곡된 주관주의적 교조와 자의적 해석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아직도 스탈린주의 망령에 갇혀 반혁명과 파시즘을 방어하는 또 다른 파시스트의 모습을 본다코뮤니스트와 노동계급의 투쟁 역사와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그 성과를 받아드리면서도 스탈린 체제 이후 반혁명 역사에 대한 반성과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지 않다.

 

소련은 무엇이었나에 대한 과학적이고 명쾌한 분석 없이 세계혁명은 불가능하다우리는 다시 한번 코뮤니스트 좌파를 포함한 맑스주의자들이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한 입장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 자기 해방을 향한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사회 건설 강령과 세부적 실천계획을 세워야 한다소련을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볼 것인가국가자본주의로 볼 것인가의 토론과 논쟁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1917년부터 1989년까지의 소련 역사 속에서 진행된 주체적 사실을 바탕으로 연구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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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셀 판 데르 린던 지음황동하 옮김서구 마르크스주의소련을 탐구하다서해문집,

 

국제코뮤니스트전망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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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억압 기구-검찰 폐지!

 검찰 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억압 기구-검찰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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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부르주아 정부인 문재인 정부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검찰은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권력이지만, 계급적으로는 가장 정치적인 집단 중 하나이다.
 
  검찰과 같이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부분인 '기생' 지배권력은 지배계급에 속하면서도 독립적인 사회 계층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입법, 사법, 행정부와 국가기관에 속한 (고위직) 공직자들로 판사, 검사, 국정원, 경찰, 군인뿐 아니라 그곳에 파견(포섭)된 교수, 노동자대표도 포함된다. 이들은 자신만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사회의 '기생충'으로 살아가는데, 이들의 배타적인 이해의 영역은 '국가 기관'의 것이다.
 
  이러한 사회 계층은 지배계급의 손에서 사회의 공직자로 시작하여 그 규모와 무엇보다도 국가 기구의 상층에 있다는 위치 때문에 자신을 점점 더 자유롭게 하여 결국 사회의 지배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지배계급을 자신들의 경향에 동화시킨다. 이 계층은 공공 재정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다수의 공무원(공공) 노동자를 통제-지배하고, 법을 명령하고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법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게 적용할 물리적 폭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이들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물질적 존재를 국가의 존재로부터 끌어낸 이 기생적인 특권 계층의 계급적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들은 사회 존재 측면에서 기생적이고, 정치적 본질에서는 반동적인 계층으로 국가의 영속화에 관심이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지만,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이 계급의 경제적 체계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며, 인간 착취의 영속화와 경제적. 사회적 특권의 보호를 주요한 원칙으로 하는 계급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의 지도층으로 그에 맞는 권위와 명예를 가지며, '언제까지나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에 다수의 선망이 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계급적 중립'이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계급적 본질을 흐리게 하는 환상할 뿐이다. 
 
  현재의 검찰 개혁 요구 역시 환상이다. 검찰을 개혁하고 그것을 ‘덜 부패한’ 기관으로 교체하는 것이 억압 기구의 폐지는 아니다. 그것은 통제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물론 문재인 정권의 검찰 개혁은 검찰을 정권에 맞게 통제하려는 시도 이상이 아니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누가 이기든 노동자들은 이용만 당할 뿐이고, 노동자의 통제력 강화가 아닌 지배계급의 독재(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 갇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혁은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점진적 변화'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조직과 혁명당을 통해서만 전복할 수 있다. 정치 검찰, 부패한 검찰을 청렴한 기관으로 교체하는 것으로는 검찰의 반(反)노동자성이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 폭력을 종식시킬수 없다. ‘덜 해로운’ 정치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고 부르주아 정부가 기능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듯이, 검찰을 개혁하고 그것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자본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사회의 피착취, 피억압계급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폭력으로 통치하는 그들은 견인이나 포섭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검찰과 사법기관이 구조적으로 저질러 온 범죄행위는 '사건재조사와 진상규명',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과 책임자 처벌'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들과 적대하는 사회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스스로의 물리적 힘과 집단이성으로 그들이 독점하고 남용하는 모든 특권을 폐지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폐지 없이 당장 그들의 특권만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없어져야만 이러한 기생 계급과 특권을 없앨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지배계급 내의 여러 분파와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벋어나, 국가기구에 의탁하지 않고 독립적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세상에서도 기생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과 특정 집단이 갖는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공직자들이 노동자 평균급여를 받으며, 사회 전체의 통제(선출자의 소환)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검찰 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억압 기구-검찰 폐지!
노동자 권력-평의회 기구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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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에 대하여 2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에 대하여
 
2. 노동자운동에서 분파의 역사와 좌익분파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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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2 인터내셔널의 배신과 분파의 출현

 

19세기 동안 맑스와 엥겔스가 이룩한 거대한 이론적 성취의 상속자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였다. 20세기 초, 이들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건강하게 제2 인터내셔널의 테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기에 비추어 혁명가들의 역할을 명확히 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투쟁과 코뮤니스트 혁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 사이의 분리에 집중되었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당의 일부로서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을 보지 못했던 '멘셰비키에 반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그는 대중 정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버렸다. 레닌에게 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경제적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변환시킬 소수 전위 정당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 일탈에 대해 반대했다. 룩셈부르크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통일을 주장했고, 방어적인 투쟁은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최종적 정치 투쟁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의해 의제가 된 코뮤니스트 혁명의 필요성을 단언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제2 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을 결정적으로 삼켜버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1915년 침머발트에서, 그리고 1916년 키엔탈에서 단호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진전은 대부분의 국제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독립적인 좌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침머발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레닌, 지노비에프와 라덱으로 구성된 침버발트 좌파 서기국을 설립했다. 1916년 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레닌이 예측한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첨예화되었다.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침머발트 다수와 좌파 사이의 큰 차이는 균열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레닌은 침머발트의 늪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로만 구성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을 즉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코뮤니스트 9, 이형로)

 

2 인터내셔널의 반동적 퇴행 속에서 최초로 진정한 분파가 출현했다. 최초의 분파는 볼셰비키분파로서,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대회 이후 처음에는 조직에 관한 문제를 놓고 그다음에는, 러시아와 같이 반봉건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임무와 관련된 전술 문제를 놓고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1917년까지는 볼셰비키분파와 멘셰비키분파가 서로 독자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수행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당,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ussian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에 속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트리뷴을 중심으로 발전한 맑스주의 경향이 1907년부터 네덜란드사회민주노동자당(Dutch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 내부에서 비슷한 작업에 관여했다. 이 경향은 당내의 기회주의적 기류에 대항해 싸웠고, 1909 3월 새로운 당,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을 결성하게 된다. 1918 11월 사회민주당은 네덜란드 코뮤니스트당(Communsit Party of the Netherlands)이라는 당명을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창립 이전에) 채택한다.

 

2 인터내셔널의 내부 분파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 번째 경향은 독일 코뮤니스트당을 창립하게 된다.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포함해서 만장일치로 전쟁차관을 통과시킨 1914 8 4일 저녁, 국제주의자 투쟁가들은 당내에서 이러한 지도부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인다. 1914~1915년 겨울부터 불법 전단지가 유포되었다. 불법이라는 조건 하에서 탄압에 노출된 채, ‘스파르타쿠스그룹(Spartakusgruppe)’을 그다음엔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kusbund)’을 이름으로 채택한 극히 작은 그룹은 전쟁과 정부에 반대한 투쟁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우파와 중앙파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스파르타쿠스 멤버들이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그룹, 특히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의 다른 그룹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국제주의적 정책을 옹호했다. 이러한 다른 경향은 1918 12 31,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창립 순간에 함께 결집하지만, 새로운 당의 근간을 이룬 것은 명백하게 스파르타쿠스동맹 멤버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좌파분파가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에서 보다 약간 뒤늦게 형성되었다. 이 분파는 나폴리에서 보르디가(Bordiga)와 그의 동지들이 1918 12월부터 간행한 신문, ‘소비에트(Il Soviet)’를 중심으로 한 기권주의자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이었는데, 공식적으로는 1919 10월 이탈리아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y)의 당대회에서 한 분파를 이루었다. 1920 10월 밀라노에서 통합코뮤니스트분파가 결성되었다. 투라티의 우익을 배제하고 코뮤니스트당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내놓았고, 코민테른의 제2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서 선거 보이콧을 포기한다. 1920 12월 이몰라(Imola)대회에서 분열 원칙이 결정되었고, 1921 1 21일에 시작된 리보르노(Livorno)대회에서 소수는 대회를 떠나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으로 정착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한 지부가 될 것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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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좌익분파의 투쟁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9 3월에 창설되었다. 3 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세기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제3 인터내셔널은 하나의 먼 전망으로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긴급한 그리고 실천적인 필요성으로서. 노동자의 권력 장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하나의 세계적으로 집중화된 정치조직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너무 늦게 창설되었고,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 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회민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International Review 57,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코민테른 안에서 이러한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운동의 가장 암흑의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했던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이 점을 상기 하면서 코민테른 내부의 좌익분파의 투쟁을 살펴보겠다.

 

러시아 좌익분파의 투쟁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에 대한 의견 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의 발생은 멈추었다. 당시 러시아의 코뮤니스트좌파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당 내부 분파 중 가장 선명했던 노동자그룹 1922~23년에 결성되었다. 그룹을 주도한 것은 우랄지방의 노동자 미아스니코프(Miasnikov)였는데,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다른 투쟁가들과 함께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노동자그룹을 창설했고 당의 12차 대회에서 그룹의 선언문을 배포했다. 이 그룹은 당과 노동자 사이에서 불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의 파업 물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이 그룹은 대대적인 시위를 요구했고, 일차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이 시위로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는 당에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고, 미아스니코프를 포함한 그룹의 주도자들은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룹의 활동은 1920년대 말까지 불법적인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이때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를 탈출해서 파리로 망명했고,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옹호하는 코뮤니스트노동자(L´Ouvrière Communiste)의 간행에 참여한다.

볼셰비키당의 퇴행에 맞서 투쟁을 벌인 모든 경향 중에서 노동자그룹이 가장 정치적으로 명확했다. 특히, 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혁명의 국제적인 전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와 경제 관리에 중점을 두었던 다른 그룹과는 상반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코민테른의 첫 4번의 대회를 참조점으로 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과는 달리 코민테른의 제3차 및 4차 대회의 통일전선 정책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좌익과 노동자그룹의 인자 사이에 (특히 망명 중에) 토론이 있었다.

노동자그룹은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일관되게 하나의 분파처럼 활동했던 유일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혹독한 탄압은 혁명가들이 이들의 경로를 따라 발전할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예상대로 그는 즉시 실종되었고, 코뮤니스트좌파의 미약한 역량은 가장 용감한 투사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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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5차 대회 이후 시기는 코뮤니스트당의 지속적 볼셰비키화와 코민테른 우선회로 특징지어졌다. 당 대회에서의 논쟁 밖에서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레닌이 정치 활동을 포기하게 만든 이래 코민테른과 소련코뮤니스트당을 이끈 3두 체제(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1925년 말 와해된 것이었다. 1929년 봄 소련코뮤니스트당 15차 당 대회 준비를 위해, 트로츠키의 최초의 반대파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크룹스카야가 합세한 통일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반대파 결성에 스탈린은 억압을 강화했다. 게페우는 지도자를 당에서 축출함으로써 반대파의 지역조직을 폐쇄했다. 1927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소련코뮤니스트당 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지노비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항복은 러시아 좌파가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모욕, 위협, 당으로부터의 추방도 노동계급의 진정한 투사를 막을 수 없었다. 연속되는 새로운 타격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성원과 그 대표인 라코프스키는 계속되는 투항과 소련에서의 트로츠키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투쟁을 계속했다. 함정, 협박, 암살에도 불구하고 라코프스키와 반대파 중핵은 1934년까지 조직화된 투쟁을 지속했다. 그들 대부분은 진영 내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라코프스키가 투쟁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지노비예프와 그 추종자들이 했던 부끄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독일과 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다른 나라에서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와는 다른 형태를 취했지만, 이들도 아주 일찍부터 코민테른 내부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노동자운동은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두 나라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사이의 관계 측면에서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의 입장은 판네쿡, 호르터 및 얀 아펠과 같은 혁명가들로 대표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일 노동자계급의 혁명 투쟁의 열기 속에서 단련되어 반동적인 차리즘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독일혁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형집행인과 그들의 노동조합 심복에 대항했다. 이들은 제국주의 전쟁과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으로 나타난 시대변화의 여러 의미를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된다. 노동자계급 이해의 옹호를 위한 의회의 이용 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하사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 새로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투쟁은 혁명 물결의 퇴조와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실패와 함께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이들은 정치조직 자체의 문제와 역사적 진로(계급 간의 힘의 균형)의 문제에 있어서 취약했다이들의 최종적인 실패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에 힘의 균형의 진화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혁명가들이 가질 필요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1921 7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지도부는 호르터의 지원을 받으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

호르터와 그의 지지자들의 오류는, 하나의 국제적인 좌파코뮤니스트 경향으로 재편성될 수 있는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이 코민테른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 인위적으로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실수는 독일혁명 운동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21년 즈음 세계혁명의 퇴조는 유럽에서 명백했고 이러한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경로가 여전히 혁명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라는 이론을 가진 호르터와 에쎈 경향의 KAI 선언에는 특정 논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틀렸다.” (독일과 네덜란드좌파, Philippe Bourrinet)

 

이후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일부는 1930년대 동안러시아에서의 혁명의 패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결정적인 문제와 직면하여, 볼셰비키당이 국가자본주의의 기관으로 변형된 것을 혁명 패배의 결과이기보다는 원인이라고 잘못 파악했다그래서 불가피하게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이론화하고 노동자평의회를 현시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조직 형태로 간주했다. 결국, ‘평의회주의 경향으로 된 그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자신의 무용성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과 교훈

 

독일·네덜란드 좌파와는 반대로 이탈리아 좌파는 전쟁 동안 그리고 코민테른의 창설까지는 볼셰비키의 특징과 같은 비타협성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들에게는 원칙에 대해 타협하고 원칙을 흐리게 만들어 혁명을 향한 지름길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가치도 없었고, 그러한 지름길은 패배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사실상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선두에 있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비타협성은 1920년 계급투쟁의 패배에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의 등장을 대항해 모범적으로 표현했다. 실천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비타협성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직면해서 (진보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부르주아의 어떤 당과도 동맹을 맺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점에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오직 자신의 영역에서, 경제파업과 자기방어를 위한 노동자민병대의 조직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현상에 대한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진지한 분석을 했다. 그는 이 분석을 코민테른 제4차 대회의 대표단에 제시하며 코민테른의 분석을 거부했다.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산물도 아니고 부르주아 지주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겪은 패배의 산물로서, 그 패배는 우유부단한 쁘띠-부르주아 계층이 파시스트 반동 세력을 지원하게 만들었다. (...)

파시즘은 봉건적 반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밀라노와 같이 모든 산업대도시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상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필수 불가결하게 보완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러한 비타협성은 통일전선정책, 사회당과 그 부수체에 대한 관대정책과 관련해서도 표현했는데, 보르디가는 노동자의 정부라는 구호는 코뮤니즘의 정치강령을,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위해 투쟁하도록 대중을 준비할 필요성을 사실상 부정한다.” 고 비판했다. 또한, 비타협성은 1924 7월 코민테른 5차대회에서 추진된 코뮤니스트당(CP) 볼셰비키화정책에 반대한 것에서도 표현되었다.

보르디가는 1926 2월부터 3월까지 코민테른의 제6대 확대 행정위원회 동안 마지막 전투를 벌인다. 그는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비난했고,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고 분파는 병도 아니고 병의 증상도 아니라 기회주의적 영향에 맞선 방어 반응임을 시인하면서 이 문제가 당장의 사안이 될 것으로는 내다보지 않으면서 분파의 문제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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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부터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망명지에서 계속되었다.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활동가는 감옥에 있거나 보르디가처럼 섬에 갇혀 있었다. 좌파는 활동가 다수가 축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당과 코민테른 내에서 싸웠다. 그들의 기본목적은 퇴행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경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 조직 내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탈리아 좌파의 교훈은 아래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코뮤니스트 소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운명의 한 표현으로서 영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소수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갖는 영향력은 그것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 의식성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공개적이고 점점 더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시기에 만이 소수는 영향력을 갖기를 바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코뮤니스트 소수는 하나의 당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역사적으로 퇴조하고 반혁명이 승리하는 그러한 시기에 혁명적 입장이 중요성을 띠고 계급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시기에는 유일하게 가능하지만, 극히 중요한 일은 바로 분파의 일이다, 즉 계급 역량의 균형이 또다시 코뮤니스트 입장이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에게 영향력을 갖도록 가능하게 만들 그때를 대비해 미래의 당 건설을 위한 정치적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좌파 분파는 프롤레타리아당이 기회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말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 당에 침투함으로써 퇴행되어갈 때 형성된다. 혁명적 강령을 지지하는 분파의 책무는 당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분파가 성공한다면 그것의 원칙이 승리하고 당이 구출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당은 퇴행을 계속하여 무기와 짐을 모두 넘겨주고 결국 부르주아 진영 안으로 전향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당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전향의 가장 중요한 징후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생활이 당 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좌파 분파의 책무는 당을 바로잡을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당 내부에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좌파 경향은 코민테른의 당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런 당은 종종 야비한 술책까지 동원해서 이들을 제명했다. 프롤레타리아당이 일단 자본주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면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을 향한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하고, 분파의 역할은 적에게로 넘어가 버린 낡은 당과 미래의 당 사이에 놓인 가교가 되는 것으로, 미래의 당을 위해 강령적 기초를 세워야 하고, 당의 골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이 일단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면 당 안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탈리아분파와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 International Review 90,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후 이탈리아 좌파의 이론적 발전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떠나서 프랑스와 벨기에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탈린주의화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 채 그들은 미래의 당을 위한 이론적 틀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배운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1933년 빌랑(Bilan)그룹을 형성했다. 빌랑은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대한 분석과 미래의 이행기의 문제에 대한 탐구, 경제 위기와 자본주의 쇠퇴의 토대에 대한 작업을 수행했다. 빌랑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당과 분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었다. 빌랑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빌랑이 혁명은 당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을 때, 이것은 혁명이 가능해지기 위해서 당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의 건설 자체가 혁명 문제를 제기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의 능력의 표현이라는 의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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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에 대하여 1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에 대하여
 
1. 노동자계급에게 당(혁명조직)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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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상 최초로 계급투쟁에 대한 자신감과 세계혁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창설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혁명적 소수는 세계혁명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100년 전과 다르게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 속에서 전쟁, 긴축, 환경파괴, 증가하는 빈곤에 맞서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되고 해체된 상태로 생존의 위험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실을 뛰어넘어 미래의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건설 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몇 가지 전제조건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한다.
 
미래의 세계혁명당은 (국가별) 당의 연합 수준이 아니라 ‘국제적인 당’이어야 하고, 당 건설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의식과 투쟁력의 발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혁명당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정치적 강령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를 포함하여 현존하는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세력이 「세계혁명당」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쇠퇴기 계급투쟁과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단일한 국제적 혁명 조직을 의미한다.
 
세계 혁명당 건설의 전제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혁명조직)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당’ 개념은 노동자운동의 경험(코뮤니스트동맹, 국제노동자협회, 제2 인터내셔널의 당, 코뮤니스트당)을 통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조금씩 정련되어 나아갔지만, 결정적인 개념은 코민테른 시기까지 혼란이 계속되었다. 보기를 들어 1920~1921년 코민테른의 당에 대한 테제와 이론들은 1917년 볼셰비키의 실천을 진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졸렬한 모방이나 변형에 불과했다. 이러한 혼란은 심지어 코민테른의 타락에 반대하여 투쟁한 좌익 분파마저도 명료화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것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전망하는 글에서 코민테른의 테제를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당은 무엇이었나? 당과 계급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필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투쟁, 혁명과 관련된) 조직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목적이 다른 두 가지 조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나는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단일)조직으로 전체 노동자를 공동의 투쟁으로 결집시키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다른 하나는 당과 같은 정치조직으로 이 조직의 목적은 계급의식의 발전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신의 혁명적 본성과 목표를 인식해 혁명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유형의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역사적 조건 변화와 함께 자신도 변화하면서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 (목적에 맞는 역할을 하지 못했을지라도) 항상 존재했다.
 
먼저 대중조직의 진화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19세기 동안에는 노동자계급의 출현과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 향상을 위해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이 발달하게 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이었지만, 실업이나 병환 시의 상호부조를 위한 친목회인 노동자협회, 그리고 스포츠클럽이나 문화협회와 같은 모임까지 발달했는데, 이들은 노동자 대중의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계급조직의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1905년,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 시기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이 첨예화되었다. 이제는 노동자계급의 생활 조건 방어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계급과 인류 자체의 파멸을 초래할 제국주의 전쟁이냐, 아니면 세계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과 코뮤니즘의 건설이냐, 라는 역사적 선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노동자 권력을 향한 혁명 투쟁에는 부적절할 것으로 판명되었다. 대신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새로운 대중(단일)조직을 창조했다.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한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과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조직으로써 노동자소비에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주의가 상승기에서 쇠퇴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계급의 대중조직도 변화한 것이다. 노동자의 대중조직과 마찬가지로 정치조직의 형태와 역할도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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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뮤니스트동맹, 제1 인터내셔널 시기의 ‘당’ 개념
 
자본주의 초기,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진 개별적인 계급으로 자각하지만,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전망을 갖지 못한 채 처음으로 독립된 행동체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당시 노동자계급이 만들어 낸 정치조직은 아주 작고 사실상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즉자적인 계급투쟁을 넘어 노동자계급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었고,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하고 역사적인 표현이 코뮤니스트동맹(Communist League)이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동틀 무렵인 19세기의 전반부에는 여전히 형성 단계에 있던 노동자계급은 지역적이고 고립적인 투쟁을 벌였고, 교조적인 학파, 종파 그리고 연맹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코뮤니스트동맹은 이 시기의 가장 선진적인 표현이었던 한편, 동시에 그들의 선언문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앞으로 다가올 시기를 예고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당의 본질과 역할, 「Internationalisme」 38호, Gauche Commune de France(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 1948년 10월)

 

그 이후는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대중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노동자계급이 쁘띠부르주아계급의 영향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던 시기이자,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다양한 새로운 조직 형태를 실험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 최고의 표현은 파업하는 동안 파업파괴자들의 수입에 저항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노동자들이 설립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이다. 국제노동자협회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은 소그룹의 헌신적인 혁명가들이 (인민을 위해)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점이다. 블랑키와 바쿠닌과 같은 인물과 그룹이 갖고 있던 이러한 시각에 반대해 제1 인터내셔널은 1864년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이 쟁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1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유럽 주요 나라에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무대 위에 효과적으로 등장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조직화된 역량을, 계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함께 결집했다. 제1 인터내셔널은 경제적, 교육적, 정치적 그리고 이론적인 노동자 투쟁의 모든 흐름과 모든 우발적 측면 두 가지 모두를 함께 모이게 했다. 그것은 모든 다양성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단일 조직의 최고점이었다." (같은 글)

 

불법조직이었던 코뮤니스트동맹은 여전히 종파의 시기에 활동했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IWA)의 임무는 바로, 이러한 종파를 넘어서서 유럽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결집과 그들의 의식에 내재한 수많은 혼란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물론 제1 인터내셔널은 이질적인 구성(노동조합, 협동조합, 선동그룹 등)으로 인해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이 가졌던 근대적인 의미의 당은 아니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임금노동의 경제투쟁과 사회적 정치투쟁 사이 분화의 시기를 나타냈다. 자본주의사회가 완전히 꽃핀 이 시기에 제2 인터내셔널은 개혁 투쟁의 조직이자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확인을 위한 정치적 정복의 조직이었던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이고 혁명적 사명의 이론적 기초를 명확히 하고 정련함으로써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구분에서 더 높은 단계를 나타냈다.” (같은 글)

 

위와 같이 계급의 대중조직(노동조합)과 정치조직(당) 사이의 구분은 제2 인터내셔널에서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분은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창립될 당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최초로 역사의 현안으로 된 순간에 더욱더 분명해졌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있어서 계급의 대중조직은 더는 노동조합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동맹에서 코뮤니스트당까지 다양한 조직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계급투쟁의 진로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당’이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뮤니스트동맹이 민주주의 운동의 좌익으로서 활동했던 혁명 시기(1848~1849년)에 영향력은 여전히 미약했지만, 국제노동자협회의 영향력은 훨씬 커졌고, 무엇보다도 제2 인터내셔널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대중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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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 인터내셔널의 ‘당’ 개념
 
제1 인터내셔널은 1871년의 파리 코뮨의 패배와 이에 뒤이은 반동의 물결에 따라 사라졌다. 코뮤니스트동맹이 해체되었을 때, 미래의 새로운 당을 향한 가교 역할을 할 어떤 형식적 조직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가 사라졌을 때, 제2 인터내셔널 창립의 기원이 될 조직이 남아있었는데, 독일의 사회당이 그중 하나였다.
 
당시 사회당은 혁명적 전망이 멀어진 시기에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특히 독일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대부분 노동자의 의식이 혁명적이지 않던 시기에 사회당이 얻은 영향력은, 그들의 강령 안에 사회주의의 전망을 포함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개혁이라는 ‘최소강령’을 옹호했다. 당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한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임무를 강조하고 당이 의회의 임무에 전념할 필요를 강조했다. 1902년에 벌써 카우츠키는 “점진적인 운동, 민주주의적이며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를 주창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유일한 임무는, 이러한 점진적인 운동을 강제할 목적으로 의회에 참가하는 것뿐이었다. 권력 쟁취는 더는 노동자 스스로가 부르주아 국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 ‘노동자들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당의 책무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완전히 왜곡됨으로써, 또 다른 왜곡이 나타났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준비하는 필수적인 분파로 간주되지 않았다. 대신에 당은 통치 기구가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적으로 당을 신뢰하며 당에 투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활동과 권력을 당에 위임해야만 했다.
 
이렇게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수정주의’가 탄생하고, 노동자의 (노동조합이 이끄는)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의회 대중정당에 위임된) 정치적 활동 사이의 점점 더 날카로운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의 최종 목적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연한 목표로 부르주아 국가의 ‘정복’을 내세웠지만,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치 기관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정치 기구는 당이었다. 만약 국가가 프롤레타리아당의 통제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면, 권력 쟁취는 오직 당에 의해 조직되고, 수행되며, 지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논리적이었다. 이러한 책무를 위해, 특히 개량을 위한 투쟁을 이끌기 위해, 당은 대중적이고, 극도로 규율 잡히고 위계적인 조직이어야 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이 이렇게 사회민주주의의 발상에 심각하게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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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당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혁명을 독립적인 정치적 당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관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내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투쟁의 목적은 정치권력의 장악이다. 정치권력은 오직 당에 의해서만 장악되고, 조직되고, 지도될 수 있다. 다른 방도는 있을 수 없다.” (당의 역할에 대한 테제)

 

코민테른 2차 대회는 당의 역할에 대해 위와 같이 정의했다. 이 입장은 특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시기 대다수 혁명가의 입장이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 안에서 단호하게 행동했지만, 처음부터 노동자를 대신해서 권력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 노동자계급, 국가 사이 관계의 본질과 당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혼란이 존재했다. 1918년부터 계속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은 볼셰비키당이 정상에 앉아있는 국가기구에 의해 제한되고 억압되어 왔다. 권력 장악 후,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기관(소비에트)과 갈등하게 되고, ‘통치’ 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소비에트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1920년대 초 트로츠키의 저작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에서도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전망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바로 그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의 의회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역사가 그러한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당대의 질서가 되도록 만든 시기에, 코뮤니스트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표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 1920, 트로츠키)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언된 ‘대표자’가 되고 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고, 전체 노동자계급에 맞서게 될지라도, 심지어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 자체는 당과 국가의 과업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러시아 국가는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혁명의 힘을 파괴하고 반혁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 혁명가들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 대해 전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았다. 코뮤니스트들은 대체로 노동자평의회를 권력 장악을 위한 기관으로 보았다. 1920년까지 모든 경우에서, 코민테른은 혁명에서, 권력의 실천에서 평의회(소비에트)의 탁월한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어떤 코뮤니스트도, 어떤 혁명적 조직도, 지역 소비에트(이행기 국가의 토대)와 노동자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이의 혼란 또한 존재했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과 함께, 코민테른은 통일전선의 개념, 대중 정당을 통해 최소 강령을 보호한다는 생각, 노동조합 과업의 필요성, 혁명적 의회주의 입장 등을 발전시켜갔다. 코민테른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저항하며 코뮤니스트 원칙을 그대로 지키려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고 이러한 실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전술과 원칙 사이의 차이는 제2 인터내셔널의 안에서 그랬던 만큼이나 커졌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이해를 항상 염두에 두기보다, 코민테른은 더욱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었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선택했을 때 조종을 울렸다. 코민테른이 옹호한 이러한 테제들은 단지 러시아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볼셰비키당은 반혁명의 가장 유순한 도구가 되었다.  <계속>
 
(「실천 복간 3호」, 이형로, 201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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