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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노동당의 붕괴 - 진보정당운동 제1기의 해체
작년 대선 끝난 직후부터 민주노동당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끝내 18대 총선을 앞두고 붕괴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진보정당이 무너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분열’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보다는 ‘붕괴’가 맞다. 단순히 기존의 민주노동당이 잔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뉜 게 사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으로서의 생명력 자체가 사라졌다.
물론 잔류 민주노동당은 18대 총선에서 5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어떠한 적극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의 죽음’을 선언하고 탈당한, 필자를 비롯한 전(前) 당원들은 18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의 미래는 ‘좌민련’, 즉 ‘좌파 자유민주연합’일 뿐이라고 지적했었다. 국회에 몇 석의 의석을 갖기는 해도, 마치 과거 자민련이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미래의 전망도, 존재 의의도 찾기 힘든 정당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18대 국회에서 잔류 민주노동당이 이 운명을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민주노동당의 붕괴의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전면에 내걸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어떤 이들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 변혁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의회주의에 경도된 것이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과서적인 진단만으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운동이 맞부딪힌 구체적인 난점과 과제들을 제대로 직시하기 힘들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상황을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정당은 조직이면서 또한 정치적 프로젝트(기획)다. 그것은 특정한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어떤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집단 행위다. 게다가 한 정당이 꼭 하나의 프로젝트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정당들은 여러 개의 서로 다른 프로젝트들이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의 성격을 띤다.
민주노동당도 그랬다. 필자가 보기에 민주노동당은 3개의 주요 프로젝트가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었다. 그 3개의 주요 프로젝트란 무엇인가?
첫째는 ‘대중조직 기반 정당’이라는 프로젝트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지원에 바탕을 두고 창당했고, 이후에도 이것이 당의 존립과 발전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전농도 합류했다. 민주노총과 전농은 주로 상층 간부들을 중심으로 당에 입당했고, 때로 조합원이나 농민회원을 대상으로 입당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공직 후보군을 배출하고 재정 지원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 그리고 최고위원회에 노동 및 농민 부문 할당을 실시해 민주노총, 전농 간부들이 이들 당 기관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민주노동당은 당과 민주노총, 전농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곧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농민의 정당인 근거로 내세웠다.
둘째는 ‘운동권 정파 연합 정당’ 프로젝트다. 민주노동당은 80년대, 90년대에 등장한 ‘운동권’(한국에서 오랫동안 좌파를 일컫던 말) 정파들의 결집체였다. 물론 ‘노동자의 힘’이나 한국사회당처럼 여기에 합류하지 않은 정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운동권의 8, 9할이 뭉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그 동안 독자정당 창당 문제를 놓고 서로 이견을 보여 왔던 범NL 정파들과 범PD 정파들이 함께 했다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심각한 노선 차이가 존재했지만, 일단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그 현실 대안을 추구한다는 수준에서 강령 상의 합의를 했다.
셋째는 ‘국회 진출 중심 정당’ 프로젝트다. 물론 제도권 정당이라면 다 국회에 진출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국회 진출 중심 정당’이란 활동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국회의원 배출 쪽에 놓여 있는 정당을 뜻한다.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다. 그래서 제도권 정당들의 활동 중심도 대통령 선거의 도전에 있다. 한데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일반적인 경쟁의 대열에 속해 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87년 민주화 이후 10년도 더 넘게 진보 좌파가 의회 안에 독자 지분을 전혀 갖지 못한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졌고, 그 지분 확보 의지 하나로 비바람을 헤쳐 왔다. 국회 진출 전까지는 여타의 다른 제도 정치 활동(대선 도전이든 지방선거든)은 부차적인 관심사에 불과했다.
이러한 3개의 프로젝트들이 서로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로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일단 성공을 거뒀다. 대중조직의 지원과 운동권 결집의 저력을 바탕으로 드디어 국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프로젝트는 2000년대 초반 상황 속에서 확실히 정세적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해체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 성공에서 비롯됐다. 이때부터 민주노동당의 쇠퇴와 몰락이 시작됐다. 애초에 민주노동당은 소수 의석의 한계를 대중운동의 활성화로 돌파한다는 ‘거대한 소수’ 전략을 통해 보수 양당에 맞설 대안으로 성장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거대한 소수’ 전략은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에는 분명 원내 활동에 고착된 의원단 활동의 한계도 존재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근본적인 이유들이란 곧 민주노동당이라는 복합 프로젝트를 이루던 3개의 프로젝트들이 각각 시대 상황과 결정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선 ‘대중조직 기반 정당’ 프로젝트를 보자. 사실 민주노동당과 대중조직 사이의 관계는 그 자체로 커다란 약점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 좌파 정당 중 대중조직 기반 정당의 전형은 영국 노동당이다. 영국 노동당이나 이 당의 영향을 받은 정당들(아일랜드 노동당, 캐나다 신민주당 등)은 ‘노동조합의 정치 부대’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노동조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여기까지는 민주노동당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영국 노동당형 정당들은 민주노동당에는 없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집단 입당 제도다. 노동조합이 일단 당 지지를 결정하면 그 노조의 조합원 전원을 당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기계적이며 형식적인 입당 방식으로서, 비판받을 소지가 많다. 하지만 어쨌든 영국 노동당형 정당들은 이를 통해 당과 노조의 유대를 일반 조합원 수준으로 확대하려 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에는 대중조직 기반 정당이면서도 이런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기대어 창당했으면서도 겉으로는 좌파 정당의 좀 더 보편적인 형태, 즉 당 강령에 동의하는 개인이 스스로 입당하고 그 개별 입당 당원들의 활동에 기반하여 성장하는 정당을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원칙을 적극 구현하지는 않았다. 당이 독자적으로 노동 대중 사이에 뿌리 내리려 하기보다는 민주노총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결국 민주노동당은 좌파 정당의 보편적 형태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렇다고 영국 노동당형 정당의 장점을 구비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조직 형태를 갖게 되었다.
역사상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 바로 일본 사회당이다. 일본 사회당도 당시 일본의 진보적 노총인 총평에 크게 의존했지만, 집단 입당 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일본 사회당도 겉으로는 노조와 분리된 독자적 이념 정당을 표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 역할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총평의 중개 없이 노동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던가? 80년대 말 일본 노동운동의 우경적 재편 과정에서 총평이 사라지자 일본 사회당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 십 년간 제1야당의 자리를 점하던 당이 몇 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그만큼 일본 노동계급 사이에 독자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탓이었다.
우리의 경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러한 당-노조 관계의 약점이 조기에 드러났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으로 말이다. 이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기업별 노조 중심 구조와 노동 유연화 공세가 서로 맞물리면서 비롯됐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지는 데도 불구하고 기업별 노조 중심의 한국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수준에 묶여 있고,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을 자신들의 무기로 바라보지 않는 (심지어는 ‘귀족 노동운동’이라는 보수 세력의 악선동에 공감하는) 형편이다.
이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덫에 걸린 신세가 됐다. 한때는 ‘민주노총당’이라 불리는 것이 노동계급의 당으로 인정받을 근거가 됐지만, 상황이 반대가 됐다. 대다수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을 자신들의 조직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래서 ‘민주노총당’ 역시 자신들의 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만 계속 의존하는 한,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노동계급의 당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점점 더 봉쇄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정규직당’, ‘대기업 노동자당’으로 치부돼 다수 노동자들 사이에 뿌리 내릴 가능성을 차단당할 위험이 높다. 이것은 ‘대중조직 기반 정당’ 프로젝트가 몰고 온, 의도하지 않은 비극적 결과다.
다음으로 그럼 ‘운동권 정파 연합 정당’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는가? 원내에 진출하고부터 민주노동당 안의 강령적 합의라는 게 무척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2006년에 북한 핵 실험을 계기로 북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됐다. 당 내 범NL 정파들이 종북주의 혐의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사실은 이때부터 범PD 정파들 사이에서는 기존 정파 연합 구조를 계속 유지하는 데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 안에서 노선 투쟁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게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이라는 데 있었다. 적어도 범PD 성향 당원들 사이에서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한 변형으로서 북한 체제가 갖는 근본 문제나 최근 북한 정권 및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의 퇴행성은 이미 평가가 끝난 사항들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여전히 그 평가를 놓고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범NL 세력은 민주노총 국민파와의 연합과 특유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당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울타리 안의 동거 구조가 미래의 대안 제시와는 인연이 먼 것이라는 점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분명해졌다.
마지막으로 ‘국회 진출 중심 정당’ 프로젝트를 보자. 막상 국회에 의석을 갖고 보니 소수 의석의 한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소수’ 전략에 따른다면 대중운동의 활성화로 이를 극복해야 했으나, 대중운동은 침체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그간 당의 지역 거점이었던 울산의 두 기초자치단체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운동에서든 지역 정치에서든 당의 토대가 아주 부실함을 새삼 절감했고, 그런 상황에서 의회 안에 약간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공허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민주노동당이라는 복합 프로젝트 안에 점차 균열이 나타나는 가운데, 2007년 대선이 다가왔다. 당 안팎의 많은 이들이 이번 대선을, 민주노동당이 봉착한 위와 같은 한계들을 뛰어넘을 마지막 돌파구로 보았다. 아니,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민주노동당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를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우리당의 쇠퇴로 열린 새로운 정치 공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보여준 좌파 민중주의(left populism) 전략을 한국의 진보 세력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가 일정한 대중적 바람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도 이것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집권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비약적 발전은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가 자라났다.
이것은 보수 우파의 ‘미완의’ 수동혁명(아직 그 결과가 최종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에 맞서는 진보 세력의 적극적 대응이 될 수도 있었다. 이명박 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보수 우파 세력은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무기로 우파 자체를 재편하고 새로이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6년 지방선거가 그 시작이었고, 2007년 대선은 승리의 정점이었으며, 2008년 총선이 그 승리의 최종 인준 절차였다. 이 수동혁명 과정에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즉 중도 우파의 정치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민주노동당 역시 이를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대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잘 하면, 이러한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보수 우파의 ‘미완의’ 수동혁명에 심각한 균열을 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러한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안의 많은 이들은 이 기대를 짓밟은 당사자가 다름 아니라 민주노동당 내부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 내 범NL 정파들이 별다른 근거 제시 없이 대권 3수생인 권영길 의원을 조직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의 조직력에 힘입어 결국 권 의원이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나서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은 차단됐다.
대선 직후 민주노동당을 떠난 당원들(최대 2만 명 수준)의 상당수는 범NL 세력의 이러한 선택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범NL 세력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전체 프로젝트야 어떻게 되든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당 내 패권 유지 가능성만 계산했기 때문 아닌가? 권영길 후보 이외의 후보들(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할 무기로서는 더욱 유력했지만, 만약 이들 중에서 후보를 낸다면 그 후보에게 당권이 집중됨으로써 범NL 세력의 당 내 패권이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의 정치 조직이자 프로젝트로서 민주노동당은 그 존재 의의를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민주노동당은 생명력을 다했다. 죽었다. 이것이 지난 1, 2월에 민주노동당 탈당파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지난 몇 달간의 사건들은 민주노동당의 분당 과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사망을 선고하고 이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아직도 다 끝난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 프로젝트가 시효 만료임을 좀 더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 2-3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해체 과정이 이미 시작됐으며 그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진보정당운동의 제1기는 그 막을 내렸다.
2. 진보정당운동 제2기를 시작하기 전에 확인할 것들
진보정당운동의 한 시기가 이렇게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동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진보신당이 출범했지만, 진보신당 스스로 표방한 것처럼, 이 당은 과도 정당이다. 진보정당운동의 제2기를 이끌 새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전 단계다. 진보신당은 창당할 때부터 총선이 끝나면 제2단계 창당 과정을 밟겠다고 약속했었고, 이제 그것을 본격 추진해야 할 시점이다.
게다가 진보신당 외에도 새로운 좌파 정당을 건설하려는 또 다른 흐름들이 있다. 한국사회당이 초록정치연대에 초록 좌파 정당 창당을 제안한 상태다. 그리고 ‘노동자의 힘’이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해방연대와 사회주의노동자연합도 각각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표방하고 있다. 가히 당운동의 백가쟁명 시기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진보정당운동의 제2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확인해야 할 점들을 짚고 싶다. 진보 좌파 내에는 여전히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을 선명하게 나누고 새로 건설될 당이 이 중 어느 한 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들이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인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게 이런 이분법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고전적인 개혁/혁명 논쟁은 앞으로 우리 운동에서 어떤 식으로든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혁/혁명을 놓고 입장이 갈린다는 것과, 그래서 이러한 입장 차이가 곧바로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의 분립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으로 나뉘는 게 더 바람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이 그 시점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의 이분법을 고집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체적 분석에 따른 구체적 실천이라기보다는 낡은 교과서(그것이 사회민주주의판이든 코민테른판이든)의 추종으로만 보인다.
왜 그러한가? 우선 한국 자본주의의 현 상황이 어떤 교과서의 틀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독특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점이 지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이 지대에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부나 주변부에 비해 훨씬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모순이 지배한다. 그래서 세계 자본주의의 좀 더 전형적인 지역(중심부나 주변부)에서 발전한 교과서적 이론이나 노선이 현실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이른바 보편 이론이 쉽게 통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이 지대는 흔히 새로운 이론‧노선의 배양지가 되곤 한다. 기존의 틀로는 다루기 힘든 상황에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설명이나 실천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혁명기 러시아나 그람시 생전의 이탈리아가 그 좋은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람시는 국가-시민사회의 특정한 접합으로서 역사적 블록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는 그러한 점이 지대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분단을 경험했고, 돌진적 산업화를 겪었다. 또한 제국주의 경험이 없는 비슷한 규모의 국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선진 자본주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가 하면 노동계급 1세대가 계급 정체성과 연대감을 채 연마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 공세에 휩쓸렸다. 민주화 1세대가 미처 50대가 되기도 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피로감이 나타나고 있다. 한 마디로, 너무도 압축적인 자본주의 발전 때문에 한 사회 안에 서로 다른 시간대가 공존하고 있다. 복수의 시간대가 교차하며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특히 대중의 경험과 의식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나타난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시간을 단위로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하기 때문에 세대가 잘게 나뉠 뿐만 아니라 세대 사이의 의식 차이도 심대하다. 그래서 주체의 의식 측면에서만 보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인구 집단이 파편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뚜렷한 공통성과 강한 연대감을 지닌 다수 집단이 형성되기가 쉽지 않다. 즉 민주주의와 사회 변혁의 주체가 형성되기 쉽지 않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형성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에서 가장 뼈아프게 드러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채 초기 단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노동 유연화 공세가 몰아닥쳤다. 어느 나라나 노동 유연화가 진행되면 불안정 노동자가 늘어나고 노동계급 내에 원심력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기업별 노동조합 중심 구조와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가 서로 맞물리면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구조적으로’ 노동조합운동 바깥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초보적 계급 형성 과정을 거친 소수 조직 노동자들과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인 다수 미조직 노동자들 사이에 객관적 차이 그 이상으로 의식의 골이 깊어졌다. 이 간극이 지금 노동계급 형성 과정이 계속되는 데 커다란 장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적인 개혁/혁명 정당 도식은 과연 어떠한 답을 던져줄 수 있는가? 혁명 정당의 선전 선동의 정치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간극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이런 사회에서 교과서적인 선전 선동의 정치가 작동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지금 한국의 중간층(여기에는 신중간계급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상층도 포함된다)을 지배하는 화제는 자녀 교육과 부동산이다. 자녀를 어떻게든 대학 서열 구조의 상층부에 진입시켜 신자유주의 엘리트로 만들거나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하는 것, 그리고 자가 소유 주택(아파트)을 장만하고 그 가격을 올려 노후 소득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모든 중간층의 욕망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이미 개발 자본주의 시대부터 자녀 교육과 부동산이 중간층에 진입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두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간층에게 입시 경쟁과 내 집 마련은 곧 가계 차원의 복지 확보 통로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의 중간층에게는 신자유주의의 엘리트 교육 열풍이나 만인 투기 문화가 결코 낯설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발 자본주의의 유습과 신자유주의의 투기 문화가 서로 만나 전대미문의 사교육‧부동산 열풍으로 확대‧증폭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고전적인 개혁/혁명 정당 도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개혁 정당의 통상적인 레퍼토리는 사회 복지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호응해야 할 대중의 상당수는 이미 자신들만의 복지 수단(입시 경쟁과 부동산 투기)을 확보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것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복지를 통한 집단적 해결책이 더욱 바람직한 대안이라는 계몽이 과연 얼마나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 사회에는 혁명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주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체의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비관주의에 빠지자는 게 아니다. 교과서의 도식이 우리에게 해답을 던져 주리라는 오해와 착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과제가 과거의 논쟁을 단순 반복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접근을 요구한다는 점을 더욱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의 재구성’을 추진할 새로운 진보정당 역시 과거의 개혁/혁명 정당 도식에 얽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독특성 말고도 또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발전된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에서 과연 변혁의 계기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는 물음이다.
사회민주주의 개혁 정당의 입장을 따른다면, 이것은 애당초 고민거리가 못 된다. 이 입장에서는 ‘변혁’을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로 집권한 뒤에 부분적 개혁 조치들을 추진하기만 하면 된다.
한편 코민테른의 혁명 정당 공식에서도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혁명이 전위정당의 단일한 기획으로 사고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위정당이라는 주체가 확실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이 당을 중심으로 배치되면 되는 어떤 객관적 요소들일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공식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코민테른 운동에 뿌리를 둔 정당들 중에서 실질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했던 사례를 들자면,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공산당이 있다. 그런데 이들 정당은 위의 도식에서 전제하는 ‘전위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실제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중정당 형태를 취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보다 좀 더 급진적인 이념을 내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한편 위의 공식을 고집스럽게 견지한 세력들(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정파들)은 대중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대개 소정파 수준에 머물렀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적 추가 가장 왼쪽으로 기울었던 1960년대 말에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의 공식들보다는 실제 역사적 사례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좌파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에 가장 근접했던 사례를 든다면, 이탈리아의 잉그라오 좌파나 영국의 벤 좌파가 있다. ‘잉그라오 좌파’는 196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대중 정치가 피에트로 잉그라오를 중심으로 당 내 좌파와 노동조합운동 내 좌파가 결집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1960년대 당 내 논쟁 과정에서 등장하여 1969년의 대중파업(‘뜨거운 가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이들은 공산당의 구조개혁 노선과 대중운동을 결합하는 데 앞장섰다.
벤 좌파는 영국판 ‘잉그라오 좌파’라 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영국 노동당의 좌파 하원의원 토니 벤이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에 벤 의원은 대기업의 국공유화 약속을 저버린 당 지도부를 과감히 비판하여 당 내 좌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70년대 말 대처의 신우파 정부가 들어서자 벤 의원을 중심으로 당 내 신좌파가 형성됐고, 여기에 다시 노동조합운동 좌파나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이 결집했다. 이들은 1980년대 초에 노동당의 당권에 도전하는 등 영국 역사상 최초로 대중적인 좌파 정치 운동을 펼쳤다.
이 두 사례로부터 우리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갖춘 변혁운동은 어떤 전위정당의 단일한 기획이나 자연발생적 대중운동으로 설명하기에는 사뭇 복잡한 양상을 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 정치인, 대중정당 내의 좌파적 흐름,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활성화 같은 다양한 요소의 특정한 접합으로 나타난다. ‘당-사회운동 접합’이라고나 할 이러한 특정한 배열과 결합이 대안적인 역사적 블록의 형성 과정이 시작되는 데 촉매이자 중핵 역할을 한다.
사실 위의 두 사례는 실제 변혁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 단계에서 멈춰버린 사례들이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두 나라, 칠레와 베네수엘라는 위의 사례들보다 더 앞선 경험을 보여준다. 1970년-1973년의 칠레 인민연합 정부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그것이다. 이들의 경우에도 변혁의 길을 연 것은 잉그라오 좌파나 벤 좌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중 정치인, 대중정당(들) 그리고 노동운동‧사회운동 사이의 어떤 결합이었다.
물론 칠레와 베네수엘라를 선진 자본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의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나라들임에는 분명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발전한 나라에서 변혁의 순간에 다가가는 것은 ‘당-사회운동 접합’을 통해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도 87년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정착됐다. 이런 사회에서 집권의 방식이 선거냐 아니냐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선거를 통한 집권은 이제 상수이자 전제 조건이다. 다만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집권 자체는 선거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되 변혁은 선거 결과만으로 시작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이제 한국에서도 변혁 과정은 대중 정치가, 대중정당(들) 그리고 대중운동의 특정한 접합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접합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당운동의 방향과 방식은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은 개혁/혁명 교과서의 추종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 물음에 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논의에 유용한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운동 정당’ 구상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개혁/혁명 정당의 이분법을 극복할 출발점으로 ‘사회운동 정당’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사회운동 정당’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한 데가 많다.
혹자는 당이 사회운동을 집권의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대등한 동반자로 인정함으로써 당운동과 사회운동의 동시 발전을 추구하는 것 정도로 해석한다. 나쁘지 않은 전망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다분히 수세적이고 도식적인 정의가 아닐 수 없다. 당과 사회운동 사이의 새로운 관계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 활동 자체가 왜 ‘사회운동적’이라고 불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게 핵심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명하기도 한다. ‘사회운동 정당’이란 ‘수권 정당’과 대비되는 말이다. 수권 정당에게는 집권이 절대적 목표인 데 반해 사회운동 정당은 그렇지 않다. 사회운동 정당에게 집권은 복수의 목표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운동 정당은 집권보다는 사회운동 전반의 발전을 더 중요시한다.
이것 역시 가능한 하나의 해명이다. 하지만 집권을 단지 부차적인 목표로만 바라보는 정당이 과연 정당으로 존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거 독일 녹색당이 비슷한 맥락에서 ‘반(反)정당적 정당’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다른 대중정당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인 사례가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정당으로 존재하면서 집권이라는 본래 목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적어도 ‘집권’과 ‘사회운동’을 서로 대립시켜 바라보는 입장에서 ‘사회운동 정당’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선 ‘사회운동’ 자체를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한다. 이제껏 ‘사회운동’이라 불려온 이러저런 조직들이나 대중 동원 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정치적 상상력을 펼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사회운동’을 이렇게 정의 내려 본다. “기존의 자본주의-대의 민주주의 질서의 제약을 넘어서는 대중의 행위 능력들을 배양하고 성숙시키는 일련의 집단적 과정.”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 아래서 일상 개혁 투쟁의 목표로 제시한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의식의 사회화”를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사회운동’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사회운동 정당’이란 “집권 과정 자체를 사회운동적인 것으로 바라보며 실천하는 정당”이다. 즉 집권을 지향하되 그것을 일련의 제도 정치 과정으로 제약‧환원하지 않고 대중의 대안적인 행위 능력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으로 심화‧확장하는 정당이다. 이러한 대안적 행위 능력들이 발전해야만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적인 역사적 블록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고, 집권이 집권 자체로 종료되는 게 아니라 변혁 과정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 정당의 주된 정치 활동 방향은 계몽의 정치나 선전 선동의 정치가 아니라 예시적(prefigurative) 실천의 정치다. 사회운동 정당은 시민사회 내에 다양한 연대조직들(초기업단위 노동조합, 대안 협동조합, 민중의 집 등등)을 만드는 데 앞장서며 이들 연대조직들의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당 활동 자체와 이들 연대조직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대안 사회의 가치와 원칙(가령, 협동과 연대)을 바로 지금부터 현실로 구현한다. 비록 맹아적인 수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회운동 정당이 대중을 설득하는 것은 계몽이나 선전 선동이 아니라 이러한 예시, 즉 미리 보여주기를 통해서다. 21세기 현대 사회는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통상적인 방식의 메시지 전달로는 도저히 이 냉소주의를 깰 수 없다. 현대 사회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메시지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가 닿으려면 수신자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즉 제한된 범위와 수준에서나마 우리의 대안을 ‘행위’ 혹은 ‘현실’로 구성해서 제시해야 한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참여예산제 실험과 같은 사례가 당시 정세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노동자당 시정부가 펼친 참여예산제는 항상 먼 미래의 이상으로만 이야기해온 민중 참여와 자치를, 비록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지금 여기의 현실로 구성해서 보여주었다. 굳이 이렇게 지방자치제를 활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운동 정당은 다양한 수단과 방식을 통해 예시적 실천을 펼쳐야 한다. 그래서 이 단단한 교착 상태, 즉 대중의 분열과 냉소주의를 깰 충격(들)을 던져야 한다.
3.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구성할 3개의 새 프로젝트들
어떤 이들은 보수 우파 정권이 최소 10년은 갈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직하다. 하지만 이게 비관주의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비록 대안 부재 상황에서 보수 우파 집권 시대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을지라도, 그들의 헤게모니는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지금, 서울 종로 거리에서는 수만 명의 10대, 20대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 항의하며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렇게 균열은 항상 존재하고, 어느 때든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에 모순은 폭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명박 시대에도 집단행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88만원 세대도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해선 안 된다.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일회적 동원을 일상적 참여로 전환하고 대중의 움직임에 방향과 형태, 지속성과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정치운동이 중요하다. 비록 그것이 대중과 관계 맺는 방식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지라도 말이다.
진보 좌파는 이명박 정권 아래서 예기치 않게 폭발할 대중운동들에 긴밀히 결합하면서 동시에 진보정당운동의 제2기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두 실천이 결코 서로 동떨어진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운동의 새로운 등장과 새 진보정당의 건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 대중운동의 침체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민주노동당과 달리 튼튼한 내구성과 왕성한 생명력을 갖춘 좌파 정당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새로 전열을 정비해야만, 2010년 지방선거로 시작될 이명박 정권 후반기의 제도 정치 과정을 보수 우파에 대한 대반격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어차피 18대 총선에 그런 반격의 시작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이번 총선은 우파의 ‘미완의’ 수동혁명의 끝자락이었다. 이제부터 진보 좌파는 원외에서 토대를 새로 쌓고 아래로부터의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의 재구성’의 요체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의 구체적인 이념과 노선, 활동 방향과 조직 얼개까지 다 다룰 수는 없다. 아래에서도 계속 강조하겠지만, 이런 내용들은 대중적인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가야 할 것들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대변하던 3개의 프로젝트와 대비하여 새 진보정당이 담보해야 할 프로젝트들은 무엇인지 짚어보겠다.
새 진보정당도 몇 개의 주요 프로젝트들이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대안 형성’ 프로젝트다. 새 진보정당에도 물론 강령과 정책이 필요하다. 당장 제2창당 과정에서 강령 작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새 진보정당은 이러한 작업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과거의 방식은 통상적인 계몽주의적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지식인들 혹은 선진적 투사들이 사회주의의 궁극 목표와 그 당면 과제를 정리해 강령 문서를 만들면 당원들은 그것을 마치 교과서처럼 학습하는 방식.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에는 빈 곳도 많고 의심할 대목도 너무 많은 시대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인류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만 분명할 뿐, 나머지는 불명확하다. 즉 자본주의 문명을 ‘어떻게’ 극복해나갈지는 숙제로 남아 있다. 물론 과거 사회주의 운동의 교훈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문제제기 역시 그와 동등한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래서 새 진보정당은 통상적인 이념 정당과는 달리 ‘대안 형성 정당’이어야 한다. '즉 궁극적인 대안은 공동의 실천과 토론을 거치면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대중적인 실천과 토론 과정이라는 용광로 안에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등등 우리 시대의 좌파 이념들을 녹여내야 한다. 그 결과물이 무엇일지는 우리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합금 과정을 거친 금속만이 21세기 자본주의에 맞설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안 형성의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러한 대안 형성 과정 그 자체다. 21세기 좌파는 누군가 먼저 이념을 만들면 대중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식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념은 대중들 자신의 참여와 대화를 통해 만들어져야만 종이 위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대중의 일상 세계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 새 진보정당의 강령 작성 과정이 이래야 할 뿐만 아니라 이후 일상적인 정책 생산 과정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좌파 이념의 토착화에 아직 성공하지 못한 한국 사회이기에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새 진보정당은 곧 이러한 참여․대화 과정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새 노동운동 육성’ 프로젝트다. 새 진보정당은 새 세대의 노동운동을 육성하는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넘어서는 노동운동의 활동 메커니즘을 만드는 일이자, 기업 단위 임단협을 넘어서는 의제를 개발하는 일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남성과 여성 노동자 사이의 새로운 연대의 전통을 만드는 일이다.
새 진보정당이 새로운 노동운동의 배양장이 되자면, 과거 민주노동당과는 달리, 당 안에 노동자 당원들의 독자적인 활동 구조를 갖춰야 한다. 당 지역조직과는 별도로 광역 단위의 노동자 당원 조직을 마련하는 게 그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노동자 당원 조직이 노동조합운동 내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의 가치와 방향을 몸으로 보여주고 확산시키는 진지 역할을 해야 한다.
그 동안 많은 이들이 갈망해온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의 등장은 기존 노동조합 구조만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노동자 당원 조직 같은 초기업적이고 탈조합적인 진지들을 구축하고 그 연계망을 만들어야만,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이 비로소 태동하고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진보적 지역 정치’ 프로젝트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국회 진출’에 전략적 중심을 두었다면, 새 진보정당은 그와 달리 ‘지역 정치’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가까운 선거가 지방선거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보수 우파가 중앙정부를 장악한 상황에서 그나마 진보 세력이 도전하기 수월한 영역이 지역 정치이기 때문은 아니다.
지역은 그렇게 만만한 도전처가 아니다. 오히려 진보 좌파에게 지역 사회는 여전히 쉽지 않은 활동 무대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보 좌파는 지역에 전략적 비중을 두고, 진보적 지역 정치를 일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우선 지역 사회야말로 87년 이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민주화의 바람이 미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풀뿌리 토호 세력이 지역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들이 항상 보수 우파의 최종 피난처 역할을 해준다. 이들이 건재하는 한, 보수 우파는 어떠한 후퇴를 겪더라도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사회의 민주화는 곧 한국 사회의 제2단계 민주화다.
다음으로 지역은 이제 노동계급 형성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점차 서비스 산업 비중이 늘어나면서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노동 과정 자체가 지역 단위로 이뤄진다. 또한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단위는 개별 기업이 아니라 지역이다. 따라서 새 진보정당은 노동운동이 지역 중심의 활동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자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 정치는 대안 사회의 맹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대가 되어준다. 새 진보정당은 지역 사회에 다양한 연대조직들을 건설하고 ‘민중의 집’ 등을 통해 이들 연대조직 사이의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조직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국가 관료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행위 양식들의 묘목장이 될 수 있다. 또한 브라질의 참여예산제 사례처럼 지방자치제를 활용해 대안 사회의 이상과 원칙을 일정하게 구현할 수도 있다. 즉 지역을 무대로 예시적 실천을 펼칠 수 있다.
이 모두가 이명박 정권 시대, 전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역류를 맞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그 최후의 절정을 향해 치솟는 이 시대에 진보 좌파가 벌여야 할 진지전의 핵심 과제들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사명은 바로 이 진지전의 야전 사령부 역할을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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