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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맑스주의와 국가 코뮤니즘 2

맑스주의와 국가 코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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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화(Nationalization)”와 사회화(Socialization)”[20]

 

맑스가 코뮤니스트 산업적 삶의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그에 따르면 생산의 규제는 국가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의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조직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개량주의자 쿠노(Cunow)에 따르면 이 개념은 맑스가 그 시대 자유주의 아나키스트들의 경향에서 이끌어낸 것이다(하인리히 쿠노, “Die Marxche Geshichts-, Gesellschafts- und Staatstheorie”, 1, 309). 생산과 분배의 관리는 생산자와 소비자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고그 과정에서 국가를 거치지 않을 것이다국가와 사회를 동일시하는 것은 이후 시대의 산물이다엥겔스는 국가 사회주의 또한 반대하며 그의 반듀링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그러나 주식회사로의 전화도국가 소유로의 전화도생산력의 자본주의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 이 해결은 현대적 생산력들의 사회적 본성이 실제로 승인되는 것에만따라서 생산 방식전유 방식교환 방식을 생산 수단의 사회적 성격과 일치시키는 것에만 놓여 있을 수 있다그리고 이는 사회의 지휘 이외의 다른 어떠한 지휘에 비해도 웃자란 생산력들을 사회가 공공연하고도 솔직하게 점유 획득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힘들은 자연력들과 꼭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려하지 않는 한그것들은 맹목적으로폭력적으로파괴적으로 작용한다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고그 활동그 방향그 작용을 파악하고 나면그것들을 더욱더 우리의 의지에 복종시키고 그것들을 매개로 하여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 된다. (...) 이처럼 오늘날의 생산력들을 마침내 인식된 그 본성에 따라 취급하면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전체와 각 개인의 욕구에 따른 생산의 사회적-계획적 조절로 대체된다.”[21]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5, p.307-308, 박종철 출판사 번역)

 

1880~1890년 무렵이러한 입장은 이후로도 사회 민주주의당에 의해 방어되었다이는 구 리프크네히트의 추종자들이 철도광산과 다른 대규모 산업을 국유화하고자 한 연설에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다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결국 사회주의 사상의 맹공으로부터 더 이상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부르주아 사회가 많아질수록 국가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주장하고, “여기는 사회 민주주의 – 그쪽은 국가 사회주의다!(Here social democracy – there state socialism!)” 슬로건 아래 사회 민주주의자가 수행해야 할 마지막 전투가 일어날 순간에 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쿠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따라서의회[사회 민주주의 당의](편집자)도 역시 기업의 국가로의 이전에 반대하여 선언해야 한다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와 국가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으로 불리기 때문이다.“(쿠노위 책, 340)

 

그러나, 1900년 무렵, ”사회 개혁의 투쟁 속에서 이 입장은 포기되었고국가 또는 사업의 다른 지점들의 지방 정부로 가져오는 국유화는 사회주의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따라서 사회 민주주의적 용어에서 그런 기업들은 비록 그들의 관리와 리더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더라도 사회적 [또는 공동체적기업으로 불린다.

 

러시아 혁명 또한 완전히 산업의 국유화“ 기획에 따라 이뤄졌다이 경우 성숙한‘ 사업의 지점들도 중앙 정부 기관에 합류했다. 1917생산자들은 다른 회사들의 소유주로부터 회사를 강제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위에서부터“ 경제적 삶을 이끌고 관리하고자 했던 이들이 이를 매우 불편해하기 시작했다노동자들은 코뮤니스트 원칙에 따른 새로운 기반 위에 생산을 조직하길 원했다이러한 원칙 대신 그들은 빵을 위한 석판을 받았다코뮤니스트당은 회사들이 트러스트로 통일해야 하고중앙집중식 리더십의 지도를 받도록 하는 지침을 내렸다이러한 중앙집중식 처리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회사들은 도로 소유주에게 돌아갔다왜냐하면 이 회사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첫 번째 모든-러시아의 경제 평의회 의회(All-Russian Congress of Economic Councils)가 아래의 결의안을 채택했는지를 본다.

 

생산의 조직 영역에서전반적인 국유화는 필수적이다개별 회사들(304개의 회사가 국유화되고 압수되었다)의 국유화 시행부터 산업의 효과적인 국유화까지 진행시키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국유화는 때때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오직 전권 최고 경제 평의회(Supreme Economic Council of Plenipotentiaries)를 통해최고 경제 평의회의 승인으로 이뤄져야 한다.   (A. 골드슈미츠, “Wirtschaftsorganisation in Sowjet-Russland”, 228)

 

따라서 코뮤니스트당(공산당)은 노동자들 스스로 기업을 코뮤니스트 영역으로 더할 수 있는 원칙생산과정에 대한 관리를 사회로 이전하는 원칙에 따라 지침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코뮤니스트당에게 있어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의 작업이 아니었고코뮤니즘의 수행은 과학적 인간”, “지식인”, “통계학자의 기능이 모든 배운 자들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었다코뮤니스트당은 산업의 과거 지휘관들을 몰아내고 그 자신의 손에 노동에 대한 올바른 명령(Right of Command)만 쥐여준다면 코뮤니즘의 안전한 안식처로 모든 것을 이끌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노동계급은 과거 노동의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자리에 새로운 이를 세우는 것으로 충분했다그 기능은 그 이상에 이르지 못했고더 나아갈 수 없었는데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생산의 법칙들을 제공함으로써 자기-조직의 기반이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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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어떻게 간단한”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했나

 

레닌은 확실히 국가 독점의 손에 전체 생산을 집중시키는 것을그것은 엄격한 조직의 중앙집중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국가 권력의 강화를 의미했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국가와 혁명이 집필되던 당시레닌은 러시아의 실제 발전을 어떤 식으로든 예측할 수 없었다여기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면 국가 권력을 가능한 한 강화해야 했고이를 통해 다른 목표는 고려할 것도 없이 생산을 독점해야 했다그러므로 러시아의 상황은 그 자체로 레닌의 국가 코뮤니즘 이론을 발전시켰다국가를 더 강하게가깝게 하는 방법은 러시아의 국가 권력을 차지한 이들에게 점진적으로 처방되었다이 과정은 일반적인 공기업의 메커니즘으로국가의 자본주의 독점의 보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발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에 점점 반대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레닌주의 국가 코뮤니즘의 가장 좋은 사례를 현실에서 발전시켰으나그것은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닌은 실제 결과의 모든 구체적 내용까지 예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그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강제적인 기관이라는 것이 명백하기도 했다레닌은 이제 독창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이 국가라는 것이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체 생산의 관리와 중앙집중적 리더십을 보유한 영속적인 기관으로서의 국가가 스스로 잉여가 되도록스스로 소멸할 수 있는지 그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우리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이미 창조한 기반 위에노동자로서의 경험에 기대어무장한 노동자들의 국가 권력의 지지를 받는 엄격한 철의 규율을 세워 대규모 생산을 조직해야 한다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지시를 의무적으로손쉽게 취소할 수 있는적당한 보수를 받는 십장과 회계사들과 같이 수행하는 국가 공무원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물론 모든 종류와 유형그리고 수준의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이것이 우리의 프롤레타리아 책무이며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시작할 수 있고시작해야 하는 일이다대규모 생산에 기반한 이러한 출발은 그 자체로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 소멸과 질서의 점진적 창조 – 비할 데 없는 질서임금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질서 로 이어진다그 질서는 점점 더 단순해지는 통제와 회계의 기능으로 교대로 수행될 것이고그 후 습관처럼 되어 마침내 전체 인구 가운데 특별한 부분의 특별한 기능으로 사멸할 것이다.“[23]

 

여기서 우리는 기계적 조직의 극단을 알아낼 수 있다경제 영역에서 생산자로서 노동자들은 국가 생산 독점의 가장 가혹한 규율에 적응해야만 했고국가 공무원에 복종해야 했다이 국가 공무원들은 정부에서 최고 리더십 아래 있는 고용주노동자들은 또한 정부에서 그들의 최고 대표를 가진다정치적 민주주의 덕에(소비에트 선거 – 당 활동그들은 정부에 영향을 줄 수 있고따라서 국가 공무원들과 함께 생산을 통제한다.

 

우리는 그런 시스템에서 모든 권력은 정부에 집중되어 있고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심각하게 억압되며여기서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농담으로 변하며그런 사회에서의 번영은 선한 의지와 정부의 역량그리고 그들의 관리에 의존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그런 환경 아래서 국가는 그 민주주의와 함께 더욱 견고한 기반을 다지지레닌이 원했던 것처럼 잉여가 되어 사멸하지 않는다레닌은 우리에게 이러한 국가가 사멸함에도 불구하고오직 그 엄격한 조직에 의해서만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 시켜 준다그러나 그는 인용된 모호한 논리점점 더 단순해지는 통제와 회계의 기능으로 교대로 수행될 것이고그 후 습관처럼 되어 마침내 전체 인구 가운에 특별한 부문의 특별한 기능으로 사멸할 것이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증을 하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이 모호함의 이유는 추상적으로오직 환상에서만 상상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국가 생산 독점(‘우편 서비스든 트러스트든)의 리더십을 매우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감독과 회계의 기능으로 제시하는 것은 모든 것을 근본부터 뒤집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레닌이 국가의 소멸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그의 결론 등의 이 주장을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으로 낙인찍어야 한다이것은 레닌 자신에게도 역시 성가신 것이었다.

 

 

국가 코뮤니즘은 평의회 사상과 충돌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국가 코뮤니즘 사상을 따르려 한다면그 사람은 2가지 특징을 발견할 것이다첫째는 국가 코뮤니즘은 모든 문제를 단지 기계적인 것으로 취급한다그것은 조직에 의해 이런저런 영역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중앙집중식 리더십과 관리하에 둘 수 있을지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이미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집중시키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 코뮤니즘을 완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했다하지만 자본주의 집중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임노동자의 관점에서 볼 때그리고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그것은 노동의 통제이며임노동자에 대한 조직된 통제이다. 맑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은 그에 대해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맑스에게 임노동자에 대한 자본주의자의 사회적 입장은 그의 노동생산 과정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취급에서 특징지어진다.

 

모든 사회 민주주의 흐름의 사회화 이론들은 노동 계급에 대한 통제라는 동일한 관점에 집중한다노동은 반드시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명백하고조직의 엄격한 중앙집중이 요구되는 것(왜냐하면 그것은 체제와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된 사회적인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그렇게 여겨진다].

 

그러나 국가 코뮤니즘이 지도자들의 역량에도 결정적인 무게를 둔다는 점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이것은 중앙 집중주의적 조직의 요소 중 하나의 결과임이 분명한데왜냐하면 중앙에 위치한 리더십 원칙의 연약과 견고함에 이제 모든 것이 의존하기 때문이며대중들은 이러한 가장 엄격한 규율에 종속된다.

 

노동계급은 폐쇄된 통일체로서 투쟁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권력을 쟁취한다는 볼셰비키를 인정해야만 한다그러나 이것이 조직의 규율과 중앙의 명령에의 복종이라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는 지금 검토할 수 없는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주의를 기울인다왜냐하면 국가 코뮤니즘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여기서 모든 지도자” 문제가 평의회 사상에 반대된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맑스주의으로부터의 의문스러운 이탈

 

국가 코뮤니즘에서 자신의 목적을 찾았던 제인터내셔널의 일부로서 노동자 조직의 모든 전술은 그들을 둘러싼 거대한 대중들을 중앙집중식 지도력 아래 두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조직이 일단 만들어지면, 지도자는 주요한 것이 된다그러나 그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은 지도자의 능력에 깊이 조건 지어진다 이것이 맑스주의로부터의 의심스러운 이탈이다. 

 

이 지도력 문제는 우리가 제3차 인터내셔널의 당과 조직의 전술에 대한 일상에서 직면하는 문제인데(우리는 노동조합의회그리고 조직의 문제를 C.P. 자체에서 언급했다), 국가 코뮤니즘에서 경제적 영역으로도 이전되었다이러한 관점에서 지도자의 능력과 태도는 그런 사회에서 엄청난 규모로 그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마찬가지로 레닌과 다른 이들의 미화와 같은 사람에 대한 역겨운 숭배도 설명할 수 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이뤄져만 한다.” 이 말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고려할 때에도 유효하다가장 숙련된 지도자들을 노동자들이 절대적인 규율로 따를 때조차도 그 지도자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해방의 작업을 떠안아 줄 수 없다더욱이 국가 코뮤니즘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를 석화시키고그 지도력이 발전함에 따라 그 모든 민주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도력은 사회가 점점 의존하는 지배 카스트가 된다.

 

 

노동자들의 통일된 권력은 필수적이다

 

우울하고 지루한 수백만의 대중들을 혁명으로 이끈 단호하고 맹렬하며혁명적인 전위가 있는 러시아가 국가 코뮤니즘이라는 교리를 낳고 말았을 때이 교리가 첫 번째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탄으로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의 열망에 불 질렀을 무렵엄격한 관료제와 생산의 독점화로 인한 재건된 국가 권력은국가 코뮤니즘에 의해서는그리고 대중들이 규율로 복종하는 지도자에 의해서는 노동 계급의 최종적 해방이 이뤄질 수 없으며, 오직 노동자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물론무장한 노동자의 통일된 힘은 부르주아지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왜냐하면 이 방식으로만 부르주아 국가의 집중화된 권력이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기업을 기반으로 무장을 하고 새로운 국가 권력을 구성한 것은 노동자들 자신이다.

 

소비에트 또는 평의회가 지도하고 그 지도자는 평의회 정부를 구성하는 노동자 국가의 정치적인 통일은 이 투쟁의 필연적 결과이다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소유” 선언또는 더 정확하게는 사회적 소유 선언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그러니까 정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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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파리 코뮨의 교훈

 

그러나 이제 국가 코뮤니즘은 맑스주의로부터 이탈한다왜냐하면 정부의 중앙집중화된 조직 지도력 아래 국가 소유로의 조직화를 통해 국가 코뮤니즘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즉각적인 생산자들을 추방하고 정부의 손에 그것을 쥐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 엥겔스는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연합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 의한 사회적 생산으로의 이전을 요구했다그러나 우리가 아래에서 보여주겠지만이것은 국가에 의한 중앙집권적 생산의 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맑스는 그의 글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뮨(1871)으로부터의 교훈을 이끌어냈는데그것은 노동자 권력을 확립하려는 첫 번째 시도이다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그로부터 다양한 인용을 했는데, “사회 민주주의 가짜 맑스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우리는 레닌이 이용한 것과 똑같은 인용구를 사용하여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용할 때의 의미가 러시아에서 나타난 것과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므로 코뮨의 첫 번째 명령은 상비군을 억제하고이를 무장된 시민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코뮨은 지방 평의원으로 구성되며이들은 시의 다양한 구역에서 치러지는 일반 선거에서 선출된 이들이며책임을 지되 언제든 소환(revocation)이 가능하다.”

 

코뮨은”, 맑스가 쓰기를 의회와 같은 조직이나 행정부사법부 없이 작동할 것이다”.

 

“3년이나 6년에 한 번씩 의회로 대표하고 억압할 지배계급 구성원을 정하는 대신일반 선거는 코뮨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데개별 선거가 노동자십장그리고 회계사 등 자신의 사업을 위해 일할 사람을 찾고 있는 다른 모든 고용주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것과 같다.”[24]

 

 

맑스의 평의회 체제란

 

그러므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제의 놀라운 성격을 부여했던 것이고그것은 이제 모든 혁명적 노동자 정당의 표준적인 특징이 되었다이런 과정으로 임명된 평의회는 언제든지 그 투표자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아야만 한다고용주가 노동자십장그리고 회계사들을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처럼투표자는즉 노동자는 이 경우 그들의 사업에서 완전한 주인이다이러한 코뮨의 건설이 중앙집중적 러시아 국가 코뮤니즘과 비교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다를 수 있는지는 맑스가 쓴 아래의 문장들에서 보여진다.

 

코뮨과는 전혀 다른 국가 조직을 간략하게 묘사해보면그것은 코뮨은 가장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적인 형태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코뮨은 파리에서 국가 대표(National Delegation”를 선출했다.

 

“...얼마 되진 않지만 중요한 중앙 정부의 잔존할 기능들은 억압되지 않았다의도적으로 그릇되게 진술되었는데코뮨의그러니까 엄격하게 책임 있는 관료들로 이전되었다.”

 

“...국가적 통합은 붕괴되지 않았고오히려 반대로 코뮨 헌법으로 조직되었다그것은 국가 권력의 파괴에 의해 실재하게 되었다국가 권력은 통합이 형상화된 것으로 국가에 독립적이고 국가에 우월하길 원했던 것이었는데그 실체는 기생적인 이상 생성물에 불과했다과거의 정부 권력의 억압적이기만 했던 기구가 제거되는 동안그 정당한 기능들은 사회 위에 설 권리를 주장하는 권위에서 책임감 있는 사회의 봉사자로 복원되었다.”[25]

 

 

코뮨의 대중과 지도자에 대한 문제

 

여기서 얼마 되진 않지만 중요한 중앙 정부에 잔존할 기능들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선출한 이들에 언제나 엄격한 책임을 지고 있는 공동체의 공무원들이 수행한다고 모호하지 않게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중앙 정부의 최고 공무원들은 국가의 공무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무원이며국가의 정부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코뮨에 있는 그들의 직접적인 선출자들을 책임진다그러한 질서다시 말해 국가나 사회의 통합을 보장하는 코뮨 공동체의 책임 있는 공무원이 중심적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함을 가정한다면국가의 소멸 또한 상상 가능하다그러나 그러한 질서에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소위 중앙 정부는 더 이상 분리된 권력을 갖고 있지 않고 공동체의 손에 그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공동체 또는 평의회 체계가 전체 국가에서 자리 잡는 것은 기생충 같은 국가를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과거의 정부 권력의 억압적이기만 했던 기구가 제거되는 동안그 정당한 기능들은 사회 위에 설 권리를 주장하는 권위에서 책임감 있는 사회의 봉사자로 복원되었다.” 일단 그러한 질서가 이뤄지기만 하면국가는 진정으로 죽어 없어지고사회는 더 이상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가 소멸의 조건들

 

이러한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오직 이전 국가 권력의 합법적인 기능들이이제 사회의 중앙 기능이라고 불리는 것이 공동체의 공무원들에게 이전될 수 있을 때국가 권력 – 여기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 이 불필요해질 것이다이러한 기능들의 이전 가능 여부는 이러한 중앙 기능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코뮨에 달려 있다이러한 기능들과 도구들 함께 사회는 저항을 찾지 못할 것이다이전의 국가 권력은 과거 그래왔던 것처럼 코뮨 안에서중앙 기능들과 그 결과로서의 도구들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는 자발적인 중앙집중화에 의해 생명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 중심 기능들은 사적 소유의 폐지와 나아가 모든 특권의 폐지생산수단을 사회의 소유로 이전하는 것(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 의해)으로 구성되기 때문에이러한 특권과 사적 소유를 일을 수 있는 모든 개인또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중심 기능에 저항할 것이다따라서 새로운 사회질서의 기능은 이런 사람이나 계급에게 이전될 수 없고이러한 저항이 존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연적이다그러나 이러한 저항을 극복한 코뮨은, (예를 들어 코뮤니즘에 충성하는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존재할 경우이러한 기능들을 스스로 전복할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점진적인 소멸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 또한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반드시자발적인 중앙집중화다시 말해 코뮨에 권력을 이전시킴으로써 처음부터 스스로 모든 권력을 박탈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이 조건을 만드는 것이 독재의 책무이고잉여가 되는 것이 그 목표이다.

 

 

두 체제의 대립

 

맑스에 따르면중앙 정부의 적지만 중요한 기능들은 공동체 공무원(엄격하게 공동체를 책임지는)에게 이전될 것이다그러므로 지역 공동체의 자치 정부가 문제가 되었을 때중앙 국가 권력은 코뮨의 자발적인 중앙집중화에 의해 잉여가 된다레닌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고그의 생각으로 받아들였다그러나국가 코뮤니즘 이론에 따르면(이 역시 레닌이 발전시켰는데), 모든 생산 수단은 국가 소유이고, “국가 자본주의 독점의 형태로” 중앙집중화된다조직적 일반 공공 기업의 메커니즘은 정부의 지도력을 가정한다그러므로 그것은 국가의 권력 도구이지 코뮨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독점의 기능조직적 일반 공공 기업의 메커니즘 코뮨이 아니라 중앙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공무원들이 수행한다이러한 두 체제의 대립보다 더 극명한 대조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관점레닌이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에서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 신념은 오늘날 제인터내셔널을 지지하는 이들의 신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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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인용한 엥겔스의 글 2.

 

출처국가와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는 처음부터 국가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생산 수단을 국가 소유로 돌려준다그러나 그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로서 스스로를 폐기하고모든 계급 구분과 계급 적대를또한 국가로서 국가를 폐기한다지금까지 계급 적대 속에서 작동해 온 사회는 국가가 필요했고그것은 특수한 착취 계급의 조직으로 생산의 외적 조건들을 유지하고따라서 특히 착취당하는 계급을 주어진 생산 양식(노예제도농노 또는 농노제임노동)에 의해 결정되는 억압의 조건들 속에 강제로 두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국가는 가시적인 기업의 형태로 집중된 사회 전체의 공식적인 대표였다그러나 계급이 스스로 자신의 시대전체 사회를 대표하게 되는 국가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오직 지금까지만 그러했다고대에는노예를 소유한 시민들의 국가중세 시대에는 봉건적 귀족우리 시대에 와서는 부르주아가 그러하듯이사회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국가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전체 사회의 대표로서 국가가 진정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었을 때 –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 수단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 첫 번째 행동은 또한 국가로서의 마지막 독립적인 행동이게 된다사회적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은 한 영역에서 차례차례 다른 영역에 이르기까지 잉여가 되고스스로 사멸한다사람의 정부는 사물의 관리(administration of things)로 대체되고또한 생산 과정의 관리로 대체된다국가는 폐지되지 않는다그것은 사멸한다.” (반 뒤링, pp.301-03, 독일어 제3)“

 

 

<주>

 

[20] 네덜란드어 원판의 이 부분은 코뮤니스트 생산과 분배의 근본적인 원칙들의 같은 제목의 챕터에 해당한다 :

http://www.aaap.be/Pages/Transition-nl-Grondbeginselen-1935.html#II.b

 

[2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7/anti-duhring/ch24.htm 이 인용은 1932년 네덜란드판보다 확장되어 있다(편집자 주)

 

[22] 이 부분은 근본적인 원칙들의 끝맺음과 동일하다.

 

[23]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3.htm ‘우리’ 이후의 이탤릭체는 편집자가 추가한 것으로 GIC의 네덜란드 원판과 Lenin Werke, Dietz Verlag, Berlin, 1981, Bd. 25, 439쪽에서 볼 수 있다후자 같은 경우 레닌은 노동자로서 스스로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자...”고 썼다.

 

[24]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3.htm - s3.

 

[25]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3.htm - s3.

 

F.K. 번역(원문), 2016 5 25

편집 Jac, J., 2017 7 26일 : 2017년 10 10

최종 수정 : 2017 12 22

 

 번역(한국어)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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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이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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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맑스주의와 국가 코뮤니즘 1

맑스주의와 국가 코뮤니즘

 

국가의 점진적 사멸

 

 

국제코뮤니스트그룹(G.I.C.)

네덜란드, 1932

 

 

 

 

차례

 

경제 혁명은 생산 수단의 정복과 함께 시작한다

레닌주의 국가 코뮤니즘임노동자는 여전히 임노동자로 남는다.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 이론의 모순

국가 코뮤니스트로서의 레닌

국유화(Nationalization)”와 사회화(Socialization)”

레닌은 어떻게 간단한”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했나

국가 코뮤니즘은 평의회 사상과 충돌한다

맑스주의으로부터의 의문스러운 이탈

노동자들의 통일된 권력은 필수적이다

1871년 파리 코뮨의 교훈

맑스의 평의회 체제란

코뮨의 대중과 지도자에 대한 문제

국가 소멸의 조건들

두 체제의 대립

 

1932년 G.I.C.가 채택한 막스 헴펠(Max Hempel)의 글 ‘Marx-Engels und Lenin’. Uber die Rolle des Staates in der proletarischen Revolution, in: ‘Proletarier’ Nr. 4 . 6, 19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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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국가 코뮤니즘

 

 

경제 혁명은 생산 수단의 정복과 함께 시작한다

 

노동계급의 지배가 산업화된 국가에서 사실이 되자마자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일상을 새로운 기반공동체 노동[2] 위에 세우는 변형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일에 직면한다사적 소유의 폐지는 쉽게 발표되고그것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표현하는 첫 번째 척도가 될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실제 경제적인 과정을 위한 법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사법적인 조치일 뿐이다진정한 변형과 실제 혁명적 작업은 그 후에서 시작된다.

 

 

레닌주의 국가 코뮤니즘임노동자는 여전히 임노동자로 남는다.

 

이 문제가 공식적인 맑스주의자[3]에 의해서 다뤄지는 한국가가 이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과거의 결론으로 간주된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볼셰비키당은 지속적으로 생산수단을 국가의 손에 쥐여주는 사상을 수행해왔다[4]. 그것이 제한된 정도로만 성공한 것은 러시아의 사회적 생산이 후진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어떤 점에서는그것은 생산 수단의 국유화에 부여된 자연적인 장벽이다그러므로 문제는 국유화를 할지그리고 어느 정도 국유화가 가능할지가 아니라볼셰비키 이론과 실천에서 스스로 선언한 것처럼승리한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수행하는 것이 코뮤니즘으로 나아가는 길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볼셰비키 정권 아래 러시아 기업의 발전은 명확한 답을 내놓았다국유화된 기업에서 노동자가 여전히 임금 노동자라는 것은 이제 확실한 사실로 여겨진다국가는 이전의 사적 자본가들을 대체했고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이 국가에 판매한다국가는 법으로 임금을 정하고노동조합을 허락하는데스스로 국가 기관이 되고노동법을 제정한다러시아에서 실제로 효력을 갖는 임금법은 17개 임금 단계성과급보너스 등을 보여준다한마디로:

 

국유화된 산업은 사적 자본주의 아래 생산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착취에 기초해 있다국가 관료는 지배계급이 된다이 체제에서 소비에트 선거는 가짜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마침내 노동자와의 공동-경영을 획득한다.

 

국가 그 자체–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국가로 불리지만[6] -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임노동자 계급과 대립한다중앙집중화된 국가 관료제의 정상은 국가의 입법과 행정기관이며동시에생산의 지도자이기도 하다이들은 사적 자본주의에서의 독점 자본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사실 새로운 지배계급국가 관료와 농민 계급을 대표한다노동자들의 그들의 노동력을 국가에 판매하지만오직 노동법에 따라서만 그렇게 할 수 있고국가 관료에 의해 만들어진 노동법은 가격과 노동 조건을 정해놓고 있다유례없이 가혹한 착취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며모든 반대는 원칙적으로 반혁명적인 것으로 억압된다.[7] 훈육과 국가에의 복종은 이 강제적인 조직을 완성한다사람들은 헛되이 궁금해한다대체 어떻게 코뮤니즘의 첫 번째 요건, “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달성했냐고.

 

다른 편에서는국가의 경제와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동자들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소비에트 선거에 참여하고당과 노동조합에 가입한다그러나소비에트 선거가 전능한 국가 관료(그리고 재산을 갖고 있는 농민 계급)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는 이상당과 노동조합이 관료의 강력한 도구인 이상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영향력이 이런 방식으로는 효과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실질적으로 후자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아래서 요구한 노동자들에 의한 공동-경영으로 환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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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

 

맑스에 따르면국가는 독특한 억압 기구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기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는 부르주아지와 반혁명을 억제하는 기구

 

그러나 이로부터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중심 리더십과 전체 경제적 삶의 정수를 손에 쥔 국가가 배타적인 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오히려 반대로맑스와 엥겔스는 코뮤니스트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연합에 있다는 입장을 지지했고국가란 반드시 사라져야 하고그 시기는 억압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그러므로 부르주아지의 저항과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극복되었을 때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는 더는 계급 적대가 없으며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권력의 도구로서의 국가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레닌은 국가 코뮤니즘의 창시자이다그 이론의 토대를 닦은 국가와 혁명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를 언급한다비록 이 작업이 멘셰비키주의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방어하기 위해 작성되었고그런 점에서 지속적인 이점이 있지만레닌의 주장에 따른 독재의 모습은 과학적 코뮤니즘 창자들의 문제에 대한 개념과 대립된다이는 레닌이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인용한 부분에서도 드러난다레닌은 엥겔스를 인용한다.

 

국가는 그렇게 오랫동안 존재한 것이 아니다국가가 없는국가나 국가 권력의 개념이 없는 사회는 존재했다경제적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필연적으로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는 시점에서 국가는 그 분열의 필연적 결과가 된다우리는 이제 이러한 계급들의 존재가 더 이상 필연적인 것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에 방해가 되는 생산 단계에 다가서고 있다이전 단계에서 등장했던 모양으로 그것은 없어질 것이다그와 함께 국가는 필연적으로 사라진다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 기반하여 재조직된 사회는 모든 국가의 기계를 그것이 속할 장소에 둘 것이다골동품들의 박물관물레와 청동 도끼 옆에.”[8]

 

엥겔스는 다른 장소에서 생산수단은 국유화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그러므로 레닌은 이 문장에서의 그의 이론을 발견한다.[9]

 

그러나 그것은 기이한 국가임에 틀림없다왜냐하면 그 국가는 오직 티끌로 사라지기 위해모든 권력을 점차 잉여로 만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만들기 위해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자신의 손에 사물과 생산의 리더십의 관리를 집중시키고생산 체계의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관리 기관이 정치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소수당의 손에 있다면실제로 그것은 광범위한 대중을 지배하는 것 관한 것이다.[10]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라는 변명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이 관리 기관은 러시아의 예시가 가르쳐주듯이중앙화된 조직 기관으로서중앙으로부터의 지시만을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이 기관 내에서는 독립적인 생산자“(노동자)의 자리는 없다이것은 중심적 리더십과는 관계가 없다.[11] 결과적으로 우리는 엄격한 규율최고 지도자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 러시아 경제와 정치의 종교적 교리가 되었음을 관찰한다.

 

이론적으로 소비에트 선거는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 수단을 소유한 국가가 실제로 사회의 이름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생산 기관을 지시하는 안전망을 제공할 것이었다실제로 국가 관료주의는 모든 권력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계획을 강요했고소비에트 선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음을 보여준다그러므로 소비에트 선거로 국가의 관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이는 국가당(State Party, C.P.R.)이나 노동조합의 사례가 아니다이 국가 관료는 자신 외의 그 어떤 다른 정치의 등장도 허락하지 않는다이러한 국가 코뮤니즘에서 명목상 당과 노동조합 조직그리고 소비에트 선거로 운영되는 민주주의가 맑스와 엥겔스가 요구했던그리고 레닌 또한 꿈꾸는 척했던국가의 소멸을 보장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12]

 

한 손에 집중화된 생산은 새로운 형식의 지배를 정의한다결과적으로 국가는 소멸할 수 없다민주주의도 역시 소멸할 수 없다민주주의는 억압을 감추는 가리개를 남겼다.

 

우리는 이 정부 또는 집중화된 리더십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지만반대로 생산 수단를 국유화한 방식의 결과로 스스로를 더 긍정해야 한다.[13] 그것은 실제로는 자유롭고자 하는 생산자들이 정부에 복종한다는 것그들이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한다는 것결국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위안을 삼을 만한 것이라면그 대가로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종속될지 스스로의 종속을 모양 지을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길은 생산자로서의 그들의 기능을 넘어서는민주주의의 길이다.

 

의심할 바 없이생산자로서의 노동자는 하나의 권력이지만바로 그렇게 그들은 중심적 리더십에 따라야 한다기업 바깥에서 그들은 오직 무장했을 때에만 결정적인 권력이 된다그러나 러시아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이 무장해제 되고반대로중앙 정부 소속의 적군(Red Army)이 만들어짐을 본다결과적으로 이러한 민주주의에서 노동자들은 거의 영향력이 없다근본적으로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도 구분되지 않으며관료제를 지배하는 강한 내부자들에 저항하는 것은 그 무엇도 이뤄질 수 없다. (이는 러시아의 사례이기 때문에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사회적 관계에 의존한다이들은 러시아의 국가 코뮤니즘의 승리를 보장했다그러나 동시에 이로부터 우리는이것들이 노동계급에게 어떤 타격을 주었는지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러시아 모델에 따라 국가 코뮤니즘을 실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레닌의 이론에 따른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의 결과로서 중앙조직의 지도력과 관리는 지배관료주의에 의한 억압의 도구로서 이른바 새로운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다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쓸모없는 잎사귀가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지배를 가리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국가는 반드시 소멸할 것이라 표현했고심지어 민주주의 또한 반드시 죽는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린다:

 

”(...)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그리고 보다 생생하고 다채롭게 스스로 죽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엥겔스는 꽤 명백하게그리고 단호하게 국가가 전체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시점 다음의 시기를 언급하고그것은사회주의 혁명 이후이다우리는 모두 그 시기 국가의 정치적인 형식이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임을 안다그러나 뻔뻔스럽게 맑스주의를 왜곡한어떤 기회주의자들의 우두머리들도 진입할 수 없다엥겔스는 결론적으로 여기서 민주주의에 대해 스스로 죽어가는‘, 또는 소멸한다고 이야기한다.”[14]

 

의심할 바 없이이를 통해 레닌은 국가 코뮤니즘 내의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러시아에서는 실제 그 반대로 나아갔지만그러한 발전 상황과는 별개로엥겔스의 다음 문장을 반복함으로써 반대하고자 한다.

 

사람들의 정부는 사물의 관리그리고 생산과정의 지휘로 대체된다국가는 철폐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멸한다.”[15]

 

여기서 레닌의 이론은 스스로 모순됨이 명백하다.[16]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 이론의 모순

 

핵심은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 이론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있다만약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민주주의의 소멸이 이뤄진다면누구도 동시에 사회를 정치적으로그리고 경제적으로 정부의 가장 엄격한 중심적 리더십 아래 있도록 강제할 수 없다왜냐하면 이것은 자본주의 아래의 부르주아 국가보다 더 큰 권력과 광범위한 역량으로 무장한 새로운 국가의 존재와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국가가 그 권력을 특정 시점에 내려놓고이것이 생산과 관리를 위한 전체 중앙 기구들의 붕괴 없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오직 정치 신생아들뿐일 것이다반대로국가는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하고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어떤 사회들보다 더 큰 억압을 위한 도구로 성장할 것이다.

 

새로운 지배 카스트(계급)는 새로운 국가 코뮤니즘으로 진화한다노동자계급에서 올라온 지도자와 부르주아지의 탈주자로 구성되는데이들은 국가 코뮤니즘에 투신하고 중앙 관리를 차지한 이들이다이것이 오늘날 러시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지금은 사라져가는 러시아 노동자의 소수만이 국유화된 생산의 관리 조직 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경제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공무원들과 지도자들을 차지할 필요가 있다코뮤니스트당으로 통합됨으로써 코뮤니스트로 정당화된 이 사람들은 유능한 노동자들 지도자들 과 함께 나라의 생산을 통제한다그들은 새로운 지배 카스트를 형성하고이미 지금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나은 물질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의 지위 권력을 사용한다러시아 노동자들의 불만은심지어 프라우다(Pravda)"와 같은 공식 신문상에서도 나타나는데관료들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걱정할 뿐이며노동자들의 너무나 뚜렷한 위기상황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 준다그러므로 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단어가 러시아에서 나왔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국가 코뮤니즘은 코뮤니즘에서는 국가가 소멸한다는 주장과 모순되는 입장에 있다오직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국가 코뮤니즘다시 말해 중심적 조직 리더십과 국가에 의한 생산 관리가 이뤄지는 경우는 국가가 남아 있으며그 권력을 강화한다국가와 민주주의의 소멸의 경우에는그 대신 사회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을 향해 나아가며억압적인 국가 권력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그러나 이 경우 국가 생산을 주도하는 중앙 기관은 무너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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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코뮤니스트로서의 레닌

 

이 새로운 억압적 기관이 러시아 국가 자본주의의 관행들로부터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레닌이 국가와 혁명“(1917)에서 그 한계를 이미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세기재치 있는 70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는 우편 서비스를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의 예시라 했다이것은 확실히 진실이다현재 우편 서비스는 국가-자본 독점의 연장선상에서 조직된 사업이다제국주의는 점차 모든 신뢰(trusts)를 유사한 형태과로하고 굶주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똑같은 부르주아 관료제를 가진 조직들로 변형시키고 있다그러나 사회적 관리의 작동방식은 이미 우리 손에 있다우리가 자본주의자들만 전복시키고무장한 노동자들의 철권으로 이 착취자들의 저항을 박살 내고그리고 근대 국가의 관료적 기구들을 때려 부수기만 한다면우리는 아주 멋지게 장비된 작동방식들, “기생충으로부터 자유로워진통일된 노동자들이 기술자들십장그리고 회계사들을 고용하고 모든 국가의 일반 공무원들이 그러하듯 노동자의 임금으로 보수를 지급하며 잘 운영할 수 있는 작동방식을 갖게 될 것이다모든 신뢰(trusts)와 관련하여 즉시 수행 가능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업무가 있다이 일의 수행은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착취를 없앨 것이다이 일은코뮨이 이미 실행하기 시작한 (특히 국가의 건설에서것에 관한 것이다.”

 

우편 서비스와 같이 모든 경제를 조직하기 위해서는기술자들십장그리고 회계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공무원들은 노동자의 임금“ 이상의 보수를 받을 수 없고모두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제도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이것이 당장의 우리 목표이다이것이 의회주의의 폐지와 대의 기구의 보존을 실현시키는 것이다이것이 노동하는 계급들에서 이러한 기관들의 부르주아지 변절자들을 제거하는 방법이다.”[17]

 

여기서 레닌은 평이하게 국가 코뮤니즘에서의 중심적 리더십과 생산관리는 우편 서비스의 모델에 근거하여또는국가 자본 독점의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술자들십장회계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공무원들은 이제 국가의 공무원이 되고국가의 생산 독점에서 이 공무원들은 전체 생산을 통제하는 이들이다. “일반적인 공공 기업의 작동방식은 자본주의 국가 독점의 예시에 따라 조직된다.”[18]는 것은 사실 국가 코뮤니즘에 대한 특징적인 서술이며레닌이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서 엥겔스(그리고 다른 곳에서 맑스)가 이야기한 바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쟁취하고 처음에는 생산 수단을 국가 소유로 전환시킨다”[19]. 얼핏 보면 그는 레닌과 같은 말을 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그는 생산 수단은 처음에는” 국가 소유로 이전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나아가 생산수단은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마지막 독립적 행동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생산수단의 소유가 또 다른 행동을 시작하는 것일 뿐이며우리가 맑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거꾸로 뒤집지 않는 한또 다른 행동이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일 수밖에 없다만약 생산수단을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 이러한 연합의 형성을 자극한다면, “업무 관리와 생산과정의 관리는 발전할 것이며그동안 자유롭게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된 사회가 자유로운 경제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삶을 정하게 될 것이다오직 이 연합이 스스로 확장하는 정도로만 국가의 억압적 힘이 잉여가 되고국가는 소멸할 수 있고그렇게 될 것이다동시에이러한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그래서 국가의 소멸을 이루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유일한 책무다오직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의 글을 이해할 수 있다맑스와 엥겔스는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을 일반적인 공공 기업의 작동방식자본주의 국가 독점의 예시에 따라 조직된 것으로 제시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러한 관점은 오직 한 재치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의 산물일 뿐이며맑스와 엥겔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여기서 레닌은 재치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맑스주의 원칙들을 설명하는 방식을 가져다 쓰면서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엄격하고 기계적인 개념으로스스로 국가 코뮤니즘임을 보여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생산을 독점한 국가는 여기서 사회를 대표하는데이는 사회 민주주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국유화(nationalization)와 조금의 차이도 없다.   (계속)


<주>

 

[1] 이 번역은 1932국제 코뮤니스트 그룹(Group(s) of International Communists)이 네덜란드어 팸플릿으로 출간한 것이다. (서지 데이터는 이 판 편집자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2] 1927년 글에서는 경제를 새로운공동의(코뮤니스트적원칙에 따라 전환하는 것으로 작성되어 있다.

 

[3] 1927년 글에서는 비공식적인 맑스주의자로 작성되어 있다.

 

[4] 1927년 글에서는 이와 같이 계속된다: “이와 같은 부르주아화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보편적 참정권으로 스스로를 지배하는부르주아 국가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주의화까지 마음속에 그려보는 데까지 나아간다이것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이론적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나현실은 다르다.

 

[5] 1927년 글에서는 국가는 과거의 사적 자본가들을 대체했고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이 국가에 판매한다그동안 국가는 임금을 고정시키고지배하는데오직 자유 시장과 경쟁의 한계 내에서만 그러하다.”

 

[6] 1917년 글에서는, “거만하게도 노동자 농민 국가로 불렸다로 작성되어 있다.

 

[7] “이들은 사적 자본주의에서의...”에서 유례없이 가혹한 착취...”까지의 구절은 1932년 판에 추가되었다.

 

[8] 레닌, “국가와 혁명”(챕터1: 계급 사회와 국가, 3국가억압된 계급을 착취하는 도구):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1.htm

1927년 글에서 헴펠의 원문은 우리는 레닌, ‘Lenin, ‘Staat und Revolution’, Aktions-

Verlag, Berlin-Wilmersdorf, 1918. 에서 인용했다쪽수는 판마다 다를 수 있다엥겔스의 인용은 다음과 같은 제목이 있다: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Verlag Dietz Nachf., Berlin

[편집자 주: 1927년 글에서는 레닌 이후 엥겔스의 인용 두 개가 더 있다그들은 과학에서의 유진 듀링의 혁명 [-듀링]’에 있던 것인데이 판에서는 부록에 있다 레닌이 엥겔스로부터 인용한 두 인용문]

 

[9] 1927년 글에서는 엥겔스는 생산수단은 국가의 재산이 되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언급했다국가는 사회를 대신하여 그것을 소유한다그러므로 레닌은 이 문장에 기반을 두어서도 그의 이론을 정립했다.“(”-여서도는 1932년 팸플릿에서는 빠졌다)

 

[10] 1927년 글에서는 그것은 광범위한 대중을 지배하는 것 관한 것이다로 되어있다(강조인 실제로는 빠져있다.

 

[11] 1927년 글에서는, ““자유로운 생산자들”(노동자들)에 의한 뒤섞임은 이 기관 내에서는 불가능하고통합된 중심적 리더십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2] 이 문장은 1927년 글에서는 공식화되어 있다. “중앙 정부에 대한 소비에트 선거는 이 국가가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보장해야 한다국가는 생산수단을 사회의 이름으로” 소유해야 하고 이것은 엥겔스그리고 또한 레닌이 요구한 것이다 - , 실제로 사회의 이름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생산과정을 지도하며국가는 이 혁명의 과정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전체 경제는 중심에서 통합되어 있고그로부터 지시를 받으며그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그래서 다른 공동체 현장에서 이뤄지는 소비에트 선거는 경제의 결정적인 설계에 영향력이 전혀 없다이것은 사회가 그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대로 생산의 지도자들의 중심적 최고위층에 행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이다이 경우정부가 실제 사회의 이름으로”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그렇다.

 

[13] 1927년 글에서는 우리는 여기서 그것이 가능한지어느 정도로 가능한지에 대해 검증하고 싶지 않다그러나 이 정부 또는 중심적 리더십은 소멸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작성되어 있다.

 

[14]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1.htm - s4

 

[15]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1.htm – s4.

 

[16] 1927년 글의 처음 세 부분은 여기서 끝난다.

 

[17]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taterev/ch03.htm.

 

[18] GIC는 아마도 호르터(Gorter)의 국가와 혁명’ 네덜란드 번역판을 인용한 것이다.

 

[19]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7/anti-duhring/ch24.htm.

 

 

F.K. 번역(원문), 2016년 5월 25

편집 Jac, J., 2017년 7월 26일 : 2017년 10월 10

최종 수정 : 2017년 12월 22

 

 번역(한국어)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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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경찰 개혁에 반대한다. 자본주의 철폐를 위하여!

경찰 개혁에 반대한다.

 

자본주의 철폐를 위하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글을 온라인에 게시할 준비를 마치자마자 완전히 드러내놓고 벌어진 또 하나의 미국 흑인 시민에 대한 경찰의 노골적인 총격 사건이 위스콘신주 커노샤에서 분노에 찬 투쟁을 촉발했다제이콥 블레이크는 하반신이 마비된 채 남겨졌다야간 통행금지의 재시행과 함께시위자들을 제지하기 위해 한 줄에 선 무장 경찰과 주 방위군은 블루리브스매터(역 경관의 생명은 소중하다.)” 의 추종자가 되었다. : 17세의 카일 리튼하우스가 장전한 소총을 들고 즉시 세 명에게 발사했으며그들 중 두 명이 사망했다아니라면 최소한 목격자 상황 진술에 따른 것이다그의 변호사는 무장한흥분한 경관으로부터 도망치는 한 젊은 청년의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한 가지 확실한 것은이 모두가 도널드 트럼프의 기세등등한 선거 운동을 위해 천국에서 온 만나와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그에게 있어서 백악관으로 복귀하도록 할 최고의 방책이란 법과 질서라는 명분의 깃발을 휘두르는 것이고경찰이 만행을 저지르도록 한 바로 그 법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버리는 것이다한편진정한 근본적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이며가진 자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대다수의 빈자-그들의 피부색이 어떻든-를 억압하는 법적정치적 근간 전체를 제거할 필요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된다이 글에서 우리는 법과 질서의 대안은 경찰 개혁이 아니라 모순덩어리인 체제 전체를 개혁하는 것임을 주장한다계속...

 

조지 플로이드 시위

 

맑스는 몇 주 같은 몇십 년몇십 년 같은 며칠이 있다고 했다. 5월 26일 이후의 하루하루는 마치 맑스가 묘사한 문구 뒷부분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미국 내의 노동자들 및 이주 노동자들이 느낀 응어리진 분노와 불만이 수십 년 동안의 좌절이 응축되어 전 세계적으로 표출되었다오바마 행정부 후반기 동안 2014년 퍼거슨, 2015년 볼티모어, 2016년 달라스와 같은 각 도시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와 과격 시위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은 6월 중순을 정점으로 거의 모든 주요 도시를 거쳐 온 나라로 확산하였다미국의 소규모 도시들 뿐 아니라 해외의 도시들에서도 시위가 촉발됐다투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여름 동안 대부분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미국의 IWG, 영국의 CWO, 캐나다의 클라스바탈로를 포함하여 ICT의 지지자들과 동지들이 뉴욕필라델피아런던몬트리올토론토로스엔젤레스트렌턴리치몬드그리고 애들레이드와 같은 도시 전체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이들 시위는 미네아폴리스의 인종차별주의 경관이 조지 플로이드를 무자비하게 사살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되었다그의 죽음은 투쟁의 촉매제였으나곧 그 투쟁은 더욱 심오한 쟁점을 언급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졌다말하자면조지 플로이드는 최근 몇 해 동안 경관에 의해 사망한 수천 명의 흑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전통은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하여 수십 년 동안 경찰의 야만성과 국가적으로 성역화된 폭력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 모든 인종의 노동자 계급이 흑인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들고일어섰다.

 

투쟁이 다인종적이라는 것과 그렇게 강렬한 노동자 계급의 반응을 끌어낸 것은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 그 이상의 문제로 파고들어 가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점차로 수많은 백인 노동자 계급 한 부분에 대한 공격이 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찰이 맡은 역할이라는 점을 이해한다경찰은 시민을 보호하거나 공공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계급에 속한 무장 폭력배라는 매우 분명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그들의 과제는 재산을 지키고그리고 자본의 이해관계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일으키는 이들을 협박하는 것을 포함한다이 점은 투쟁과 시위에 대해 경찰이 전 국가적으로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보면 아주 분명한 일이지만코뮤니스트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 있어 경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경찰 폐지와 개혁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경찰을 폐지하라!”라는 반 경찰 투쟁에 점차 전국적인 유행 문구가 되었다자칭 반()자본주의 좌파들은 경찰 폐지를 지지하는 대신 경찰 개혁을 반대한다. (좌파란 자본주의의 좌익 진영을 언급하는 말이기에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자신을 좌파와 구분 짓는다.) 필수적인 암묵적 편향 교육단계적 축소 및 위기 훈련그리고 바디캠(역 추가 주로 법 집행 기관 혹은 범죄 현장에서 동영상 증거를 수집하는 데 사용하는 녹화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이 개혁의 몇 가지 보기들이다. - 경찰의 폭력적 행동을 완화하거나 비폭력적 방어를 이유로 경관에 의해 살해되는 비무장 흑인의 수를 줄이는데 이러한 개혁은 실패했다개혁의 한계를 깨닫고 나자활동가들은 경찰을 해체하여 공동체적 치안 유지라는 대안 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경찰 권력을 폐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폐지와 개혁이라는 단어를 그 개념을 상호 교환하여 사용할 정도로 남용한 것이다개혁의 방안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정책 변화를 언급한다한편 경찰을 해체하여 다른 이름으로 하는 다른 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급진적인 어떤 것으로 보인다결국이것은 근본적 개혁이 아니라 폐지와 다를 바 없다.

 

경찰 폐지 운동이 지닌 문제점은 폐지에 대한 관념이 아닌그러한 구조가 자본주의 내에서 폐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이는 경찰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분리될 수 있으며자본주의 내에서 파괴될 수 있는 조직이라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경찰은 단지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며자본의 이해관계를 변호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코뮤니스트는 알고 있다따라서 자본주의가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한 경찰은 존속해 나갈 것이다경찰 폐지론은 별개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혹은 코뮤니즘의 점진적 발전으로 나아가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자본주의가 붕괴하여야만 비로소 경찰이 폐지되는 것이다.

 

경찰의 역사

 

경찰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조직된 이후미국에서는 범죄가 아닌 군중 일반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경찰 권력은 본래 1825년에서 1855년 당시다수의 격렬한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 구체적으로는 영국에서의 노동자 파업북미 지역에서의 격렬한 시위들그리고 남부의 노예 봉기의 위협을 일컫는다경찰의 역사는 그것이 결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닌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조직적 행동을 억압하기 위해 언제나 폭력 및 협박 전술에 의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계급투쟁의 기폭제였다. - 산업화는 그 자체로 프로레타리아트 탄생으로 향하는 필수적 단계였으며임금 상승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더 많은 노동자가 투쟁할수록그들은 자본가계급에 더욱 위협이 되어갔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노동조합은 불법화되었고영국에선 50인의 회담이 열렸다. - 이는 영국 노동자들이 프랑스로부터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영국 지배 계급의 우려 때문이었다. 1792년부터 1820영국의 노동자들은 무장 군인의 억압에 직면했을 때조차 계속해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 나갔다. 1819년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피터루 대학살(Peterloo Massacre)에서모집된 병사들은 8만 명의 평화 시위대로 돌진하였으며, 11명이 죽음에 이르렀으며수백 명이 부상했다비록 이 사건이 군중 통제 및 시위 진압의 목적이 있었음에도파업과 투쟁은 계속되었다노동자들이 처형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더욱 조직화한 행동으로 불길이 번졌고군 측은 시위 확산에 따른 파업 지도자들을 계속해서 처형할 수 없었다이로 인해 1829년 런던 경찰이 창설되었고이는 비무장 폭력을 통해 군중을 해체하려는 의도였다. - 경찰의 만행 행태는 그들을 위협적으로 만들었고집합적 행동에 대한 사전 경고 없이 노동자들을 탄압하도록 했다경찰은 런던 전체로 확대되었으며이웃의 감시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일상생활을 철저히 사찰했다현대의 경찰 권력이 바로 이 형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비록 경찰 권력의 발달에 있어서 뉴욕과 찰스턴 같은 곳의 그 역사적 맥락이 런던의 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이들 기관이 군중 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점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협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남는다. ‘법적 강화라는 폭력적 행동을 통해 개개인을 감시하는 것은 인종차별 이상의 문제이며그저 사유 재산 방어 이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그것이 일상이든개인에 대한 경찰의 만행이 특정 지역에 국한한 것이든그게 아니라면 평화시위대에게 최루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며 폭력을 촉진하는 대규모의 경찰 폭력배이든그 모두가 노동자 계급을 억압하여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이용된 수단이다경찰 권력은 오직 그 목적을 충족할 때에만 존재하므로, ‘경찰 폐지에 대한 어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우리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그것은 한 가지 혹은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할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인과 개혁

 

샌드위치를 생산하는데 최저임금 이하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상점에서는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문구를 내걸 때나이키가 중국의 죄수 노동자들에게 이윤을 착취하는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지 말고 억압을 반대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진부한 광고를 집행할 때대부분 사람은 와와 같은 기업들의 염세적이고 초비판적인 노력 통해서 볼 수 있고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경찰 폭행과 제도적 인종차별을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그들 상당수조차부르주아 정치인이 구사하는 친절한 형태로 표현하는 선전에 빠지기 쉽다비록 경찰 폐지는 자본주의를 철폐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으며그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알고 있지만진보와 보수 정치인 모두는 경찰 폐지론이 자본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무엇보다도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착취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 존속을 요구한다경찰국가와 자본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매우 많은 사람이 미국의 주요 모든 도시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지배 계급과 그들의 정치적 하수인들에게 그들이 빠르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물론 많은 이들이 분명히 자행되고 있던 억압을 무시하고전통적인 법과 질서에 사로잡혀 있었다더 많은 못된 정치인들이 실제로는 포퓰리즘적 구호를 외치고점진적 변화를 변호하는 한편동시에 그들이 지지하고 대표한다고 외쳤던 사람들을 착취하는데 몸담고 있었다는 점은 논란거리다.

 

심지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T)를 트윗하며초크홀드(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될 당시 경찰이 사용한 체포 방법)를 그것을 무엇으로든 변화시킬 것인 양국가적으로 금지할 것을 요구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들이다. - 조 바이든카말라 해리스앤드류 쿠오모스일한 오마르스이들은 퍼거슨 시위 때는 색맹으로 남으려 했으면서입에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인종차별을 비난했다더 많이더 온건한 청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양쪽 모두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일단 어떤 움직임이 관심을 끌어 그들의 권력에 잠재적 위협이 되면결국 자기 무덤을 파기 위해 그 운동에 편승한다자신들의 편이 되기를 요청하는 자본가들의 허울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일상생활을 착취하는 현실과 본질을 본다우리가 보고 있는 경찰 개혁안은양보를 위한 조치들은 과장된 것이며너무도 많은 노동자가 느끼는 분노를 잠재우려하고그들에게 안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임금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 지배계급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보호하려고 애쓰는 바로 그 제도에 의문의 여지없이 노동력을 계속 팔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조 바이든은 형식적 경찰 개혁안에 3억 달러(한화 약 3400)의 예산을 추가로 편성할 것을 계획한 한편민주당」 정치인들이 관할하는 도시와 주에서도 비슷한 안건이 제시되고 시행되었다보기를 들면 뉴욕의 시 의회는 어떤 매체에서 일컬은 일련의 근본적 경찰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는데이 안에 경찰관을 징계 조치하는 범칙제도,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공무원을 교육하는 중재제도그리고 경찰관의 행동을 기록(녹화)할 권리를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개혁안들이 경찰의 지속적 위협과 폭력에 노출된 흑인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가져다줄지는 여전히 상당한 의문으로 남는다경찰은 그들이 위협을 받을 때마다서로를 방어할 이들로 구성된 조직 폭력배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해왔다특히 그들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가한 폭행을 공개 조사할 경우더욱더 그러하다공무원이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는 범칙제도를 대체 누가 시행한단 말인가경찰관을 녹화할 권리를 누가 보장하겠는가경찰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할 것이다그들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데 실패해왔다그리고 만약 이러한 개혁을 시행하도록 방관한 이들이 경찰이 아니라면그것은 수감 중인 수백 명의 흑인황인백인 노동자를 유지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일 것이며다를 바 없는 인종차별주의적 형사사법제도일 것이다이것은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기업을 위해 값싼 상품을 생산하는 임금 노예가 되라고 강제하는 것이다경찰의 만행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창설된 어떤 기관이든지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또 하나의 다를 바 없는 기구에 불과할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설상가상으로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뉴욕의 시위대에게 시위할 필요 없잖아이겼는데.”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말했다전국적인 주와 시에서 통과된 소규모의 점진적 개혁 조치의 목적은이제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드러난 경찰 폭력그리고 자본주의 착취 구조에 저항하는 분노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수단임이 분명하다이들 정책 변화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우려가 마침내 해결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그들을 안주하게 하는 수단으로이는 물론 자본가들과 그들의 하수인 정치인들이 유행병으로 악화하여온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하기 위함이다.

 

한편어떤 부르주아 정치인과 정치단체들은 심각한 경찰의 폭력 사건이 뉴스가 될 때마다 역사적으로 통과된 전통적인 개혁조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를 자처해왔다조지 플로이드의 사살을 둘러싼 첫 시위가 있은 지 2주 후미니애폴리스 시의회는 경찰력을 해산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공공 안전 모델을 설치하기로 의결했다고 발표했다제이콥 프레이 시장은 직접 이 개혁안에 지지하지도 않았고심지어 미니애폴리스 경찰력을 해체하는데 이바지한 것도 아니지만미니애폴리스 시의회 계획은 분명 진보진영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는경찰 폐지를 요구하는 급진적 문구로 장식한 움직임에 영합하도록자유주의 정치인 자신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이런 사안이 십여 년 전 미국의 정치적 담론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그 과정에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하거나 기념할 만한 어떤 것이 아니다바로 그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과 자본주의 체제는 서로 의지하는 공생관계 일부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졌다현재의 미니애폴리스 경찰서는 해체될 수도 있겠지만그 자리에 어떤 새로운 구조를 끼워 넣든근본적으로 경찰이 해온 역할은 변함없을 것이다.

 

지역사회 치안 유지와 관련된 문제

 

경찰을 반대하는 많은 활동가는 기금을 재편성하고경찰서를 시민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할 지역공동체 기반 시설로 대체하길 바란다이런 제안에는 경찰관을 특정 911 신고에 대응할 사회복지사와 전문정신건강관리사로 대체하는 안도 있다정신건강관리노동자들이 응급구조요원으로서 무장경찰보다 더 효율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이미 사회복지사와 피해보호자들과 협력하는 미국 전역의 경찰서들은 매우 유연하지 못하다전문정신건강관리사는 경찰력과 법체계와 협력하면서 관료적 한계에 종종 부딪히는데이것은 심각한 곤경에 처한 희생자들을 돕는 데 있어서 방해요인이다광범위한 정신건강지원기관이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한 생각처럼 보이지만자본주의 아래 존재하게 될 기관은 잠재적으로 더 큰 해악을 낳을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 존재하는 심리학은 교육과 마찬가지로어릴 때부터 학생들에게 주입하여 부르주아 선전을 강화하는 부르주아 제도다심리치료가 무익하다거나 모든 치료사가 부르주아라는 것은 아니다단지 부르주아의 이해에 따라 자본주의 아래 정신건강관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보기를 들면 ADHD, 우울증과 같은 질환 치료는 종종 생산력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도록 교육받는다.

 

심지어 계급의식이 있는 심리치료사조차도 그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정신들이 그들의 활동에 계속해서 스며들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는지도 모르겠다. DSM-V형 행동장애(일반적으로 성인기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진단하는 기준이다.)의 주요 범주에 권위에 반하는 것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그 보기이다여기에는 가게서 물건을 훔친다거나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소한 상황도 포함되는데두 경우 모두 한 개인의 정신 상태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는 살기 위해 물건을 훔치며자신의 부정적 경험으로 인하여 경찰력을 점점 불신하게 되는데이는 단순히 자신의 현실에 대한 물질적 조건을 반영하는 행동이다자본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그러한 행동들을 병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본주의 트라우마적 영향을 무시하는 것이며개인 단독의 책임으로 그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경찰력을 정신건강노동자 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범죄 행동의 병리화를 가중하는 것일 수 있다더욱이 이것은 치안 유지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데이미 의료 시스템을 불신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더욱 소외시키고 치료사들이 완전한 치료를 제공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궁극적으로 경찰력을 지역공동체 기반의 정신건강관리 체계로 대체하는 것은 단지 치료사들에게 경찰복을 입히는 것이며그들이 정부에 협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미네아폴리스 시의회에서 경찰청을 해체할 계획을 처음 발표했을 때여전히 대응할 필요가 있는 강력 범죄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스스로 언급했다그들이란 단지 경찰을 일컫는 것이 아닐 것이다경찰관은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경찰관이 되는 것을 멈출 수 없다심지어 미네아폴리스의 시장 제이콥 프레이는 정부의 계획은 폐지가 아닌 개혁에 중심을 둔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경찰을 해체하고 그것을 덜 부패한’ 기관으로 교체하는 것이 폐지는 아니다그것은 통제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개혁은 코뮤니즘을 위한 부분적 점진적 변화일 수 없다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조직과 (국제주의) 세계혁명당을 통해서만 무너뜨릴 수 있을 뿐이다인종차별주의 경찰관을 지역사회 지도자로 교체하는 것은 경찰의 야만성이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 폭력을 종식하기에 충분치 않다. ‘덜 악의적인’ 정치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고 정부가 기능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듯이경찰을 해체하고 그것에 새로운 명칭을 붙인다고 해서모두가 자본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뉴저지주캠던

 

경찰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뉴저지주 캠던의 사례는 여러 좌파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실험적 전망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로서 표류해왔다소셜미디어 게시글의 제목은 2012년 캠던시가 경찰 부서를 해체한 경위를 분명히 하는데이후 수년 동안은 범죄율이 내려갔다소셜미디어의 게시글과 제목이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음에도캠던시가 폐지 운동을 선도하는 모델이 되기를 바라는 주류언론의 배출구를 통해 떠돌고 있다.

 

캠던의 경찰 개혁 시행 이후 범죄율은 내려갔다. 2013년 이 시에서 보고한 강력 범죄는 1,950건이었다. 5년 후인 2018년에는 1,197건으로 수치가 감소했다이는 약 38%로 상당히 감소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이 했던 것처럼 이들 수치가 줄어든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경찰 폐지론자들은 왜 일반인들이 범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를 떠올려야만 할 것이다범죄는 가난과 실직열악한 교육과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 부족의 주요 결과물이다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다캠던은 노동자계급 환경을 개선하고 빈곤의 근원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할 일련의 사회 계획을 통과시키지 못했다대신 계획대로 캠던 경찰서를 해체한 후그에 따라 도시의 치안은 변화하여 정반대로 통제되었다.

 

사실 캠던 경찰서는 일련의 국가적 긴축 정책으로 해체되었고기타 사회 정책과 도시 서비스도 이와 함께 중단되었다그렇다면 기존 경찰의 부재로 생긴 공백을 캠던 카운티 경찰과 함께범죄 발생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철저한 감시 체계로 메꾼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체제를 공동체적 치안 유지의 본보기로 지목하겠지만도보 순찰에 나선 경찰관들이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마을의 시민과 상호작용 함으로써이 이야기 – 보안 카메라감청 장비번호판독기이동감시초소경찰정보시스템 설치를 극대화하는 것 는 개혁이 가진 전체주의적 본질을 위장한다.

 

이처럼 극단적 수준의 감시로 경찰은 경범죄를 저지른 민간인을 색출할 수 있었고이로 인해 2013년에서 2014년 동안 9만 7천 명으로 상승했다. ‘카운티 경찰은 2014년 7월부터 10월 사이벨 없는 자전거 운행을 위해 99장의 티켓을 발행했다그리고 이 중 딱 한 장만이 전년도와 같은 수준의 범죄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이다또한 이러한 치안 유지 체제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채권력 남용을 초래했다그리고 그것은 흑인에게 불균형하게 집중되어있다캠던의 흑인이 백인과 비교하여 체포 도중 경찰로부터 무력과 폭력을 당할 확률이 4.5배 높은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자유주의자들이 이 마을을 경찰 개혁이 추구하는 이상향으로 삼는다는 점은 모순적이다캠던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지역에도 그와 같은 치안 유지 제도가 존재한다비록 그것이 자본주의와 제국이 우호적인 용어로 은폐하기를 좋아하는 도시의 자유주의자들의 기민함에 좀 더 적합하며 현대화되었을지라도.

 

요컨대캠던에 존재하는 치안 유지 모델을정치인 및 자유주의 정치 권위자들이 거기에 내재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웠지만전국에 존재하는 똑같은 억압적 감시국가의 강화일 뿐분명 경찰 폐지와 비슷한 것만도 못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론

 

본래 미네아폴리스 시의회가 6월 경찰청을 해체하기로 발표한 당시미국의 많은 자유주의자는 이것을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했다이것을 사회주의로의’ 필수적 단계로 인식한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노동자들과 코뮤니스트의 계획에는 해악이었다그들의 발표는 폐지와 개혁을 완전히 왜곡한 것일 뿐 아니라사람들에게 코뮤니즘으로의 점진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도록 확신시킨 것이다게다가 당초 발표 이후 항의 시위가 줄어든 것은 정부가 의도한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여준다노동자들 걱정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달랬으며그들이 진정한’ 변화를 보기를 원한다면 11월에 투표만 하면 될 것이라고 촉구한 것이다비록 뉴욕과 포틀랜드 같은 도시에서 여전히 시위가 발생하고 있지만전국적 선전은 잠잠해졌고정부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한다면 투표하라고 대중을 선동할 뿐이다.

 

지난 두 달 여간 이들 일련의 사건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민주당의 개입으로 BLT운동(흑인생명은 소중하다.)이 힘을 얻은 것인데폭력에 대한 저항을 유권자영합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그 연장선에 불과하다선거공약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의 불만을 해결하는 것은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수법이다이는 정책의 변화와 투표로 노동자 계급에 가하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권력을 쥔 정치인이 누구이든미네아폴리스의 경찰 권력을 대신하는’ 공동체 제도가 어떤 것이든경찰은 무고한 흑인과 홈리스 생명을 계속해서 위협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철폐되어야만 경찰이 폐지될 수 있다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조직하고세계혁명당을 창설함으로써만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점진적 개혁이라든지 투표를 통해서가 아니다우리는 코뮤니스트로서 경찰 폭력으로부터 투쟁하는 이들을 지지한다그러나 조직화한 노동자계급투쟁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시위에서 계급투쟁의 요소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긍정이지만단결하지 않으면 물거품이 되고해방을 위한 어떤 장기적인 목표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계급적 노선을 따라 조직되어야만 한다경찰 폭력을 계급 문제라기보다 인종 문제로만 다루는 것은 본질적으로 계급협조를 수반한다이는 흑인을 계급 지위와 상관없이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거대한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이다주류 언론에서 신분 정치를 점차 수용하고이와 결합한 비조직화한 운동이 소부르주아에 필연적으로 영합하고 만 것이다이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우리의 삶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흑인을 사살한 사건에 대한 투쟁은 자연스럽게 흑인 소유의 사업과 진보적’ 기업의 증진으로 이끌었다흑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돕는 것이 어떻게 경찰 권력으로부터 폭행당한 흑인 노동자를 돕는 것이겠는가그뿐만 아니다소부르주아에 결속한 흑인 사업주들은 흑인 노동자계급과 그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는다업주들이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지역공동체를 돕는다고 광고하는 가족 운영 영세 업체 역시 마찬가지다흑인 부르주아는 흑인 노동자계급과 경험하는 것이 다르기에그들의 계급적 지위에서 오는 경찰과의 관계 또한 판이할 것으로 본다미국의 경찰 만행이 심각하게 인종차별적이며불평등하게 흑인에게 집중된 한편계급 내에 그들의 억압 또한 뿌리박혀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경찰 폭력을 계급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인종 문제의 결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사실 우리는 노동자계급과 기타 소수 민중의 이해를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바라봐야만 한다미네아폴리스뉴욕시카고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을 구치소로 이송하기를 거부했던 버스 운전기사들의 사례는 훌륭한 계급적 단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우리는 이처럼 노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하도록 해야 한다이는 진짜 위협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고서로를 적대시하도록 만들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도록 역사적으로 사용된 부르주아 전술로부터의 저항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무엇보다 경찰 폭력에 대응하는 계급적 행위는 모든 노동자가 원하는 것이다노동자계급 한 영역에 대한 공격이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1

국제주의노동자그룹

옮긴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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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

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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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고문의 두 번째 부분(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Ⅱ)은 16세기 전환기 이래 자본주의 초기 팽창 시기부터 전쟁과 전염병들에 대한 역사적 스케치로 시작한다. 유럽의 초기 식민주의에 의한 ‘서인도제도’의 발견과 뒤이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그리고 아프리카와 ‘동인도’로 유럽의 팽창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제국주의 시대까지) 스케치한다. 이 글은 그때까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인구들이, 노예와 강제 노동의 무자비한 착취라는 조건 아래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접촉한 결과 치명적인 질병과 전염병의 ‘자연적인’ 확산에 초점을 맞춘다.

 

  이 글은 계속해서, 경쟁하는 모든 주요 열강들에 의한 현대 제국주의 환경에서, 화학전과 나란히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전쟁에 덧붙여서, 체계적으로 개발되었을 따름인 생물학전으로 나아간다. 다양한 생물학 물질(보기를 들어 탄저균, 보툴리누스균, 페스트 또는 에볼라 같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무기화’를 위한 군사-과학 프로그램들과, 일본의 옴진리교파(공식적인 비국가 세력) 사례를 포함하여, 그것들을 전시 분쟁에 ‘시험’하고 ‘적용’하려는 아직은 제한된 시도를 간략하게 고찰할 것이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한 몇 가지 논제를 제시하고 현재의 코로나19 대유행이 중국의 군사 실험에서 비롯했다는 추측을 거부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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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미생물 전쟁

 

1913년, 전쟁 직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발흥은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된 자본주의의 범죄와 폭력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그로써 자본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격동에 빠져든다고 지적했다.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구멍으로 피와 쓰레기를 분비하며’ 태어났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하여 단계적으로 세계에 자신을 각인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훨씬 더 폭력적인 격동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준비한다.”1)

 

 

화폐라는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신(몰록)

 

자본주의 발전은, 먼저 그 상업적인 형태에서, 첫 번째 세계화를 동반했다. 이것은 대체로 대륙들 전체를 규모로 한 팽창, 군사 정복, 식민화 그리고 착취 정책이었다.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의 ‘발견’은 미생물의 세계화의 막을 올렸다. 유럽-아시아 대륙에서 번성하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들이 정복이 이루어지는 내내 모든 곳으로 확산하였다. 홍역, 천연두, 콜레라, 결핵 같은 전염병들이 전체 인구를 파괴했다. 멕시코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가 1519년 2천5백만에서 1580년에 1백5십만 명으로 급감했고, 페루에서도 감소는 급격했는데. 1530년 즈음에 1천만 명이 감소했다.2)  동일한 종말론적 관측이 북아메리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중앙·남아메리카의 전염병은 16세기 초 오늘날의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착민들은 캐나다에 정착했고, 인디언 공동체들과 (상업적인 형태와 군사적인 형태로) 접촉한 결과로 즉각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으며, 외국 선박들이 그들이 사는 해안에 도착했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많은 공동체가 사라져버렸다.3) 대유행병의 이러한 치명적인 행진은 19세기까지 지속하였다. 1880년대 초에, 자본이 서스캐처원(Saskatchewan) 내부 지역을 관통하는 캐나다 태평양 철도 노선을 건설했을 때, 그때까지는 백인들의 병균들로부터 보호되었던 그 지역 토착민들은 매년 9%의 비율로 죽어 나갔다.4)

 

가축들과 가까이서 실제로 면역력을 지닌 채 살고 있던 유럽인 정착민들의, 대량으로 수입된 육종 시스템도 아메리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전염병이 출현하는 데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다는 점을 덧붙이자.

 

그것은 승자가 고의로 미생물 무기를 사용한 계획적인 대량학살은 아니었지만, 대규모로 수행된 여타의 군사 정복처럼 콩키스타(Conquista)는 돌이킬 수 없는 인간 재앙이었음이 분명하다.5) 도미니크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해서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는 철과 불에 의한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에 대해서 빼어나게 묘사를 했다.

 

“40년 만에, 기독교인들의 폭정과 극악무도하고 부정의 한 행위 결과로, 1천2백만의 남녀노소가 죽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리고 내가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1천5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믿는다. …… 이 12년(1518~1530년) 동안에 뉴스페인의 4백50 리그(거리 단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백만 명 이상의 사람을 칼과 창으로 죽이거나 산 채로 태워죽였다.”6)

 

그러나 미생물에 의해 이미 엄청난 충격을 받은 인구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식민 당국에 의한 강요 노동이었다. 금과 은을 갈망한 에스파냐 제국은 (자유롭든 그렇지 않든) 원주민들을 광산의 사실상의 노예제도뿐 아니라, 거대한 농업용 토지의 농노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즈텍의 권력을 더 쉽게 쓰러뜨리고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에스파냐 의회를 지원한 토착 귀족(추장)에 의존하면서, 에스파냐 하급 귀족들의 귀족정은 임금 노예제, 즉 식민 국가에 의해 정해진 비참한 임금을 강제함으로써 번성했다.

 

1542년 이후, 토착민 노예화 금지는 그들이 노동 상태에 처하는 것을 공식화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또한 번성하는 흑인 노예무역을 수반했는데, 흑인 노예는 이미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의 플랜테이션에서 이용되고 있었다. 라스카사스는 처음에는 가내 이용을 위해 흑인 노예 수입을 수용했지만, 이내 후회했다. ‘부주의에 대해 자책하면서,’ 도미니크회 수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흑인 노예제는 인디언 노예제만큼이나 부당하다.”7)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제도라는 재앙의 발전은 또한 그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미생물 재앙을 수입하는 사악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아프리카 원숭이들이 옮겨온 ‘황열병 바이러스’의 도입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숭이들과 토착민들을 대규모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노예제도와 같은 칭호로서,8) 강제 노동은 아시아9)와 아프리카 양쪽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한창일 때 확산하였을 따름이다. 레오폴드 2세 치하에서, 벨기에의 콩고는 왕의 개인적인 재산이었는데, 국왕과 막대한 수익을 공유한 대규모 광산 회사들과 거대 대농장 주인들에 부과한 흉포한 농노제를 경험했다. 또한, 식민지 정부는 앙골라와 북로디지아에서 44,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들여왔다. 이 노동자들은 진드기 열병, 독감, 폐렴, 과로 또는 되풀이되는 광산 ‘재난’으로 사망했다.

 

우리는, 알버트 런던(Albert London)과 앙드레 지드(André Gide)의 증언을 통해서, 프랑스 자본에 의한 콩고-해양 철도(Congo-Ocean railway) 건설이 낳은 인간 재앙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 공사는 23,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역사가 엘리키아 음보콜로(Elikia M’Bokolo)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적인 도입으로 야기된 생태, 인구 그리고 보건 재앙을 아주 잘 요약했는데, 자본주의는 인간을 이윤을 위한 살코기나 총알받이로 변형시켰다.

 

“두 콩고 지역의 특권 양여 회사 시스템에 의해 야기된 생태적 재앙과 인구 파국은 거의 모든 식민화된 지역을 덮쳤던 훨씬 더 일반적인 현상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었다: 세네갈(황열병, 페스트)이나 아이보리 코스트(황열병)에서처럼 마다가스카르(페스트)의 극적이거나 치명적인 전염병, 사하라 사막 지역과 앙골라처럼 상이한 지역의 가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 가축 돌림병, 전쟁, 초과 사망률이 중·동부 아프리카에 지옥 같은 주기로 뒤섞여 나타났다.”10)

 

따라서 전체 인구가 16세기 이래로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멍에에 매여 있었다. 죽도록 착취당하고, 강제 노동이나 노예제도에 의해 쇠약해지고, 바다와 육지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유행병을 견뎌낼 수 없어서, 그들은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한 위대한 몰록(Moloch: 인간을 제물로 바쳐 섬기는 신), 맘몬(Mammon: 부나 금전의 신), 돈의 신에 희생되어야 했다.

 

“돈은 모든 것의 사형 집행자이고,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몰록이다.……

사실상 돈은 진정한 재산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몰록이다.“11)

 

“자본은 전 세계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는 몰록처럼 보인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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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괴사의 시기에 생물학 무기

 

생물학 무기(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사용은 전쟁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고대의 병사들은 화살에 썩은 고기나 부패한 피를 살짝 묻힘으로써, 다시 말해 화살에 독성을 입혀 그만큼 잘 감염되도록 만들어, 화살의 파괴력을 강화했다. 스키티콘(Skythikon: 비잔틴의 기마 궁수들), 스키타이 궁수들의 전문 독은 똥거름에서 부글부글 끓는 유기물 세균뿐 아니라 여러 독성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혼합물은 중독뿐 아니라 가스괴저, 파상풍, 또는 여타의 수포 감염증을 일으켰다.13)

 

자본주의 팽창의 초기에, 우리는 상업적·식민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생물학 무기의 첫 번째 사용에 주목한다. 천연두가 북아메리카 영국 군대의 총사령관 제프리 애머스트(Jeffery Amherst) 장군에 의해 사용된 것은 7년 전쟁(1756~1763년) 시기였다. 그는 1763년 7월에, 토착민들의 반란이 맹렬했던 폰티액 전쟁(Pontiac War) 동안에, 아래와 같이 썼다. 생물학 무기의 사용은 ‘인종 청소’, 즉 그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의 진정한 종족 집단 학살 계획의 일부였다.

 

“이 불만 가득한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 천연두를 확산시킬 방법을 찾을 수 없는가? 이 기회에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술책을 사용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만 한다.”14)

 

그리고 이 ‘의문’ 뒤에, 천연두로 오염된 담요들을 사용함으로써 신속한 적용이 이루어졌다. 이 멋진 작업으로 그는 결국 명예로운 영국의 귀족원(일반적으로 상원이라고 번역) 의석을 얻었다.

 

토착민들을 전멸시키는 이 기술은 지난 두 세기 동안에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다른 사례로 브라질의 경우를 보자. 대지주들과 그들의 측근들은, 천연두나 마을들을 파괴하기에 적절한 다른 질병으로 토착민들을 오염시키기 위하여, 병원에서 나온 의복을 토착 인디언들에게 ‘제공’했다.15)

 

자본주의의 완전한 발전과 전 세계적 규모로 제국주의의 치명적인 대립이 ‘군사화’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화학 무기(그리고 1945년 이래로는 핵무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생물학 물질들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이끌었다. 그것의 치사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생물학 무기는 몇 가지 기준 — 테어도어 로즈베리(Theodor Rosebury, 1904~1976)의 기준으로 알려진 것 — 을 만족해야 한다. 직접적인 전염성, 최소 감염량, 감염이나 중독 경로, 잠복 기간이나 첫 번째 징후 지속 기간, 자연환경에서 생존, 생산과 보관의 용이함, 저장된 생산물의 안정성, (가능한) 치료법 같은 것이 그것이다.16)

 

극비리에 수행된 연구 과정에서, 군사 전략가들 — 미국, 영국, 일본,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등 — 은, 자연환경, 분말, 또는 스프레이 형태에서 안정적이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이미 사용되었던 탄저균의 ‘엄청난 효과’에 주목했다.17) 하지만 페스트균, 야토병(감염된 동물과 접촉하거나 진드기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파되는 질병) 효과에도 주목했다. 또한 죽음의 과학자들은 바이러스들의 “경이로움”에 주목했는데, 그것들의 미세한 크기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것들은 필터 소자들의 봉쇄와 개인 마스크를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백신에 의한 예방 범위 밖에 있으며 효과적인 치료법도 없다.

 

군사적 ‘총아’는 이제 실험실에서 부활하여, 그것을 멈출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확산할 수 있는 천연두 바이러스 — 1980년 5월 8일에 WHO가 박멸되었다고 선언했다 — 일 것이다.18) 이것에 절지동물에 의해 전염되는 뇌염(진드기를 매개체로 하는 뇌염, 치쿤구니야, 뎅기열,19) 황열병, 베네수엘라 말 뇌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들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런데 박쥐에 의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들은 깊이 연구되었는데, 특히 중국 실험실에 많이 연구되었다. 마르부르그바이러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리사 바이러스, 니파 바이러스(말레이시아, 인도, 방글라데시) 등이 박쥐가 옮기는 바이러스이다. 곤충의 경우에는, 군사 프로그램(곤충학전)20)에 사용되는 것들은 페스트, 콜레라 같은 것의 생물학적 전달자로 쓰일 수 있다.

 

극비 군사 실험실에서 수행된 이 모든 프로그램은 장래의 생물학 전쟁을 대비하는 것인데, 전면적인 집단 학살과 유사하다. 과거에 ‘실험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것들은 소량에도 치명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일본 제국 군대가 점령했던 만주(1932~1945년)는 세균전의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다. 핑팡(하얼빈)에 위치한 주 연구센터(731부대)는 150개 이상의 건물, 5개 위성 캠프를 포함하고, 적어도 3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이 범죄 과학자들은 콜레라, 페스트, 탄저병 약품을 중국인 전쟁 포로에게 대규모로 실험했다. 거의 3천 명의 포로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목숨을 잃었다. 중국 도시들에 대해 12번의 생물학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식수와 식료품을 콜레라, 페스트, 탄저균으로 오염시켰다. 사망자 수는 수천 명이었다.

 

에티오피아 전쟁(1935~1936년) 동안에, 무솔리니는 세균 무기 — 에티오피아 주민과 군대에 광범위하게 사용한 [화학] 가스와 함께 — 를 실험할 뻔했다. 바돌리오 장군(Marshal Badoglio)이 그를 말렸는데, 물론 ‘인도주의’에서 벗어나서가 아니라 전략적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일본이 패배하고 731부대가 해체된 후에, 이 모든 ‘실험’은 소련과 미국의 ‘세균 공학’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미국은 1942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연구를 수행했다. 치명적인 물질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되었는데, 특히 수감자와 양심적 병력 거부자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 전쟁(1950~1953년) 동안에, 탄저병, 페스트, 콜레라의 균들이 북한군과 중국군들 사이에서 확산하였다. 분무제뿐 아니라 파리와 벼룩 같은 것들이 이용되었다. 분무제의 경우에, 미군이 항공기를 이용해 적에게 살포했다.21) 결과들이 뒤섞이고, 여러 사고(세균과 바이러스의 ‘유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생물학 무기 비축물은 1971년 5월에서 1973년 2월 사이에 (공식적으로는) 파괴되었다.

 

소비에트 국가 자본주의 — 그 지배 계급에 의해 ‘현실 사회주의’라고 불렸다 — 는, 스탈린에서 코르바쵸프까지, 이 생물학 무기 경쟁에서 뒤지지 않았다. 한 다스의 병원균 군사화가 실험실 프로그램으로 들어갔다. 탄저병, 야토병, 브루셀라병, 페스트, 베네수엘라 말 뇌염, 발진티푸스, Q열,22) 박테리아에 의해 생산된 보툴리눔 독 등이 그것이다. 생물학 무기에 관한 모든 연구를 금지하는 국제 조약23)이 체결되고 몇 개월이 지난 1973년에, 국가 법령으로 세균 무기를 위한 40개 연구 센터와 생산기지를 복합시설(BIOPREPARAT(바이오프레파라트) = 생물학제 제조)을 설립했다. 특별한 목적의 미사일, 로켓, 폭탄의 제조는 병원균을 퍼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은 1992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소수인 지배 자본가 계급이 대량 인종 학살을 계획하고 있는 국가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백인’ 남아프리카에서, 일급 비밀 프로젝트 — 1985년에 ‘닥터 데스’ 바테르 바손(Wouter Basson)에 의해 수행되었다 — 가 시행되었다. 그것은 흑인을 목표로 삼아서 극단적인 수단 — 탄저균, 에볼라, 에이즈, 콜레라, 대규모 불임화, 인종적으로 선별한 화학 독물 — 을 사용했다.24)

 

이라크의 경우는 ‘내부의 적들’에 대한 화학, 생물학, 방사선, 핵(CBRN) 전쟁의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인상적인 생물학 병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쿠르드인들에 대해서 화학 무기만 사용하는 것으로 스스로 제한했다. 1988년 3월 16일에서 19일까지 쿠르드 마을 할랍자에 이라크군 미그(러시아제)와 미라주(프랑스제) 전투·폭격기들이 살상용 가스들 — 머스터드 가스, 사린, 그리고 타분 — 을 살포했다. 희생자 수는 5,000명이었다. 특히 이 무기들은 주로 프랑스, 벨기에, 독일 회사들로부터 공급받은 것으로, 이 회사들의 기술자와 화학자들은 사담이 결정하려는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여러 해 동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머스터드 가스와 신경가스의 사용에 대해서 사담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라는 국제적인 캠페인들을 차단했다.25)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주요 자본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할 의도가 없었다. 사고로 인한 생물학 그리고/또는 화학 물질들의 누출들에 대한 증거가 많이 있다. 더그웨이(유타)에서 1968년에 일어난 사고는 양 6,000마리의 목숨을 앗아갔다. 1969년 4월에 스베르들로프스크(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고는 훨씬 더 심각했다. 전염병이 50㎞나 떨어진 곳의 가축에게까지 퍼졌다. 에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로프스크의 옛 명칭)의 변두리에 있는 군사 연구 센터가 누출 사고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누출’은 종교적 분파 또는 극단주의 세력 — 가끔 은밀하게 테러 집단을 무장시키는 국가들로부터 나온다 — 이 연루된, 생물학 무기를 이용한 다양한 형태의 테러로 일어난 고의적일 수도 있다.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해보자. 1984년 9월에 오리건 주의 와스코 카운티에 기반을 둔 라즈네쉬(Rajneeshees) 교파가 오리건 주의 댈러스에 위치한 레스토랑들에서 제공되는 샐러드와 생채소에 살모넬라균을 살포하여, 45명이 입원하는 사태를 일으켰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1995년 3월 19일 도쿄 지하철에서 옴진리교에 의해 자행된 사린가스 공격인데, 이 사태로 (치명상을 입은 12명을 포함하여) 5,500명이 상해를 입었다. 5만 명의 신도를 지니고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던 이 교파는 진보된 생물학 무기 연구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었다. 이 종교 집단은 탄저균과 Q열 균 그리고 보툴리눔 독을 입수하여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생 시 90%의 사망률을 지니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26)

 

기고문 두 번째 부분 말미에,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1. 미생물(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확산은 세계 인구의 극단적인 집중 현상(50%가 도시, 종종 최악의 공중위생 상태이며, 그곳의 미세한 입자들이 호흡기를 공격하는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을 진척시키는 오염된 도시에서 살고 있다)으로 더 쉽게 촉진된다.

 

2. 자본의 과도한 상업화(hyper-commercialization)와 과도한 생산의 길을 따르고 있는 미생물은 매우 갑작스러운 인구 폭발(1960년에 30억 명, 2020년에 77억 명)에 따른 병원균처럼 급증하고 있다. 이 미생물들은 항공 운송에서 자유로운 장소를 발견했다. 전 세계 모든 노선으로 2013년에 30억 명의 승객, 2017년에는 40억 명의 승객이 이동했다. 더 느리긴 했지만, 바다를 통해서도 가차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세계 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상선과 그 종사자들은 세계화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아왔다. 선박 — 오늘날 고급 “대탈출”(super-”Exodus”) 선박으로 변형된 크루즈 선 같은, 여객선을 포함하여 — 의 수는 2013년에 거의 52,000대에서 2018년에 58,000대로 증가했다.

 

3. 거대 자본주의 국가에, 전쟁 준비와 참전은, 전면화된 충돌에서 CBRN(화학, 생물학, 방사선, 핵)를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군사적 수단을 정당화한다. 소규모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수행되어 온(만주와 한국 전쟁) 생물학 무기의 사용은 국제적인 충돌이 일어난다면 가공할 만한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생물학 무기를 이용한 테러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용병들에게 하청을 주는 방식을 통해서 수행되게 될 것이다.

 

몇몇 전문적인 음모론자들이 코로나19가 중국의 군사 실험실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 국가의 부르주아지로부터 평상시의 태평함을 제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것 — 진지한 과학적 조사를 결여하고 있다 — 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답해주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주권론자들(sovereignists)’의 이기적인 창작물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고.

 

이러한 불가피한 돌연변이는 다윈의 법칙에 따르는 자연 선택의 결과이다.27) 그 결과가 불확실한(새로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다), 유전 공학을 통한 의도적이거나 우연한 사고에 의한 조작물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의 최고의 동인은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은 전 지구적 범위로 ‘바이러스처럼’ 확산함으로써, 세계적인 유행병을 악화시키고 그것을 점점 더 통제 불가능하게 하는데, 종종 보건 시스템 붕괴로 그리고 목전의 이윤에 목마른 흡혈귀 자본에 의한 전체 생태계의 체계적인 파괴를 가져온다.

 

 

 

첨언: 마르크스로부터 인용

 

1. 부아기유베르(Boisguillebert, 경제학자)와 관련하여 화폐에 대한 마르크스 글, 「그룬트리세」 II. The chapter on money (note 11)

 

“[상품의] 가격으로 표현된 교환가치는, 이처럼 특별하게 화폐로 변형될 필요가 생기자마자, 희생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부아기유베르에 의한 다음과 같은 불평이 나온다. 예를 들어 화폐는 모든 사물의 사형 집행인이며, 모든 것이 그에 희생되어야 하는 ‘몰록’이며, 모든 상품들의 전제군주이다. 모든 세금이 화폐로 납부하는 세금으로 변형되면서 절대군주제가 출현하는 시대에, 화폐는 사실상 실제의 부를 그에게 바쳐야 하는 ‘몰록’처럼 보였다.”

 

2. Marx on compound interest bearing capital in ‘Theorien über den Mehrwert’, : 복리가 붙는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 「잉여가치 학설사」, Vol. III (note 12)

 

“자본의 완전한 객관화, 전도, 그리고 혼란은 복리를 산출하는 지본이다. …… 그것은 당연한 권리로서 전체 세계를 희생물로 요구하지만, 그의 본성에서 나오는 그의 정당한 요구는 결코 만족되지 않고 항상 신비로운 운명에 의해 좌절되고 마는, ‘몰록’처럼 보인다.”

 

July 4, 2020

A Free Retriever

옮긴이 | 김종원

 

 

 

<주> 는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진보넷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는 언어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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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코뮨 150년] 혁명적 코뮨Ⅱ

[파리코뮨 150혁명적 코뮨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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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코뮨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코뮨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파괴했다맑스가 이 새로운 코뮨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절대 바라지 않았던 것은―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뮨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뮨 및 코뮨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파리코뮨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뮨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써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혁명적 코뮨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는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뮨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뮨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뮨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적어도 파리코뮨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에서도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이제 파리코뮨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 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 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왜 하필 특히 코뮨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번 매우 상세하게 코뮨의 특징을 서술했는가맑스와 엥겔스는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정확히 코뮨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사실상 파리코뮨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뮨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실은 제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뮨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뮨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뮨 및 코뮨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1871년 파리코뮨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로부터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파리코뮨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즉 파리코뮨과 프랑스 모든 코뮨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뮨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맑스와 엥겔스는 모두바로 1871년 파리코뮨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 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뮨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그는 혁명적 파리코뮨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역사적인 한순간 ― 승리한 반동 세력에 맞선 코뮨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 내려 간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파리코뮨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뮨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그 이유는 더는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뮨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뮨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뮨을 추가하고자 했다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 및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뮨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뮨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뮨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고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파리코뮨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만일 맑스가 파리코뮨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뮨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 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뮨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그는 이러한 코뮨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그가 주목한 것은 코뮨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코뮨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뮨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뮨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뮨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뮨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뮨의 연방적이고 반()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맑스와 엥겔스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파리코뮨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 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코뮨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뮨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뮨”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이는 파리코뮨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뮨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이들이 만약 어떤 코뮨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이는 완전히 틀렸다최종적으로 코뮨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시킨다는 이론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는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추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1871년 파리코뮨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뮨” 국가도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뮨주의 사회이며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는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코뮤니스트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 장치를 장악해내든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혁명적 코뮨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 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2013년 코뮤니스트 2,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 남궁원

2021년 파리코뮨 150년 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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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코뮨 150년] 혁명적 코뮨Ⅰ

[파리코뮨 150혁명적 코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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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적어도 새로운 시간은 준엄하다.

승리를 손에 넣었다고 말할 수 있기에이를 갈아대던 일도불같던 기적 소리들도악취 나던 한숨들도 가라앉는다모든 더러웠던 추억들도 사라진다내 마지막 회한들도 달아나니, - 거지강도죽음의 벗온갖 낙오자들에 대한 질투도. - 저주받은 것들응징할 수 있다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찬송가 따위는 없다그러니 의기양양하게 발걸음을 옮겨라힘든 밤이여메마른 피가 얼굴 위에서 먼지처럼 일어나고나의 배후에는 끔찍한 관목만이 있을 뿐!…… 영혼의 전투는 인간들의 싸움처럼 야만적이다정의에 대한 환시(幻視)는 신이 홀로 누리는 즐거움.

하지만 지금은 전야(前夜)흐르는 모든 생기와 실제의 애정을 받아들이자그리고 새벽에열렬한 인내로 무장하고우리는 빛나는 저 도시로 들어갈 것이다.” (랭보,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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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파리코뮨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다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파리코뮨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때다시 한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깜짝 놀란 속물들의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그렇다면 여러분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파리코뮨을 보십시오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코르쉬는 일평생 혁명적 실천 및 사회주의 모델의 발전에 관심을 쏟았다초기의 코르쉬는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를 진정한 사회주의적 기관으로서 지지했다레닌주의 시기의 코르쉬는 잠시 정당과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의 테제를 혁명적 실천의 결정적 수단으로서 수용하기도 했지만그러나 이 기간에조차도 독일코뮤니스트당 내의 레닌주의 강경파로서였다그는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과 노동자평의회를 강력하게 강조했다레닌주의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면서 코르쉬는 새로운 혁명적 역량을또한 혁명적 변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 및 그 모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후반 좌익반대파 기간의 코르쉬는 코뮤니스트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으며혁명적 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지했다.

 

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다따라서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뮨과 러시아 소비에트독일 노동자평의회에서의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갔다.

 

파리코뮨에 관한 두 개의 에서 코르쉬는 혁명적 정치의 성격에 대하여 진지하게 몰두했다첫 번째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 행동(Die Aktion)에 실렸으며, 1931년 같은 저널에 실린 두 번째 글은 첫 번째 글에 관한 논의 및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 여기서 코르쉬는 파리코뮨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했다파리코뮨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코르쉬의 지적에 따르면슬프리만치 짧았던 파리코뮨 시대의 정치 형식은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도 실은 명백하지 않다맑스는 파리코뮨의 뚜렷한 특징으로서 개방성과 잠재된 발전 가능성을 강조했고이에 동의하면서 코르쉬는 파리코뮨이 비극적으로 짧아 보일 수는 있지만자치정부 및 급진적 사회 변화에 대한 영웅적인 실험이었다고 말한다.

 

파리코뮨을 연구하는 데 있어 코르쉬의 정치적 전략은 맑스가 프랑스 내전이라는 위대한 글에서 사용한 전략과 대응한다왜냐하면 코르쉬가 지적하듯이, “맑스는 파리코뮨 속에 맑시즘을 결합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파리코뮨을 맑시즘에 결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맑스의 글과 유사하게 코르쉬의 연구는 사회적·경제적 투쟁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모든 투쟁을 정치 권력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따라서 정당이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단편적인 논박을 벌였다첫 번째 글의 말미에서 코르쉬는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적 역할을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고 보았으며또한 혁명적 투쟁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적·경제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혁명적 코뮨의 두 번째 글 끝부분에서 코르쉬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과장하는 사람들이다이를 위해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결코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그 국가가 아무리 민주적이든 코뮨적이든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하든 마찬가지이다정확히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뮤니스트의 사회이다그 사회의 종합적 형식은 이제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코뮤니스트 선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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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코뮨

 

혁명적 코뮨이라는 의제를 기반으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적 속박에서 벗어나 혁명적으로 스스로를 해방하는 현재이 역사적 시점에서 모든 계급의식적 노동자는 혁명적 코뮨에 관하여 과연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또한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이 혁명적 코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그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이 이루어진 지 반세기 만에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공화국 내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뮨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파리코뮨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다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파리코뮨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때다시 한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깜짝 놀란 속물들의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그렇다면 여러분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파리코뮨을 보십시오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20년도 더 지난 후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 주요부에서 파리코뮨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레닌 및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뮨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모든 혁명적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이 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또는 1920년 카프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또는 1923년 루르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 파업 과정에서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 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 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폴란드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 패배의 결과로 현재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는 우리의 낡은 신념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의심할 여지 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샤이데만과 뮐러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또한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 기구의 최고 정점이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 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이는 ―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발전하는 의식이라는 발전형식으로부터 그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뮨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뮨의 가담자들이다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할 수 있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뮨을 달성해냈으며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뮨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뮨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현실에서 코뮨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뮨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동시에 그는 코뮨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뮨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뮨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또한 그는 코뮨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뮨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코뮨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국가의 최고권력이란 코뮤니스트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써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뮨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발전의 이러한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바―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뮨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뮨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뮨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스주의자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뮨을 비교함으로써부르주아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봉건제와 전제군주제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을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이 단계 역시 봉건 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써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철학의 빈곤, chater 2, # 5) <계속>

 

 

2013년 코뮤니스트 2,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 남궁원

2021년 파리코뮨 150년 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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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1919년 3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우리가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현재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 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조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 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 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 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 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 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 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 역사적 투쟁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 인터내셔널(1864~73)과 제2 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차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대적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대적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대적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차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 인터내셔널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뮨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계급이 자신을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글)

     

    (2) 제2 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 인터내셔널은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 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과 결의문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 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 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침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침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침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침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 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 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은 '코뮤니스트'당 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 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 인터내셔널 당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코뮤니스트들은 제3 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 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 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 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 인터내셔널과 침머발트의 좌파와 제3 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침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침머발트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침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침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침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나키스트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 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코뮤니스트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히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코뮤니스트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 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코뮤니스트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해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 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코뮤니스트당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말 자신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코뮤니스트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 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대적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대적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대대적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 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 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 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 명확하게, 더 첨예하게,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아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 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코뮤니즘으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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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러운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 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침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코뮤니스트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침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처럼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코뮤니즘의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RL (IR57 2nd quarter 1989로부터 재발행,  2021년 3월  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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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딜 시기 사진에 나타난 실업자 이미지

뉴딜 시기 사진에 나타난 실업자 이미지  

 

 

사진은 객관적이다사진은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아마 이를 그대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사진은 아주 정치적이다우리는 대공황기 국가가 주도한 기록 관리를 통해 이를 알아볼 수 있다.

 

대공황은 미국 사회의 많은 부문에 정부가 개입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정부는 1935년에서 1942년까지 있었던 경제 위기의 해 동안 미국인들의 경험을 문서화하는 사진 기획을 지원했다그 가운데 몇 편의 사진을 소개해본다수집된 사진은 어떤 이미지를 담고 있을까.

 

 

1. ‘잊혀 진 사람(?)’

   

<사진 1> 하릴없이 떠돌고 있는 실업자들  

 

<사진 2> 뉴딜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파산한 레스토랑임대합니다.” 그 레스토랑을 등지고 서 있는 농부.

 

<사진 3> 고통스러운 기다림사회에서 배제당한 모습.   

   

<사진 4>  

 <사진 5>

 <사진 6>

 

위의 사진에 나오는 실업자 이미지는 하나같이 파편화된 개인이다그들은 하나같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당당하지 못한 모습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무기력감 등을 보여주고 있다그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다이런 구도가 전달하는 것은 개인적’ 절망일 뿐이다대공황이라는 구조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희생시켰음에도오로지 책임은 개인의 몫이다.

 

개별화된’ 실업자 이미지는 구경꾼의 처지에서 보면 사회의 낙오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 3>을 보면그것이 뚜렷이 드러난다광장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실업자들그들은 분수대에 있는 거북이보다 못하다그럼에도 파산한사회적으로 고립된 실업자의 이미지는 사회적 모델에 도전하고 정부 지원의 증대를 요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노동 운동의 일부로서 실업자를 재현한 것이다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뉴딜 개혁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이미지다대공황은 실업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크게 달라졌던 시기였다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됨으로써 실업은 모든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이것은 실업자에 대한 훨씬 더 커다란 사회적 공감을 생기게 했다특히 50 퍼센트가 넘는 실업이 생긴 공동체(광부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그래서인가 다음의 사진에는 광부들이 전투적인 실업자 노동운동으로 조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나온다.

 

 

2. “전투적 실업자 노동 운동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뉴딜흑인에게도 완전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평등을 위해단결하라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라.”

   

 

 

3. 그리고 다른 사진들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있는 광산도시 스코트 런에는 이주자들의 도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사진에 나타난 그곳의 분위기는 마치 라스폰 트리에 감독이 만든 영화 <도그빌>에 나온 것처럼 스산하다스코트 런에는 <오두막 공동체 센터>(The Shack Community Center)가 있다이 공동체는 처음에 스코트 런에 있는 다양한 이주자 공동체를 미국화하고” 앞으로 있을 수도 있는 광부들의 급진화를 미리 내다보고 모건타운의 제1장로교회(Morgantown First Presbyterian Church)가 세운 것이다그러나 미국사회가 대공황으로 휘청거리자이 <오두막 공동체 센터>는 오히려 실직당한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는 중심이 되었다. <노동자 연맹>이 이 공동체에서 실직당한 광부들을 열심히 조직하고 있다.

 

실천, 2008년 9월호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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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자본주의 위기 :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

자본주의 위기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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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위기는 지금 여기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모든 곳에 있다코로나19 팬데믹 위기가 폭발한 지 채 몇 개월이 되지도 않아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과 무능력이 확인되었고이 재앙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이제 자본주의 세계는 온갖 종류의 사회적 반란과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고세계 곳곳에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올 초부터 전개되고 있는 이 위기는 계급 대결의 새롭고 전례 없는 가능성과 경로를 열어주었다.

 

자본주의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

 

자본주의 쇠퇴기의 경제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악화될 수밖에 없다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많이 논의했던 'V'나 'L'자 형태의 회복은 보이지 않는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생산의 절반 이상이 폐쇄되고 마비된 상황은 일단 폐쇄되고 나서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정상적인 경기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자본주의 위기가 2020년 팬데믹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단지 위기를 촉진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부르주아들이 바라는 대로 회복과 부흥이 가능하면 좋겠지만현실은 경제 위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위기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존재했다자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그동안 자본주의는 산업 구조조정과 생산 부문 이전 등으로 위기 때마다 다양하게 대응 해왔다이는 유선에서 인터넷과 최신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정보기술 및 통신의 디지털 혁명과 함께 경제의 금융화로 공공과 민간 부채의 붐을 일으켰다이 모든 것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고용 조건과 직간접적 임금(연금)에 대한 공격에 기반을 두고 있다경제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촉발된 이른바 세 번째 산업 혁명은 이전의 두 산업 혁명보다 훨씬 더 인간의 존재를 심오하게 변화시켰지만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붕괴에서 다른 붕괴로그리고 또 다른 전쟁으로 옮겨갔다이러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알고 있는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일반화된 전쟁이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생태계 전체를 황폐화했고지구 온난화에 기여했고세계 인구 최소 1/3의 생활 수준과 보건의료 수준을 대폭 하락시켰다이것은 바이러스 확산의 전제조건이 되어버렸다인류의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위기와 전염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코로나19는 머지않은 미래에 유행할 새로운 전염병과 교차할 가능성이 크다이는 장기적으로 경제사회환경 위기 해결을 위한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인 무능력을 보건의료 부문에도 적용시킨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로 위기가 촉발되었다그 뒤로는 12년간의 감축불안정가시적인 경제 회복의 부재가 뒤따랐다그리고 이번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그것은 들불처럼 번져 세계 자본주의 경제 회복의 꿈(10년마다 꿈은 유토피아적으로 변한다)을 다시 한번 파괴했다. 2020년 2분기 GDP의 붕괴는 거의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두 자릿 수를 기록했다독일 -11.7%, 미국 -32.9 %, 이탈리아 -12.4% ... 유일한 예외는 중국의 3.2% 미미한 성장이다.

 

자본가계급은 이 경제-보건 위기에 중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잃은 이윤의 일부를 보충하기 위해 엄청난 대출을 이용하면서 대처하고 있지만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감축더 불안정한 노동조건그리고 더 많은 착취를 통해 노동계급에게서 이윤을 보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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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바이러스다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초지배계급의 반응은 이윤의 톱니바퀴를 계속 돌리기 위한 초기의 부정적 반응에서 확산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로 다소 빠르게 전환했다지배계급은 초기에 바이러스를 억제하고 보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는 정책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보다는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보건의료 시스템의 전반적인 안정성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지배계급은 곧 바이러스의 확산이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한편으로 시장 경제(자본주의 활력소)를 정상적으로 돌리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시스템의 안전성(작업장 감염 및 보건의료 시스템의 잠재적 붕괴로 인한 문제)을 보호하려는 것 사이의 모순에 직면했다노동자들은 계속 생산해야 했고감염 예방 비용을 제한해야 했다하지만감염 확산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감염 예방과 보건의료 분야에 많은 투자가 필요했다이는 시장과 이윤 측면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다하지만이것은 이윤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다른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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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들

 

바이러스의 존재와 위험에 대해 포퓰리스트-음모론의 관점으로 보면 이 사태에 대해 신뢰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물론 우리가 현실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수많은 음모론은 대부분 근거가 없다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바이러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위험을 막기 위해 새로운 바이러스를 퍼트릴 필요가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더구나 그 바이러스는 자본주의의 심장을 강타했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자본가계급의 발명품이었다면 분명히 자기 학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한마디로 우리 노동계급의 상대는 역사에서 지워질 운명이기는 하지만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음모론은 포퓰리스트와 극우 반동들의 방책을 대신해 외치고 항의하는 일부 지배계급 분파와 소부르주아의 위기만을 반영한다.

 

소부르주아지와 중산층은 이번 위기에서 고통을 과장하는 경향이 일부 있지만그들은 실제로 위기에 처해 있다그들은 자본주의 위기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함으로써 국가를 부흥하려는 계획과 동시에 자신의 작은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한 불가능한 개혁에 열광하고 있다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이와 다르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불만과 분노를 자신의 주변으로 모아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의 중심을 조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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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노동자계급에서 나왔다

 

이번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가장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반응은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왔다우리는 지난 3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파업의 세계적인 물결에서 "우리는 도살장의 양이 아니다!"라는 외침을 보았다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살해 이후 계속되어 온 프롤레타리아 반란과 벨로루시에의 총파업까지이란에서 레바논에 이르는 중동의 시위와 파업의 물결까지...

 

이러한 투쟁을 통해 세계 노동계급은 비록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보이지만중요한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그중 일부는 최근에 발생했다그것은 또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이전 투쟁 경험과 다른 나라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계급적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3, 4월의 파업에서처럼 공동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해 어떻게 단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자신을 ()자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정치 세력들은 여전히 헛발질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그들은 이 가혹한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더듬거리고머뭇거리고심지어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을 흉내 내기까지 했다그들은 전혀 반()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개혁 프로그램을 급진적 요구라면서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그들이 주장하는 보건의료 시스템 재정 확대국유화 요구 등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가 아닌 체제 전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코뮤니스트는 국유화와 같이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 전제되지 않은 이른바 '과도기적요구를 내 거는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그것은 혁명에 더 가까워진다는 착각 속에서 개혁주의의 영향을 강화할 뿐이다진정 위기의 대가를 자본가들이 치르게’ 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이 권력을 가져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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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아닌 코뮤니즘을 대안으로 투쟁하자

 

이 고통스럽고 험난한 위기의 시대에 노동계급은 반()자본주의만을 주장하는 모호한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복과 코뮤니즘이라는 명확한 강령적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이 위기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가진 계급은 다른 사회계급에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투쟁의 파괴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계급이다그들은 바로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동일한 착취와 동일한 반()자본주의-코뮤니즘 이해관계에 따라 연합한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그들은 자본주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따라서 노동계급에게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국가 자체에 대한 코뮤니스트 대안을 신속하게 구축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실제로 새로운 세계 정부(노동자평의회 국제 권력)는 가능하다코뮤니스트 강령은 노동자의 자기 권력즉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정치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이는 노동계급이 본질적으로 생산의 주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노동계급은 혁명(과정)을 통해 전체 계급을 포괄 할 수 있고가장 기초적인 단위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체 생산을 통제할 수 있고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노동자 평의회 권력을 통해 체제를 장악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주적은 부르주아 국가에 있고 진정한 바이러스는 자본주의 체제다그 적은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에게 위기를 전가하는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이다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위기와 고통바이러스 대유행의 치명적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모든 민족주의애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국제적으로 연대하여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국제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를 위해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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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과 2차 대유행자본주의 위기는 시작에 불과하다앞으로 닥쳐올 감원정리 해고불안정한 일자리생존권 위협에 맞선 저항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이 세계 도처에서 지금보다 훨씬 자주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물론 세계의 계급투쟁은 균등하지 않고 앞선 곳과 뒤처진 곳의 격차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세계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은 동일하다.

 

이에 코뮤니스트와 노동자투사들은 코뮤니스트 강령을 전면에 내걸고, ‘계급적이고 국제주의적 원칙을 가진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할 것이다.

 

2020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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