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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장모님이지만 내 어머니기도한 어머니인데

어머니는 내가 그리도 싫었을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년 온갖 가난의 설움은 다주고
그것도 모자라 마음고생으로 시작해 몸고생까지 시키고 있으니

어머니는 내게 말을 안하신다
"지서방 우리딸 초록이에미 호강을 시켜주란 말한마디 없으셨다"
너무나 이기적인 나를 곧은 사람으로만 보아주시니
쇠눈에 경읽는다 생각을 하셨을게다

어제 초록이녀석의 휴가로 온식구가 다모이니 열 넷
둘째 며늘년 11년전에 옛애인 만나 신발 바꿔신어
아들 셋
딸 하나
며늘년 둘
사위놈 하나
손주새끼 여섯
그리고 어머니

바람난 큰아들의 8년의 외도에도 천사같은 큰며느리는
딴서방 만나 떠나버려 손아래 동서새끼까지 챙겨주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고마운 큰며늘년이지만
얼마나 마음 고생했을런지

이혼도장까지 찍고
당신이 어머니 내치고 조카새끼 내치면
오갈데 없는 것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내치겠느냐고 하면서도
힘들어 하던 큰처남댁에게
어머니는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워했을까

지난 겨울 큰처남 무슨연고로 바람끼 접고
집안을 기웃거려 잠자리 챙기고 들어 앉아
이제 어른노릇하는 것이 자신도 고마운 것 아는지 모르는지

어제 찾은 처가집은 집안꼴 돌아가는 것이 사람사는 것 같았는데
어머니의 편안한 얼굴에 내놈도 얼마나 고마운지

어머니는 분주히 움직인다
둘째아들 새끼 형수에게 맞기고
덤프트럭 하나로 건설현장 찾아 떠도는데
요즘 보령에서 일하다가 어제는 어머니 생신 챙기느라
모처럼 생기넘치는 가족과 얼굴 맞데고
형님 제자리 찾아 형수에게도 다시 고마워하는 자리이니

어머니는 혼자 떠도는 둘째아들 챙기느라 분주하시더라
이틀전 담구어논 총각김치 국물 흐르지 않게 보자기에 싸메시며
안먹는다는 찹쌀묻혀 튀긴 미역을 밑반찬하라고 눈치보면서 싸메시며
이제 쉰이 다 되어가는 둘째 아들 하나라도 더 챙여주시느라 분주하시더라

어머니와 큰처남댁 그리고 집사람은
이시대에 고난을 몸으로 이기는 진정한 어머니인 것을
이기적이기만한 나는 어제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내나이 쉰이 되어서야 볼수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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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나의 소중한 안식처였고 나의 슬픔이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안동이 고향이라고 7살에 고향을 떠나 그 때 어머니는 고향과 형제의 이름을 잊는 것이 제일 두려웠답니다 이름 석자도 쓰지도 읽지도 못하신 어머니 서울 어느집에 식모살이가 너무 힘들어 10살에 어느 아저씨를 따라 황해도 연백으로 바느질 솜씨가 눈에나 어느 지주집의 침모로 다시 지씨집 종가 민며느리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어습니다 사남 삼녀의 여섯째인 나는... 글께나 읽었다고 피난이후 어려운 일 피해 무의도식한 아버지 덕분에 온갖일 마다 안하시고 일곱을 자신이 벌어 가르치시며 아버지 원망 한번 안하시는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하고 안스러웠습니다 큰 형이 자기가 벌어 대학을 가고 둘째형도 공부를 잘해 어려움 속에 대학을 가고 누이들도 최고학부를 가고... 우리 어머니 형들의 입학금을 위해 뼈를 깍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벽 물때를 맞추어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고 낮에는 노동판에 막일을 하고 저녁에는 아침에 캐온 조개를 팔러 나가시고 어머니는 두,세시간 주무시었습니다 날씨가 추어지면 바다 보다는 양키놈 덜 유류저장소에서 나온 휘발류 를 몰래 팔러 다니시고 통금시간에나 들어 오시던 엄니... 나는 들풀처럼 클수 밖게 없었습니다 그 형제들 사이에 나의 존재를 어머니가 거두시기는 벅차기도 했을 겁니다 막내 동생을 본 다섯살부터 끼니도 내가 알아서 챙길 수 밖에 없었고 학교는 둘째누나 손을 잡고 입학을 하고 운동회때 어머니가 한번 오는 것이 막내누나 와 동생과 나의 소원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어머니의 소원도 우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놈들은 머리커 색시 얻으니 지에미 몰라라하고 둘째놈 압구정동 한양 아파트 살며 어머니 가면 둘째며늘년 어머니가 궁상 맞다고 날벼락을 맞을 년놈들 처가 덕에 공장 차렸다고 자랑하는 큰아들놈 우리어머니가 가면 큰며늘년 늙은이 냄새가 난다고 염병헐 년놈들 남의 일인줄 알았는데... 내놈 어머니가 불쌍스러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형놈들 잘나 대학나와 에미 몰라라 하는 형놈들 따를까 봐 나는 인테리 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냥 들풀처럼 살아 가기를 어릴적 나 스스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 어려움속에 결국은 딸년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 파킨슨 병을 얻으시어 한수족마저 떨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신 어머니 내놈 월세방 겨우 면해 지금 사는 열세평짜리 주공의 임대 아파트 얻어 방두칸 짜리로 옮겨 어머니를 모시고... 세째 며늘년 수족 못쓰시는 헌신에 어머니는 고마워하시고 가끔 딸년들 들여다보고 훼방 놓고 같지만 어니 옆에 계시니 행복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상 바꾸겠다고 오른손 하늘로 내졌다가 내놈 좇기는 신세가 되어 집사람과 아이는 처가로 가고 어머니는 동생네로 가시고... 그 잘난 형놈들은 몰라라 했지요 ... 마지막 가시기전 어머니는 울엄니는 집사람에게 그러셨답니다 세째네 집으로 가고 싶다고... 네 서방 출소를 하면 함께 살자고 그러셨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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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평의 행복

지금 주공이 지은 열세평짜리 아파트로 이사 오기전 까지 구로동 지하골방을 시작으로 5년 동안 일곱번 이사를 했다 그렇게 살면서 집사람에게 제일로 미안 했던 것은 친구들 집에 가면 중견건설업체가 지은 번듯한 아파트에 없는 것 없이 꾸며놓은 집안살림이 집사람보기가 무안하게 했다 녀석들은 부모잘 맞나 공부도 하고 싶은 만치 한 것도 있지만 녀석들이 만나면 20여년 전에 벌써 재테크를 하는데 골몰해 있는 것을 볼수가 있었으니 지금도 그렇지만 밥세끼 겨우 챙기면서 월세방 살면서 제지공장 3교대를 하는 내게는 감히 재테크는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돈에는 관심이 없는 내게는 그냥 지나치는 말로 욕심없이 살자고 녀석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말로 나를 내세울 뿐 이었고 열세평짜리 우리집에 장농은 집사람이 결혼할기 전에 준비한 혼수품이다 또 아직도 전기밥통이 있는데 그 것 역시 집사람의 혼수품이었다 이 외에도 작년까지 쓴 헤어드라이기를 비롯 아직도 그릇은 집사람의 혼수품이 더러 있다 그러니 23년이 다되어 가는 가제도구가 골동품이 아닌 실생활용품으로 있는 것이다 열세평짜리 아파트에 둘째누이네 집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 와서는 그 때는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리고 17년을 우여곡절이 많은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아빠 덕에 초록이가 2년을 넘게 외가살이를 하고 집사람도 그 때는 남의 집 살이로 집은 거의 비어도 있었고 지금 내게는 열세평에서의 행복이 보인다 비록 욕심없이 살아온 내 나름데로의 간결한 삶이 나를 배부르게 하지 않았고 포만감으로 불편해 하지 않으면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세상사람 누구와도 나눌수 있는 행복을 가진 것이다 더 욕심이 있다면 우리 일곱형제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어머니가 생전에 계셨으면 하는 바램이 그것이고 내 주변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질시와 모멸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은게다 일욜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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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처남

내놈 4년전까지 서른넷둔 노총각 막내처남을 두었었다 그때까지 행사장을 쫓아다니며 남성복 장사를 하는 처남은 그야말로 장가못간 천덕꾸러기였던게다 벌써 머리중간은 머리카락을 셀수 있을 정도로 빠지고 있었고 몸닦기를 싫어해 우리집에만 와도 발냄새를 비롯 홀아비 티를 내는지 술,담배냄새가 온몸에 쩔어있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런데 처남이 녀인네 하나를 불쑥 데리고 온것이다 1미터 58센티는 될까 작달막한 키에 동근얼굴에 유난히 큰눈을 내리깔은 모습은 고르지못한 이에 주근깨의 얼굴이었지만 모질지못한 착한 심성의 소유자인것이 보이는것 같았다 처남의 말로는 행사장에 아르바이트를 나와 만난 67년 양띠처자라 했다 결혼 6개월만에 이혼한 혼자사는 처자라했다 집사람과 나는 조심스럽긴 했지만 나이 조금더 먹으면 상처가 있는 처자도 얻기 힘들다는 생각에 서로 좋으면 마다 할것 없다고 말했다 덕담은 생략한체 좋은면 살라고 한것이다 그해겨울 처남은 그처자와 결혼을 했다 그처자가 막내처남댁이 된것이다 그날 처남은 뭐 그리도 좋은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내놈 속으로 "이구 이놈아 변변치 몬허게 뭐 그렇게 좋으냐" 씨브렁댔다 밖으로 나돌며 장사를 하는 놈이 처남댁과 볼것을 다보았을텐데 어린아이 처럼 좋아하는 것이었다 자기집을 갖는 것이 좋았나보다 식을 올리고 장사도 안가고 열흘을 월세방을 꾸몄다니 늦장가에 전세방 얻을 돈이 없어 오백에 이십오만원 하는 월세방을 얻은 것이다 월세방이라도 자신의 가정을 꾸민다는 것이 좋긴 좋았던 모양이다 장사도 때려치고 처남은 정착해야 한다고 싱크대 설치하는 이를 따라나서 직업전환도 하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다되었는데도 아기가 없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처남의 정자수가 아주 적다는 것이다 있는 것도 활동이 정상적이지 못하고 이놈이 장사 한답시고 거처없이 떠돌며 별별것 조심안하고 다 먹을때 면박을 준 기억이 났다 "못먹어서 병난다며... " 음식조심 않한것이 원인이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심성착한 처남댁은 아이 못낳는 것이 자신의 문제인냥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구 저 착한녀인네에게 누가 돌질을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정도로 순박한 녀인네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업동이였다 2년전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의 소개로 여자아이를 하나 데려다 키운것이다 이름은 내놈이가 "다솜"이라 지어주고 재작년 12월 돌잔치를 하는데 부산에서 올라 오시는 처남의 장모를 모시게 되었다 일찍 상처하시어 90이 넘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두분이 사신다는 그리 늙어보이지 않는 처남댁 친정어머니의 등에는 히말라야 셀파들이나 짊어질 큰배낭에 보였고 양쪽 손에는 큰보따리가 들려져 있지 않으신가 택배로 미리 보내시고 떡만 싸가지고 오실수 있었을텐데 그 배낭을 내등에 옮겨 짊어지니 과장없이 식은땀이 주르르 흐를 정도로 무거웠었다 처남집에와 바리바리 쌓오신 보따리와 배낭을 풀어 놓는데 말린 생선에, 밑반찬에, 부산어묵에, 손녀딸년 돐떡에 우리 세식구가 먹어도 한달은 먹을듯한 음식을 싸온 것이었다 딸가진 죄가 저렇게 크겠구나 하는 맘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어떤 연고로 큰따님 두번이나 결혼식을 시켰는데 허물없이 살며 속안썩이는 사위에게는 얼마나 고마우시면 저런 고생을 마다않하실까 하고 그런것도 있겠지만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데 처남댁의 화를 낼줄 모르는 온화한 품성을 보면 친정어머니를 보는듯 했다 이번 설 이틀전 막내처남이 미리 부산처가댁을 다녀온다며 우리집을 들렀다 매번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부산 안사돈 께서는 사돈댁 몫도 챙기신단다 처남네 것과는 별도로 한보따리를 싸신것이었다 내놈 장모님 품성도 만만치 않아 장가못간 막내아들 거둔 착한며느리가 고마워 막내아들 집으로 김치담아 나르는 것은 예사고 업동이 티안나게 손녀딸 빨고, 쓰다듬고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할머니의 따뜻한 품성이 옮겨와 언니, 오빠들은 다솜이녀석이 사촌동생이 아닌 친동생으로 챙기고 두돐이 지난 다솜이녀석은 벌써 공주님으로 자리하며 재롱을 떨고있다 두분 사돈간의 말없는 사랑의 교감을 보며 깊은 산속의 맑은샘을 보는듯하다 두분의 마음이 그렇게 맑고 깨끗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향기라고 말하고 싶은게다 이번 설날은 우리사람들의 아름다운 향기를 고맙게도 두분 어른들에게서 맡을수 있게 된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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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비라도 올라치면 산등성이 겨우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고 바람이라도 함께 불라치면 비닐떼기로 겨우 지붕 가리며 사는 사람들 더 어려워지고 걱정에 걱정을 더 하는데 언제나 그칠는지 비 그만 와 달라고 가슴만 쓸어 내리니 내일 즈음이면 그칠라나 엊그제만 하여도 더위에 지쳐 헉헉대며 비를 그렇게 그리워했건만 비가와도 어지간히 와야지 이바구니 밥 세끼 겨우 챙겨놓고 하늘이나 가리고 누울자리 겨우 마련하여 하루를 아둥바둥하며 가난을 지고 사는 사람들은 힘들기만 한데 내일 즈음이면 그만 올라나 그러면 비바람에 힘들어하며 마음졸이는 내도 마음이 좀 풀릴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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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적

나 어릴적 ... 10시를 넘으면 아버지 불끄고 잠자라는 소리에 혹시라도 라디오소리 새어 나갈가 보아서 이불 뒤집어 쓰고 라디오 다이얼을 동아방송에 맞추었다 성우 김 세원님의 밤의 플래트 홈의 시그날 인 폴 모리아의 경음악"Isadora"속에서 감미로운 세상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열시를 넘기면서 윤 형주님의 "0시에 다이얼"을 기다리면 프랭크 폴셀의 " in the year 2525" 이 가슴벅차게 나를 자극하고 혹시라도 밥 딜런의 "Knock on havens door"이라도 나올라치면 어데 천국을 어떻게 찾아갈까 하고 마음도 졸이면서 다이얼을 잠시도 고정시키지 못하고 조금은 무거운 음악을 듣고싶어서 다이얼을 조금 옮겨 기독교 방송에 임 문일님의 "꿈과 음악사이"를 켜놓고 킹 크림슨을 기다려 보고 블랙 사베스도 기다리면서 젊은 밤을 달랬는데 혹시라도 켄사스의 "Dust in the wind"라도 나올라치면 왜 그리 가슴이 울렁였는지 다시 우측으로 다이얼을 옮겨 임 국희님의 "별이 빛나는 밤"을 틀으면 어디 우주의 아름다운 별여행으로 안내 하는 듯한 프랑크 폴셀의 "Merci Cheri"가 나를 편안히 맞았고 유신이라는 엄혹한 그 시대에 살아온 우리가 월남전에서 전해전 비둘기 발자욱을 그려진 평화를 상징한 peace mark를 청바지 자락에 그려놓고 왜 비둘기 발자욱이 그 시대를 상징 햇는지 보다도 왜 존 바이에즈와 밥 딜런 그리고 존 레논의 노래속에서 월남전을 반대했는지를 느낌으로 받아들인 아주 감성적인 소년이었으니 돈 메클린의 울림이 각별한 "Vecent"를 듣고 메라니 사프카의 애절한 "Ruby tuesday"를 듣고 산타나의 "Sambapaty"를 에게를 여행하게 하는 듣한 감정으로 들으면서 이 때에는 내게 음악이 있어 살아있는 것을 실감한 어쩌면 음악에는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도 해본다 그 때는 말이지 김 민기가 내게 정말 특별하기도 했구 김 민기의 "친구" 를 들으면서 뭉클거리는 마음을 깡통이라는 친구녀석과 즐겨부르면서 한 대수의 "고무신"을 들으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아프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한 고등학교 그 때의 조금은 예민한 감성을 가진 나인데 그 때의 그 예민한 감성을 자극한 음악이 지금의 아주 감성적인 나를 있게 한듯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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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공동체

어제는 오산근교에서 일하는 스리랑카분 들을 공동체로 묶어주는 날이었습니다 얼굴은 검지만 키는 크고 핸섬하기만 한 그 들은 인도대륙 아래에 남한정도의 크기에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70년대 중반까지 실론이란 나라로 불리어 지기도 했지요 인도, 파크스탄과 같이 1948년 이전까지는 영국의 제국주의정책에 100여년을 영국의 식민지로 있어온 까닭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도 하구요 문화적인 요소도 식민지의 잔재가 남아 있어 그들이 즐기는 운동도 영국연방국가 들이 즐기는 야구와 비슷한 클리켓이란 운동이기도 하지요 83년대 들어서는 48년 영국으로의 해방이후에 싱글리족과 타밀족의 민족 문제가 내전으로 번져 수많은 사상자를 나은 분쟁의 지역이기도 합니다 넉 달전 망포리에 있는 회사가 이사를 하면서 일자리를 줄이는 바람에 실업자가 되고 일한 월급도 받지 못한 헤르뜨란 청년이 상담을 청해와 일자리도 찾아주고 월급도 받아준 계기가 헤르뜨에게는 신뢰로 다가갔는지 매주 일요일이면 친구들을 데려와서 밥도 같이 먹고 인터넷도 가르치면서 마음을 나누고 오산근교에 사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갈 공동체란 틀을 만들 것을 제안 한 것이 오늘 25명이 모여서 스리랑카공동체구성이 성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약자로 존재하는 이주노동자들 자신의 나라에선 인테리 교육을 받았어도 경제활동을 할 근거가 부족하여서 일자리를 찾아서 코리아를 찾은 그 이 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가 않습니다 지난 해 9월 28일 개소한 오산의 이주노동자센터 매월 첫 번째 일요일 한번의 무료진료 공장에서 한국말 못 알아듣는다는 구박을 면해주기 위한 한글교실 이제 전 세계에 어느 구석에서도 필요할 인터넷 교육 생일잔치라도 함께 하고 어려운 일은 함께 논의하여 해결 할 수 있는 나라별 공동체구성 자칫 그 이들에게 차별화된 인권의 적용이 있다면 평등한 국제 인권 법을 들어 그 이들이 소외되지 않게 상담을 통해 해결하는 일 문화적인 이질감을 해소 해주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민중문화를 공연이나 체험을 통해 접목시켜 주는 일 우리나라에서 부부로 맺어지어서 아이를 낳았는데 온종일 일을 해야 하는 엄마, 아빠를 위해서 육아방을 꾸리는 일 일자리를 찾아 오산에 온 이들을 위한 쉼터 운영 등등등 쉽지는 않습니다 온통 어려움 뿐 입니다 사람들을 챙기는 일이 모두다 그렇듯이 말이지요 순박하기만 한 스리랑카 청년들의 오산지역공동체 속에서 낯설기만 한 이국 땅 코리아의 오산이란 곳에서 자신의 외로움도 그리움도 공장의 일 속에 어려움도 해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그 들도 우리와 똑 같이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우리도 그 들과 똑 같이 먼 이국 땅에서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들은 언어와 얼굴색만 틀리지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을 나누어 가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 들의 공동체 탄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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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청년 죠니

지난주 일욜날 늦은 아홉시 즈음이 넘었는데 인도네시아 스물 여덟먹은 청년 죠니에게서 폰이 왔다 "미스터 지 바뻐요? 지금 어디예요???" 이궁 녀석 무슨 일이 있나보다 하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아직도 한국말이 서투른 녀석은 여자친구 사바티니 이름만 데고 나머지 말은 통 알아들을수가 없서서리 내게 눈총주는 마눌 뒤로 하고 집에 있으라 하고 녀석 숙소로 차를 몰고 갔다 에고고 녀석은 집에서 무슨 음식을 하는데 녀석들 먹는 음식의 향이 독특해 비위를 상하게 하는데 뭐하냐고 물으니 여자친구 사바티니가 기숙사에서 점심부터 저녁까지 안먹어서 저녁을 가져다 주려는데 녀석이 내보고 같이 갔으면 하는 것이다 녀석이 안내 하는 데로 사바티니가 근무하는 기숙사를 찾으니 그 곳은 기흥 톨게이트 에서 한참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곳에는 가게를 나가려 해도 30분은 걸어 나와야 하나보다 그 처녀 참으려다 못참고 죠니에게 먹을 것 좀 가져다 달라고 ~~~ 구원을 청한 모양이다 이구 주변단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죠니가 보고 싶었는지 아니면 미스터 지가 보고잡았는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죠니란 녀석은 아주 순진하다 무슬린은 술과 돼지고기를 안먹는데 녀석은 술도 잘하고 돼지고기도 잘 먹는다 녀석은 먹으면서 엄마가 알면 혼난다고 비시시 웃는다 녀석들은 아직도 동네에서 네 것 내것 없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 습관이 남아있는지 녀석의 자취방엔 항상 여러명이 들끓은다 녀석의 심성이 좋은 탓도 있다 인도네시아 다른 녀석들도 보지만 녀석들을 챙겨 주다가도 우리보다 영악스런 별난 녀석들에게는 가끔 정이 싹 떨어지기도 하는데 녀석의 착한 심성에는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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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필봉산

집사람과 두주째 오르는 필봉산이 어제는 내게 선물이었다 오랜만에 내려준 실비가 하늘을 가린 뿌연연기 모두다 거두어주니 맑고 푸른하늘 너무 고맙기도 한데 하늘 바라 보기가 부끄럽기도 하다 나도 저 맑고 푸른 하늘에 뿌연연기를 뿜어낸 장본인중에 하나이니 당연히 죄스러워하고 반성하며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니 하늘보기가 부끄러운 것은 당연 한것이려니 정말 깨끗한 하늘아래 동네가 펼쳐졋으니 북으로는 지지대고개 넘어 관악산자락도 보이고 동으로는 산세가 수려하다는 용인의 산자락들이 광주까지 넓게 펼쳐져 보인다 그곳에 사람도 살고 다른 생명체들도 서로서로 의지해서 살텐데 반환경적인 사람의 욕심가득하게 살아가는 것이 햇빛이 쨍쨍 거려도 파란 하늘을 볼수 없으니 말이다 차마 서쪽은 애써 외면 한다 그 맑고 푸른 하늘아래 수청동철거민들의 망루가 있으니... 우린 늘 손을 잡고 다닌다 81년부터 였으니 휫수로 스무다섯해째인데 이제는 식상할때도 됬구만 집사람과 집을 나서서 손을 잡지 않으면 허전하기만 하다 보경이아빠는 우리보고 투닥거리지나 말란다 녀석이 우리 집안속내 꿰뚫고 있으니 시비거리가 일수도 있는데 그 시비거리가 거슬리지는 않다 그만큼 가까워있는 후배녀석이 잇으니 말이다 1시간 30분 정도의 그리 험하지 않은 산을 손잡고 다녀온다 마주치는 이들에게 눈인사도 하고 우린 무슨 할 이야기가 많은지 질리지가 않는다 자존심 강한 집사람 심사만 건들지 않으면 나 보다도 살겹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집사람이니 말이다 그 필봉산 자락에는 내가 좋아하는 야생화들이곳곳이 숨어 있다 닷새 전에는 소나무 그늘아래 수줍게 숨어있는 각시붓꽃을 보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요즘은 넓게 분포해 있는 제비꽃인데 초입에는 하얗게 핀 알락제비꽃을 비롯 어제는 황매화가 시들고 있고 노란 뱀꽃도 시들고 있구... 지금은 보기 힘든 그렇게 흔하던 쇠뜨기도 보인다 그런데 비가 와서 땅이 물러져 산길이 망가지고 있다 곳곳이 뿌리가 들어내 아파하고 있는데 얼마나 아플까 하는 맘 뿐이니 말이다 /// 쇠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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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요즘 일상은 수청동에 온통 매달려 있다. 덕분에 변화에 중심에 있는 동지들과의 함께할수 있어 좋기는 한데 집사람과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내가 변화한지 벌써 18년을 넘기는 해인데 일에 대한 끊임없는  나의 열정을 본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기도 하다.

 

 다솜교회의 존재 그리고 고마움 늘상 마음에 있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가끔 불만으로 다가가는 우를  반성도 한다.

 

어디 장목사님 같은분이 있겠나. 목사라는 신분하나로도 편하게 살수 있는 조건을 뿌리치고 노동자를 예수로 섬기는 목사님은 어쩌면 우리시대에 예수이기도 한데 말이다.

 

요즘은 하루가 모자란다. 가게일에 매달려야 하고 변변히 챙기지도 못하는 수청동철거현장에서 마음도 벗어나질 못하고, 다행히 동지이자 후배이고 동생인 형모가 있어 수청동이 살아움직인다.

그리고 센터식구인 우곤씨 승만씨 케리어 엘지동지들 경기본부동지들 모두가 오산을 살아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오늘은 장모님 생신에 식구들이 모이기로 해서 서울 처가댁에 가야하는데 오산이 미덥다. 수청동을 떼어 놓고 간다는 것이 벌써 마음에 걸런다. 마음같아서는 망루에서 함께 귀찰이라도 서고 싶은데 그렇질 못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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